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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2000). 『학문과 교육(하):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2장 기초개념의 재건
2.1. 품위로서의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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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기초개념의 재건
인식론은 인식에 관한 지식이다. 지식은 그 대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따라서 아무리 저급의 인식론이라도 그것이 하나의 이론인 이상 대충이나마 지식의 성질, 지식의 형성 문제, 그리고 지식의 타당성 규정에 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것들이 서로 연관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우리가 검토한 바 있는 제반 인식론들, 예컨대 합리론, 경험론, 칸트의 인식론, 현상학, 분석철학들도 인식론적 요소들에 대한 모종의 관점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론 내부에는 요소들 간의 정합성이 유지되고 있다. 어떤 인식론적 논의든 간에 그것은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이론적 맥락 내에서 의미를 갖는다.
다른 분야의 경우처럼 인식론도 불완전한 것이고 발전의 여지가 항상 있는 분야이다. 만약 그것이 완전한 것이라면 인식론은 더 이상 필요없는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불완전성이 반드시 미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인식론은 그 나름의 완성된 체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식론의 개선 혹은 발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의 완성된 체계가 무너지고 그 위에 새로운 체계가 형성되는 총체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예컨대, 칸트(I. Kant)의 인식론을 말할 때 흔히 그것이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종합은 물리적인 합산을 의미하지 않는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체계 내부에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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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전혀 새로운 인식론의 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칸트가 종합한 것 속에서는 경험론이나 합리론의 어떤 요소도 그 원래의 형태로 보존된 것이 없다. 어쩌면 그 두 인식론이 전혀 다른 양태의 것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제반 인식론 간에는 부분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총체적인 단절이 있다. 서로 다른 인식론들 간에는 지식의 정의, 형성과정, 그리고 평가기준의 면에서 어떠한 공통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그 중 어떤 것이 다른 것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 오류를 지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들 간에는 위계와 발전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후행된 이론은 선행하는 이론이 제기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개념체계를 모색하고 구축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인식론의 역사가 보여준 발전의 양상이다.
나는 이제 교육적 인식론을 제안할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어떤 인식론을 단지 부분적으로 보완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개정하기 위한 작업이다. 우리가 앞의 논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았듯이 전통적인 인식론적 개념들은 그 자체의 역사적 발전과정에 말썽이 많다. 그런 개념들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인식론을 건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육적 인식론으로 인식론을 수준을 높인다는 것은 그 전반의 틀 자체를 바꾸어 나가려는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제반 문제들, 즉 지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그리고 지식의 타당성과 발전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 판단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관념과 해명의 전반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우리는 앞(1.4)에서 많은 학자들의 이론을 개별적으로 소개하면서 ‘교육적 인식론의 전조’를 다루었다. 그러나 그 전조와 교육적 인식론 자체는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전자는 후자를 유도해 내는 안내자의 역할을 할 뿐 그것들 전체를 모아놓고 그것이 교육적 인식론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 간에도 간과할 수 없는 이견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차이와 다양성 가운에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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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을 취사선택하고, 또 그들이 빠트리거나 단순하게 취급한 부분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충하여 하나의 통일된 인식론적 체계를 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할 것이다. 이것은 그 개별적인 것들을 넘어서서 하나의 다른 인식론적 차원에 진입하려는 시도이다. 이 종합의 양태는 내가 <학문과 교육[중](장상호, 2000)>에서 재개념화한 교육본위론과 내적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이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하여 전통적 인식론에서 제기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 자체가 자율적인 교육학의 출범과 더불어 얻어낸 부수적인 성과의 하나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2.1. 품위로서의 지식
2.1.1. 체험의 특수한 구조
교육적 인식론이 전통적 인식론이 봉착한 문제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먼저 지식과 관련된 문제부터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주로 보편적이고, 비역사적인 지식의 형태나 결과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들은 지식을 그 주창자로부터 따로 떼내어 박제로 만들고 그것의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인간을 지성 · 정서 · 신체 · 의지 등으로 분리시키고 지식은 지성의 측면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해왔다. 서양철학에서의 합리성은 욕구나 정서가 완전히 배재된 순수한 형태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이성은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을 얻을 수 있는 기관이라는 영예를 누려 온 반면에, 충동이나 욕망은 온갖 불완전과 오류의 원천으로 배척받았다.
교육적 인식론은 지식의 규정방식에서 은폐되거나 간과된 측면을 살려내고, 새로운 토대 위에 인식의 문제를 재정립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까지 인식론에서 다루어 왔던 지식의 개념은 지식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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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형성이라는 교육의 입장에서 볼 때 거의 의미가 없는 가공적인 수준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가공적이라는 말은 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지식의 세부적인 특성이 인식론자 자신들의 학문적 관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배제됨으로써 그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교육의 경우 살아 있는 개체가 자신의 지식을 획득하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에서 배제되어 버린 좀더 미세한 부분을 드러내고 살려내야만 그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
지식과 관련하여 우리가 먼저 청산하여야 할 관점은 지식이 실재에 대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문제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를 다루는 곳(1.3.1.)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우리는 흔히 우리와 독립된 대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보편적인 정신으로서의 지식을 분리시킨다. 그러나 지식은 객관적인 사실과 우리들 자신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구성되어 나아가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바로 그 점을 간과함으로써 스스로 인식론적인 문제를 일으킨 점이 없지 않다. 이 점은 교화적 과정에 의해서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학자들 가운데 하이데거, 듀이, 그리고 폴라니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었다. 그 가운데 듀이(J. Dewey, 1948)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아직도 지식에 대한 그림을 생산해 내는 화가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만들어 놓은 그림을 바라보는 방관자의 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로부터 전문적인 철학자들에게 익숙한 모든 인식론적 문제들이 야기되고, 그것이 특히 현대철학을 일상적인 사람들의 이해범위에서 멀어지게 했으며, 또 과학의 성과와 과정에서 그들을 격리해 놓는 결과를 가져 왔다. 왜냐하면 이들 문제들은 모두 한쪽에서 바라보는 정신이 있고, 또 다른 한쪽에 바라보고 주목해야 할 먼 이역의 대상이 있다는 가정에서 발생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문제들은 정신과 세계, 주관과 객체, 그렇게 격리되고 독립된 항이 어떻게 참된 지식이 가능하도록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에 의문을 제기한다. 만약 인식을 언제나 능동적이고 조작적인 것으로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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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가설의 인도를 받는 실험이나 어떤 가능성에 대한 상상의 인도를 받는 발명에 비유해서 생각한다면, 철학은 혼미에 빠져 있는 모든 인식론적 난제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다(pp. 122-123).
전통적 인식론의 문제는 이미 거기에 실재하고 있는 대상을 포착한다는 관점에서 앎에 접근하는 데서 비롯된다. 실상 지식은 그처럼 외재하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주관적인 반영이나 그림이 결코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식으로 타당성을 검증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객관적 실재를 직접 이해할 수 없고, 다만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형성된 우리 자신의 체험적 조직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마치 거미가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그의 먹이를 포착하는 거미줄을 구성하는 방식에 비유될 수 있다. 먹이로서 곤충과 그것을 잡아내는 거미줄에는 어떤 일대일의 대응관계도 없다. 사실인즉 거기에는 긴 세월에 걸친 거미와 곤충의 교섭관계가 있었고, 그 상호작용의 한 형태로서 거미줄이 있다. 거미의 입장에서 곤충은 결국 거미줄의 구조에 의해서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실재의 진정한 반영이라기보다는 진리탐구자로서의 우리 자신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 세계를 인지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는 바로 우리의 인지적 체험 안에 있는 요소들과 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구조의 차원에서 세계와 지식을 이해하는 방식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953)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 슈츠(Schutz, 1973)의 ‘다수의 실재들(multiple realities)’, 카스타네다(Castaneda, 1968)의 ‘대안적 실재들(alternate realities)’, 피아제(Piaget, /1980)의 ‘도식(schemes)’, 오우크쇼트(Oakeshott, 1933)의 ‘경험의 양상(mode of experience)’, 듀이(Dewey, 1916)의 ‘경험의 재구성(restructuring of experience)’, 바슐라르(Bachelard, 1934)의 ‘문제틀(problematics)’, 쇤(Schon, 1983)의 ‘행위 속의 이론(theories-in-action)’, 쿤(kuhn,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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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패러다임(paradigm)’, 고프만(Goffman, 1974)의 ‘프레임(frame)’, 메지로(Mezirow, 1991)의 ‘의미조망(meaning perspective)’ 이라는 개념들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실재와의 대응보다는 그것들과 부단하게 접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체험적 조직형태로 관심을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
앞서의 개념들은 모두 복수의 세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 우리가 접하는 세계가 오직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여럿인 것은 우리 내부에 서로 다른 세계를 인식하는 특별한 체험조직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범주착오와 논점이탈의 오류로 치닫는다. 이 주제는 지식의 상대성을 논하는 곳에서 횡적 상대성의 개념으로 다루어야 할 성질의 것으로 설명된 바 있다. 이질적인 세계 간에는 경계가 있으며, 그 경계를 전환하는 데에는 비약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학문적 지식 역시 그 세계 내에서 생산하는 지식으로서 여타 분야의 지식과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지식의 형태 가운데 학문적 지식은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우선 대상세계의 실재를 이론적으로 만들어 내는 특정한 정신적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사회과학은 사회를 대상으로, 예술학은 예술을 대상으로 특수한 지식을 생산해 왔다. 이것은 우선 그 대상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하는 것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그것과 일대일의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론을 만들어 넓은 세계에 던져놓고 그것에 의해서 포착되는 것을 보고 그 대상세계를 사념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포착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물눈을 보다 정교하고 촘촘하게 수정하고 발전시켜 나갈 과제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발전의 척도를 가늠하는 모종의 규칙을 알고 있어야 한다.
