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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의 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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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이라 함은 문묘에서 공부자(孔夫子)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일컫는다. 즉 만세종사(萬世宗師)이신 공부자께서 남기신 인의도덕의 이상을 근본삼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실천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리를 천명함에 있어 배사모성(拜師慕聖)의 예로서 생폐예제(牲幣醴齊)를 헌설(獻設)하고 공부자께서 자리에 앉아 계신 듯이 엄숙하고 경건하게 전례(奠禮)를 봉행하는 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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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래는 문묘에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으로서 석(釋)과 전(奠)은 다 차려놓다는 뜻으로, 석채(釋菜)라 하면 빈번지류(蘋蘩之類)로 단조로운 차림이고, 석전은 생폐(牲幣)와 합악(合樂)과 헌수(獻酬)가 있는 성대한 제전(祭典)이다. 이러한 석전은 선성과 선현들의 학문과 인격과 덕행과 사상을 단순한 이론으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숭모하고 존중히 여기며 스승을 높이하고 진리를 소중히 여기는 기풍을 체득하기 위하여 문묘에서 거행하는 의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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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문묘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설립한 태학(太學), 신라시대의 국학(國學),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시대의 성균관(成均館) 등의 국립대학 구내에 건립하여 국조(國朝)에서 주관하는 오례(五禮) 중에서 길례(吉禮)편에 속하는 국가적 중사인 석전을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태학이나 국학, 국자감, 성균관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전통적 민족대학으로서 유교를 근본이념으로 하여 인재를 양성해 온 교육기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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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의 유래(由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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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이란 학교에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선사(先師)란 앞서간 전대(前代)의 훌륭했던 스승들을 일컫는 말이고, 선성(先聖)이란 주대(周代)에는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을 일컫는 것이 고대 중국의 관례이고, 한(漢)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부자를 점차 선성, 선사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우러르는 관례가 정착이 되었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같은 제왕은 주공(周公)을 선성, 공부자를 선사로 삼아 공부자의 고택(古宅)을 찾아가서 석전을 올리기도 하였다. 위(魏), 수(隋), 당(唐) 이후로는 대체로 공부자를 선성, 안회(顔回)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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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당 태종 정관(貞觀) 4년(630년)에는 각 주(州)의 현(縣)마다 공부자묘(孔夫子廟)를 세웠는데 당 현종(玄宗)이 개원 27년(736년)에 공부자를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하였다. 공부자께서 돌아가신 후 그의 옛집 곡부(曲阜)에 묘(廟)를 세우고 후제(後齊)에 이르러 태학의 가운데에 공안(孔顔)의 묘(廟)를 두었다. 명(明)에 와서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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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서기 372년으로 이때 석전도 함께 봉행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백제는 국립 중앙학교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五經博士)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박사 아직기(阿直岐), 왕인(王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국립 중앙학교도 석전의식을 봉행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신라에서는 진덕여왕(眞德女王) 2년인 서기 648년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國學)을 찾아 석전의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설립을 추진했고 신문왕(神文王) 2년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성덕왕(聖德王) 16년(717년)에는 태감(太監) 김수충(金守忠)이 당으로부터 공부자와 10철 및 72제자의 영정을 가져와서 국학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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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서는 『고려사(高麗史)』에 보면 국자감에서 석전례를 행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성종(成宗) 2년(983년) 박사 임성로(任成老)가 송으로부터 공부자묘도(孔夫子廟圖) 한 폭과 제기도(祭器圖) 1권, 72현찬기(賢贊記) 1권을 각각 가져와 성종에게 올렸으며 현종(顯宗) 11년(1020년) 8월, 최치원을 선성묘에 배향하고 같은 13년(1022년)에는 설총을 또한 이 묘에 배향하였다. 