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 난곡은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는 옛 지명이다. 지금의 신림11동 난우초등학교 오른쪽과 문성골길 남쪽 마을을 본래 난곡이라 했지만,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던 개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서 난곡초등학교 일대의 딩굴[된굴-여기서 딩굴이란 지명의 내력을 살펴보면 강홍립 장군이 청나라에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어 이곳에서 청녀를 부인으로 맞아 살다가 작고한 곳이다. 그 당시 당쟁에 휘말려 그를 역신으로 여기고 때놈골(오랑캐를 칭하고)이라 부르던것이 어음변화로 딩골(된골)이 되었는데, 지금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과 더 위쪽 상류에 있는 비석말 일대까지를 모두 난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1년 경기도 동ㆍ리 통폐합 때 신림리로 통합되었다. 난곡은 진주 강씨와 전주 이씨들이 많이 살았고, 6.25전쟁 때는 58탄약창고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 전 서울시의회 강정석 의원의 선조들이 수십 대를 거쳐서 살아온 곳이며 난곡은 웃난곡(신림7동), 가운데 난곡(신림3동), 아랫난곡(신림11동) 등 셋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또한 난곡은 조선조 중조 때 문신인 강서(姜緖)의 호이기도 한데 강서는 우의정 강사상의 아들로 선조 때 남양부사, 좌승지, 인천부사를 지낸 분으로, 이 분의 호에 따라 지은 자연부락이라는 것이 마을 이름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지명 유래에 관해 옛 문헌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금천현 낭천리로 칭하였으며 이리가 많다 하여 낭주골, 낭곡동이라고도 불렀다. 이곳에 오래 기거한 진주 강씨 가문의 승정원 좌ㆍ우승지 강서가 1560~1580년경에 평소 마을 명칭이 좋지 못함을 꺼려 개칭코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을 입구 3~4분의 옛날 묘소에 묻혀 있는 좌상의 표석에 ‘난고리(蘭庫里)’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마을명에 별 뜻이 없고 여러 가지로 분분하게 쓰이고 있음을 깨닫고 이름을 난곡으로 바꾸어 호칭케 하고 자신의 호도 난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난곡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관한 또 다른 얘기는 이곳이 조선시대 명장 강홍립 장군이 유배되어 일생을 마친 곳으로 장군이 은거할 때 난초를 많이 길렀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왜정 때 공동묘지와 납골당이 많아 난골, 낙골이라 했다지만 공동묘지에서 유래된 말은 아닌 듯하다. ‘골’이란 ‘곡(谷)’의 우리말로, ‘난골’이란 ‘난곡’을 우리말로 나타낸 것일 뿐이며 낙골이란 현지의 지형을 가리킨 것으로 보여진다. 난곡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목이 있는데, 신림13동 721-2번지에 있는 굴참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이 나무는 수령이 1천여 년에 이르고, 키가 18m이며 둘레가 2.5m 가량 되는 거목으로 천연기념물 제271호로 지정되어 주민 모두의 공유물이 되었다. 오래된 큰 나무에 대개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내력이 담겨 있듯이 난곡의 굴참나무도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난 나무라는 전설이 있다. 수명보존(목신)과 동리의 안전을 위해 인근의 칠불사에서 음력 7월 1일과 10월 1일 고사를 지내고 있다. 난곡은 비운의 장군인 강홍립 장군의 묘터와 진주 강씨 일가의 묘역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강홍립 장군은 명종15년(1560년)에 출생하여 인조5년(162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자는 군신, 호는 내촌으로 진주 강씨다. 명나라가 요동반도를 침범한 후 후금을 토벌할 때 명나라 요청으로 조선 원군의 5도 도원수가 되어 부원수 김경서와 장병 1만 3천명을 거느리고 출정해 싸웠으나, 휘하 전군을 이끌고 후금에 항복하였다. 후금에 억류돼 있던 중 인조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의 선봉장으로 입국해 강화도에서 화의를 주선한 후 국내에 머물렀으나 역신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난곡에 유배돼 생을 마쳤다. 난곡은 현재 신림3동, 7동, 11동, 12동, 13동 5개동으로 행정력이 늘어나 인구가 10만 명이 넘는 주거밀집 지역이며 삼성산 밑에 위치해 관악구 서남쪽으로 금천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신림7동은 1968년 서부이촌동에서 집단 이주한 철거민 정착지역으로 그동안 판잣집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나 1995년부터 재개발 사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앞으로는 전형적인 전원도시로 살기 좋은 마을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또한 교통 해소책의 하나로 난곡에서 신림1동으로 터널을 뚫어 주민들의 왕래에 편리함을 주고 있는데 그 이름이 문성터널이다. 문성터널은 이곳 지리적인 배경으로 보아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차라리 난곡터널로 하는 것이 지역의 동명과 역사성으로 볼 때 합당하지 않나 생각된다. 비석마을 난곡 비석마을은 신림7동과 신림3동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진주 강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몇백년에 걸쳐 살았으며 이곳에 강홍립 장군의 조부 강사상의 묘와 신도비가 있어 비석말이라 이름하였다. 지금도 난곡 일대에는 진주 강씨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은정골 은정골은 관악산 입구 주차장에서 성불암을 지나 관악산으로 오르는 골짝이다. 옛날에 은이 나왔다 하여 은정골이라 한다. 채광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대략 신림9동 208번지의 훨씬 위쪽이다. 현재에는 금호아파트 및 건양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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