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승 시인의 시집 [익어가는 시간이 환하다]
_ 소소한 것들로 흘러드는 시간 붙들기
- 박철영
가벼운 스침을 조우라 하던가. 시인과는 눈인사에 몇 마디 말을
더한 적은 있었다고 해야 무방하겠다. 그것마저도 스침 이상으로 나를 생각해주었다면 늦었지만 참으로 미안한
마음뿐이다. 수없이 사람을 만나는 나 자신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편하게 살아온 기억을 되짚어보니 부끄럽다. 낯설게 생각했던 간극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게 해준 김미승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익어 가는 시간이 환하다." 가 내게로 건네진 것이다. 그동안 몰라라 했던 시인의
속살까지 송두리째 담아 올린 시집으로 여지없이 한 대 주어 맞은 느낌이다
꽃그늘 아래
꽃과 잎의 거리만큼 상사하며
초로의 아낙이 씩씩대며 지나가고
삐딱구두 아가씨 먼 데 눈 맞추며 가고
단발머리 여학생이 숨차게 달리는
------ <그 익어가는 시간이 환하다.> 부분
"손주를 둘러업은 노파 한 분"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먼 훗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만개한 벚꽃 아래서 어쩔 수 없이 굽은 등에 아이를 둘러업어야만 했을
할머니의 고단함을 소화해내는 시간은 잠시지만 모든 것을 봄 꽃에 매여 잊었음 직하다. 눈앞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통해 할머니는 자신의 지나온 꽃 시절을 떠올리고 있음이다. 봄기운에 정신줄을 놓았던 망중한은
칭얼대는 아이를 통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만다. 현실은 잠시라도 곁눈질을 못하도록 다그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늙어간다는 것을 시인은 마냥 아쉬워하지 않고 "꽃잎들
하르르 하르르 쏟아진다." 며 아직도 자신은 꽃 같은 시절에 머물러 있다는 항변이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는 것이어서 화사하거나 환한 거와는 대비되어 어둡고 칙칙한 것이거나 서글픈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늙어가는 시간을 환한 것이다.고 굳이 강변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자신의 눈을 통해 본 늙어간다는 것은 <당신의
뒤>에서는 "재활용하기에는 너무 쇠한"것처럼 어쩔 수 없는 세월 앞에서 "숯 검뎅이 눈썹, 저 등등한 콧날 너머로" 가 아무 쓸모 없고 하찮은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만다. 시인도 어언 반백의 세월 앞에서 늙어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가를 예감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화해는 정말 화---해>의 "뜨거운 국물 퍼 먹다/입천장이 홀랑 벗겨졌다/처음 있는 일도 아니지만"에서 처럼 익숙하지 않은 시인의
시집속 시들과 맞닥뜨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뜨거운 국물을 퍼먹다."데인 것처럼 난감한 경우도 있다. 시는 그야말로 문자의
조합이고 글 쓰는 취향에 맞는 배열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시를 읽어가면서 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언어적 수사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즈음에서 더 이상 내 가슴을 열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져간 시도
부지기수다. 그렇지만 희미하게 사라지다가도 어느 순간 기억을 비집고 되살아나는 시도 있다. "익어가는 시간이 환하다"의 시집속의 시편들이
그랬다면 시인에 대한 결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시를 읽어가다 시인은 무슨 일을 하며 시를 쓸까. 모르는 삶이 사뭇 궁금해지기 시작해졌다. 경험적 현실에서 찾아가는
시편을 보며 삶은 누구나 자신의 몫만큼 가져가는 것임을 본다. 자신의 몫을 살아가면서 남의 몫까지도
아우르고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시를 통해 사는 방식을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여자를 찾아냈다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그녀,
천 년의 형벌을 받고 바위에 눌린 괴물처럼
장롱 밑바닥에 깔려
무너진 수평을 버티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어느 날
열사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그녀의 세상은 푸석푸석 말라 갔다
모래바람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음부를 틀어막았다
젖꼭지에 모래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서히 풍화되기 시작했다
자궁을 적출한 그 여자
모래 시간 속에서
모래 아이를 낳고
......건재했다
------ <모래시계> 전문
이 시 속에서 난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장롱 밑에서 수평을 이루기 위해 고임이 되어
있는 존재감이 상실된 시인. 그 어떤 곳의 중심이나 주체가 될 수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녀도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음을 시에서 말하고 있다. 풋풋했을 여자로서
시작은 화려했을 것이다. 어느 때부턴가 불어닥친 사막의 모래바람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고 어쩔 수 없이
여자이기를 포기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것들을 끝없이 내려놓아야 하는 <빅 피쉬>에서
"머리 따로 마음 따로/간 쓸개 빼놓고 살아온 지 오래"라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토록 자신을 질기게 괴롭혀 왔음을 알 수 있다. 여자이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그것은 극도의 공포이거나 절박할 수밖에 없는 고립무원의 사막 안에서 스스로 죽어
가거나 살아남기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그녀는 서서히 풍화되기 시작했다" 고 고백하고 있다. 그 시점에서 자신을 다 놓아 보내고서야 "......건재했다" 고 다시 한번 확인을 해준다. 헷갈리는 아이러니다. 여자임을 버려야만 가능한 남성 우위의 사회
구조 속에서 베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내는 시인은 어찌 보면 여자로 되돌아가 우리 앞에 당당히 서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팍팍한 일상이지만 자기중심이 아닌 주변을 아우르며 바라보는 시인은 소소한 일상의 재미난 풍경을 놓치지 않는다. 주변을 살피며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나이만 들어 그리 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
삶의 신산함을 온 몸으로 맛보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 후에야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
보이는 것이다. 시인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식은 믿음과 사랑이 결코 별개가 아니 여야 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싶은 거다. 질량은 생의 부피일 수도 있다. 부피는
삶의 무게여서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랑은 홀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사랑은 그래서 완벽한 중심이다.
