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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月潭會(월담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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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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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판본체의 서체에 충실하며 세종대왕께서 한글창제 당시 기본으로 삼으신 천(天)·지(地)·인(人) 3재(3才)를 모두 표현하였다. 서체는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단순하고 명쾌하며 정중함과 부드러움도 함께 지니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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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영에 담긴 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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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邊)은 두텁게 하여 외세(外勢)로부터 국토보위(國土保衛)를 굳건하게 함을 상징하였고, 여백은 시원스럽게 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정신과 국민에 대한 봉사정신을 다짐하는 뜻을담아 표현하였으며, 정사각형의 인면은 바른 정치와 공직사회의 굳건한 기강을 의미토록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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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가 : 여원구(呂元九, 1932년 3월 7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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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각학회 회장(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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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미술대전 서예대상 수상 ( 83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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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서예대전 운영위원장 ( 9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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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장 ( 93년 ) |
인뉴(印紐, 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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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의 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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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이 무궁화 꽃잎을 함께 물고 구만리 창공을 웅비(雄飛)하는 모습으로, 조형미를 극대화시키고 남성적·적극적·개척자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봉황의 형상을 현대적 감각 으로 디자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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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에 담긴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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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이상을 실현하는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인 봉황이 무궁화 꽃잎을 함께 물고 있는 것은, 21세기에 대한민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해 국가 지도자와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화합·협력하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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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 : 김영원(金永元, 1947년 5월 18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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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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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88년, 9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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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상파울로 국제비엔날레 한국대표 참여(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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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초대전·단체전 출품 120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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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가로10.1㎝, 세로10.1㎝, 높이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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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 금75.2%,은11.8%,동11.6%,아연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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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 2.15㎏ |
국새의 끈 보 술
국새 인수(印綬: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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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함 보자기 |
자물쇠 주머니,열쇠,술 |
국새보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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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명주실을 다홍색으로 염색하여 꼬은 12사(絲)로 광다회(廣多繪)를 치고 중심에 안경 매듭을 맺은 후 방망이 술을 부착하였다. | |
※ 끈을 만드는 방법에는 둥근 형태로 끈을 짜는 원다회(圓多繪)법과 납작한 형태로 끈을 짜는 광다회(廣多繪)법으로 나눠어 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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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자물쇠 주머니 |
- 보자기 | |
조선왕조 왕의 곤룡포를 만들던 비단을 재현·제직한 다홍색 운문단(雲紋緞)에 명주 솜을 얇게 넣은 후 손으로 누빈 띠를 붙이고, 네 귀에 금박(金箔 : 순금을 종이처럼 늘인 조각)을 입힌 금전지(金箋紙)에 술을 달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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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물쇠 주머니와 열쇠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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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 주머니는 다홍색 운문단으로 귀주머니를 짓고, 남색 명주실 8사로 원다회(圓多繪:둥근형태)를 쳐서 도래(구슬형태)·국화·잠자리 매듭을 맺어 장식했으며, 열쇠술은 다홍색 명주 8사(絲)로 도래(구슬모양)매듭·정(井)자 매듭을 맺은 후 작은 딸기술을 부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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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자기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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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古文書) 보관용 중성합지(中性合紙)로 함(函)을 제작하고, 순금으로 실을 뽑아 명주와 혼합직조한 금란(金欄)으로 함의 외피를 장식하였다.(협조 : 호암미술관보존과학실 송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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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자 : 김희진(金喜鎭, 1934년 5월 3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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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전통매듭) 기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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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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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
위에서본 모습 |
옆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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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 및 규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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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를 전통 짜 맞추기 방법에 의해 제작 후 옻칠을 10회하고 주석으로 조선왕조 국새함의 장석문양을 재현하여 부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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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 격 : 20.3×20.3×21.4cm(장식포함 25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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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가 : 홍동화 (洪東和, 1945년 8월 18일생) 전승 옻칠명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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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협조 : 이규삼(목수), 정희수(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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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차원에서 국새제작
국새를 만드는 것은 국가의 상징물을 제작하는 것 이기에 역사적인 사업이다.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국새를 만든 것은 이번이 세 번째. 1949년 5월 5일 국새규정을 공포하고 '대한민국지새'라는 한자로 쓰여진 국새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그 뒤 1963년 1월 1일부터 한글로 '대한민국'으로 바꿔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정권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국새를 만든 것이다. 새로 제작된 무게 2.15㎏의 국새는 재질이 금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금75.2%, 은11.8%, 동11.6%, 아연1.4%로 돼있다. 강도 등을 고려한 배합이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지난해까지 쓰던 국새는 재질이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전통적으로 국새는 금이나 옥으로 만들었다. 은으로 만든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국가의 상징을 만드는 데 있어 우리 스스로가 그 격을 낮췄던 셈이다. 행정자치부 한 관계자는 1963년에 제작된 국새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국새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해방 직후 만든 국새와 1963년 새로 만들어진 국새는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거북이는 중국에서 황제가 변방의 제후에게 내려주던 도장에 있는 영물. 상징적으로 '복종'의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새는 처음부터 중국과의 긴밀한 관련아래서 만들어졌다. 이런 측면에서 해방이후까지 '거북이 국새'를 가졌던 것은 민족적인 측면에서 부끄러운 일이었다.