영토에 대한 지도를 소유하는 것과 영토 자체를 소유하는 것이 천양지차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대상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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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구분된다. 자연과학적 체험과 자연적 상태는 다르다. 자연과학적 이론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발명된 관념체계이다. 우리는 무거운 물체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무거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1g을 들어 올리는 것’과 ‘1000kg을 들어올리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똑같은 정도의 인지적 부하량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실제로 각각의 무게를 들어올리는 경험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따라서 인력법칙의 공식과 이 법칙이 현실에 적용될 수 있다는 개연성에 대한 진술은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법칙 자체는 인력작용을 하는 물체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주는 바가 전혀 없고, 단지 ‘인력작용을 하는 물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인식의 규칙을 제공해 줄 뿐이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사회학적 지식과 사회적 적응능력, 예술학적 지식과 예술 창조 능력을 구분할 수 있다.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에 잘 적응한다는 것과 그것을 인지체계로 이해하는 일은 동일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또한 피아니스트가 훌륭하게 연주하는 것과 예술비평가나 예술학자가 그것에 대해서 학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그리고 역사를 체험하는 것과 역사학적 체험을 하는 것 역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식활동이 학문적 실천이고 모든 인식내용이 학문적 지식인 것도 아니다. 학문은 일상적 체험과 전혀 다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상식과 학문적 지식을 대비할 수 있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인식구조와 사회과학자로서의 인식구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일상적인 경험만으로는 물이 산소와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학문적인 체험은 사회의 정상적인 사람이 생각하고 발견한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사물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학문적 지식은 상식에 의존하는 일반인에게는 거의 환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뉴턴의 중력이론을 보자. 어떻게 하나의 물체가 엄청난 거리가 있는 공간에서 다른 물체를 끌어당길 수 있단 말인가? 상식인의 입장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보다 더 황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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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빛이 어떻게 공간 속에서 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자연현상의 보다 근본적인 법칙을 더 많이 발견할수록, 그 법칙들은 점점 우리의 일상적 인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공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괴이하고 환상적인 생각이 결국 상식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상식이 더 허구적인 환상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일상적 경험의 영역에서 학문적 체험으로의 전환은 체험의 영역에 있어서 비약적인 태도전환을 요구한다. [각주1: 그 비약적 체험의 전환은 현상학적 방법에서 자연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의 차이로 나타났다.]
학문적 지식은 상식과 즉각적인 감각내용을 초월한다. 대상세계는 구체적 실재성에 있어서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학문은 그들로부터 추상적인 관념을 형성하여 그 대상의 일반적인 측면만을 보존한다. 이 점에서 학문적 지식은 듀이가 말하는 이차적 경험에 해당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경험은 일차적 경험에서 이차적 경험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일차적 경험은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적으로 대하는 조야하고 거친 경험을 말한다. 태양, 대지, 식물, 동물 등과 같은 대상은 일차적 경험의 소산이다. 이차적 경험은 거대한 덩어리째 그대로의 일차적 경험의 내용이 한 차례의 반성과정을 통해 좀더 고차원의 내용으로 승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은 마치 거미줄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관련된 대상들의 전체 체계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에 의해서 그 의미가 확보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특징과 관련하여 통상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 생각은 학문적인 사실들을 지구, 나폴레옹,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과 같은 개별적인 사건들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이다. 지구는 천문학적 사실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며, 나폴레옹은 역사상의 한 인물에 불과하며, <햄릿>은 문학작품의 하나에 불과하다. 학문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 구체적이고 시 · 공간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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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천문적 사실, 역사적 사실, 그리고 문학작품이라는 보편적인 사실로 정치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입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광경이라면 그 이전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목격하였지만, 그들은 그것이 지구의 인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적어도 뉴턴 이전까지는 중력이라는 사실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중력이란 지식은 바로 사과가 떨어지는 특수한 사건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것을 설명하는 우리 내부의 체계인 것이다. 그 체계로서 이해되는 것은 이제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물리적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한편으로 많은 사람들이 암석을 바라보았지만 그것으로부터 지구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고고학자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학문적 지식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사물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물이 ‘무엇으로’ 이해되느냐 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법칙에 이르는 일반화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표면적인 복잡성을 서술하는 데서 그것을 더욱 단순하게 근원적으로 설명하는 인지체계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시 · 공간에 있는 제반 사건들은 보다 단순한 사실의 특수한 사례로 환원된다. 여기에는 14세기에 오컴(W. Ockahm)이 제안했던 원리, 즉 “보다 적은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보다 많은 것으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헛된 것이다”라는 원리가 적용된다. 이처럼 학자들의 과제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일회적인 특수성과 복잡성을 더욱 근원적인 사실의 일부로 설명하는 인지체계를 창출해 내는 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개별적인 것에서 “사람은 죽는다”라는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의 이행과정은 오래 전부터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런 일반화에는 또한 더 일반적인 이해의 구조가 전제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이다. 이제 우리는 “사람은 죽는다”라는 일반명제의 집합만을 가지고 학문적 지식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개념, 문장, 문단이 그것과 대응하는 실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는 그 의미가 독자적인 근거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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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우리가 그 신화를 거부한 이상 개념 혹은 관념의 의미를 대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관념들은 서로 독립해서 고립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의 개별적인 의미는 그것을 포함하는 좀더 포괄적인 인식체계와의 관련 속에서만 확정될 수 있다. 이런 관점의 변화는 정초주의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었음을 우리는 인식론적 전체주의(1.2.4.)와 관련하여 살펴본 바 있다.
우리가 어떤 사실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때는 그것이 체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학문적 지식은 그 사실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인지체계이다. 어떤 인식의 대상, ‘X’가 밝혀진다는 것은 그 내부의 구조가 밝혀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은 어떤 대상 혹은 주제에 대한 총체적인 관념 혹은 체험구조를 지칭한다. 모든 주제는 그것에 포함된 요소와 그들의 관계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런 총체성과 체계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대상의 본질은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아직 밝혀진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학문적 지식은 그 구성요소와 그것에 의미를 주는 관계양상을 포함하는 일종의 세계관인 것이다.
어떤 주제 혹은 대상세계와 관련하여 하나의 통일성 있는 관점을 이룬 것이 바로 학문적 지식이라고 할 때, 그 지식은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의 요소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이다. 우리들의 지식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의 총체 이상의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는 원자적인 구성요소로부터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형태지각이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신체는 구성요소의 단순한 산술적 합이 아니다. 어떤 화가가 다양한 모델로부터 멋대로 손, 발, 얼굴, 몸통 등의 부위를 따로 그려 놓고 아무렇게나 연결시켰다면 그 결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의 지각은 분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단순한 감각들의 집합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지각할 때는 그것의 전체의 형태를 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단순한 정보나 그것의 세부항목들만을 가지고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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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대상에 대한 이해는 정보의 단순한 합계 이상으로 새로운 유형과 구조를 발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지식은 내부적으로 조직화된 하나의 전체구조이기 때문에 그 안의 어떤 의미 있는 개념도 서로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다. 각각의 개념은 개념들의 전체 체계에 의해서만 서로 의미 있는 것으로 지탱된다. 중요한 개념의 의미를 알려면 그 개념이 포함된 명제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 명제의 의미를 알려면 그것이 소속된 관념체계 전체를 알아야 한다. 전체의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의 개념은 여타의 다양한 개념과 관련되면서 서로가 의미를 확정짓는다. 예컨대, 다윈(C. Darwin)이 진화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쓴 ‘種(species)’의 개념은 다양성, 속(genus), 선택, 생존, 적응, 최적상태, 생물체, 잡종 등과 관련하여 그 의미가 규정된다. 또한 애덤 스미스(A. Smith)가 경제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도입한 ‘富(wealth)’의 개념은 노동, 자본, 토지, 임금, 이윤, 지대, 공동체, 가격, 교환, 생산성과 비생산성, 화폐 따위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생성된다. 이런 전체적인 맥락이 확정되지 않는 한 그 개념의 의미는 아직 모호하다. 고립되고 단편적인 이야기를 집성하여 역사학을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이 하나의 체계 속에 묶였을 때 그 의미가 확보된다. 유대,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희랍 및 로마에서 발생한 사건을 하나의 연대기 속에 모두 통합하는 일은 초인적인 박식함을 필요로 한다. 마찬가지로 각종의 신문기사가 현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주어진 자료로서 그것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역사가들이 보통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그 해답을 얻어내는 엄청난 사고와 통찰의 여과를 거쳐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학문의 세계 내에서도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분과학문적 지식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각각의 분과학문은 그 영역에 할당되는 한정된 대상세계를 포착하기에 알맞은 독자적인 이론, 개념도식, 범주틀과 해석의 원리로 조직되어 있다. 예컨대, 물리학적 지식과 생물학적 지식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단순한 합으로 구분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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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다른 대상을 포착하는 인지의 망이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세계를 향한 감각의 기술만은 아니다. 분과학문은 세계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법이며 개념적 조직이다. 여기서 조직은 우선 하나하나의 개별적 인지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각각의 요소는 다른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학문적 지식의 최소단위인 하나의 개념 속에는 그것을 요소로 하는 전체 이론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포함하는 전체 이론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은 핸슨(N. Hanson, 1961/1995)이 열거하는 다음과 같은 실례는 인지적 망으로서의 분과학문적 지식의 의미를 참으로 실감나게 한다.
이것은 물리학에서의 ‘압력’. ‘온도’, ‘부피’, ‘도체’, ‘부도체’, ‘전하’, ‘방전’, ‘파장’, ‘진폭’, ‘진동수’, ‘탄성’, ‘팽창’, ‘강도’, ‘응집변형(strain)’ ; 생물학에서의 ‘섭취’, ‘소화’, ‘동화’, ‘배설’, ‘호흡’ ; 의학에서의 ‘부상’, ‘독약’, ‘한계치’ ; 시계학에서의 ‘기어열(gear-train)’, ‘탈진장치’, ‘추’, ‘평형기’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개념들 중의 하나를 철저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속하는 학문의 개념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다(p.104).
이처럼 지식은 특정한 사실들을 만들어 내는 개념들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한 인식대상에 대한 지식은 그것에 대한 조직화된 인식체험이다. 분과학문적 지식은 그들 나름의 특수한 조직적 특성을 갖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두어야 할 것은 그 소속을 알 수 없는 개념이나 단편적인 일반명제는 일단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지식의 영역에서 제외된다는 점이다. 단편적인 정보를 기억했다가 그것을 특수하게 재생해내는 컴퓨터의 능력 및 백과사전적 박학은 지식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보의 폭발적인 증대는 곧바로 지식의 증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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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하지 않는다.
