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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3월호 표 지 작 가
오 유 화
Oh - You Hwa
體驗의 美學을 통하여
韓國性 追求하는 畵壇의 女流
김남수 / 미술평론가
글머리에……
한국미술의 세계성 추구, 세계의 예술양식과 접목하고 공존하는 작업은 우리미술의 생존을 위한 초미의 과제다. 그동안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가장 세계적인 그림'이라는 논리가 아직도 화단의 일각에서 집요하게 주창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러한 독선적인 주장이 세계시장에서 공인을 받지 못할 때 한국미술은 편견과 아집의 덫에 걸려 국제미술시장 사생아나 고아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열린 미술환경 속에 살면서 이렇듯 폐쇄적인 사고나 자기아집의 발상은 자칫 스스로를 폄하하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된 시각, 즉 선진국의 예술이면 무조건 좋다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버린 지난날의 사대주의적 발상이나 관행은 서구문물이 우리나라에 수입 된지 거의 7, 8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굴레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심한 갈등과 모멸감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행이도 일부 원로나 젊은 후배들이 우리미술의 잘 못된 방향설정에 자각을 하고 한국미술의 현주소를 찾기 위한 집요한 노력들이 여러 징후를 통하여 발견되고 있는 것은 한국미술의 좌표에 푸른 신호가 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화의 예술양식에서 주제와 기법, 소재로서의 한국성화(韓國性化)는 서구주의에서 탈출하는 첩경이며, 세계미술환경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사족이지만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 서양화가 이한우는 지난해 12월, 프랑스 상원 '룩상부르'미술관의 초대를 받았다. 동양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오, 한국으로 보아서는 미술사적 사건이며 개인은 물론이요, 국가의 이익과 관련한 영광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선택된 이유는 양화의 한국성 추구에 있다. 한국의 고유한 민족미술이 세계의 미술양식과 맞아떨어진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유명작가가 탄생한다는 것은 일석삼조의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외화획득, 둘째는 관광객의 유치, 셋째는 미술산업의 세계시장화 등이다. 예술행위가 갖는 노하우는 이토록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十長生>
본란에서 집중 탐구코자하는 표지작가 오유화의 작품세계도 이러한 컨셉과 관련한 가능성을 가진 화가가 아닌가 싶다. 그의 최근작들을 보면 한국정신의 모랄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장생도(長生圖)' 시리즈가 전개되고 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꼽는다 하지만 십장생의 덕목으로 해, 구름, 물, 돌, 소나무, 대나무, 지초, 거북, 학, 사슴 등은 상서롭고 신성한 영물로 영원히 산다는 장생의 이미지로 역대의 미술가들이 이를 즐겨 그려왔다. 물론 이러한 화목(畵目)들이 소재로 등장한 것은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민속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 정신주의는 동양사상의 사유의 철학에 기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월 7일부터 13일까지 과천 갈현리미술관에서 가진 이 미술관의 개관 1주년기념 초대전에 선을 보인 작가의 작품 <십장생>은 한국의 서양화단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한국미술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문제의 작품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와 발상, 방법론 등에서 표현주의 예술양식을 도입하고 있는 화법이 참신하면서도 전통적인 소재의 현대화작업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인의 설화적인 신비와 기복신앙, 염원과 기도가 이 '장생도' 속에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제의 작품 <十長生>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존공간을 무릉도원의 선경(仙境)으로 환치(換置)하고 그 속에 해와 구름, 물, 돌과 소나무, 대나무와 지초, 학과 사슴, 거북 등을 그리고 있다. 섬세한 필치와 극세필 묘법 등 초현실주의 화법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이 작품은 양화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서 한국미술의 창조적인 비젼이 점쳐지고 있다. 앞으로 십장생 등 한국성 예술양식을 본격적으로 탐구하여 발표하겠다고 의욕적인 결의를 다짐하고 있는 작가는 "비록 화구(畵具)와 매재(媒材)는 서양 것이지만 정신과 주제, 방법론 등은 한국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만이 국제경쟁력에서 살아 남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라고 작가는 소신을 편다.
作品世界 展開過程
예술작품의 본령은 아름답고, 인간에게 감동을 주고, 그 아름다움은 영원해야 된다는 것을 필자는 평소 역설해 왔다. 물론 이러한 요건이 갖추어지면 세계적인 명품이요, 명화가 되는 것이다.