예종(睿宗) 9년(1114년) 6월에 사신 안직승이 귀국할 때 송휘종(宋徽宗)이 신악기와 악보 및 지결도(指訣圖)를 보내 주었다. 이 때 보내준 악기는 속악기와 아악기가 혼합하여 있었다. 이 악기를 받을 하례사(賀禮使)로 추밀원(樞密院) 지주(知奏) 왕자지(王字之)와 호부(戶部) 미중(微中) 문공미(文公美)를 파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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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 11년(1116년) 6월에 송에 하례사로 가 있던 왕자지, 문공미에게 휘종이 조서(詔書)와 함께 대성아악(大成雅樂)을 보내 주었다. 이 때에 들어온 대성아악은 순수한 아악기에 속하며 이와 함께 아악 연주에 필요한 무구(舞具), 무복(舞服) 장식 일습을 구비하여 보내온 것이다. 이 때 들어온 대성아악은 원구(圓丘)·사직(社稷)·태묘(太廟)·선농(先農)·선잠(先蠶)·문선왕묘 등의 제사와 그밖의 연향에 쓰이게 되었다. 충렬왕 30년(1304년) 6월에 고려의 국도 개경에 있던 국자감을 성균관으로 개칭하였는데 성균관이라고 하는 이름은 "一掌成均之法典 以治建國之學政"이라는 『주례(周禮)』의 성균에서 연원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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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태조(太祖) 7년(1398년), 숭교방(崇敎坊)에 성균관을 설치해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했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부자를 비롯해서 4성, 10철과 송조6현 등 21위를 봉안했고, 동·서무에 우리 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 94위 등을 봉안하여 매년 춘추 두 차례 석전을 받들어 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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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제치하인 1937년부터는 양력 4월과 10월의 15일로 변경하여 실시하다가 해방 후인 1949년에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5성위(五聖位)와 송조2현(宋朝二賢)만 봉안하고 그 외 중국 유현을 매안(埋安)하고 우리 나라 18현을 대성전에 승봉종향(陞奉從享)하고 춘추석전을 폐하고 탄일(誕日)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석전을 봉행하다가 그후 석전도 봄과 가을 두 차례 즉,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로 환원하여 봉행하였으나, 중국·일본·대만·베트남 등 전세계적인 조류에 발맞춰, 임원 및 전교회의에서 설문조사를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중앙상무회의에서 결의하여 2007년부터 공부자(孔夫子)의 기신일(忌辰日)을 양력(陽歷)으로 환산한 5월 11일에 춘기석전(春期釋奠)을 봉행하고, 탄강일(誕降日)을 양력으로 환산한 9월 28일에 추기석전(秋期釋奠)을 봉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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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석전(釋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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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석전대제에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고래(古來)의 악기와 제기를 보유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고전음악인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과 고무(古舞)인 팔일무(八佾舞), 제관(祭官)이 입는 전통적이고 권위있는 의상과 고전적 의식절차 등이 화려하고 장중하여 예술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유일하게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커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석전은 동양의 철학과 학문과 그 인습에 깊이 뿌리를 둔 종합적이고 복합적인 문화의 양식으로 오늘날까지 동양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본질적인 맥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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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전순(釋奠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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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전악(典樂)이 악사(樂士)와 무생(舞生)을 인솔(引率)하여 소정(所定)의 위치(位置)에 들어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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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찬인(贊引)이 대축(大祝)과 제 집사(執事)를 인도(引導)하여 소정(所定)의 위치(位置)에 들어감. |
대축(大祝)과 제 집사(執事)가 사배(四拜)함. 대축(大祝)과 제 집사(執事)가 관세위(관洗位)에 나아가 세수(洗手)하고 대성전(大成殿) 계상(階上)에 정열(整列)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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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알자(謁者)와 찬인(贊引)이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분헌관(分獻官)을 인도하여 소정의 위치에 들어감. |
