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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초향 문학방 원문보기 글쓴이: 초향
안동교구 약사와 그 속에 담겨진 영성
휴천동본당 조마르첼라 (평진)
※ 역사가 지나간 자리에는 인물과 유적이 남아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위인으로 남고, 부정한 일을 한 사람은 악인으로 남게 되듯이
이렇듯 인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분명한 자취로 남게
마련이다. 이제 안동교구의 지난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교구 일을 함께 생각하고 더 낳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일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 안동교구 ( 지역 사회에 열린 가난의 영성 )
<사목 비전>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 안동교구 신앙의 씨앗 : 농은 홍유한 선생
안동교구 지역에 복음 전파의 싹은 바로 한국 교회의 최초 수덕자이신 농은 홍유한 선생의 수계생활에서 발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풍산 홍씨(豊山洪氏) 홍유한은 1726년(영조 2년),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홍창보(洪昌輔)이고 모친은 창령성씨(昌寧成氏) 훤의 딸이다. 그 선조들의 고향은 안동현 풍산이다. 홍유한 선생은 자(字)는 사량(士良)이며, 호는 농은이다.
홍유한은 16세 때 실학의 대가인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1750년부터 성호 이익이 제자들과 함께 서학문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직방외기(職方外紀)」등을 공부하였고,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서학의 책들을 읽고 연구하며 수계생활하기를 원하였으므로 문중이나 주위에서 압력이 가해졌다고 한다.
마침내 성호 이익 선생이 권하는 대로 산속에 기거하며 치료와 휴양을 하기 위하여 서울 집을 팔아 친척들이 살고 있는 충청도 예산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그는 천주교를 더욱 깊이 연구하는 한편 자신의 호를 농은 이라고 지어 18년 동안 조용하게 수계생활을 하였다. 1775년 수계생활에 더욱 적합한 곳을 찾아 영남지방으로 내려와 소백산 아래 순흥 고을 동쪽 십리에 있는 단산 구구리(배나무실)에 머물게 된다. 이곳에서 더욱 전심전력으로 「칠극」에 의한 수계생활을 하는 한편, 뜻있는 학자들과 서로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의 홍유한의 수계생활은 천진암보다 4년 앞선 것으로 실로 그가 한국교회의 최초의 수덕자임을 알게 하여 주며, 실로 경상도 북부지방(현 안동교구 지역)에 최초로 복음의 말씀을 가져온 분임을 시사해 준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없으며, 1785년 1월 30일(양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나자 그 해 4월 19일(양 5월 27일)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장되었다
◈ 안동교구 설정배경
1911년 설립된 대구교구는 경상도 지방을 관할하면서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 왔다. 1954년 경남 감목대리구를 설립하고 이어 1957년 부산교구를 설립하여 경남지방을 사목하게 하였다. 1953년 왜관 감목대리구를 설립하여 왜관으로 피난 온 성 베네딕또 신부들에게 경상북도 서북부 지방인 상주, 문경, 김천, 금릉, 선산, 성주, 칠곡 지방의 사목을 위임하였다. 1958년에는 충남 감목대리구에서 일하던 파리외방 전교회 신부들을 다시 초빙하여 안동 감목대리구를 설립하고 경상북도 동북부 지방인 안동, 영주, 영양, 봉화, 예천, 영덕, 영일, 포항, 청송지방의 사목을 위임하였다. 이후 활발한 포교활동으로 1966년 대구교구장 서정길 대주교는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사목할 새 교구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안동교구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안동교구의 관할 지역은 안동 감목대리구 지역인 안동, 영주, 영양, 봉화, 예천, 영덕, 청송지방이었으며 영일과 포항지방은 대구교구로 넘어가고, 대구교구 지역인 의성지방과 왜관감목대리구 지역인 상주와 문경지방은 안동교구로 편입되었고, 원주교구의 지역이었던 울진이 안동교구로 편입되었다.