학문의 진보를 특수한 사실들에 대한 정보의 누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해석되지 않은 구체적 정보들을 아무리 수집하고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학문적 지식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질서와 체계를 함축하며, 그 질서가 배제된 혹은 그 질서와 연관되지 않은 단순한 정보내용은 더 이상 지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의 정보내용을 그것이 속한 전체 문맥에서 떼어냈을 경우 그 의미는 확정될 수 없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지식은 인식대상의 관련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내포하는 사고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그 요소 상호 간의 관련성이 포함되지 않은 단편적인 정보내용은 그 대상을 구체적으로 인식한 것이 못 된다. 품위로서의 학문적인 지식은 그 자체가 단순한 정보의 집적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을 기술하는 단편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런 것들의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총체적인 인지구조를 의미한다. 지식을 형성한다는 것은 그런 정보들 속을 관통하는 실재를 포착하는 대담한 관념들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새로운 지식을 획득한다는 말은 새롭게 전반적인 인지구조의 변화를 경험한다는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지식이라는 말을 정보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2.1.2. 지식의 발전과 위계
앞의 논의는 품위의 횡적 상대성에서 학문적 지식이 차지하는 특징, 더 나아가서 분과학문적 지식의 독립성을 검토하는 데 할애되었다. 이제 학문적 지식의 다른 하나의 속성인 종적 상대성에 관해서 살필 차례가 되었다. 학문적인 지식의 한 가지 특징은 자체의 지식을 최종적인 것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문적인 탐구는 절대적인 시작도 끝도 없는 자기교정의 과정이다. 그런 목적을 가진 세계가 자기지식에 대하여 더 이상의 비판적 검토를 거부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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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학문적 지식은 그 내부에 어느 정도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며, 지속적인 침투에 개방적이며, 자체의 수정을 요구한다. 학문적 지식은 역사를 통해서 정지되어 본 적이 없다. 변혁의 정신에 따라 끝없이 개선의 과정을 거쳐 온 역사가 학문계의 자랑이다.
과학의 목적은 영구히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최종의 완성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단순히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다. 과학의 정신은 끊임없는 진보, 연속적인 변화였다. 그의 정의로부터 과학적 지식은 축적되고 개선된다. 그것은 항상 확정되고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과학이 승리해도 안정되고 풍요롭고 평화스러운 시대를 축하하는 일은 없다. 과학이 축하하는 것은 위대한 발견, 무지의 정복,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혁명적인 새로운 시대의 도래이다(Ziman, /1994, p.165).
학문적 지식은 이런 자기교정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타의 인식체계, 이를테면 상식, 이데올로기, 교조와 구분된다(장상호, 1997a). 역사상으로 볼 때 지금의 비학문적 지식이 과거의 학문적인 지식보다 절대적 수준만으로 볼 때는 좀더 타당할 수도 있다. 그것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은 어느 세계에 소속하느냐하는 것이다. 상식은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 이데올로기는 특정 집단의 이해에 공헌하는 기능, 교조는 종교적 기능을 하며 진리추구 자체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학문적인 지식과 구분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습득하는 방법에 있어서 서로 다른 면모를 갖는다. 비학문적 지식들에서는 그것을 습득하는 방법은 이차적인 관심이다. 그러나 학문의 경우는 지식 그 자체의 추구를 목적으로 삼는 내재성을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그 고유한 성격을 유지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진리를 계속 추구할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비학문적 지식과 구별될 수 있다.
위의 인용에서 ‘최종의 완성상태’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가 구조를 말할 때 지식은 어떻든 완성된 것이라는 조건을 요구한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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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이며, 최종의 것일 수는 없다. 지식이 이미 탐구가 끝난 것, 확립된 것, 그리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면 그 학문은 이미 종료된 학문이고 더 나아가 죽은 학문이다. [각주2: 이 점에서 그 내용의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정답’으로 규정하는 교과서적인 지식은 이미 죽은 학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불완전한 것이 학문활동에 활력을 부여한다. 학문적 지식은 이전의 지식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고 이 세계나 우주의 어떤 측면을 좀더 적합한 방법으로 설명하기 위해 인간이 자유롭게 창조해 낸 사변적이고 가설적인 추측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은 우리의 탐구의 결과로서 항상 얼마만큼의 오류, 미진한 부분,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고 개선의 여지가 있다. 의미는 객관적이고 영원한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관계성 속에서 발생하는 그 무엇이다. 그릇된 관계성은 왜곡되고 불완전한 의미를 생산할 것이다. 실재에 대한 현재의 이해는 항상 불완전하고,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신비주의적이다. 광대하고 신비로운 세계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는 범위 내에서 그것을 규정해 나간다. 여기에 개선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탐구하는 활동을 별도로 하게 된다. 이런 미진한 점이 없다면 학문에서 탐구의 의미는 소멸된다.
학문적인 지식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현재와 미래로 연결되는 개방된 쇄신의 길이 열려있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선천적으로 주어진, 따라서 수정의 여지가 없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학문계에서는 한순간도 지식이 완벽하게 균형잡혀 있었던 적이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런 의미의 지식을 발견했다고 선언한 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는 자신의 생애 내에서 그 생각이 환상이었음을 자각하거나 혹은 타인들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수정되는 날을 맞이해야만 하였다. 그러한 수정은 차후의 지식을 만드는 디딤돌의 역할을 하면서 그 효력을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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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지금의 지식은 최선의 것이지 마지막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더 나은 미래의 지식을 예견한다. 학문계에서는 어떤 개념이라도 그것이 발전한 발생적 배경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재생적 추적이 없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개념은 항상 얼마만큼의 애매성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장차 어떤 의미로 발전될지는 지금으로서 당장 예측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어떤 개념이건 탐구의 방향만이 예시될 뿐 그것의 충분한 의미는 미래 속에 감추어져 있다. 이처럼 학문적 지식은 그 자체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지만, 또한 그것은 정지된 상태에 변함없이 머무르기보다는 더 나은 지식으로 향하는 도정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지식을 향해 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경험주의자들은 그것을 단순한 반응이나 지적 단편들이 점차 추가되고 누적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식의 발전을 단지 음식을 한 계단씩 차곡차곡 쌓아가는 찬합의 경우처럼 하나의 탄탄한 지식 위에 또 하나의 탄탄한 지식이 쌓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지식은 그처럼 평탄하게 발전하지 않는다. 지식을 개선한다는 것은 한두 가지의 타당한 정보를 추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구조이고, 그 구조 내의 요소는 여타의 요소와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의 개선은 바로 구조 전체를 개선하는 일과 같다. 일찍이 오우크쇼트(M. Oakeshott, 1933)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할 때 그는 이 점을 우리에게 예고하려 했던 것이다.
그 체계를 하나의 전체로 수정하는 것은 각각의 요소가 새로운 특성을 갖도록 원인을 부여하는 일과 같다. 그 구성요소의 어떤 것을 수정하는 것은 그 체계를 하나의 전체로 수정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경험 내에서 주어진 관념의 세계는 좀더 세계다움의 성질을 갖는 관념의 세계로 변형된다(p.30).
구조의 한 요소에서의 변화는 불가피하게 다른 요소의 변화를 동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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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떤 과학적 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들어 있는 이론적 맥락에 의존한다. 따라서 전자의 의미는 후자가 변형되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지식을 구조로 보는 피아제(J. Piaget, /1971b)는 이 때문에 지식의 성장을 좀 더 나은 ‘균형화(equilibriation)’의 과정으로 규정한다.
내가 균형화에 대해서 마할 때 그것은 인지적 기능이 얻어낼 수 있는 하나의 명확한 상태라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획득된 균형화는 제한되어 있으며, 또한 제약되어 있으며, 좀더 나은 균형을 향해서 그 자체를 초월하려는 하나의 경향이 있다. … 그래서, 간단히 말하자면, 좀더 나은 균형화를 향한 부단한 탐구가 있다(p.18).
우리가 지식이 구조라는 것을 시인하면 자연스럽게 지식의 발전이 바로 구조의 변형임을 이해하게 된다. 지식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개념, 명제, 법칙들의 진리성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 맥락적 의미는 그것이 소속한 전체 이론체계가 나타나기 전에는 아직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발전은 이전의 구조와 전적으로 다른 관념의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신념체계가 와해되고 다른 하나의 신념체계가 구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볼 때 쿤의 지적처럼 불가공약적 비연속적인 단계가 개입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각 단계는 피아제의 지적처럼 발생적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 두 가지 특징이 품위로서 학문적 지식이 갖는 오묘한 특징이다. 그러나 교육소재로서 그것의 가치는 전자보다는 후자에서 오히려 비롯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과학에서 뒤따르는 이론들은 항상 앞선 단계를 토대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과학공동체는 발전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전의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것의 인식적 가치만을 인정하는 관례를 유지해 왔다. 말하자면 과학적 지식의 지위는 최후의 것만을 승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이전에 신봉하던 이론을 배척하고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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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만을 지식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볼 때 과학적 지식은 항상 특정한 시대의 현재와 미래에 국한되어 정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학사가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지금의 시점에서 옳다고 판단되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과학사에 등재된 지식은 과학적 지식으로 규정할 필요성이 생긴다. 쿤(T. Kuhn, 1970)이 “시대에 뒤진 이론들이 폐기되어 버렸다는 이유로 인해서 원칙적으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p.3)”라는 발언을 한 이면에는 바로 이런 심대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미 오류로 판명난 지식을 과학적 지식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상당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지식의 상대적 위계를 이미 예비적으로 논의한 바 있다. 정초주의자들이 싫어하는 상대주의는 진리의 영원성을 거부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불변의 진리개념은 헤겔(G. Hegel)의 변증법에서는 사라져 버린다. 변증법적인 이념에 따르면 유한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과도적인 것이며, 그 중에는 진리도 포함된다. 절대정신으로 향하는 경험은 무한히 계속되며, 매 단계마다 하나의 전체에서 다른 전체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한 단계의 것이 긍정되는가 하면 그것이 부정되고,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진행된다. 이 말은 오류도 그것이 부정되기 이전에는 진리로 간주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하나의 부정에서 다른 긍정에 이르는 단계마다 유한자인 우리는 그 단계에 알맞은 진리체험을 하게 된다. 더욱 정확하게는 절대적 진리에로 접근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각 단계의 상대적인 가치에 대한 이러한 인정은 키에르케고르(S. Kierkeggaard)의 실존적 변증법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학문적인 지식은 누구도 고칠 수 없는 절대전리의 체계라기보다는 누구든지 비판을 통해서 넘어설 수 있는 잠정적인 후보진리의 체계에 불과하다. 이 점은 다행히도 해석학의 전통에 비교적 잘 반영되어 있다. 그들에 있어서 모든 지식은 자연과학적인 것이건 인문과학적인 것이건 각각의 전통에서 얻어낸 ‘선입견’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항상 역사적 제약을 받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특징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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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절대적인 것이나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말은 지식의 가치가 절대성에 있지 않고 발전을 보장하는 상대성에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제 불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를 고수하려는 입장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낡은 것이다. 듀이는 <확실성의 탐구(1929b)>의 말미에서 이렇게 말한다.