알자(謁者)가 초헌관(初獻官)에게 행사(行事)를 청함. 당하악(堂下樂)과 문무(文舞)를 시작함. 헌관(獻官)과 참례자(參禮者) 일동(一同)이 사배(四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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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전폐례(奠幣禮) |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 세수하고 공부자대성위 앞에 나아감. 당상악과 문무를 시작함. 초헌관이 공부자대성위 앞에 꿇어 앉아 세 번 분향하고 폐백(幣帛)을 드리고, 차례로 안자성위(顔子聖位)와 증자성위(曾子聖位), 자사성위(子思聖位), 맹자성위(孟子聖位)에 나아가 분향하고 폐백을 드리고 소정의 위치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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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초헌례(初獻禮) |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공부자대성위에 올릴 술상 앞에 나아감. 당상악과 문무를 시작함. 공부자대성위 앞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고 조금 물러서서 꿇어 앉음. 대축이 축문(祝文)을 읽음. 초헌관이 안자성위, 증자성위, 자사성위, 맹자성위 순으로 나아가 각각 술잔을 올리고 소정의 위치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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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아헌례(亞獻禮) |
알자가 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 세수하고 공부자대성위 앞에 나아감. 당하악(堂下楽)과 무무(武舞)를 시작함. 공부자대성위 앞에 술잔을 올리고 다음 사성위(四聖位)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소정의 위치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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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종헌례(終獻禮) |
알자가 종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 세수하고 공부자대성위 앞에 나아감. 당하악(堂下楽)과 무무를 시작함. 공부자대성위 앞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고 다음 사성위 순으로 각각 술잔을 올리고 소정의 위치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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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분헌례(分獻禮) |
종헌관이 행례를 위해 장차 전에 오르려고 하면 찬인이 동종향 분헌관과 서종향 분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 세수하고 동종향 분헌관은 동종향 십칠위(十七位)에 분향하고 술잔을 올리고 서종향분헌관은 서종향 십칠위(十七位)에 분향하고 술잔을 올리고 소정의 위치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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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음복례(飮福禮) |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음복하는 곳에 나아가 석전에 드린 술과 포(脯)를 받아 음복함. 헌관이 사배함. 대축이 철상(撤床)함. 당상악을 하다가 그치고 다시 시작함. 헌관과 참례자 일동이 사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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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망예례(望瘗禮) |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분축(焚祝)하는 곳에 나아감. 악을 그침. 대축이 분축함. 알자가 초헌관에게 예필(禮畢)을 고함. 알자와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퇴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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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관 및 집사의 명칭과 임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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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헌관(初獻官):5성위에 향을 사르고 첫 잔을 올리는 제관으로 제사의 주인이다. |
아헌관(亞獻官):5성위에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
종헌관(終獻官):5성위에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 |
분헌관(分獻官):종향위(從享位)에 향을 사르고 잔을 올리는 제관. |
당상집례(堂上執禮):한문 홀기를 읽어 진행을 담당하는 제관. |
당하집례(堂下執禮):원래는 동서무 진행을 담당하는 집례였으나 현재는 동서무에 위패를 모시지 않아 대성전 월대밑에 서서 해설을 담당하는 제관. |
전사관(典祀官):나라의 제사에 제수를 준비하고 제상을 차리는 일을 맡은 제관. |
대축(大祝):축문을 읽는 제관. |
알자(謁者):초헌관을 안내하는 집사. |
찬인(贊引):헌관과 대축을 안내하는 집사. |
봉향(奉香):향(香)을 받드는 집사. |
봉로(奉爐):향로를 받드는 집사. |
봉작(奉爵):준소(樽所:술항아리를 놓아두는 곳)에서 사준이 따른 술잔을 받아 헌관에게 건네주는 집사. |
전작(奠爵):헌관에게서 술잔을 받아 신위 앞에 올리는 집사. |
사준(司樽):준소에서 술을 잔에 따르는 집사. |
> 유교 > 유교의 의례 > 공부자 탄강기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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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자 탄강기념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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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강작헌례(誕降爵獻禮) : 공부자의 탄강일에 올리는 의례 |
시 기 : 매년 음력 8월 27일 오전 11:00 |
장 소 : 성균관 대성전 |
의식절차 : 석전과는 달리 한 사람의 헌관(獻官)과 네 사람의 분헌관(分獻官)이 단헌(單獻 : 술 한잔을 올림)을 올리고 제수로는 포(脯)와 해(醢)를 쓰고 음악과 춤도 없는 다소 간소한 의식이다. |
현재는 헌작례가 끝나면 이어서 차를 올리는 헌다례(獻茶禮)도 진행한다. |
