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사이펀 신인상(하반기) 김느티
걷지 못하는 나무 외 4편
종종 길을 벗어나는 일이 있다
늦은 아침이 오는 소리를
손끝으로 감지하거나
아삭거리는 무말랭이를 남편에게
슬쩍 밀어 놓거나 어제보다
이른 저녁 산책에서
길을 막고 있는 소나무를 보는
늦봄의 습설을 견디지 못해
뿌리를 드러낸 채 저리 드러누웠다고
했다 허약한 가지 몇 개 부러뜨리거나
지나가는 바람의 등을 두드려
빈 둥지라도 떨어뜨리거나
바위 위에 올라앉은 자신을
탓하지 않고 소나무는 저리 뉘엿뉘엿
길을 나서는 것이다
아마존 원시림 어딘가에
햇빛을 찾아 한 걸음씩 걸어가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밤새 노모를 병간호하면서 출근하던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다
어깨에 내려앉은 삶의 폭설을 털면서
그 나무는
사람들이 잠든 밤마다 울창한 별빛
길잡이 삼아 조금씩 움직인다고
어둠이 길을 밝혀 곁길로 접어드는 저녁
걸음을 멈춘 나무 가로질러
축축한 자리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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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풍경
골목이 풍경을 만드는 시간이 있다
소리가 길을 밀며 올라오고
어둠이 형체를 감춰 더듬거릴 때
둘도 셋도 아닌 혼잣말에 덜컥
걸음을 멈추고 한쪽으로 비켜서는
늘 혼자 중얼거리는 이를 당골네라 했다
그녀를 길에서 만나거나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왠지 오싹해 걸음이 빨라졌다
언젠가 그녀가 밭일할 때,
“혼자 먼 소릴 그리 해쌓소?”
엄마가 묻자,
“귀신이 자꾸 말을 걸어싸”
라고 했다
백팩을 멘 청년이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귀에 꽂힌 이어폰
혼잣말하듯 통화를 하는
소리가 골목에서 밀려나고서야 알았다
내 안에
혼잣말 귀신을 두려워하는
어린 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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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설
뒷산에 오르다 본 것인데
굴참나무 그늘에
흰 것이 납작 웅크리고 있던 것인데
발과 날개가 없어 언덕 너머
양지로 이사도 못 가고
파르르 떨고 있던 것인데
상형문자처럼 가슴팍에 찍힌
새의 발자국에 그만
신음이 터져 나오고
초등학교 때 서울로 전학 와서는
찬 그늘처럼 웅크린 채
앉아만 있었던 것인데
봄빛이 흘러들어오기만을 고대하며
날개를 키우고 있었던 것인데
벙어리냐는 짝꿍의 비아냥에
그만 머리끄덩이를 잡고 만 것인데
잔설에 찍힌 새 발자국을 본 순간
오래 잡고 있던 손이 풀린 것인데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발가락을
들여다보다가
녹지 않은 낙인을 허공에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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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 의자
태양이 떠오르면 느티나무는
지상에 의자를 내려놓는다
매미들 화음으로 여름을 달구는
그늘 의자에
걸음걸음 모여든다
그늘에 평상 깔고
부채를 날리거나 가져온
음식의 온기를 나눈다
그늘 의자 웃음 그물에는
걸리는 것도 잠기는 것도 없다
다 풀어져 순해진다
까무룩 선잠이라도 들면
내 것도 없고
네 것도 없다
나뭇잎 사이사이 빗질하는 바람에
햇살 잠시,
잠깐 머물다 사라지고
어둠에 잠기던 마음 한구석에
의자 하나 들려놓자
선한 그늘 한 자락
슬그머니
내 안에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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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 타기
거미의 아침은 이슬에서 온다
투명과 투명 사이
푸르스름한 애벌레 한 마리
외줄을 타고 있다
거미줄에 걸릴세라 손을 내밀다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일 야자나무에 오른다는
맨발의 가장이 생각나
개입하지 않기로 한다
맨발로 걷는 운동장
한 바퀴 돌고 와보니 그는
정지상태, 정신을 수습하고 기라도 모으는 중일까
다시 한 바퀴 돌고 오니 나뭇가지를 향해
삼 분의 이는 타고 올라와 있다
근처 영산홍 숲 사이에서 먹이 찾느라
부스럭대는 오목눈이 기척 듣고 있을까
한 바퀴 더 돌고 찾으니
온데간데없다 무사히
초록 요람에 도달했을까 거미보다 먼저
오목눈이가 다녀간 건 아닐까
삶은 한순간도 그냥 두지 않는다
맨발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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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당선소감 – 김느티
머뭇거리지 않고 시의 낯섦을 추구하겠습니다
2023년 겨울 《사이펀》을 처음 접했습니다. 다른 잡지보다 젊고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잡지를 펼치자마자 사이펀 문학상과 신인상 수상자의 화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신인상의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일로 미뤄야 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2년 동안 많은 시를 읽고, 썼습니다. 매주 시의 도반들과 합평을 하고, 철학 공부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시를 쓰는 일은 좌절의 연속이었습니다. 앞으로 나가는 듯하다가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는 나를 만날 때면,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정은귀 영시 번역가 겸 한국외대 교수는 시가 어렵다는 학생들에게 “혼자 낯섦을 대면하고 견뎌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그 낯섦을 헤집고 차곡차곡 시를 읽으면 “시는 혀가 음미할 수 있는 다양한 맛을 보여줄 거”라고 했습니다. 시를 쓰는 일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낯선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좌절하지 않는 용기 말입니다.
시의 낯섦을 대면하고 견디자, 어느 순간 시가 내게로 흘러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시가 축적되자 비로소 사이펀 신인상에 도전해볼 용기가 생겼고, 마침내 그리던 그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건 커다란 인드라망에 얽힌 연기(緣起)의 한 지점일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사이펀》과 심사위원님들, 곁에서 묵묵히 늦은 꿈을 존중하고 지지해준 가족과 ‘철학반’을 이끌어주신 한영옥 교수님, 늘 성원해준 김금용 동국문학회 회장님 고맙습니다. 이제 머뭇거리거나 뒤돌아보지 않겠습니다. 시의 낯섦과 새로운 세계를 위해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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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느티|본명 김애숙. 1957년 전남 순천 출생. 동국대 국어교육과 졸업. 중등교사로 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