오유화는 미국 LA에 있는 퍼시픽웨스턴대학에서 순수미술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작품의 실기전형과 심사를 거쳐 받은 학위이기 때문에 이것이야말로 진짜 박사학위가 아닌가 생각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신념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미술이란 본시 아름다운 것이요, 미학도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미학에서 아름다움의 균형이 깨지면 이미 미술을 떠난 것이지요."
그가 설치나 행위 등 모던한 현대미술을 싫어하는 것도 미가 결여된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미술의 추세는 어떤가. 예술가가 한 가지 예술양식이나 장르에 매달려있는 것은 매너리즘이나 침체에 빠지기 쉽고 조형의 영역이나 폭이 좁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탈 장르화 혹은 작업의 양식이 다양하고 포괄적인 성향으로 행해질 때, 그 작가는 보다 스케일이 크고 대범한 화가로서, 혹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화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세계의 유명작가나 선배작가들의 체험을 통하여 경험한 바 있다.
오유화는 작업활동의 연륜만도 30년을 헤아린다. 작가가 사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처음 작품전을 선언한 것은 그의 신중하고 조심스런 성격 탓이다. 이제 그가 공인이 될수 있는 재능과 자질, 실력을 고루 겸전했다는 간접적인 시사가 된다.
그래도 작품 발표전의 결심을 굳히기까지에는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는 것이 지난날의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사려깊은 미술인이었는가는 요즘 성급하게 대성하려고 하는 일부 작가들에게는 큰 귀감이나 사표가 되는 바람직한 예술가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93년부터 서양화를 최예태 스승에게 사승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말하자면 동서양의 미술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체험의 미학을 천착했다. 그의 예술의 진폭이 크고 다양한 것도 실기탐구의 영역이 넓고 깊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유화 작품의 전개과정이나 변화주기를 요약해서 분류를 해보면 초기 13, 4년은 극사실주의에 바탕한 철저한 아카데미즘을 추구했다. 이 무렵은 캔버스를 실크지로 사용하는 등, 소묘와 드로잉, 누드와 인물의 크로키 등 기초적인 훈련을 쌓았다. 그러다가 88년부터는 유화와 함께 동양화의 사군자나 문인화 등 수묵조의 발묵법이나 용필용묵을 익혔다. 말하자면 조형적인 깊이나 시각이 넒어지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다시 본격적인 유화를 시작한 것은 지난 90년부터이다. 다만 지난 반세기 동안에 장르와 양식을 자유분방하고 작가의 취향에 따라 자유자재롭게 넘나들었던 예술 중에 꼭 변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라면 '아름다운 형상의 추구'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시종일관 미의 극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작가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시대의 편승, 주위의 유혹에 한 눈을 팔지 못하는 외곬수 고집과 신념과 의식을 가진 화가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니멀아트나 포스트 모더니즘, 컨템프러리나 설치미술을 전혀 의식을 하지 않는 화가다. 주위의 충동이나 자극 때문에 어쩌다가 전무 후무하게 추상작품을 한 점 만든 적이 있지만 본인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아 손을 떼었다고 한다.