마침내 1969년 5월 29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경상북도 북부지방을 대구교구에서 분리하여 안동교구로 설립하고 초대 교구장으로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이며 대전교구 상서국장 겸 대흥동 본당 보좌신부였던 두봉 레나도(Rene Dupont)신부를 임명하여 7월 25일 주교 성정식 및 착화식을 가졋으며 주교자 성당은 ‘원제없이 잉태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를 주보 성인으로 모신 안동성당으로 정하였다
새 교구의 정비
초대 교구장 레나도 주교시대
교구 설정 당시 18개 본당 175개의 공소가 있었으며, 성직자는 주교 1명에 외국인 신부 17명, 한국인 신부 2명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봉 주교는 새로운 교구에 당시 막을 내린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새로운 교회상의 모습에 따라 교구를 이끌어 가려고 하였다. 주봉 주교님은 취임사를 통해 성경의 산상설교 참행복 ( 진복팔단 )을 인용하여 모든 성직자와 신자들이 한데 모여 새교구를 만들고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어 ‘ 이 사회를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도록 봉사’ 하자고 하셨다
대부분이 피폐한 농촌지역인 안동교구에서 초창기에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사제수급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였다. 두봉 주교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내적으로는 사제들에게 가난의 영성을 강조하였고 현실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많은 외국교구와 기관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사제단의 형제에를 강조하고 본당간의 유대강화와 작지만 서로 나누고 함께하는 모습의 교구 본당을 만들기 위해 수차례 사목서한을 각 본당에 보내기도 하였다. 이것은 1970년 교구를 5개 지구로 나누면서 한국 최초로 지구별 사목회와 공동사업추진이라는 형태로 드러났고, 1971년도에 사제단의 미사예물 공유화라는 이름으로 사제단의 형제적 결속은 더욱 강화되었다.
초창기에 사목 전 분야에 있어서 조직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교구와 교구네 각 본당은 여러 차례의 사목서한을 통한 조직화와 방문을 통해서 조금씩 정리되어 갔고, 이와 더불어 지역 내 주민들의 여러 가지 필요성들에도 귀를 기울여 이미 설립된 한국최초의 전문대학인 상지전문학교에 이어 상지여자중학교가 1972년도 설립되었다. 또한 농어촌이란 지역 사정에 부합한 경제적 발전을 위해 각종 신용협동조합이 설립되었고, 1972년도 어민들을 위한 해성협업회가 설립되면서 어업의 현대화와 가난한 어민들의 삶의 희망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하였다. 유교적 뿌리가 깊은 안동지역에서 교회와 유교적인 사회와의 대화와 상호존중의 정신으로 복음전파를 이루기 위하여 1973년 안동 동부 동에 문화회관을 준공하게 되었다. 그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공간은 시민들을 위한 열린 공간으로서 각종 회의장과 극장 강당 숙박시설의 복합건물 안에 또 성당이 들어가 있는 건물이었다. 한편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관심을 소홀히 하지 않아 교구장의 방침에 따라 1973년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이 설립되게 되었다. 시민들이가톨릭을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하고 시민을 찾아가는 선교를 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였다
◈ 농촌 사목과 정의평화 운동
1)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는교회
교구가 설정되어 5-6년간 기초를 다지는데 역점을 두엇지만 외향적 활동인 사회 문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75년 사목방향의 세 가지 목표는 첫째 내적 쇄신 ( 기도생활 충실.충분한 연구시간 갖기.좀 더 가난하게 살기)
