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임하소서 내 마음에 암흑에 헤메는 한 마리 양을 태양과 같으신 사랑의 빛으로 오소서 오주여 찾아 오소서
내 피요 살이요 생명이요 내 사랑 전체여 나의 예수여 당신의 사랑에 영원히 살리라 오 내 주 천주여 받아 주소서
내 나아 가리다. 주 대전에 성혈로 씻으사 받아주소서 거룩한 영이여 구원의 성체여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소서.
지난 토요일 6월9일 날
장녀 결혼식 마치고 집에 도착하여
지인과 답례 인사차 통화중에 뜻하지않은 소식을 접하고
그간 고인의 행적을 유추해 보았다.
고인은 1979년에 서울신문에 입사하여 1988년까지 사진제판 에 근무하고
국민일보 창간 맴버로 국민일보에서 화상부장으로 10여년간 재직중에 명퇴하여
최근까지 노부모 병간호로 인해 줄곧 휴직상태였다.
올 봄 4월에 아버님이 지병으로 작고한 후로는 심한 우울증으로
더욱 바깟 출입을 자제하는등 대인기피증세까지 있었다.
윗 사진은 올해 5월11일 소요산 화상부 모임이 마지막 고인의 모습이다.
큰 아이 혼사문제를 경황이 없어 한동안 부원과 안부전화를 잊고 지냈는데
지난 5월11일 저녁 8시50분경에 연락바란다는 서너통의 문자를
확인 후 30여분간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계속해서 통화중이라고 해서
그날은 통화를 못하고 다음 날 출근해서 마지막 통화을 했다.
같은시간 연락 바란다는 메세지는 여러지인과 한것으로 확인되었다.
무슨일 이냐고 물으니 평소 그 답지않은 어투로 말을하고
딸 결혼식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소 짜증스럽고 퉁명하게 전화통화를 했던게 맘이 걸린다.
전화 통화 후 그 다음 날 의정부 볼일이 있어 버스를 기다리는데
힘없이 언뜻 스처지나가는 사람의 옆모습을 보니 어디서 본듯했다.
저만치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뒷 모습을보니 고인이 맞다.
땅만 바라보며 힘없이 서있는 모습이 축은하게 보였다.
부를까 말까 하는 참에 신호가 바뀌어 건너간다.
외롭게 살았을 고인을 좀더 따뜻한 말 한마디 술 한잔 함께하지 못하여
맘이 무겁게 짓누른다.
살아생전 법 없이도 살 았던 빈틈없이 반듯하던 서울 신사였던
고인이였기에 저승에서는 이승에서의 모든 시름 다 잊고 편온하게 영면을 취할 것 으로 믿는다.
부디 故人의 冥福을 바란다.
2012. 6. 12일
故人의 동료 愚奉 이가.
첫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뒤늦게 소식을 알게되여 속상해 하시는 분들이 많은듯해서 정리해올렸습니다. 윗글 이상도 그이하도 없으니 달리 고인에 대한 추축성 판단은 삼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속상하고 안타깝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고인의 영면을 위해 명복을 빌어주는게 최선이고 고인에 대한 예라고 생각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립시다.
결혼식장에 갔다가 그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읍니다.
법없이도 살 반듯한 선배이셨었는데...
비통한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달리 조문할 방법도 없어더욱 안타갑습니다.
집전화는 물론 핸펀 번호도 결번이더군요.
뜻밖에 소식을 접하고 사실로 믿어지지않는 심정이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사망 일시라도 알아 보려고 했는데 지인들 중에는 사고 경위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카더라만 있어 인생 무상함을 느낍니다.
어찌 이런일이...
진심으로 김 명철님의 명복을 빕니다
내 동네에 살면서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외면하고 살 듯 하였는데...
길에서 만나서 너무나 반가워 두 손을 꼭잡고 한참을 이야기 했었는데...
삶의 여정이 이리도 허무한 것인지...
하나둘씩 우리곁을 홀연히 떠나가니 인생사 귀거래 귀거사요 허무함을 어찌말로 표현 하리요.
우리동료 주변에 사람이 사무치도록 그리워 하는
동료가 있는지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면서 살펴보고 오로움을 서로 공유하고 삶의 버거운 짐을 나누워 갖을 수 있도록 주변을 살펴 보아야
겠습니다.
믿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아니길 바랬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꿈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오는 허탈한 심정입니다.
이제는고인을 놓아 드려야 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비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