참가범위 : 유림 외 일반인 누구나
> 유교 > 유교의 의례 > 고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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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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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성균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 내용을 공자에게 고하는 의식인데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의 중요한 관직의 임명 때, 대성전을 수리하기 위해 위패를 이안(移安)하거나 공역(工役)이 끝나고 다시 환안(還安)할 때 의식을 거행했으나 현재는 성균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신임 임원이나 전교(典校)를 임명할 때, 성균관대학교의 입학식과 졸업식 때 올리는 의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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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관과 참가자가 부복하고 있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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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성균관 대학교의 입학식과 졸업식을 제외하고는 부정기적이다. |
장소 : 성균관 대성전 |
방법 : 헌관이 집례의 창홀에 따라 분향을 하고 부복하면 대축(大祝)이 해당사실을 적은 고유문을 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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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관이 고유에 앞서 관세(물로 손을 닦음)하고 있다
> 유교 > 유교의 의례 > 분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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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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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先聖先賢)에게 향을 피우는 삭망(朔望)분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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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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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시기 : 음력 매월 초하루(朔)와 보름(望) 오전 10시 (설날과 추석에는 정오(正午)에 분향을 한다) |
분향장소 : 성균관 대성전과 전국 향교 대성전 |
분향방법 : 헌관이 집사를 대동하고 창홀(唱笏 : 집례가 의식절차를 부르는 것)에 따라 성현을 참배하며 향을 피우는 의식. |
참가범위 : 유림과 일반인(예약자에 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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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잡영(정조때 윤기저작)에 나온 분향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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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咏朔望焚香]- 초하루와 보름에 행하는 분향례를 노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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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香前日早延香。碑閣傍邊列作行。吏負函乘官押後。下橋過處鞠躬忙。 |
분향례 전 날의 새벽 연향례(延香禮), |
탕평비각 근처에서 나란히 열 지어 기다린다. |
아전은 함을 지고 말을 타고 관리는 뒤에서 감독한 후, |
말에서 내려 향석교(香石橋)를 건너오면 황망히 국궁(鞠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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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下咏朔望焚香 - 아래는 삭망의 분향 의식을 읊었다. | |
每晦日及十四日朝。行延香禮。臨時下人引齋儒出。列立香橋碑閣邊。吏負香函乘馬。香官隨後。至橋下馬而過。則一齊鞠躬。 |
매월 그믐 및 14일의 아침마다 연향례(延香禮)를 봉행한다. 도착시간이 임박하면 하인이 동·서재의 유생을 인도하여 나와서 향석교의 탕평비각 옆에 열을 지어 선다. 아전이 향함을 지고 말을 타고 오고, 향관은 뒤에서 <향함을> 수행한다. 향석교 다리에 도착하면 말에서 내려 다리를 통과하는데 모든 사람은 일제히 국궁(鞠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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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香朔望未明時。守僕三呼促外儀。下輦臺前北向立。列書擧案火光隨。 |
삭망 분향일이 되면 날도 밝기 전부터 |
수복이 재촉하여 3번 ‘외의(外儀)’를 연호한다. |
하련대 앞에 북쪽을 향하여 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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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朔望曉將焚香。先打起寢洗水鼓。然後守僕三呼請外儀。則儒生出立下輦臺前。北向成列。隨炬火光書擧案給守僕。 |
매월 삭망일에는 새벽에 분향례를 실시한다. 먼저 기침(起寢)과 세수(洗水)의 북을 친 후, 수복이 큰 소리로 3번에 걸쳐 ‘외의(外儀)’를 청한다. 유생들은 하련대(下輦臺) 앞에 나와서 북쪽을 향하여 열을 지어 선 후, 횃불 아래에서 거안(擧案)에 서명하여 수복에게 건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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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僕六人典字巾。眞紅團領色鮮新。班中尋得曹司出。引向獻官廳上臻。 |
