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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떼가 무료를 달래주는 농로
아무리 아침을 먹지 않는 늙은이라 해도 플로렌티노 부부가 애써 준비한 식사를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함께 식사한 후 그들 부부와 작별포옹을 하고 나섰을 때 황금 들녘이 더욱 누렇게 변한
듯이 보였다.
한밤이 지났을 뿐인데 그럴 리 있는가.
숙소를 나설 때까지 모르도록 밤새 얌전히 내린 비온 후인데다 맑아진 심안(心眼)으로
보니까 그런 것이겠지.
해발700m에 자리잡고 있으며 주민이 20명도 채되지 않는 작은 마을의 특이한 점 없는
알베르게지만 지금까지 숙박해 오는 중 가장 순수한 밤을 보냈다.
아마도, 그래서 사물이 더욱 깨끗하게 보였을 것이다.
(등을 받아주는 곳은 모두 훌륭한 잠자리인 내게는 마음이 편한 곳이 최고의 침대다)
카미노는 경사가 급한 내리막과 자갈밭 길 이후 너른 농로가 된다.
푸엔테 라 레이나 데 하카에서 아레스를 거치지 않고 가는 길과 다시 만나게 된다.
아레스 이후로는 솜포르트 ~ 하카와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된다.
전반적으로 석회질 토양이며 산발적으로 분포된 산악지대의 계곡지대가 되어 남쪽에
비해 비옥하단다.
누렇게 익어가는 밀, 보리 들판이 우리의 가을 황금 들을 연상하게 하며 해발500m대로
내려앉은 아라곤 계곡의 기름진 들녘이 펼쳐진다.
운하를 비롯한 수리시설과 영농의 기계화가 일찌기 이뤄져서 하늘의 눈치를 보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가물 때 비행기 날개와 흡사한 거대한 살수기가 뿜어내는 물은 장관을 이룬다.
농로에서 농로로 이어지는 카미노,
그늘막 하나 없는 길이다.
미아노스(Mianos)를 비롯해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이따금 등장하지만 모두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아레스에서 18km, 아르티에다 까지는 먹을 것은 커녕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다고 경고
(?)하는 길이다.
그러나 공차증(恐車症)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행복한 길이다.
그렇다 해도, 고백컨대 조금은 무료한 길이다.
이 무료를 달래주는 것은 개미떼다.
어제 비가 많이 내려 하지 못한 일을 아침 일찍부터 하는 중인 듯 부지런한 기미들.
한국 늙은이는 이들 개미로부터 하루의 일기를 확인하며 걷는다.
저들의 활동이 왕성한 날은 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라곤 길은 상당히 떨어져 있는 아라곤 강과 거의 나란히 가고 있다.
따라서, 순례자들은 가까운 마르테스(Martes)산과 산 에스테반(San Esteban)산 등의
계곡에서 아라곤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개울들을 건너야 한다.
아직은 미완상태지만 홍수의 위험에 대비해 다리들이 건설중이어서 다행이다.
예전의 순례자들은 물이 불어날 경우에 난감했을 텐데.
이에사 댐
우에스카 주를 떠나 사라고사 주에 진입한 아라곤 길은 모처럼 잠시 숲길이 되었다가
농로를 따라 아르티에다(Artieda) 마을을 지난다.
아라곤 지방에서 가장 큰 주(州)인 사라고사 주(Zaragoza/지방정부의 수도)의 지자체
중 하나로 인구가 110여명 되며 아라곤 길에서 600m 떨어진 언덕바지 마을이다.
알베르게와 바르가 있으나 숙박 또는 요기할 요량이 아니면 들러지지 않을 마을이다.
동구 저지대에 마을 묘역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거고묘저(居高墓低), 즉 높은 데서 살고 낮은 데에 묻히나.
드디어 긴 농로가 끝나고 하늘을 가리는 우거진 숲길이다.
천연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자연, 눈 덮힌 피레네 산맥 아래에서는 초원과 울창한 숲이
푸르름을 과시하고 있다.
프랑스 길은 물론 포르투 길과도 달리 걷고 또 걸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숲길이 아라곤
강과 나란히 간다.
끊기는 듯 하다가 이어지기를 거듭하는 숲길이다.
1950년대 말에 산책한 적이 있는 경남 함양의 상림(上林/정교하게 다듬어진 오늘날의
모습과 달리 천연의)을 연상하게 하는 숲이다.
솜포르트에서 발원한 아라곤 강물을 담은 이에사 댐(Embalse de Yesa)이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팜프로나(Pamplona)와 사라고사 사이에 있는 바르데나스(Bardenas) 등 가뭄지역을
해소하기 위해 축조한 댐이란다.