고정된 실재, 가치, 이념의 옹호권을 버린 철학은 새로운 독자적 길을 걸을 것이다. …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실재와 가치의 추구를 단념한다는 것은 하나의 희생처럼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념은 일층 위대한 생명력을 가지는 소명에 발을 들여놓는 조건이다(p.311).
그의 주장대로 확실성은 도달하기보다는 추구하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우리는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가공적인 환상에 젖어 있기보다는 더 현실적으로, 또 학문의 발전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지식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금세기의 지식이 다음 세기에는 미신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은 과학사가 말해주는 확실한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과학철학의 경우에도 쿤의 경우처럼 각 단계가 갖는 지식의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이제 학문적 지식은 전적으로 틀리거나 전적으로 맞다는 식으로 평가될 수 없다. 어떤 지식이거나 그 안에는 얼마만큼의 틀린 것과 얼마만큼의 맞는 것이 있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틀린 것을 줄이고 맞는 것을 늘리는 방식으로 지식을 재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지난동안의 학문의 행진은 재고될 필요가 있는 잘못된 논의들과 오개념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각각은 이전의 것에 비해서 얼마만큼의 진리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전의 지식은 설사 그것이 이후에 오류로 판명되었다고 하더라도 종종 새로운 지식을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말은 학문적 지식을 소재로 하는 교육에 있어서 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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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시사점을 내포한다.
과학적 지식은 언제나 최종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개척해야 할 신천지의 길을 안내하는 표지의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항상 발전의 디딤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이 말은 참된 지식 혹은 학문공동체에서 인정하는 최근의 지식만이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오래된 신화를 우리가 과감히 벗어나야 함을 말해 준다. 각 시대는 그 시대에 알맞은 지식을 교육의 소재로 삼았다. 오늘날의 경우도 장래의 다른 시대에는 오류로 판명될 지식을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교육의 입장에서 학문적 지식이 갖추어야 할 조건은 그것들이 경험의 연속성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문적인 지식의 교육적인 가치는 마치 높은 곳을 오르는 사람에게 사다리의 가치처럼 한 단계 더 나은 지식을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토대나 도구가 될 수 있는 정도에 비추어 평가될 수 있다. 한 단계의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그것을 이미 통달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고, 아직 그것조차도 습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항상 얼마만큼의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학문적 지식의 교육적 가치는 그것을 탐구하는 사람의 현재의 품위를 기준으로 늘 새롭게 규정되어야만 한다.
2.1.3. 개인적 구인
위의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은, 교육의 경우 지식은 그것을 소지했거나 탐구하려는 개개인의 입장에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개인을 떠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으로 지식을 규정하려는 이전의 인식론적 이념이 무리한 것임을 말해 준다. 후자에 의해 야기된 문제를 전자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결하려는 것이 바로 교육적 인식론의 기본적인 취지이다. 어떤 지식은 비교적 많은 사람에 의해서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혹은 앞서의 논의를 따르면 적어도 하나의 지식이 그 분야의 발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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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타당성은 그 주장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가능성이 있는 개개인의 승인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지식들이 있다. 그러나 품위로서의 지식은 그것을 점유한 사람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식은 오직 자기의 것으로 점유될 때만이 살아 있다. 아무도 없는 장소에서 혹은 그것을 감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인 개인과 관계를 맺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지식은 무의미하다. 적당히 이름을 붙여서 도서관에 진열시킨 전시물로서의 지식의 가치는 그것을 읽고 소화해 내는 독자가 나타날 때까지 증명된 것이 아니다. 교육에서 문제되는 것은 우리 각자가 지식을 구성하고 그 실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교육은 그 특성상 바로 개인들 간의 지식의 보편성을 인정하기 어려운 간극이 전제되는 상황이다. 아무리 근사한 지식이 개인 외부에 자료로서 주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개인에게 이해되지 않는 한 그것은 그의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아인슈타인의 지식과 그것을 공부할 학생의 지식이 엄격하게 구분될 필요가 있다. 만약 아인슈타인의 지식이 바로 학생의 지식이라면 교육이라는 과정이 별도로 필요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페트리(H. Petrie, 1981)는 지식을 개인적인 구인(personal construct)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
이런 일반적인 틀 속에서 우리는 지식이 개인적 구인이라는 견해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에 있어서 강한 것과 약한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약한 의미에서 개방적인 교육자는 지식이 한 학생의 정당화 도식 속으로 점유될 때까지 그 지식을 그가 점유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전의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학습자에 관한 한 그것은 쓸모없는 의미인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주제에 대한 강한 인식론적 입장은 개별적인 인식자 밖에서 찾는 객관적인 정당화의 관념 자체가 참으로 의미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물리학에서 어떤 정당화도 찾을 수 없다. 그런 정당화는 결국 따지고 보면 그 분야에서 어떤 지명된 ‘전문가들(experts)’의 개별적인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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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다. 따라서 모든 정당화와 그에 따른 모든 지식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구인으로 볼 수 있다(p.38).
위에서 페트리는 지식이 누구에 의해서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가 특별히 쓰고 있는 정당화는 개인적으로 이해된 것 혹은 개인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정당화는 엄격하게 말하면 개별적인 것이다. 먼저 그는 교사의 지식과 학생의 지식을 구분하고 그들이 서로 치환될 수 없다는 약한 의미와 지식은 각각 개별적인 정당화를 요구한다는 강한 의미를 든다. 아무리 전문가에게 정당화된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확인하지 않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전문가의 것일 뿐이다. 기존의 인식론은 지식이 바로 그런 특수한 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사이에 마치 합의된 지식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였다. 교육에서는 나에 의해서 정당화되거나 점유되지 않은 타인의 지식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소외되거나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지식을 개인적인 구인으로 파악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구조의 특성을 개개의 점유자의 입장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닥워스(E. Duckworth)는 <굉장한 착상의 점유(1973)>라는 글에서 그런 미세한 점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식이라는 말을 쓸 때 나는 어떤 사람의 지식을 단순히 언어로 요약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교과서와 강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촉구하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한 개인의 사고, 행위, 연결, 예언, 그리고 감정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은 그들의 원천으로서 그가 읽고 들은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그 자신의 힘으로 한군데로 모으는 일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지식은 그가 그것들을 한군데로 모으는 새로운 방식들을 얻어내도록 하였다(pp.275-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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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지식이 언어나 상징의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과 그것을 한 개인이 구조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 사람에게 구조성을 가진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구조로서 파악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닥워스는 교과서에서 진술한 일단의 지식들이 개인의 구인으로 내면화되는 데 따르는 특별한 조건을 언급하고 있다. 아무리 교과서적 지식이 체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학생들이 구조로서 파악하지 않는 한 그것은 품위로서의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는 교과서적인 지식이 한 개인의 사고와 행위, 그리고 감정으로 통합되어야만 비로소 그 지식이 학생들에게 하나의 ‘굉장한 착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말은 품위로서의 지식은 그것을 점유한 사람의 인식체계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인지요소라도 그것이 소속된 맥락을 떠나 객관적이고 단일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말은 우리는 하나의 인지요소만을 상대로 그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혹은 그것이 어느 정도의 품위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아이디어의 성장과정의 큰 부분은 논쟁의 변화하는 구조와 관련이 있다. 하나의 맥락에서 의미를 갖는 아이디어가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의미 혹은 다른 공략을 갖는다. 이 점은 한 사람의 사고의 성장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비교함에 있어서 공히 적용된다.(Gruber, 1973. p97).”
예를 들어보자. “사람은 죽는다”라는 말은 그것을 점유한 사람이 어떻게 동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수준을 반영한다.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은 상이한 전제하에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갑’은 “사람은 개다, 개는 죽는다, 고로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고계열을 따를 수 있다. 이에 비해 ‘을’은 “사람은 동물이다, 동물은 죽는다, 고로 사람은 죽는다”라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이 때 양자의 사람에 대한 개념은 다르다. 따라서 그 명제의 의미 역시 그들에게 각각 다르다고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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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또한 ‘죽음’에 대한 개념 역시 양자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갑’은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보는 반면, ‘을’은 ‘심장이 멎은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유자가 가진 개별적인 의미맥락을 구분함이 없이 단지 “사람은 죽는다”를 보편적으로 의미지우거나 혹은 그것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지구는 돈다”는 생각 역시 그 의미는 어린이와 어른에 따라, 그리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이라는 개별적인 물리학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개인 간의 학문적 지식의 수준차이는 낱낱의 개념에 대한 분리된 이해가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는 전체 생각의 틀에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지식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개별적인 인지요소에 대한 합산 이상의 판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식을 단편적인 정보의 합산으로 보는 통념이나 더 나아가 인지적인 요소의 의미는 그것을 소지한 개인과는 무관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넓은 의미의 구조주의는 그런 품위상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한다. 실증주의의 지배 아래 있는 오늘날의 학교는 개념을 배우거나 그것을 평가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식의 단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한 개념의 추론적 내용을 이해시키기보다는 개별적인 개념의 정의를 이론적 맥락과 분리시켜 주입시키고 그 주입된 내용의 기억력을 평가한다. 이 때문에 초등학생이 가진 ‘압력’, ‘섭취’, ‘부상’의 개념과 일선의 교사나 일류의 과학자가 가진 ‘압력’, ‘섭취’, ‘부상’의 개념 간의 엄청난 차이를 구분하거나 식별하지 못한다. 높은 수준의 지적인 요소가 낮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낮은 수준의 것으로 동화된다. 교사의 개념은 학생의 인지체계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변형된다. 혹은 학생들은 강요에 의해서 교사의 것들을 단편적이고 기계적으로 암기하고 그것들을 시험에서 단순히 재생해 내는 적응방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그런 것들이 찾는 구조적 수준의 차이를 식별해 내지 못하고 학생들의 단순한 암기를 마치 교사나 아인슈타인의 성취와 동일한 것으로 과대하게 평가하는 관례를 반복하고 있다.
지식을 개인적 구인으로 볼 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다른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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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점은 지식을 언어로 표현된 형식과 구분하는 것이다. 흔히 철학자들은 지식과 언어를 결부시키고 언어화된 지식이 갖는 보편성에 큰 기대를 건다. 학문에서 그 대상에 대한 이론적 체험은 구조의 형식을 갖는다. 그것이 명제의 형식으로 정리되어 표현될 때 철학자들은 비로소 지식의 소득을 얻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문자로 쓰인 것으로서의 물리적 지식과 그것을 이해한 유기체적 지식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동일시하면 의미 있는 교육적 활동에 대한 논의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인식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판별하지 못하였다.