전자건(典字巾) 차림의 수복 6명, |
진한 홍단령 색깔도 선명하다. |
반열 중에 조사(曹司)를 찾아 앞으로 나오라 하여 |
헌관(獻官)을 모시러 향대청으로 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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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僕六人。盖大聖位 四聖位 東西從享東西廡各一人也。着典字巾紅團領。旣受擧案。掌議或班首。差定奉香奉爐執禮。奉爐則以下齋及四庠中一人爲之。執禮則以前第三榜中人爲之。盖新榜爲下色掌榜。其前榜爲上色掌榜。又其前榜爲執禮榜。執禮榜中若無參者。則又以其前榜爲之。守僕尋得班中最少年。引向獻官所在香大廳。揖以迎出。曹司若有同庚。則又分其生日先後。故或有厭避曹司。而詐增其月日者云。可笑也。 | |
수복은 6명인데 대개 대성위, 사성위, 동·서종향, 동·서무에 각각 한사람씩이다. 전자건과 홍단령을 입고 거안을 접수한 후에 장의나 반수가 봉향(奉香)과 봉로(奉爐), 집례(執禮)를 차출하여 정한다. 봉로는 하재생 및 사학 가운데 한사람으로 정하고, 집례는 이전에 3방(三榜)을 지낸 사람으로 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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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신방(新榜)이 하색장방이 되고 그 전방(前榜)이 상색장방이 되며 또 그 전방이 집례방이 된다. 집례방 가운데 만약 참여자가 없을 경우에는 또 그 전방으로 정한다. 수복(守僕)은 반열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曹司: 조사]을 찾아서 헌관이 계신 향대청으로 인도하면 <헌관에게>읍하여 예의를 갖추고 뫼시고 나온다. 조사가 만약 나이가 동갑[동경(同庚)]이면 또한 그 생일의 선후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간혹 조사(曹司)가 되기를 싫어하고 기피하여 거짓으로 그 <태어난> 달과 날을 늘리는 자도 있다고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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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司前導獻官來。揖就班頭側立陪。復見香官隨後至。一時多士鞠躬催。 |
조사가 앞에서 인도하여 헌관이 나오시면 |
읍하고 제일 앞에 나아가 곁에 서서 모신다. |
연이어 향관이 뒤따라 도착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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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에 모든 선비에게 국궁(鞠躬)을 재촉한다. | |
曹司隨守僕在獻官前導以出來。立於班前。守僕揖。曹司亦揖。仍陪立於側然後香官陪香出來。守僕呼鞠躬。香官仍上階入門。受香奉安卓上。 |
향이 들어가면 제생이 모두 비각 옆의 소신문(小神門) 밖으로 옮겨가 선다. 조사도 헌관이 오면 읍(揖)한다. 향관이 향을 올린 후, 소신문을 경유하여 나와 헌관의 아래에 선다. 수복은 집례와 찬인을 인도하여 먼저 들어가 사배례를 행한다. 사배례를 마치면 찬인은 다시 나와서 헌관에게 읍한다. 헌관이 들어가면 제생들도 모두 따라서 층계를 오르는데 소신문을 통과여 <문이> 메어지는 듯이 들어간다. 하재생과 사학의 유생도 따라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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殿庭趍進衆靑衫。排列後前肅穆咸。小子油然尊慕意。怳如先聖儼臨監。 |
대성전 뜰로 바삐 나아가는 청삼(靑衫)의 무리들 |
앞뒤로 배열함이 모두 엄숙하고 화목하다. |
학생들 뭉게구름처럼 존경과 추모의 뜻 복받치니 |
마치 공자께서 의젓하게 굽어보시는 듯 황홀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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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絲捲箔殿門開。門外朱床望裏嵬。試看床上安排物。香盒香爐兩燭臺。 |
푸른 실로 말아 올린 발 너머로 대성전 문 열려 있고 |
문 밖에서 의연하게 놓여있는 붉은 제사상(床) 아득히 바라보네. |
상 위의 놓인 기물(器物)을 살펴보니 |
향합과 향로와 쌍(두개의) 촛대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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殿門外設箔。是曉捲絲開門。於門前當中。設朱卓。卓上安兩燭臺燃燭。又安香爐於正中。香盒在其東。 | |
대성전 문 밖에 발을 설치해 놓고 새벽에 실을 감아올리고(줄을 감아 올려) 문을 연다. 문 앞의 정 중앙에 붉은 탁자가 놓여있는데 탁자 위의 쌍(두개의) 촛대에 촛불을 켜놓고 또한(빼도 될 듯) 향로를 정중앙에 배치한 후에 향합을 그 동쪽에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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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禮階前笏記扶。只隨守僕一聲呼。引着獻官盥手詣。奉香上處奉爐俱。 |
집례는 계단 앞에서 홀기를 잡고 |
다만 수복의 말에 따라 큰소리로 연호한다. |
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니 |
봉향이 올라간 곳에 봉로도 함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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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禮贊引立臺下層階之傍。執禮持笏記。只隨守僕之聲。守僕曰呼。則執禮唱。贊引引獻官詣盥洗所。遂引詣香所。奉香及奉爐執禮皆隨而上。 | |
집례와 찬인은 월대 아래의 층계 곁에 서 있다. 집례는 홀기를 잡고 다만 수복을 따라 복창(復唱)한다. 수복이 ‘부르오’하면 집례가 홀기를 읽는다. 찬인이 헌관을 인도하여 관세위로 나아가고 <관세를> 마치면 인도하여 향소로 나아간다. 봉향과 봉로와 집례도 모두 따라서 올라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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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香東跪奉爐西。三上香餘復位齊。隨唱一時行四拜。篆煙馥郁殿中迷。 |
봉향은 동쪽, 봉로는 서쪽에서 각각 무릎 꿇고 |
세 번 향을 사른 후에 가지런히 자리로 돌아간다. |
창홀(唱笏)에 따라 일시에 4배(拜)를 올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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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같은 연기와 향기, 전내(殿內)에 자욱하다. | |
獻官旣跪於卓前。奉香奉香東跪。奉爐奉爐西跪。獻官三上香於爐。則各安於卓上。獻官及諸執事皆降復位。行四拜訖皆出。 |