1920년대에 계획하고 1936년에 착공하여 1959년에 완공되었다는 댐이다.
스페인인에게는 우리나라처럼 공기단축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나 보다.
한데, 2400헥타르(hectares)의 거대한 댐에 수몰된 땅의 대부분이 비옥한 경작지란다.
먼 지역의 가뭄 해소를 위해 옥토를 수장당한 이 지역 주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우리나라도 댐 건설로 인해 정든 고향과 문전옥답을 잃게 된 실향민이 부지기수다.
특히, 부산시민의 식수를 위해 남강댐의 수위를 올림으로서 삶의 터전을 거듭 잃게 된
진주 대평마을 주민들의 탄식소리는 수시로 이 늙은이의 마음을 짠하게 하는데. (메뉴
'옛길' 통영별로 단상 8번글 참조)
또한, 이 댐이 원래의 사도 야고보의 아라곤 길 루에스타(Ruesta)와 티에르마스(Tier
mas) 사이를 삼켜버렸다는데 아르티에다와 루에스타 사이도 곧 사라질 운명이란다.
1970년대 이래 담수량을 3배로 늘리는 공사가 착수됐으나 '이에사는 안돼'(Yesa no!)
라는 기치를 내건 아라곤 강 반(反)개발단체의 법적 대응에 걸려 현재는 답보상태지만
공사가 완공되면 지금 걷고 있는 이 숲길도 모두 수장되고 말 것이라는 것.
생각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려 하는 듯 했다.
그 까닭은 내가 사도 야고보의 길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며 따라서 내게는 애통해 할 만큼 야고보의
길에 대해 특별한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길이 수장되건 매장되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인데 무슨 걱정인가.
일리일해(一利一害/a man's meat, another man's poison)는 보편적 세상이치인데.
그럼에도 애석해 하는 것은 어떤 대체길도 이 아름다운 숲길에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유기된 마을 루에스타
그렇다 해도, 비록 개발에 밀려서 쫓겨나기는 해도 프랑스 길과 포르투 길처럼 이해에
얽혀 둘 또는 셋으로 나뉘지는 않았다.
지루한 메세타 또는 센다도 없고 질주하는 차량공해와 공차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아라곤 길이야 말로 순례길의 진수라 할 수 있다.
프랑스 길과 포르투 길에서 입은 실망과 낙담을 보상하는 길이다.
극동의 77세영감이 애오라지 신바람을 일으키며 걷기 위해 대서양 땅끝 이베리아 반도
까지 먼 길을 왔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미구에 수몰될 운명인 산 후안 바우티스타 예배당(Ermita de San Juan Bautista)유적
을 뒤로 하고 긴 숲길을 벗어났다.
A-1601 지방도로에 올라섰을 때 시야에 하늘 높이 솟아있는 유적(ruins)이 들어왔다.
길을 따라 다가갔을 때 루인도 나도 백척간두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서쪽에 우뚝 솟은 유적은 10c말의 무어인의 성이며 동쪽의 유적은 16c의 산타 마리아
교회(Iglesia Santa Maria)란다.
성의 입구는 붕괴의 위험을 이유로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되어 있다.
28km 남짓의 하룻길을 마감하는 루에스타에 도착했다.
1959년 이후 버려진 마을이란다.
재건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자금난으로 포기했다는데 공교롭게도 이에사 댐의 준공
이후에 퇴락해 댐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도 성립되겠다.
중세까지도 아라곤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 지역으로 보존된 마을이었다는데 왜 이리
되었을까.
언덕 위에 걸쳐있는 배의 형상이라는 루에스타(Ruesta)는 현재 인구 4명의 마을이다.
1명인 프랑스 길 만하린(Manjarin)에 이어 초미니 마을이다.
마을이라기 보다 독립가옥에 다름아니며 존재의의는 만하린과 마찬가지로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의 운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른 점은 도나티보(donativo/donation)로 운영하는 만하린과 달리 12유로나 받으며
바르의 음식도 질에 비해 바가지 값이다.
알베르게와 바르를 운영하는 이들에게 순례자는 봉이라 할까.
아라곤 길에서 유일하게 숙식에 대안이 없는 곳이다.
아르티에다에서 이미 10km나 더 왔고 알베르게가 있는 다음 마을 운두에스 데 레르다
까지 가려면 다시 10km이상 걸어야 하니까.
소위, 대책 없는 지점임을 기화로 부르는 게 값이라 해도 달리 도리가 없다.
울며 겨자먹는 기분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레스에서 토스트와 우유로 아침식사를 한 후 아직 아무 것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계 속>
첫댓글 맑은 날씨에 그림같은 풍경이 많이 나오는군요. 사람도 거의 없는 이베리아길에서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Amazing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