폴라니는 <암묵적 차원(1967)>에서 지식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문자화되기 이전에 우리 내면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지식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실증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음이라는 실체가 가시적인 접근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존재성 자체를 부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속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지 않을 때 이미 마음과 그것의 나타냄의 차이를 주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마음속의 지식은 설사 표현되지 않더라도 혹은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혹은 그 반대의 형식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개인적 구인으로서의 지식은 바로 거짓말하지 않는 우리의 체내에 용해된 그 내부의 지식을 말한다. 암묵적 지식이 우리 눈에 쉽게 식별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의 실재를 부인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실증주의자들이 우려하는 암묵적 지식의 모호성은 그것을 소재로 하는 교육을 통해서 습득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에게 직접적인 체험으로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많은 부분 우리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는 암묵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학문적 지식은 명시적인 것으로 환원해 버릴 수 없는 암묵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도 예외가 아니다. 토목공이 그의 기술 뒤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묘사할 수 없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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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과학자도 그가 습득한 방법과 기술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지식을 통일된 전체로 경험할 때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인식에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이 의식된다. 이 점에서 의식은 단기기억의 일종일 뿐이며, 기록을 유지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은 수준 낮은 시스템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학문이 작용하는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과학자들의 이런 암묵지가 명제와 규칙들로 정식화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고 중요하다.
우리는 지식을 말이나 기회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명시적 지식은 암묵적 지식과 분리될 수 없다. 언어의 형식으로 된 지식은 고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의 의미는 언제나 원저자를 넘어서 있다. 언표된 명제나 흔히 말하는 공적 지식, 혹은 텍스트는 자기동일적이고 불변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해석학적 관점에서는 그것은 언제나 해석의 대상이다.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공유된 해석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의미는 외부적 형태 안에 있다기보다는 우리들 자신 안에 있기 때문이다. 문자화된 것의 의미는 해석하는 사람에 달려 있다. 저자의 품위를 반영하는 책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르게 해석된다. 데리다와 같은 해체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텍스트는 이처럼 단지 해석하는 사람의 편에서는 유희의 대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텍스트를 이해할 때 그에 담겨진 내용의 불변적인 재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하나의 객관적인 언명에 대한 개개인의 해석은 다르다. 그것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개별적인 선이해 혹은 인지구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동화된다. 그만큼 그것은 개별적인 품위의 다양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교육에서 중요시해야 할 지식은 객관화된 지식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들이다. 언술화된 지식은 언제나 그리고 오직 독자의 개인적인 전망과 해석의 범위 내에서 생명력을 갖는다. 따라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객관적인 언명이 아니라 바로 그 살아있는 품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는 정당한 이해, 곡해, 오해를 모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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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평가 역시 어디까지나 해석자의 밖에 있는 기준에 따른 것으로서, 그 다양한 해석은 서로 다른 것인 동시에 각각 해석자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타당한 것이다. 교육은 바로 그 부분을 주목하면서 진행된다.
개인적 구인으로서의 지식은 한 개인이 내부에 점유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체험이며, 그것의 일부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이 체험을 대변할 수는 없다. 또한 표현을 통해서 곧바로 암묵적인 내용을 추정 혹은 추리해 낼 수 있는 공식도 없다. 말하자면 그것이 안쪽에 있다는 것의 불명료함을 바깥쪽의 것이 보상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문자의 형태로 나타난 지식을 능숙하게 복사해서 재생해 내는 것과 그것을 내부에 동화시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인격의 한 부분으로 통일되고 조화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살아 있는 생물체의 일부로서 다양한 상황에서 역동적 기능을 보인다. 우리가 유관한 사태에 직면하여 남의 지시나 도움이 없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품위로서의 지식이 갖는 이러한 작용 때문이다.
그 작용과 사용의 융통성과 관련하여 암송된 지식과 동화된 지식 간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12×12=144’를 오직 암송하도록 훈련받은 아동은 ‘12×13=?’이라는 문제에 해답할 방도가 없다. 왜냐하면 어떻게 숫자가 다양한 사태에서 융통성 있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마음속의 작용상태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질문은 12를 한 번 더 더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답은 156이라는 추리는 그들의 경험 밖에 있다. 어린아이도 높은 수준의 지식을 흉내 내어 말할 수 있지만 그 지식에 합당한 생활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지식을 동화한 사람에게는 삶에서 말이나 생각마저 없어지고 지식의 활동만이 있게 된다. 교육적 인식론에서 살아 있는 지식을 말할 때 그것은 이처럼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바로 자기 자신의 지식이 되어 그것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것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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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분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오래 전부터 관심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암기, 반복 훈련, 단순한 사실의 기억은 비활성화된 무기력한 지식이다. 인식주체가 정당하게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소외된 지식 혹은 죽은 지식이다. 젊은이들의 사고구조를 활성화시키려는 교육에서는 그런 지식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이 점은 화이트헤드(A. Whitehead, 1929)의 언명에서 너무도 간명하게 잘 지적되었다.
아동을 사고의 활동으로 훈련시킴에 있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비활성적 아이디어(inert ideas)’이다. 그것은 사용되거나 검증되거나 새로운 조합으로 연결됨이 없이 단지 마음속으로 수락되는 아이디어이다. … 비활성적 아이디어를 동반하는 교육은 단지 무용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유해하다(p.1).
위의 언명은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가정되는 최근의 지식을 빠짐없이 아동에게 수동적으로 주입하고 아동 스스로의 지식이 성장할 가능성을 고갈시키는 이른바 ‘학교교육’의 낭비적인 관행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비활성적 아이디어가 무용하다는 의미는 그것이 단지 쓸모가 없다는 식의 실용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것은 명목상의 의미가 있을 뿐 그것이 있음을 나타내는 작용의 부재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 지식은 아동에게 소화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습득과정이 너무도 메마른 것이기 때문에 그 소지자에게 마땅히 증명되어야 할 지식의 내재적 가치를 손상시킨다. 그런 소화되지 않은 지식의 축적이 교육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
교육적 인식론에서 말하는 지식은 이미 개인적인 정당화의 과정을 거친 마음의 상태이다. 가령 어떤 원리들에 대한 이해는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에 적용될 수 있을 정고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원리들은 우리 내면에서 작용하는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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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우리가 말하는 품위로서의 지식을 비활성적 아이디어와 대비한다.
내가 원리들이라고 말할 때 나는 언어적 공식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 안에 충분히 스며든 하나의 원리는 형식적인 진술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정신적 습관이다. 그것은 마음이 적절한 자극에 대해서 실례가 되는 상황의 형태로 반응하는 방식이 된다(Whitehead, 1929, p1).
이처럼 개발된 정신적 상태로서의 지식은 활동 속에 직접 작동하고 작용한다.
이런 대비는 듀이가 한동안 철학에서 높이 평가되어 왔던 주지적, 명상적, 수동적, 방관적 지식을 나태하고 무력한 지식으로 지탄할 때에도 주목의 대상이 된 바 있다. 듀이에게 있어서 하나의 관념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당신으로부터 어떤 유형의 행위를 요구하는가를 고려하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필요할 때 그 지식을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이것은 딱딱하다”는 생각은 “만약 당신이 그 사물을 할퀴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듀이(1929b)는 ‘작용하는 개념’이라는 부제를 가진 논의에서 브리지만(P. bridgman) [각주3: 조작적 정의에 관한 상세한 것은 브리지만(1958)을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여기서 인용되고 있는 이 개념의 교육적인 의미와 흔히 커리큘럼 전문가들에 의해서 논의되는 ‘조작적 정의에 의한 목표진술’의 취지가 어떻게 어긋나고 상반되는가를 주목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의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
어떤 대상의 길이를 알려면 어떤 물리적 작용을 수행하여야 한다. 따라서 길이의 개념이 고정되는 것은 길이를 측정하는 일이 고정된 때이다. 즉 길이의 개념은 길이가 결정되는 일련의 활동을 의미하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개념이든 일련의 (측정)활동을 의미한다. 개념이란 개념에 대응되는 일련의 제 조작들과 같은 것이다(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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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듀이가 말하는 작용하는 지식에 그것 이외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라는 실용주의적 선입견과 편견을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그 관념은 단지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성과를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생활 속에서 작용함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수영할 수 있는 사람은 물에 빠진 상황에서 수영을 하게 된다는 식의 지식의 활성을 지적하고 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융통성 있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지식의 가치를 효용에 둔다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의 요건을 지적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수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그 곳을 헤엄쳐 나올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지식은 죽은 것이거나 삶에 방해가 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고, 정의상 그것은 일단 수락하기 어려운 이상한 지식이 될 것이다. 듀이(1929b)는 바로 그런 유의 지식을 그의 논의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다. “관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떤 방법으로 재조정 또는 재건하는 행위를 갖게 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p.138).”
거의 같은 맥락에서 오랫동안 지능의 발달을 연구한 피아제(1969)는 지식의 소묘적 측면(figurative aspect)과 작동적 측면(operative aspect)을 나눈다. 여기서 전자는 감각기관이 수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을 수용하는 상태를 말하며, 후자는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각 인식의 주체가 적극적으로 구성의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인지도식에 동화하거나 인지도식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식을 말한다.
초보적인 감각동작적 행위에서 구체적인 것을 거쳐 형식적 조작에 이르는 지능의 자발적인 발달은 변형이나 변환의 체계를 점진적으로 구축하는 특징을 갖는다. 우리는 이런 지식의 측면을 ‘작동적(operative)’이라고 칭할 것이다. 이 용어는 그 최초의 행위와 더불어 (엄격한 의미에서) 고유한 작동적 구조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알려진 실재들은 오직 ‘변형’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상태(states)’로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변형은 예외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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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다른 상태를 얻기 때문이다. 각 상태는 변형의 결과이거나 시작점을 구성한다. 우리는 상태들을 취급하거나 혹은 움직임과 변형을 단순히 상태의 연속으로 번역하는 지식의 도구를 ‘소묘적(figurative)’이라는 말로 지칭할 것이다. 예컨대, 지각, 모방, 정신적 이미지에 의해서 구성된 특수한 종류의 내면화된 모방은 이런 범주에 든다(pp.33-34).