헌관이 탁자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봉향은 향을 받들어 동쪽에서 무릎 꿇고, 봉로는 향로를 받들어 서쪽에서 무릎을 꿇는다. 헌관이 향로에 3번 향을 사르면 각자 탁자 위에 <향로를> 안치하고 헌관과 제집사가 모두 내려와 자리로 돌아간다. 4번 절하고 <절이 끝나면> 모두 밖으로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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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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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심 : 유림이나 일반인 및 학생 등이 문묘를 참배하고 향을 올리는 의식 |
분향시기 : 수시(사전 예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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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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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및 학생이나 일반인 등이 문묘를 견학하고 참배하는 의식 |
견학시기 : 수시(사전 예약)
> 유교 > 유교의 의례 > 종묘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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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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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로서,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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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창업후,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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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03평의 경내에는 종묘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고쳐 짓고, 그 후 영조 헌종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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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은 세종 3년(1421)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태실 4칸, 동서에 곁방 각 1칸씩으로 6칸의 규모였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광해군 즉위년에 10칸의 규모로 재건하였으며 그 후 계속 증축하여 현재 16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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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주(周)나라에서 시작된 종묘제도는 7대까지 모시는 제도로 시작되어 명나라 때에 와서 9묘 제도로 확대 되었는데 중국의 태묘에서는 태실이 9실에 불과하나 한국의 종묘만은 태실이 19칸인 매우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정면이 매우 길고 수평성이 강조된 맞배지붕 형식의 독특한 건축 양식은 종묘제도의 발생지인 중국과도 다른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건축유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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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여 제례를 지냈으나, 일제에 의하여 중단되었다가 1968부터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제향 의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이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종묘제례악 이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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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왕이 친히 올리는 친행(親行)과 왕이 사고가 있어 친행하지 못할 때 세자나 영의정이 대신 올리는 섭행(攝行)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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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절차로서는 전날에 전향축례(傳香祝禮), 제찬진설(祭饌陳設), 분향(焚香), 분축(焚祝)을 순서에 준하여 행하고, 당일에는 오전 9시에 영녕전(永寧殿) 제향을 먼저 올리고 정오에 정전(正殿)제향을 한다. 제례 절차는 강신례(降神禮)에 해당하는 신관례를 하고 이어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망료례(望燎禮)의 순서로 봉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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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례 복장은 임금은 9장면복(九章冕服) 곧 면류관(冕旒冠)에 9장복을 입었다. 모든 관리의 제복도 품관의 상하에 따라 구별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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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또한 익히지 않은 나무열매·새고기·짐승고기를 먹었다는 옛 제왕들을 본받아 3생(三牲)·2갱(二羹)·서직도량(黍稷稻梁)·2제(二齊)·3주(三酒)·6과(六果)·6병(六餠)·2포(二脯)·4해(四醢)·4저(四菹)·모혈(毛血) 등을 진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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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악은 세종 때 정한 종묘의 악(樂)인 경안(景安)·승안(承安)·숙안(肅安)·옹안(雍安)·수안(壽安)·서안(舒安)이 있었고, 무(舞)에는 열문(烈文)과 소무(昭武)가 있었다. 