새 국새에는 상징물이 봉황이 있다. 봉황이 무궁화 꽃잎을 물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새 국새는 왜 봉황을 상징물로 한 것일까. 국새제작위원회가 처음에 상징물로 하려했던 것은 '용'이었다. 용은 '용상' '곤룡포' 등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 황제의 상징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이런 의미가 강했다.
우리 국새중에서도 용을 상징물로 쓴 것이 있다.1897년 제작한 '대한국새'다. 고종임금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자주성을 대내외에 공표한때다. 때문에 국새제작위원회들이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 용을 상징물로 생각한 것은 자연스런 결과였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에 부닥쳤다. 기독교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닥친 것. 일부 기독교인들은 관계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며 "하필이면 전형적으로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을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물에 넣느냐"며 반발했다. 서양에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인류 최후의 날에 나타나는 괴물이 용을 닮아 있어 용을 사탄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는 것. 인도나 중국, 한국 등에서 용을 황제의 상징물이자 신과 인간의 중개자 등으로 보는 것과는 시각차가 컸다.
고민 끝에 관계당국에는 "국민을 결집시키자고 국새를 만드는데 이로 인해 국론분열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며 대안 모색에 나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상징물은 봉황으로 정해졌다. 봉황 역시 동양에서 숭배하는 영물 중의 하나다. 동양에서는 성군의 상징으로 돼있다. 중국 요순시대에 봉황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서양에서도 봉황은 대접을 받고 있다. '불사조'의 의미로 로마제국 황제의 휘장이 봉황이었다. 에덴동산을 지친 공로로 3천년마다 다시 태어난다는 전설도 있다고 한다. 새 국새에 들어간 봉황은 국보 256호인 백제금동대향로에 있는 봉황을 모델로 제작됐다. 국새에 들어가는 상징물이 용에서 봉황으로 결정되는 과정과 관련, 눈여겨 보아야할 대목이 하나있다.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부수적인 고려사항은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바로 종교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의 종교는 천주교, 이휘호여사, 김정길 당시 행자부장관, 실무책임자였던 김재철 당시 행자부 의정국장 등은 기독교였다.
당시 전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이런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국새의 크기가 결정된 과정도 재미있다. 전에 쓰던 국새는 가로 세로가 각각 7㎝였다. 반면 새로 만들어진 국새는 가로 세로가 각각 10.1㎝다. 하필이면 10.1㎝일까. 조선왕조 국새의 평균 크기는 10㎝. 그렇다면 이것보다 크게 만들려고 0.1㎝를 크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관계자들은 "세종어보(어보는 임금이 쓰던 도장을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옥새라고 하는 것과 같다)가 10.1㎝다. 이것을 기준삼아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좀더 깊숙이 들어가면 다른 얘기도 나온다. "크기가 10.1㎝로 결정된 것은 이와함께 일본을 의식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일본도 국새가 있다. 크기는 가로 세로가 각각 9㎝. 결국 민족적인 자긍심을 살리는 차원에서 일본보다 크게 만들자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 더해 한글을 만들어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드높인 세종이 사용한 어보의 크기가 결정적으로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국새에 새겨진 글씨와 관련해서도 그동안 말이 많았다.
전에쓰던
국새에 새겨져 있던 '대한민국'이라는 한글이 한문 전서체를 모방한 것이라는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던 것. 한마디로 '국적불명의 한글'이라는 비판이었다. 때문에 새로 제작한 국새는 '월인천강지곡' 등에서 집자한 순수한글로 만들어졌다.