둘째 외향적 활동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구조 개발에 앞장서자 .사회 지도자가 되자.행복한 가정 운동을 벌이자) 셋째 조직 강화에 두었다. 당시는 유신 독제시대로 사회 정의가 무너지고 경제개발이란 미명아래 인권이 유린되는 시기였기에 인권이 유린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농어민을 포함한 서민들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였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정의에 대한 표명은 우리나라의 진정한 민주화 운동과 농민운동에 동참하는 교회의 참다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정신은 1976년 3 · 1절 명동성당 기도회 사건을 필두로, 1977년 농민, 근로자, 양심수를 위한 안동 동부동 성당에서의 기도회 등 민주화와 농민들을 위한 수많은 기도회와 미사 거리행진 등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교구 창립이래 농촌 본당을 사목하는 농촌교구로서 농민의 권익보호와 농촌을 살리기 위한 운동에 앞장섰던 안동교구에서는 교구청 사목국 내에 농민 사목부를 설치하고, 공소를 중심으로 현지에서 농민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 가톨릭 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됨으로써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권익보호에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펴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한국 역사에 뚜렷이 남아있는 것이 바로 1878년도 이루어진 일명 ‘오원춘'사건이었다. 당시 농민회 영양군 청기 분회장이었던 오원춘 알퐁소 씨가 영양군에서 권장한 씨감자가 80% 이상이 싹도 트지 않아 경작에 극대한 피해를 농민들이 보게 되면서 청기분회를 중심으로 당국의 책임을 추궁하는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오원춘씨가 영양에서 납치되어 포항과 울등도를 거쳐 올라왔고, 이 사실을 확인하고 항의를 하다 중에 당시 사목국장인 정호경 신부와 농민회 총무 정재돈씨가 연행 수감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이후 이 문제는 전국 교구에서 기도와 단식이라는 형태의 시위로 확대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갔고, 마침내 외무부에서 두봉 주교의 자진 출국명령에 이르게 되었다. 두봉주교의 추방은 교황청과 한국 주교들의 면밀한 요청으로 철회되었고, 오원춘씨는 몇 차례의 재판 끝에 실형을 구형받았고, 1979년 박정히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최규하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를 해제로 석방되면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2 ) 어려운 이웃과 하나 되는 교회
마침내 교구에서는 1981년에는 지역농민들의 농촌문제 연구와 개발 및 농민운동의 집회와 강연회 장으로서 농민회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후에도 수차례 소 값 피해 보상요구, 조합장 직선제, 농가 부채 탕감, 민주 농협 및 의료보험 통합제 쟁취 등의 사회운동에 동참하는 한편 여성농민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 가톨릭 농민회의 운동 방향이 생명의 농업으로 변화함에 따라 교구 내에도 이에 부흥하는 농민운동의 형태가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농민 생산자와 도시 소비자들의 생활협동조합의 형태를 띠는 “생명의 공동체” 운동과 유기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우리 농산 한 생명”의 발족이다. 생명의 공동체 운동은 소공동체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한국 천주교에 안에서 가장 처음으로 시도된 소공동체 운동이기도 하였다.
◈ 제 2대 교구장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
초대교구장이셨던 두 봉 레나도 주교는 교구장 취임 때부터 한국교회의 발전에 비추어 방인 주교가 교구를 맡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취임 후 21년간 4차례나 사직의사를 교황청에 밝힌바 있었고, 마침내 로마 교황청은 1990년 10월 31일 대구교구 소속 박석희 이냐시오 신부를 새 교구장에 임명함으로서 이 원의는 실현되었다. 이로써 안동교구는 초창기의 교구정착 과정을 거쳐서 이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지역 안에 더욱 열린 교회 - 교구의 정착과 발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사목표어를 가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박석희 아냐시오 주교는 지역사회에 열린 교회라는 전통을 더욱 발전시켜서 지역민들에게 더욱 봉사하는 교회 상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절대적 빈곤의 탈피와 생계유지를 위한 노력에서부터, 이제는 삶의 질을 좀 더 향상시키는 방향에서 교구의 관심이 더욱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교구 내에 사회복지사업이 강조되어 박석희 주교의 재임기간에 19개의 사회복지시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박석희 주교는 본당이 지역의 복지관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지역사회 안에서 지역민들의 고통을 껴안고 함께하는 교회로서의 안동교구를 발전시켜 나갔다.