피아제가 말하는 소묘적인 것은 지식의 순간적인 상태로서 마치 영사필름의 각 프레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실재를 복사하는 것이 지식이라는 전통적인 철학적 관점은 이 부분을 중시한다. 분석철학자들이 주어진 명제에 집착할 때에도 바로 이 측면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정신적 작용의 측면에서 볼 때 마치 똑같은 모양으로 늘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의 경우처럼 무력한 것이다. 그것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작동적인 측면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덧셈의 수학적 작동은 가령 6=3+3 =2+4=5+1 등과 같이 여러 형태로 나타낼 수 있다. 이 때 각각의 표현상태는 소묘적인 것이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전자는 단지 모방이 가능하지만 수학적 조작의 수행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 교육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살아 있는 작동적 측면이다. 구조로서의 지식의 특징은 그것이 항상 변형의 체계라는 데 있다. 이것은 모방이 아니라 스스로 수학적 구조를 재발견하거나 재구성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상의 구분에서 주체에게 의미 있는 지식은 작동적 측면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소묘적인 지식은 정적 상태로서 발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동적 지식은 우리 내부의 일정한 작동상태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계속 발전한다. 이런 부분은 다음의 피아제(1964)의 발언에 잘 반영되어 있다.
지식의 발달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에게 핵심적인 것으로 보이는 한 착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작동(operation)이라는 착상이다.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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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실재의 복사물이 아니다. 한 사물을 안다는 것, 하나의 사태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보고 그것으로부터 정신적 복사물이나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대상을 안다는 것은 그것에 행위를 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수정하고 변형시키는 것이고, 이런 변형의 과정을 이해하고, 결과적으로 그 대상이 구성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작동은 따라서 지식의 핵심이다. 그것은 지식의 대상을 수정하는 내면화된 행위이다(p.177).
하나의 개념을 가졌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그 개념에 상응하는 제반 활동을 즉각적으로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지식이 구조인 이상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 내면의 상태인 이상, 그것의 향상은 변형의 개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지식의 한 요소의 변화는 그것과 관계되는 다른 요소, 그리고 전체의 변화를 동반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활성적 지식’, 듀이가 말하는 ‘작용하는 개념’. 그리고 피아제가 말하는 ‘작동적 지식’인 것이다. 이것은 교육적 인식론에서 우리가 정의하려는 살아 있는 지식에 해당한다. 그것은 철학자들이 통상 가정하거나 규정해 왔던 객관적, 보편적 지식의 범주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작용하는 지식을 의미한다. [각주 4: 여기서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우리의 이러한 개념화를 지식을 단지 심리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을 갖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츰 밝혀지겠지만 이런 유의 개념화는 오직 교육적 인식론의 맥락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는 고유한 개념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내가 도입한 ‘품위’라는 개념은 심리학의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2.1.4. 유기적 통합
지식을 살아있는 개인적인 구인의 상태로 규정할 때 우리는 다시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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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이 지식을 규정하는 방식에서 은폐된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을 인정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흔히 육체가 없는 사고, 정서로부터 초연한 냉정한 지성을 상정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또 다른 의미에서 ‘죽은 지식’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신체나 정서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그렇게 순수하게 유리되어 있지 않다. 유기체로서의 인간은 모든 요소가 그 전체의 유지에 공헌하도록 기능한다. 지식은 신체나 정서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들과 분리해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지식은 知-情-體의 유기체적 체제 속에 있는 첫 항으로서 ‘知’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의 지식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유리된 지식과 전혀 다르다. 그것들의 차이는 우리의 몸통에 붙어 있는 ‘팔’과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팔’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그릇에 포함되지 않고, 또 점유자의 책임과 열정이 포함되지 않은 지식은 살아 있는 유기체의 지식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형성의 측면에서 볼 때 감정이나 신체는 지식을 추구하고 통합하고 감상하는 데 필수적인 요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한다는 것을 그 사람이 살아 숨쉬는 신체, 동기, 흥미, 매력 등과 무관한 것으로 본 철학적 인식론은 공허한 악순환을 거듭한다.
학문적 지식의 유기체적 상관성, 즉 신체와 감정의 관계를 무시할 때 학문 자체가 건조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하는 교육은 더욱 무의미한 주지주의로 타락한다. 그런 주지주의는 철학적 인식론에서 파생된 잘못된 지식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과 고기는 설사 판이하게 다르다 하더라도 후자는 전자가 없으면 생존을 유지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학문적 지식은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신체상태나 감정과 분리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분리된 상태로서의 지식은 이미 그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살아 있는 지식은 이처럼 신체 혹은 감정과 결합되어 있는 상태를 지칭한다. 학문적 지식은 비단 인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되는 열정과 헌신, 상상과 직관 등 의지적이고 정서적인 것, 더 나아가 신체적인 반응에 이르기까지 전인격적인 요소를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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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학문을 소재로 하는 교육을 지금처럼 막연하게 ‘주지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학문을 오직 지적인 영역으로 보는 것은 학문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발달은 전인격의 한 요소로서 보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 길게 보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은 인간의 모든 부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학문적 체험을 일부러라도 ‘지-정-체’와 같은 연결된 방식으로 표기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은 앞서 교육적 인식론의 전조를 밝히면서 거론된 제반 이론에 반영되어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지식의 점유화를 강조할 때, 하이데거가 이해를 현존재의 존재양태로 가정할 때, 듀이가 지능과 감정의 조화를 논의할 때, 그리고 폴라니가 인격적 지식에 열정의 요소를 가미할 때, 그들이 말하는 학문적 지식은 지적인 것을 추상화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살아 있는 지식은 우선 그것을 담지하는 신체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신체를 떠난 지식은, 혹은 그런 방식으로 지식의 문제를 다루는 논의는 그만큼 가공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서는 신체와 정신이 전혀 별개의 것이며 독립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이원론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찍이 라일(G. Ryle, 1949)은 이러한 이원론을 비웃기 위해 ‘기계 속의 유령(ghost in the machin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러한 이원론은 에너지 보존법칙에 위배된다는 점을 지적한 라일은 의식은 뇌 속에서 나타나는 물질의 복잡한 헝클어짐(meandering)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신과 신체는 다른 범주에 속하지만 어느 것이 더 근원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적어도 유기체 내에서 그들 간의 상호작용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메를로-퐁티(M. Merleau-Ponty, 1964)는 후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인간주체가 후설이 강조하듯이 순수한 사고나 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육체성(Leiblichkeit)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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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는 ‘세계에서의 존재’는 몸과 세계 혹은 세계와 몸이 서로 구조를 교환하는 것을 뜻한다. 몸은 근본적으로 세계를 지금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로 만들어 제공한다. 몸은 될 수 있는 대로 자기가 친숙하게 거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세계를 바꾼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세계가 요구하는 대로 몸이 자신의 구조를 바꾼다. 몸이 이렇게 세계와 하나가 되도록 구조화하는 능력을 메를로-퐁티는 ‘몸의 도식’이라는 말로 드러낸다. 세계 쪽에서 보면, 우리가 그 속에 거주해 살고 있는 이 지각된 세계는 우리의 몸이 그렇게 지각되도록 한 토대 위에서 성립된다. 몸에는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온갖 정신적인 활동이 배어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R. Descartes)가 생각하는 방식의 단순한 기계적인 물질일 수 없다. 그 때 몸은 방식만 다를 뿐 흔히 우리가 말하는 정신적인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몸이다. 그 점에서 그의 존재론에서의 의미는 안과 밖, 주관과 객관, 그리고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포섭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교육적 인식론에서의 지식은 신체의 윤곽으로 제한된 개별적인 인간 속에 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말은 이미 지식이 신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품위는 육신 자체는 아니지만 육신이 유지되는 조건에서만 그 참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다. 또한 그 육체를 기준으로 우리는 너의 품위와 나의 품위를 구분할 수 있다. 폴라니(1958)가 말하는 ‘인격적 지식’은 신체를 중심으로 확장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근래에 구성주의 이론을 주도하고 있는 바렐라 등(Varela, Thompson, & Roth, 1991)은 관조적인 인식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식이 몸 안에 살아있는 경험의 구조에 있다는 의미에서 體得(embodime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체득되었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반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반성은 단지 경험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경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품위로서의 지식도 비록 몸 자체는 아니더라도 몸 안에 존재하는 지식인 것이다. 그 체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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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내면적 상태로 규정할 때 요청되는 것은 그것을 여타의 전인적인 상태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것 혹은 의지적인 것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지식과 신체를 분리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과 정서를 분리시키는 것이 철학적 인식론의 취약점이다. 학문이 오직 인지의 발달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인지와 정서는 독립적으로 논의될 수 있지만 이들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후자 없이는 전자가 존재할 수 없다. 감정은 인식내용에 뿌리깊게 영향을 주고 있다. 감정이 부대되지 않은 지식은 생명력이 없다. 모든 관념은 그것이 참조하고 있는 실재에 대한 다소의 정서적 태도를 내포한다. 한 개인의 욕구와 호기심에서부터 대상에 대한 특정한 방향의 사고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새롭게 얻은 지식은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의 신념으로서 그만큼 각자에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에 정서적 요소가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인지내용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항상 작용한다. 이것이 우리가 수도계적 품위로서 학문적 지식을 추구하는 이유가 된다.
우리 안의 지적인 것과 정의적인 것은 서로가 다른 것을 더욱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철학적 인식론자들은 흔히 감정을 타당한 인식을 왜곡하거나 혹은 타당한 지식을 획득하는 데 장애물이 된다고 간주하고, 인식활동에서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감정이 제거된 상태를 철학에서는 오히려 불편부당한 지성으로 미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런 지식은 그것을 소지한 사람의 무기력을 합리화시킨 것에 불과하다. 듀이(1948)는 철학에서 그런 낡은 지식을 고원하고 자족적인 이성이라는 개념으로 비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입장을 이렇게 대변하고 있다.
그들은 실은 전통적인 주지주의 철학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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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고 철저하고 이해관계를 떠난 사고, 즉 어떤 자족적이고 충족적인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은 역사에서 실재했던 주지주의, 지식에 대한 방관자적인 관점은 순전히 지성인이 그들이 헌신하고 있는 사고의 소명이 가진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무력함을 스스로 자위하기 위하여 쌓아 올린 보상적인 설교에 불과하다. 여러 상황적 조건에 의해서 그리고 용기의 결핍으로 그들의 지식을 사태의 진전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이용하지 못하면서도, 지식이란 변천과 실용의 것으로 격하될 수 없는 아주 고상한 것이라는 데서 그 이유와 구실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은 앎을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심미주의로 변형시켜 놓았다(p.117).