일부에서는 "국새의 순수 한글 제작을 계기로 현재 한문 전서체로 돼있는 관인에 대해서도 한글화를 검토해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현재 관인은 대략 10만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새 국새를 만드는데 알려지지 않은 일등공신이 있다면 'MK전자(회장 강도원)'다.
국새를 국산금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관계자들은 시중의 금은방을 뒤졌다. 국새를 만드는데 실제적으로 들어가는 금을 4~5㎏정도로 추정하고 이 금덩어리를 구하고자 했던 것. 그런데 어디에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난감한 관계자들을 구해 준 것이 MK전자였다. 컴퓨터 칩을 생산하는 이 회사는 칩안에 들어가는 미세한 선을 만들기 위해 금을 다량갖고 있었던 것. 구세주를 만난 관계자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협조해 달라"며 매달렸고 MK전자측은 기본경비는 받았지만 생산라인 세척에 들어가는 수천만원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를 수락했다. 이처럼 새로 제작된 국새는 많은 뒷얘기와 그 의미를 갖고 있다. 1백년만에 제대로 제작된 국새인 만큼 후세에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판단된다.
국새의 관리기관
국가의 인장(印章) 제조에 대한 통제기록으로는 고려 18대 의종(毅宗)(1146∼1170) 때 "인부랑(印符郞)"이란 인부(印符)를 두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초기에 상서사(尙瑞司)가 설치되어 새보(璽寶)·부패(符牌)·절월(節鉞)을 전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총무처에서 관장하여 왔으며, 정부조직 개편으로 98년 2월 28일부터는 행정자치부 의정국 의정과에서 국새와 함께 대통령직인, 국무총리직인을 관리하고 있다
국새 보관은 누가 어떻게?
국새는 외롭다. 쓸쓸하다. 외출을 하고 싶지만 겹겹이 철책이 쳐져 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관인이 벗이 돼주고 있는게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나 할까. 신분상 어쩔 수 없다고 자위를 하긴 하지만 답답함이 꽉 차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운 '국새보관실' 그 구중심처에 국새는 갇혀있다.
행자부 의정국 옆에는 '국새보관실'이 있다. 엄격히 출입이 통제되는 이곳은 해당 공무원외에는 일절 출입이 금지되는 '비밀의 방'이다. 이 방을 열 수 있는 열쇠는 담당공무원 한 명만 갖고 있다.
나라의 상징을 보관하고 있는 만큼 보안관리도 철저하다. 의정국 입구에서부터 국새를 꺼내기까지는 여섯 개의 문을 열어야 한다. 6중 잠금장치속에 보호되고 있는 셈이다. 정부종합청사 입구에서부터 치자면 8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국새를 볼 수 있다.
야간에는 두 시간마다 순찰을 돌며 이상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 '비밀의 문'으로 들어가 보자. 우선 문 입구에는 보안시설(세콤)이 장치돼있다. 허가없이 문을 열 경우 즉각 세콤이 울린다. 세콤은 당직실과 수위실, 경비대에 연결돼있다.
문제가 생기면 1분안에 사람이 뛰어오게 돼있다. 세콤은 밤낮없이 24시간 작동되고 있다. 문은 카드식 특수열쇠로 잠겨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면에 '국새'라고 쓰여진 커다란 금고가 버티고 있다.
특수 제작된 이 금고는 역시 특수 제작된 열쇠를 사용해야 열린다. 여느 열쇠와 달리 몇차례 밀고 당기기를 해야 금고 문을 열 수 있다. 금고 문을 열면 다이알로 된 또다른 금고가 나온다. 역시 특수제작돼 보통사람은 전혀 열 수가 없다.
이 속에 국새가 있다. 국새는 전통적인 기법으로 특수 제작된 함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전승옻칠 명장인 홍승화씨가 만든 작품이다. 이 특수금고 안에는 함이 세 개 있다.
국새가 들어있는 함, 대통령의 관인이 들어있는 함, 국무총리관인이 들어있는 함 등이다. 이 방이 '특별관리'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국새보관실'에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조선왕조 이래 사용됐던 국새모형들 일부가 유리관 속에 진열돼 있다. 국새를 사용했을 경우 나오는 도장(인영)모양도 같이 전시돼 있다.
해방이후 사용됐던 두 개의 진짜 국새들은 이미 정부문서기록 보존실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조선왕조 시대 사용했던 국새들은 덕수궁에 있는 궁중유물 전시관에 있다. 왼쪽에는 국새를 찍을 때 사용하는 깔판과 인주 등이 놓여 있다.