순교신앙 - 안동교구 영성의 뿌리
이러한 영성의 뿌리는 바로 이곳 안동교구 지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순교 성인들의 삶에 있다고 본 박석희 주교는 한편으로 순교신앙의 계승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수차례 걸쳐 신앙의 뿌리 찾기 운동이 이루어 졌고 그 결과로 여러 개의 순교신앙 성지가 조성되었다. 또한 순교신앙을 이어받아 오늘의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 선생의 묘소를 조성하고 그 옆에 우곡 피정의 집과 청소년 수련원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안동교구의 이러한 모든 노력들은 마침내 25주년을 맞으며 개최된 교구설정 25주년 기념행사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25주년 기념행사의 주된 정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안동교구의 25년의 삶은 바로 “1) 믿음과 삶이 하나 2) 지역민, 지역사회에 열린 교회 3)작은 교회 지향 4) 신앙 선조들의 신앙계승 5) 생명이신 하느님께 돌아가자”를 실현시키기 위한 쉼 없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자체 교육관 건립을 추진하였는데 1995년도에 시작된 이 교육관은 1997년 9월에 준공되면서 지역민들에게 열린 교육과 기도와 휴식의 공간임을 천명하게 되었다.
농민운동 : 생명운동
농촌의 문제는 역시 안동교구의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생명운동으로 전환된 가톨릭 농민회의 방향과 더불어 교구네 소공동체적인 생명운동으로서 시작된 “생명의 공동체”는 더욱 발전되어 교구네 각 지구에 소공동체 형식으로 소비자와 생산자의 모임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또한 가톨릭 농민회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우리 농산 한 생명”사업은 대구 대교구와 연계하여 도시 소비자들에게 생명의 먹거리를, 농촌의 농민에게는 노동의 댓가를 보장하는 생협형태의 것으로서 우리나라 생협운동의 초창기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 운동을 통하여 생명의 소중함과 우리 먹거리의 소중함을 도시 소비자들에게 일깨워 주면서, 더불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주위의 자연들의 소중함도 일깨워 주기 시작하였다. 농민운동에서 시작된 생명운동은 전 교구 신자들에게 확산되고 한국 천주교회의 방향에도 주된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9월 24일에 안동교구에서 전국 생명 · 환경 신앙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의 열매를 보게 된 것이다.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의 선종
그러나 채 이 희년의 축제가 끝나기도 전 2000년 10월 9일 10년간의 새로운 교구발전을 위해 노력하시던 박석희 이냐시오 주교는 60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창 건강해 보이시던 주교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교구 참사회의에서는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김욱태 레오 신부를 교구장 직무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직무대행체제에 들어간 교구는 박석희 주교의 장례와 함께 교구의 모든 본당을 수습하면서 또한 새로운 교구장을 빨리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사건이라 교구장의 공석 상태는 1년여의 기간 동안 지속되었고, 마침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2001년 10월 31일에서야 안동교구 쌍호공소 출신의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를 새로운 교구장에 임명하게 된 것이다.
◈ 제3대 교구장 권혁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가난의 영성을 살기 위하여
두봉주교에 의해 기초가 다져지고 박석희 주교에 의해 발전을 거듭한 지역사회에 열린 가난의 영성의 교구 전통은 2001년 12월 4일에 착좌한 교구 출신의 권혁주 주교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사목표어로 삼은 교구는 지역민의 가난과 아픔에 더 가까이 다가가며 안동교구 지역의 가난한 현실을 좀더 체계적인 가난의 영성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하고 있다. 복된 가난의 영성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 안동교구는 이러한 영성화의 작업과 실제 지역민들의 사정을 더 잘 알고 함께하기 위하여 2003년 3월에 복음화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단계별 프로젝터를 마련하여 이 지역 안에서 좀더 구체적인 복음화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복음화 특별 위원회는 1차적으로 농민사목 실태조사 실행위원회를 구성하여 내적, 외적으로 교구 지역의 사정을 알아보고 교구 사목의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