합리적인 인식은 의지 충동과 감정 그리고 기분의 토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런 정서적 요소는 인식 자체의 근거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인식의 장애로서 배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가 교육적 인식론을 예견한 철학자들로 거론한 모든 학자들에 의해서 공유되고 있다. 헤겔은 이성과 열정을 이원적으로 구분한 근대철학에 도전하면서 “열정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고, 이성이 없는 열정은 맹목적이다”는 유명한 말로써 인간생활을 합리적인 측면과 정의적인 측면의 유기적 조화로 본 희랍적 진리관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통상적인 방식을 벗어나서 의지적 또는 정서적인 측면을 중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컨대 결단 혹은 열정이 배제된 지식은 마치 몸통으로부터 분리된 팔과 같이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듀이가 말하는 경험론의 맥락에서도 지력과 욕망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욕망은 현재에 없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데 있어서 원동력이 되는 반면, 지력은 그 욕망이 재향해야 할 방향과 과정을 안내해 주는 기능을 한다. 그는 문제해결에 있어서 지능의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그 지능은 단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 이상의 태도를 동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듀이는 <사고의 방법(1933)>이라는 저서에서 그 기법 못지않게 개방성(open-mindedness), 몰입성(whole-heartedness), 그리고 책임성(responsibility)이라는 태도를 강조한다. 이것들은 경험의 범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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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는 어떤 주제에 대해 사고하도록 하는 최소한의 준비태세에 해당한다. 이런 제반 태도는 지식 자체는 아닐지언정 지식의 형성과 유지에 불가분의 요소가 있다. 마찬가지로 폴라니는 그가 말하는 존재수준의 간극에는 항상 열정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격적 지식’의 조건으로 위로 상승하려는 ‘발견적 열정’과 이전의 상태로 아직 남아 있는 후진을 끌어올리려는 ‘설득적 열정’을 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서양에서는 ‘philosophy’라는 말 자체는 愛知, 즉 지식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지식은 거꾸로 말하면 지식이 아니라는 시사를 얻게 된다. 이처럼 유기체적인 지식은 감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학문을 하려는 것은 가치있는 지식을 나의 것으로 점유하고 나 스스로를 그만큼 가치있는 존재로 확인하기 위함이다. 사실상 학문의 아버지라고 하는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일생을 통해서 강조했던 것이 ‘정신적 열망’이었다. 우리는 플라톤(Platon)의 <향연(/1987)>에서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완전한 것에 대한 욕망과 추구, 즉 에로스에 대한 찬양이 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무지한 사람 혹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중간쯤에 있는 사람에게 있다. 우리가 지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열망과 애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지식은 우리들 자신의 존재 일부이다. 그것이 가치로운 것만큼 나의 존재의 수준은 높은 것이고, 그것이 무가치하다면 그만큼 나의 존재의 수준도 낮은 것이다. 그것이 위협을 받는다면 나 자신이 그만큼 위협에 처한 것이다.
인식은 특정한 경험을 말하며, 경험은 통과 · 여행 · 부정 · 시련의 극복 · 확언임과 동시에 희생시키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 부분을 은폐하거나 억압하고 학문이나 교육의 활동을 설명하는 것은 살을 제외한 뼈만을 다루는 것과 같다. 이상적인 철학이 고전적인 희랍의 비극에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를 파괴해 버린 것을 비판한 철학자로 알려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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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니체(F. Nietzsche)는 일찍이 <비극의 탄생(1873)>에서 창조성을 솟구쳐 오르는 것과 같은 생명력이라고 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형식과 합리적 질서라고 하는 아폴론적인 것이 작용하는 두 개의 균형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우리가 깊은 인식의 층과 만날 때에는 항상 이런 아폴론적인 측면과 디오니소스적인 측면이 있다. 인간의 세계와 자신에 대한 이해의 작업에는 다양한 감정적인 요소가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들의 앎에서 배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지금 우리가 가진 지식에 대해서 애착을 갖기 마련이고 그만큼 우리는 그것을 향유하고 그것에 비추어 다른 지식들을 평가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은 옳다고 느낀다. 지식은 두려움이 있더라도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표명하지 않을 수 없는 신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실로 진리로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진 자에게 가치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다소간의 희생조차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진리가 단지 진리라는 이유로 생존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헛된 낭만이다. 역사적으로 훗날 진리로 판명된 견해들이 당시에는 그것을 주장한 사람에게 많은 박해나 억압을 가져다주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은폐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 자신의 지식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리 사악한 주위상황의 유혹이라도 그를 어지럽히지 못한다.
지식의 고급화는 평가기준의 상승을 의미하고, 평가기준의 상승은 정서적인 성숙을 의미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지식을 획득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말은 이미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과학자들은 냉철한 이성이나 계산에 의존하는 만큼이나 감정과 직관에 따라 움직인다. 허다한 것들 가운데 하나의 인지적 해석을 택하는 데에는 의지적 결정, 감식, 영감, 유쾌함, 혹은 다른 정서적 반응이 동반된다. 현재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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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적어도 그 분야에서 우리에게 참됨과 거짓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그것의 부정 역시 당연히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동반한다. 감정적 애착은 사고과정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그것은 사고의 성장의 한 부분을 이룬다. 철학적 논의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지식과 관련하여 충성과 공포, 새로움과 옛 것의 긴장, 조롱이나 비난에 대한 우려 등이 관념의 역사에서 예외 없이 중요한 힘으로 작용했다. 과학자들은 지식의 한계에 봉착했을 때 열망과 공포감을 느낀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신뢰감을 잃게 되었을 때 더 나은 것을 탐구하는 일을 계속한다. 이로써 더 나은 지식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가장 큰 지적 흥분을 유발한다.
지식은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생생하게 내 속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체험되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지식을 중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내재적 근거이다. 어떤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적어도 그 해답을 하는 자에게는 진리이다. 누가 스스로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남에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그것의 바람직성을 나의 것으로 체험하기 위함이다. 그 구조의 활동과 발달을 위한 힘 혹은 에너지가 바로 내재적 동기화이다(Desi & Ryan, 1985). 진리를 오직 감정에 호소하여 획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감동이 없이는 어떤 진리도 부화하지 않는다.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 자긍심과 애착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수도계적인 품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인격적 지식은 자신의 자존심의 대변자이다. 그것이 존중받을 때 자아의 가치가 상승되며, 반대로 그것이 손상을 입을 때 자아의 상실감을 느낀다.
살아 있는 지식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지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정말 소중하게 느껴지는 지식이다. 이런 학문적 지식의 특징은 그렇지 못한 것들을 지식의 영역에서 배제하여야 할 근거를 제공한다. 한 개인이 스스로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지식은 이미 수도계적인 품위로서의 내규와 조건을 벗어난 것이다. 지식의 소지자가 어떤 것을 자신의 지식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공포할 용의가 없는 경우가 있다. 마음속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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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할 말이 있지만 그것을 표출하지 못할 때 그것은 자신의 지식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가지의 측면이 동시에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나는 모종의 숨겨진 지식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비학문적인 차원에서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의 추구보다는 사회적 강제와 그로 인한 두려움이 작용하고 있다. 옛날에도 선비는 자기 뜻을 굽히자 않기 때문에 그들의 몸을 위태롭게 할 수는 있지만 그의 뜻을 뺏을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들은 홀로 거처하더라도 그릇된 짓은 하지 않는다는 생활철학을 지켰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또한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불쾌함, 원망, 적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혹은 그것에 대한 하등의 열정이나 가치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 때문에 그것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을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지식은 기계적인 컴퓨터에 의해서 항상 대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오직 외부적인 요구를 좇아 부화뇌동한다. 이를 두고 우리는 ‘曲學阿世한다’는 말을 쓴다. 자신의 뜻이 담기지 않고 말로만 배운 지식은 실행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신은 그와 같이 실행하지 않으면서 다만 타인에게는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감적인 체험의 누적을 통해서 확인하지 않은 것들을 다른 이유에서 숭상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기서 논의하는 품위로서의 지식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지식이 그 점유자에게 가치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고 단지 다른 것을 위한 기능으로서 혹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미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2.1.5. 증득과 지득의 차이
지금까지 우리는 철학자들이 간과하여 왔고, 또 교육적 인식론에서 중시하고자 하는 지식의 측면을 논의해 왔다. 교육적 인식론에서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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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지식은 인격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마음의 상태이다. 그것은 체험의 수준에서 분명한 구조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신체, 감정과 같은 우리 내부의 다른 요인과 더불어 유기체의 일부로 용해되어 있다. 그러나 그런 조건을 갖춘 지식은 그 결과의 형태뿐만 아니라 특정한 형성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결론삼아 마지막으로 우리가 지식으로 삼는 것과 그 결과와 형성과정에서 전혀 다른 성격을 띠는 지식을 논의하고 그것을 우리의 논의에서 배제하고자 한다. 나는 이 두 종류의 지식을 각각 ‘證得된 지식’과 ‘知得된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해 보겠다.