국새를 위해 특별제작된 깔판과 인주다. 인주는 1999년 3월 1일부터 한지용으로 특수 제작한 것을 사용중이다. 그전까지는 훈장증 등을 줄 때 일반종이를 사용했는데 이때부터 한지로 바꿨다.
일반인주를 사용해 한지에 국새를 찍으니 잘 안찍혔던 것. 오로지 국새를 위해 존재하는 '국새보관실' 그 상징성 만큼이나 고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1년에 1만 6천번 꾹꾹...
1년에 1만 6천번 꾹꾹 국새관리 공무원 이성희씨...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 의정과에 근무하고 있는 9급공무원 이성희씨에게 99년 2월 28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이날 그는 나라의 상징인 국새를 관리하는 실무 책임자가됐다. 그전까지 총무처 의사과에서 관장하던 국새를 부처가 통폐합되면서 행자부 의정국 의정 담당관실로 넘어왔다.
이씨는 "문서 정중앙에 찍어야 하기에 쉽지 않았다. 어느정도 마음에 들도록 찍기까지 한달이 걸렸다. 어느 장관은 '국새를 찍을 때는 늘 신사복을 입고 흰장갑을 끼고 목욕재계를 하고 찍어야 한다'며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찍기전에 항상 마음가짐과 정신을 가다듬고 찍는다"고 말했다.
이씨는 "국새관리를 맡은 초기에는 국새실을 분명히 잠그고 왔는데 집에 오면 정말 잠갔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나와 확인하곤 했다" 고 말했다. 이씨는 "나름대로 엄청나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고 전했다. 각 부처에서 임명장이나 명예퇴직자에 대한 포상 등을 올리면 시간은 촉박한데 함부로 찍을 수는 없으니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
그는 "나는 수만장을 찍지만 당사자는 한 장을 받기에 정성을 들여서 찍어야 한다"고했다. 의정과에서 최근 몇 년간 통계를 내본 결과 국새는 일년에 평균 1만 6천회 인주를 묻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무게가 2.8㎏이기에 수백, 수천장을 찍는 것은 보통힘이 드는 게 아니라고 한다.
이씨는 "나라의 상징인 국새를 관리하고 있다는 보람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99년 2월 1일 발표된 대통령령 6조에는 "국새사용규정'이 나와있다.
①헌법개정공포문 전문
②5급 이상 국가 공무원의 임명장
③상훈법 5조, 19조 및 동법 시행령 17조의 규정에 의한 훈장증과 포장증
④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등 외교통상부 장관이 요청하는 외교문서
⑤기타 행정자치부 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문서 등이다.
또 국새를 찍는 위치에 대해서도 명문화 했다. "문서 본문 첫째 면의 중앙에 날인한다."는 것
이씨가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훈·포장증을 잃어 버렸다며 하소연 해올 경우다. 1970년 6월 13일자로 만들어진 상훈법 시행령 31조 3항은 "훈장증의 재교부는 이를 하지 아니한다" 고 규정돼 있다. 당사자로서는 중요한 문서이기에 반드시 재발급을 받고자 하지만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이씨는 "찍는 위치 등도 기술이 있어야기에 앞으로는 국새를 찍는 것도 전문화된 사람이 찍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국새규정 연혁
대통령령 제 83호 (1949. 5. 5)
第 1 條 政府에 國璽를 備置한다
第 2 條 國璽는 「大韓民國之璽」라 새기되 그 印形은 正方形으로 하 고 그 칫수는 方二寸으로 한다
第 3 條 國璽의 字體는 篆書體로 한다
第 4 條 國璽의 印影은 總務處官印臺帳에 登錄한다.