오유화 작품의 특징은 정물과 풍경 누드와 인물 등 주어진 소재는 무엇이나 소화해 내는 재능과 기량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징을 꼽는다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정신 못지 않게 표현기법이나 색채의 마술적인 표현력, 굳이 그가 좋아하는 피사체의 선택 등을 들을 수 있다. 가령 그의 작품의 분위기나 톤은 아름다우면서도 넉넉한 윤기가 솟는다. 생명력이 살아있는 듯한 싱싱한 과일, 적요한 어둠을 밝히는 심산유곡의 여명, 청윤한 기운이 감도는 습한 계곡의 정취, 푸른 청색이나 에메랄드 빛깔의 녹색, 회백색을 주조로한 계곡의 다양한 변화 등을 지적할 수 있고, 또한 그가 즐겨 다루는 꽃 그림 등은 화사하고 꽃의 향기 등 생경한 맛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그가 외국전을 통하여 크게 부상한 것은 모란꽃을 테마로한 일본의 동경전, 프랑스 파리에서의 정열적인 장미의 연작전을 지적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미의 메신저가 되어 민간차원의 국위선양을 한 셈이다. 결론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듯 오유화의 예술세계는 다양한 변화주기를 극복하면서 도전과 시련의 역정을 걸어왔고 체험을 통한 자유의 미학을 구가해 온 것이다. 이제 그의 예술이 새롭게 정착한 곳은 평화와 염원과 행복이 충만한 '십장생'의 회화세계다. 그의 행로에 어떠한 미지의 작품세계가 펼쳐질 것인지 큰 관심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COVER ARTIST
Oh, Yoo- Wha
규량 오유화
2005. 12. 23 - 12. 31
갤러리 홍(대치동)
西歐的인 美學에 東洋의 思惟哲學 接木한
畵壇의 重鎭
김남수 / 미술평론가
한국미술의 세계성 추구, 세계의 예술양식과 접목하고 공존하는 작업은 우리미술의 생존을 위한 초미(焦眉)의 과제다. 한마디로 세계의 미술양식이나 미술질서가 우리를 외면할 때 우리는 한낮 세계의 미술환경에서 국제적 고아나 사생아로 전락할 것이다. 그 동안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 가장 세계적인 그림’이라는 논리가 아직도 화단의 일각에서 집요하게 회자(膾炙)되고 있다.하지만 이러한 독선적인 논리가 세계시장에서 공인을 받지 못할 때 한국미술은 편견과 독선의 덫에 걸려 국제미술시장에서 버림을 받게 된다.
열린 미술환경 속에 살면서 이렇듯 폐쇄적인 사고나 자기아집의 발상은 자칫 스스로를 폄하(貶下)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는 상반된 시각, 즉 선진국의 예술이면 무조건 좋다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해버린 지난날의 사대주의적 발상이나 관행은 서구문물이 우리나라에 수입 된지 거의 7,80여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굴레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심한 갈등과 모멸감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다행히도 일부 원로나 젊은 후배들이 우리미술의 잘못된 방향설정에서 자각을 하고 한국미술의 현주소를 찾기 위한 집요한 노력들이 여러 징후를 통하여 발견되고 있는 것은 한국미술의 좌표와 진로에 푸른 신호가 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유화의 예술양식에서 주제와 기법, 소재로서의 한국성화(韓國性化)는 서구주의에서 탈출하는 첩경이며, 세계미술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본다. 서양화가 이한우화백은 지난 7월, 프랑스 상원 ‘룩상부르’미술관의 초대를 받았다. 동양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오, 한국으로 보아서는 미술사적 사건이며 개인은 물론이요, 국가의 이익과 관련한 영광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선택된 이유는 양화의 한국성 추구에 있다. 한국의 고유한 민족미술이 세계의 미술양식과 맞아떨어진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 나라에 유명작가가 탄생한다는 것은 일석삼조의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외화획득, 둘째는 관광객의 유치, 셋째는 미술산업의 세계시장화 등이다. 예술행위가 갖는 노하우는 이토록 엄청난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규량 吳柳和의 長生圖
본란에서 집중 탐구코자하는 표지작가 오유화의 작품세계도 이러한 컨셉과 관련한 가능성을 가진 화가가 아닌가 싶다. 그의 최근작들을 보면 한국정신의 모랄이라 할 수 있는 일련의 ‘장생도(長生圖)’ 시리즈가 전개되고 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꼽는다 하지만 십장생의 덕목으로 해, 구름, 물, 불, 소나무, 대나무, 지초, 거북, 학, 사슴 등은 상서롭고 신성한 영물로 영원히 산다는 장생의 이미지로 역대의 미술가들이 이를 즐겨 그려왔다. 물론 이러한 화목(畵目)들이 소재로 등장한 것은 무병장수를 기원한다는 민속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 정신주의는 동양사상의 사유의 철학에 기조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003년 2월 과천 갈현리미술관, 개관 1주년기념 초대전에 선을 보인 작가의 작품 <十長生>은 한국의 서양화단에 신선한 충격과 함께 한국미술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문제의 작품들로서 많은 서양화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번에 선을 보이고 있는 ‘갤러리 홍’에서의 ‘長生圖展’은 한결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의 주제와 정신주의, 기법과 방법론 등에서 초현실주의 성향이나 표현주의 예술양식을 도입하고 있는 화법이 참신하면서도 전통적인 소재의 현대화작업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양인의 눈에 비친 동양인의 설화적인 신비와 기복신앙, 염원과 기도가 이 ‘장생도’속에 농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표제의 작품 <長生圖>는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실존공간을 무릉도원의 선경(仙境)으로 환치(換置)하고 그 속에 해와 구름, 물, 돌과 소나무, 대나무와 지초, 학과 사슴, 거북 등을 그리고 있다. 섬세한 필치와 극세필 묘법 등 초현실주의 화법으로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이 소재들은 양화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점에서 한국미술의 창조적인 비전이 점쳐지고 있다. 앞으로 장생도 등 한국성 예술양식을 본격적으로 탐구하여 발표하겠다고 의욕적인 결의를 다짐하고 있는 작가는 ‘비록 화구(畵具)의 매재(媒材)는 서양 것이지만 정신과 주제, 방법론 등은 한국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고, 그래야 만이 국제경쟁력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라고 작가는 소신을 편다.