세조 때에 이르러 신악(新樂)인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을 약간 가감(加減)하여 다듬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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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의 주전(主殿)인 정전은 건평이 1,270㎡의 상당히 규모가 큰 건물로서 유교의 검소한 기품에 따라 건립된 특수 목적용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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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개별적으로는 한국의 일반 건축물과 같이 비대칭 구조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의례공간의 위계질서를 반영하여 정전과 영녕전의 기단과 처마, 지붕의 높이, 기둥의 굵기를 그 위계에 따라 달리 하였다. |
종묘의 가치는 동양의 파르테논이라 일컬어지고 있을 만큼 건축사적 가치가 있어 사적 제12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정전(국보 제227호), 영녕전(보물 제 821호), 종묘 제례악(중요 무형문화재 1호) 종묘제례(중요 무형문화제 제 56호)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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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악은 기악, 노래, 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 때 처음 짓고 세조 때 다듬은 보태평과 정대업 22곡을 연주하고 그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것이 특징인 팔일무 등의 춤을 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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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제례는 종묘인 의례공간과 함께 의례절차, 의례음악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음악과 의례무용 등이 조화되어 있으며, 1462년에 정형화된 형태를 500년 이상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적 의례문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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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대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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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행해진 사직에 대한 제사는 자연에 감사하는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조선의 태조는 나라를 세우면서 궁궐과 함께 종묘, 사직단(사적 제121호)을 마련하여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따라 경복궁의 동쪽에는 종묘를, 서쪽에는 사직단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도 사직단을 세워 백성의 평안함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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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북쪽에 신위를 모시고 동서로 사단(社壇)과 직단(稷壇)을 배치하였다. 제사는 정기적으로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날 밤에 지냈으며, 부정기적으로는 나라의 큰일이나 가뭄이 있을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나 격식은 때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 왔으나 점차 중국의 방식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예를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행해지는 제사의식은 주(奏)·악(樂)·무(舞)와 폐(幣)를 드리고 소·돼지·양의 생고기를 비롯한 각종 곡식을 마련하고, 전폐·영신례·초헌례·아헌례·종헌례·음복례 및 망요례를 순서에 입각하여 진행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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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례에 사용되는 음악, 무용, 음식, 의복, 의기(儀器) 등을 비롯하여 제사를 행하는 우리 고유의 제사절차 등은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제사의식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터줏대감이나 산신 등에 제사하는 민속이나 전통관습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정리하는데 기준이 되는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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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례는 고종 31년(1894년)에 이르러 신관제(新官制)로 바뀌면서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격이 높아진 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시절마저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고, 1908년(순종 2) 일제의 강압으로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복원하여 매년 개천절에 사직공원에 있는 서울 사직단(사적 121)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大同宗約院) 주관으로 봉행해 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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