第 5 條 國璽는 總務處에서 管掌한다
각령 제643호 1962. 4. 10(1963. 1. 1시행)
第 1 條 (國璽備置) 政府에 國璽를 備置한다
第 2 條 (字體) 國璽는 「대한민국」의 四字를 한글 篆書體로서 가로 새긴다
第 3 條 (規格) 國璽는 七센치미터의 正方形으로 한다
第 4 條 (印影登錄) 국새의 인영은 內務事務處의 官印臺帳에 登錄한다
第 5 條 (管守) 國璽는 內務事務處에서 管守한다
대통령령 제4320호 1969. 11. 26
제 1 조 (국새비치) 정부에 국새를 비치한다
제 2 조 (글씨체) 국새는 「대한민국」의 4자를 한글전서체로써 가로 새긴다
제 3 조 (규격) 국새는 7센티미터의 정방형으로 한다
제 4 조 (인영등록) 국새의 인영은 총무처의 관인대장에 등록한다
제 5 조 (관수) 국새는 총무처에서 관수한다
대통령령 제4773호 1970. 3. 23
제 1 조 (국새) 정부에 국새를 비치한다
제 2 조 (자체) 국새는 「대한민국」의 4자를 한글로 하되, 전서체로 하여 가로로 새긴다
제 3 조 (규격) 국새는 7센치미터의 정방형으로 한다
제 4 조 (인영등록) 국새의 인영은 총무처의 관인대장에 등록한다
제 5 조 (관수) 국새는 총무처에서 관수한다
제 6 조 (찍는 위치) 국새는 문서발행 년월일의 "년"자가 가운데 오도 록 찍는다
대통령령 제16096호(1999. 2. 1)
제1조(목적) 이 영은 대한민국의 국새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적용범위) 국새의 관리에 관하여는 다른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영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제3조(정의) 이 영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인면"이라 함은 국새 중 글자가 새겨져 있는 부분을 말한다.
2. "인문"이라 함은 국새의 인면에 새겨진 글자를 말한다.
3. "인영"이라 함은 국새를 종이 등에 찍었을 때 생기는 상을 말한다.
제4조(규격 및 재질)
①국새의 인면은 10.1 센티미터의 정방형으로 한다.
②재질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금으로 하되, 경도를 감안하여 은과 구리의 합금으로 한다.제5조(국새의 인문)
①국새의 인문은 "대한민국"의 네 글자를 한글로 하되, 가로로 새긴다.
②글자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체로 한다.
제6조(국새의 사용)
①국새는 다음 각호의 경우에 날인한다.
1. 헌법 개정 공포문의 전문
2. 5급이상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3. 상훈법 제5조·제19조 및 동법시행령 제17조의 규정에 의한 훈장증과 포장증
4. 대통령 명의의 비준서 등 외교통상부장관이 날인을 요청하는 외교문서
5. 기타 행정자치부장관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문서
②국새는 문서 본문 첫째 면의 중앙에 날인한다.
제7조(등록) 국새를 새로 제작한 때에는 그 인영을 대장에 등록하고 관보에 게재 한다.
제8조(국새의 관리)
①국새는 행정자치부장관이 관리한다.
②행정자치부장관은 국새의 제작경위·제원·제작자 등 관련 기록을 보존하여야 한다.
부 칙
이 영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국새, 어보제도 개관
낙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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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낙랑시대(서기전 108∼서기314)의 인(印)이 출토되고 있으나, 이는 한대(漢代)의 인재(印材)가 그대로 전래된 것으로 독자적인 우리민족 고유의 인장이라고는 볼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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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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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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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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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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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봉황사상
정치적으로는, 하늘의 이상을 실현하는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는 제왕들의 사랑을 받았다. 단성식(段成式)의 수필집인 중국 고전(古典)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봉황을 타고 태극(太極)에 도달하면 선업(仙業)이 완성된다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민간에서는 남·여의 상징, 부부애의 표상으로 가정화목을 기원하는 상징적 대상으로 봉황이 사용되었고, 아름다운 피리소리는 봉음(鳳音), 아름다운 누각은 봉루(鳳樓), 좋은 벗은 봉려(鳳侶)라고 표현하는 등 봉황은 완성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봉황은 상상속의 신조(神鳥)로 실존하지는 않으나, 동양인의 마음과 정신생활을 수천년간 지배해왔기 때문에,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봉황은 엄연한 실존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봉황은 조물주의 단독 창조물이 아니고, 자연현상과 인간의 마음이 융합됨으로써 태어난, 환상적인 또 하나의 창조물로서, 특수한 종 교의 독점물도 아니고, 민속적·학문적으로 다같이 받아들인 영물이다. 봉황에는 가정의 화목이 나라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적인 동양 철학의 논리가 담겨져 있으며, 이러한 봉황 사상은 현대에까지 계승되어 면면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부에서는 국가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반영하여 대통령 휘장에 봉황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새로 제작한 국새의 손잡이 형태에도 21세기 세계 중심국가로의 도약과 비상(飛上)의 의미를 담아 봉황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봉황은 머리는 덕(德)을 , 날개는 의(義)를, 등은 예(禮)를, 가슴은 인(仁)을, 배는 신(信)을 상징하고 있다.
대한제국의 주요보인 사용처 (자료출처 : 寶印符信總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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