십수 년 한자리에서 과일 노점을 하는
노부부, 또 자울 거리시네
자정 근처 한 여름 밤
슬하에 층층 수박, 참외 쌓아 놓고
당최 손님 맞을 염사 없으시네
지아비는 지어미 쪽으로 자울자울
지어미는 지아비 쪽으로 자울자울
------ <기울어진 잠> 부분
시로써 시인의 생각들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장면을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한낮의 피로에 겨워 졸고 있는
"자울자울" 대는 노부부를 통해 세상을 사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도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홀로가 아닌 누군가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싶은 거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관점은 상황에 따라 또 다른 곳까지 미치고 있다. <어떤 충고>의 "갓 발라 놓은 시멘트 길 위를/ 어린 발자국 두 개가 지나갔다."에서 시인이 지향하고 있는
환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빼뚤빼뚤 문장이 환하다."고
한 것도 모자라 좋아라 탄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시멘트로 갓 발라 놓은 바닥을 짓궂은 아이가 지나가며
남긴 발자국만으로 저토록 환해질 수 있다니. 어쩌면 시멘트 바닥은 시인이 극도로 싫어하는 대상일 수
도 있고 빼톨빼톨한 족적은 시인의 마음으로 찍어가는 저항의 문장일지도 모른다. 생각은 단순히 예쁜 아이의
발자국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곳까지 넘어서고 있다. 이런 속내는 술기운으로 여지없이 노출되고 만다. 평소에는 체념하듯 담담히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취하다>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금도를 단숨에 넘어서 버린 것이다. "문을
열었으니,/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한번 붙어볼까, 요 만만한 세상"을 이라며 불편한 것들을 꼬나보고 곧장
뒤엎을 기세다. 비록 여자이기를 포기하며 살았던 자신이지만 부조리와는 절대로 화해 할 수 없음은 확고하다는
것이다. 자신을 옥죄어 왔던 "엄중한 경고를 자근자근
밟으며" 걷어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씨앗의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는 봄은
오목가슴에 얹힌 겨울을 털어 내는 게 아니라
변종 바이러스를 유포한 셈이다
사방천지 켁켁 터지는
꽃들의 기침소리
그때
내 몸을 빠져나간 것도
동그랗고 세모지고 네모난
나였다, 너였을지도
우리는 서로에게 감염되었다
하여,
너 또 등 돌리고 간다 해도
더는 뼈아픈 그리움일랑 없겠다
사래 들린 미련일랑 없겠다
------ <등으로 오는 사람> 전문
시인도 천상 여자였고 이별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너는 모딜리아니
풍으로, 나는 달리 풍으로>에서 "네가 떠나던 날도/아주 잠깐,/주파수가 어긋났을 뿐이라는 군" 이라고 혼잣말처럼 서운함을
내비친다. 그렇게 떠나보냈지만 완전한 극복에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그거 아세요? 누군가를 지독히 사랑한다는 거" 에서는 사랑이란 게 뜻대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절대로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하필 시인은 등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상상하고
있었을까. 사람은 마주 보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어야 맞다. 시인에게는
오매불망 마주 보며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의 실체로 자신 앞에 나타나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는 뼈 아픈 그리움일랑 없겠다."며 물러설 수 없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감염되었다"고
에서 이미 속내를 보여줘 버렸기에 되 돌릴 수조차 없다. 우리는 홀로라는 매트릭스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허물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지금이라도 시간의 가치가
헛되지 않게 누군가에게 닿아 환한 사랑으로 익어 갔으면 좋겠다는 시인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