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열대야
소흔 이한배
연일 수은주의 높이가 신기록을 세우며 높아지더니 영주지방을 비롯한 몇몇 고을들은 40도를 넘겼단다. 뉴스를 보니 한강물 온도가 30도를 넘겨 물고기가 견디지 못하고 죽어서 둥둥 떠다닌다. 또 수영장 물 온도가 37도로 목욕탕 수준의 온도라고 기자가 직접 온도계로 재서 보여준다. 낙동강, 금강에 올해도 녹조가 발생하여 보(洑)들을 열어 제치고 물을 빼낸다고 야단이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주민들이 못 열게 하고 그 물을 가뭄이 심한 지역에 끌어다 쓰기도 한다.
밤에 25도가 넘으면 ‘열대야’라는데 30도가 넘어서서 내려갈 기미가 안보이니까 ‘초열대야’라는 신조어도 만들어 낸다. 우리나라의 여름 기온이 자꾸 올라가 머지않아 50도를 넘긴다고 기상학자들이 겁을 준다. 영동군엘 갔더니 도심 아스팔트 도로에다 살수차를 동원하여 물을 뿌려댄다. 그런다고 얼마나 시원 해지겠냐마는 보는 시민들은 시원함을 느껴 좋다고 한다.
나는 살인적인 초열대야를 에어컨도 없이 버티어 내고 있다. 지난겨울 생전 처음 아파트로 이사와 아파트에서 여름나기는 처음 경험하는 거다. 그 첫 경험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동안도 평생을 집에 에어컨이 없이 살았다. 주택에 살 때는 아무리 더워도 밤에 문을 열어 놓고 자면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바람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에어컨을 안사는 이유 중에 하나가 그 바람의 맛 때문이기도 하다.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감칠맛 때문에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무던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직전 지하수 찬물로 샤워를 하고 드러누우면 창문 너머에서 살포시 불어 들어오는 바람. 세상 어느 것보다 귀하고 맛있어 슬며시 잠들 수 있음은 여름철에만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거기다 입추 때 쯤 되면 가을이 오는 소리들을 제일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또한 에어컨이 있으면 도저히 느껴 볼 수 없는 행복이다.
사실 그 바람은 집 주위가 잔디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 도시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 주는데 있다. 앞마당에 화초와 잔디, 뒤뜰에는 텃밭과 울타리나무들, 그 너머에는 공원이 있었다. 또 지붕이 있어 햇볕을 저만큼 떼어 놓는다. 거기다 방바닥에 누우면 차가워서 등이 시원했고 창문 밖에 풍경도 녹색이라 보는 눈 또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호사들은 주택에 살다보니 가능했다는 생각이 이 여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15층이라 지열도 못 올라올 줄 알았는데 나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아파트 건물 자체가 뜨겁다. 햇볕의 열기를 맨몸으로 받는 벽은 물론이요 바닥도 겨울에 보일러를 켠 듯 뜨듯하다. 처음엔 보일러의 난방은 끄고 온수만 나오도록 설정 해 놨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난방도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예 전원을 꺼버렸다. 그래도 마찬가지다. 주택에서 느끼던 그 차가운 바닥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밖에서 바람이 들어온들 시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차라리 맨 아래층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 건물 사이에 심겨져 있는 나무들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15층이다 보니 나무들은 저 밑에 있어 보이지도 않고 사방을 둘러봐도 열기를 가득 먹음은 시멘트 구조물만 보인다. 시원함이 아니라 숨이 턱 막히는 열기가 느껴져 내다 볼 수가 없다. 창문을 모두 열어 놓다보니까 온 동네 소음은 다 들린다. 사이렌 소리, 오토바이 소리, 멀리 있는 고속도로 소음까지 나를 더욱 덥게 만든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높으면 시야가 넓어서 좋다고 생각 했었다. 또 문을 다 닫고 사니까 시끄러운 줄도 몰랐다. 초열대야가 어느 날 갑자기 오기 전까지 그 생각은 맞았다. 창문으로 내다 봤을 때 녹색의 숲이 보이는 것과 시멘트 숲이 보이는 것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지금 내겐 모든 게 충격이다.
밤마다 어찌나 더운지 땀이 온몸을 적신다. 나는 견디다 못해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내와 집을 나섰다. 계곡을 찾아 피서를 가기 위해서다. 지난봄에 지인들과 가 봤던 거창 금원산계곡이 생각나서 무조건 달려갔다. 그 계곡의 여름은 역시 시원했다. 하루 종일 유안청 폭포 앞에서 폭포소리 들으며 발 담그고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 왔는데 현관문을 열자마자 다시 후끈한 열풍에 숨이 탁 막혀온다. 사우나도 이런 사우나가 없다. 집에만 있을 때는 그래도 이렇게 까지 덥진 않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하루 종일 시원한 곳에서 보내다 보니 몸이 그새 더위의 적응능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런 더위에는 피서를 한다는 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나 보다.
또 며칠을 헉헉대며 나는 이 더위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한다. 아예 내년부터는 여름을 강원도 홍천 선산에 있는 묘지기집으로 가서 날까? 어느 계곡을 선택해서 텐트를 치고 여름을 나볼까? 그러다 홈쇼핑에서 에어컨 파는 방송을 보면서 아파트에서는 에어컨이 해결책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설치하는데 15일쯤 걸린다고 한다. 15일이면 더위는 가고 없을 때 아닌가? 그럴 바에는 오는 겨울에 사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결국 포기하고 맨 몸으로 초열대야와 대결을 계속한다.
그렇게 대결을 하고 있는 중인데 어느 날 밤 홀연 바람 끝이 달라짐을 느낀다. 남들은 계속해서 초열대야라며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더위의 끝자락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맘때 옛날 집 같은 시원함은 아니어도 바람 끝이 식어져 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여름의 무더위를 온 몸으로 부닥치며 이겨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격이랄까? 아무튼 나에겐 반갑고 기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바람 끝이 시원해질 무렵이면 그 시원한 바람결에 풀벌레 소리도 함께 들려와 더욱 반갑게 하는데 여기 아파트 15층에선 언감생심인 것 같다.
더위 헉헉대다가 내가 그 더위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덥다.’ 라는 것도 그걸 피하려다 보니 생기는 인간의 변덕인지도 모르겠다. 정면으로 부닥치면 오히려 더위를 덜 느끼는 것 같다. 더위를 피하려고 해수욕을 가고 계곡을 찾고 에어컨을 켜고 하다 보니까 더위에 적응을 못하고 계속 더 덥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더워 더워하고 있으니까 더 더운 것이다. 언론매체들이 더위를 잊지 못하게 호들갑을 떨어 대지만 그래도 뭔가에 빠지다 보면 더위를 잊게 될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소서팔사(消暑八事)라고 해서 여덟 가지 삼매경에 빠져서 피서(避暑)가 아닌 소서(消暑)로서 더위를 잊고자 했었다. 법정스님은 더위를 이기려면 나 스스로 더위가 되라고 어느 해 하안거 법문에서 말했듯이 나처럼 온 몸으로 돌파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지만 올 여름은 더워도 너무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