우리가 품위로 생각하는 증득된 지식은 마음으로부터 자발적인 승인을 거쳐 획득된다. 이에 비해서 지득은 주체적인 선별과 승인보다는 대개 외부적 보상, 압력, 강요에 의해서 내면화된 지식을 말한다. 이런 일에는 특히 학교가 중심적인 세력이 되었다. 학교는 일률적인 교과서의 내용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학생들이 그것을 무조건 내면화하기를 요구한다. 여기에 개인차가 고려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내용을 충분히 소화해서 이해할 수 있는 조건과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주어진 가장 효과적인 적응방법은 교과서의 내용을 무조건 외워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것들이 소속한 전체의 맥락과 구조를 추적할 수 없는 단편적인 정보의 형태로 남는다. 학생들은 암기한 단어를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재생해 낼 수 있다. 그러나 누차 강조했지만 이런 단편적인 정보는 결코 지식이 될 수 없다. 물론 교과서의 저자들도 그 내용에 구조적인 특성을 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지식이 단편적인 것이냐 혹은 하나의 전체로서 통합된 것이냐를 평가하는 준거는 교과서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체험구조에 있다는 것이다. 교과서나 교사에게 아무리 체계적인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학생의 내부에서 의미상의 연결 없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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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경우, 교과내용은 대개 하나의 주제에 대한 서로 모순되는 이론들을 다룬다. 예컨대, 대학교수들이 여러 학파를 소개하고 학생들이 그것을 노트에 적고 시험을 대비한다. 이 경우 학생들은 그것들을 종합하기보다는 또 하나의 기억해야 할 사상으로 추가하는 일을 할 뿐이다. 여기서 학생들의 두뇌는 마치 서로 관련성이 없는 잡다한 정보의 무더기를 서로 다른 파일에 저장하고 있는 컴퓨터와 같은 양태를 띠게 된다. 서로 모순된 이론이 동일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아무런 갈등이 없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의 인지체계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각은 그 주창자의 머리 속에서는 체계성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그 내용들이 유기체적으로 동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단편적인 정보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다. 따라서 낱낱의 정보들을 파일처럼 칸막이 형식으로 보관한다는 것은 유기체로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이해했다는 것은 그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새로운 자료를 관련지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속성상 맥락을 추적할 수 없는 단편적인 정보를 외부로부터 강요받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패러독스나 갈등으로 체험하고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할 것이다. 여기에 불일치나 갈등에 대한 불만 혹은 좌절과 그것에서 탈피하려는 열정 등이 작용하기 마련이고, 그로써 하나의 통합을 향한 노력이 진행될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연관된 지적 체험구조로 새로운 유형의 대상을 보고, 느끼고, 파악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인지, 감정, 신체, 의지가 통정된 삶 전체의 연관성으로 출발할 때 어떤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가능해지고 그것에 대한 개인적인 열정과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학교의 사태는 통상 그런 자발적인 과정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활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그런 노력이 학생의 편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학교나 교사로부터 좋은 평가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구성하는 지식은 흔히 극히 주관적인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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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학생들은 가능한 한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그들의 감정을 분리시킨다. 어떤 지식이 흥미있고, 매력이 있고, 바람직하다는 판단이나 생각은 사치이다. 그것을 규정해 주는 것은 외부적인 전문가나 당국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과는 달리 그들의 기준에 일치하고 그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인정을 받는 길이다. 이처럼 외부적인 권위에 의해서 지식을 인정받는 경우에 학생들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자연스러운 사고방식 자체를 지식으로 부르기를 두려워한다. 이 조건에서 그들의 체험구조는 열등한 상태 그대로 억압되고 거의 원시적인 수준에 남아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잘못된 상황은 학교기관에 침투해 들어온 실증주의적 지식의 평가방식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우리는 앞(1.1.5)에서 실증주의적 인식론의 특징을 살펴본 바 있다. 이들은 지식이 객관적인 검증의 형태로 존재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 따르면 지식은 세계의 그림이고 그 그림의 타당성은 그림과 세계의 대응성에 의해서 판명될 수 있거나 이미 타인들에 의해서 평가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객관적인 지식은 교과서나 참고서적의 내용을 당분간 머리 속에 저장해 놓은 것으로 간주되며, 학생들은 그것들을 그대로 재생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실증주의자들은 지식이 언어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언어적 표현력과 지적 능력을 혼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충분한 이해와 내면의 동의 없이 단지 남의 말이나 글의 물리적인 특성만을 흉내 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이 점에서 언어는 품위로서의 지식의 지표로 기만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 혹은 분석철학은 학생들이 단지 언어를 모방한 것을 그들이 사실상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세계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고 믿게 한다. 이런 종류의 말장난과 피상적인 것에 지식의 자격을 주고 논의한다면 인식의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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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려 온갖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무리 수많은 책을 읽고 문장을 암기하더라도 그것이 삶 속에 작용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앵무새 놀음에 불과하다. 단지 타인으로부터 피상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지식은 결코 성장하지 않는다. 체험이 없이 언어만을 갖춘 사람은 그에게 결핍된 것을 타자에게 채워줄 수 없다. 여기에는 단지 언어의 유희가 있을 뿐이다.
실증주의적 평가가 갖는 다른 하나의 태생적 경함은 지식을 요소의 단순한 합으로 규정하고 그것이 가지는 구조적 조건을 간과하거나 은폐해 버린다는 데 있다.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지식은 옳은 반응과 단편을 하나씩 누적시키는 것이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특정한 자극이나 정보를 암송했다가 필요에 따라 재생시키는 것이 지식을 옳게 습득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의 평가방식은 컴퓨터를 천재로 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런 식의 지적 내용은 백과사전이나 컴퓨터로 대체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며 지식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앞에서 강조되었다. 단순히 지적인 요소보다는 그들 서로가 그것을 점유한 사람의 전반적인 인지구조와 어떤 상호관계를 갖고 의미를 갖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같은 인지요소라도 그것이 다른 것과 조합하는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하나의 인지요소는 그것이 소속해야 할 구조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원래의 특성이 상실된다. 이 점에서 지식에 대한 분석적 방법은 지식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구조이기 때문에 요소들이 상호작용하는 양상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는 사람조차도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그것은 모든 인지적 요소의 의미가 자신이 가진 구조의 형태로 해석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인지 요소를 상대방이 수락하도록 요구한 다음, 상대가 그 인지요소를 정확하게 재생하는 경우 그가 자신의 전체적인 지식체계를 수락했을 것으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천재의 기억과 일반 사람들의 기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내용이 다르게 조직되어 있을 뿐이다. 실제로 지식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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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상태에 있다. 천재의 지식이 일반인의 지식의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경우 그것은 일반인의 지식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한 개인의 지식이 성장한다거나 발전한다고 할 때 그것은 기억의 내용이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조직되는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기억은 구조에 후속한다. 한 개인이 발전할 때 이전의 단계에서의 기억은 새로운 단계에서 전적으로 재구성된다(Piaget & Inhelder, 1968). 말하자면 우리는 과거의 인지요소를 현재의 체험함수로 재구성한다. 따라서 우리가 지식의 수준을 평가할 때 특수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지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 개인의 내부에서 어떻게 조직되고 의미를 갖게 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개인이 어떤 대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 자체가 살아 있는 지식이다. 이론은 분명히 하나의 구조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마도 어떤 독자는 학자들처럼 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아나 일반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의 지식은 학자들이 말하는 연역적 체계를 갖춘 엄밀한 의미의 인지구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설사 연역적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유아나 일반사람들 역시 그들 주변의 사실들을 단순히 요소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종의 ‘관점’을 가지고 본다. 따라서 모든 인지활동은 그것이 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의 형태이건 혹은 소박한 관점이건 구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일찍이 피아제(1923)는 어린이의 경우에도 세상을 그들 나름의 일반적인 도식에 의해서 수용한다는 흥미있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들의 소박한 세계관과 이론을 ‘임상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평가방법은 복잡성과 전문성을 이유로 아직까지 학교에서 널리 수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학교 안에서 진정 가르치고 배워야 할 지식은 무엇이며, 그것의 수준을 가리는 절차로서의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지금까지 하등의 진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잘못된 인식론이 학교의 실천에 작용하고, 그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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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인식에 대하여 지식교육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선별과 정화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과 기점은 지식에 대한 인식 자체에 어느 정도 엄밀한 제한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안하려는 교육적 인식론은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인식론이 봉착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그 점은 지식에 대한 규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전의 인식론에서 중요시했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이 간과한 것을 지식의 새로운 요건으로 편입시키려고 한다. 이 점에서 지득된 지식과 증득된 지식의 구별은 불가피하다. 교육적 인식론을 통해서 우리가 심각하고 고려하고 검증하려는 지식의 범주는 지득된 형태가 아니라 증득된 형태에 국한된다. 사실상 지득된 지식은 인식론적으로 심각하게 논의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우리의 이론적 논의에서 제외된다.
첫째, 지득된 내용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식대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학문적 지식은 대상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여 이것은 그 지식을 구성하는 요소의 관계가 정립된 경우를 뜻한다. 그들은 상호 간에 침투되어 하나의 의미를 구성한다. 부분적인 지식은 그것을 소유한 여타의 지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학자 혹은 저 학자들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기억한 것은 지식이라고 볼 수 없다. 단순히 한 분야의 용어들을 암기하고 횡설수설한다고 해서 그 분야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쓸모없는 따분한 사람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종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보의 홍수 속에 밀려나고 말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각종의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급변하는 학문의 세계에서는 적응할 수 없다. 한 개인은 동일한 순간에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 상반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그것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구조적 의미가 이해된 상태만이 그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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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지식은 그 자체로서 즐길 만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지식의 자격을 갖는다. 우리가 지식이 바람직하다고 할 때 그것은 지식의 점유자에게 입증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나의 것으로 점유하고 누리는 즐거움을 잃어버릴 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그 지식은 무의미한 지식이다. 외부적 강요에 의해서 지득된 지식은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는 인간적인 가치를 추구한다는 수도계의 취지와는 먼 거리에 있다. 그것은 오직 호용의 관점에서 지식을 평가하기 때문에 내재적인 추구의 의미가 없다. 남의 것을 억지로 받아들인 지식은 우리의 신체나 정서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상구에 대한 무한한 갈망과 열정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다. 증득된 지식은 그런 갈망과 열정을 포함하며 탐구 자체가 하나의 보상임에 비해서, 지득된 지식은 외재적 조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보상이나 위협이 없는 한 유지되기가 어렵다.
셋째, 지득된 내용은 살아 있는 지식으로서 작용력을 상실하고 있다. 앞에서 지식의 정태성과 역동성이라는 범주에서 살펴보았듯이 증득된 지식은 항상 우리 자신의 일부로서 유기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지득된 지식은 당사자에게 소외된 형태로 마치 컴퓨터의 파일처럼 저장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복적이고 맹목적인 기능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남의 것을 모방한 지식은 물리적으로 통제된 것이기 때문에 주입될 당시의 특수한 맥락에서만 재생될 수 있을 뿐, 그 맥락을 떠나거나 벗어난 상황에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
넷째, 지득자에게는 그 창조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언어적 형식으로 나타난 지식을 단순히 모방한 사람과 그것을 이해한 사람의 차이는 참으로 크다. 이는 마치 선율을 기계적으로 재생해 내는 녹음기와 자기가 연주하는 선율에 도취되어 있는 음악가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지득과 증득은 결과에 있어서는 동일할지 모르나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후자는 더 나은 지식을 얻기 위한 과정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발전의 여지가 있다. 이에 비해 전자는 그것이 의존하고 있는 외재적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변화하기 어렵다. 새로운 경험이 주어질 때 지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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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지식들을 단순히 반복할 수 있을 뿐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다섯째, 지득자는 인식의 논의에서 고유한 공헌을 할 수 있는 책임 있는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다. 그들은 내적인 공감이 없이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승인이나 칭찬을 얻기 위해서 타인의 것을 모방하거나 타인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잉여의 인구, 더욱 정확하게는 괴뢰에 해당한다. 그들은 어떤 주장을 지지하는 사람의 명단에 숫자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수라는 것은 실제적 근거가 오직 그들이 따르고 모방한 몇 사람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서 지식의 독창적인 발전과 그것의 검증에 독자적인 공헌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