규량 吳柳和의 作品世界
예술작품의 본령은 아름답고, 인간에게 감동을 주고, 그 아름다움은 영원해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평소 주장해 왔다. 물론 이러한 요건이 갖추어지면 세계적인 명화가 되는 것이다.
오유화는 미국 LA에 있는 퍼시픽웨스턴대학에서 순수미술 분야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작품의 실기전형의 심사를 거쳐 받은 학위이기 때문에 이것이야 말로 진짜 박사학위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신념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미술이란 본시 아름다운 것이요, 미학도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미학에서 아름다움의 균형이 깨지면 이미 미술을 떠난 것이지요.”
그가 설치나 행위 등 모던한 현대미술을 싫어하는 것도 미가 결여된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세계미술의 추세는 어떤가, 예술가가 한 가지 예술양식이나 장르에 매달려 있는 것은 매너리즘이나 침체에 빠지기 쉽고, 조형의 영역이나 폭이 좁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이다.
탈 장르화 혹은 작업의 양식이 다양하고 포괄적인 성향으로 행해질 때, 그 작가는 보다 스케일이 크고 대범한 화가로서, 혹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화가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세계의 유명작가나 선배작가들의 체험을 통하여 경험한 바 있다.
오유화는 작업활동의 연륜만도 30년을 헤아린다. 작가가 사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처음 작품전을 선언한 것은 그의 신중하고 조심스런 성격 탓이다. 이제 그가 공인이 될 수 있는 재능과 자질, 실력을 고루 겸전했다는 간접적인 시사가 된다. 그래도 작품 발표전의 결심을 굳히기까지에는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는 것이 지난날의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가 얼마나 신중하고 사려 깊은 미술인이었는가는 요즘 성급하게 대성하려고 하는 일부 작가들에게는 큰 귀감이나 사표가 되는 바람직한 예술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동서양의 미술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체험의 미학을 천착했다. 그의 예술의 진폭이 크고 다양한 것도 실기탐구의 영역이 넓고 깊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오유화 작품의 전개과정이나 변화주기를 요약해서 분류를 해보면 초기 10 여년은 극사실주의에 바탕한 철저한 아카데미즘을 추구했다.
이 무렵은 캔버스를 실크지로 사용하는 등, 소묘와 드로잉, 크로키, 누드와 인물 등 기초적인 훈련을 쌓았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부터는 유화와 함께 동양화의 사군자나 문인화 등 수묵조의 발묵법이나 용필용묵을 익혔다. 말하자면 조형적인 깊이나 시각이 넓어지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동서의 경계를 자유자재롭게 넘나드는 회화양식을 추구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고, 본격적인 유화작업에 뛰어든 것은 지난 90년 부터가 아닌가 싶다. 다만 지난 사반세기 동안에 장르와 양식을 자유분방하고 작가의 취향에 따라 자유자재롭게 넘나들었던 예술 중에 꼭 변하지 않은 것을 지적하라면 ‘아름다운 형상의 추구’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시종일관 미의 극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작가라고나 할까, 한마디로 시대의 편승, 주위의 유혹에 한 눈을 팔지 못하는 외곬수 고집과 신념과 의식을 가진 화가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미니멀아트나 포스트모더니즘, 컨템프러리나 설치미술을 전혀 의식을 하지 않는 화가다. 주위의 충동이나 자극 때문에 어쩌다가 전무후무하게 추상작품을 한 점 만든 적이 있지만 본인의 성격과는 전혀 맞지 않아 손을 떼었다고 한다.
<99년 개인전 서문에서- 필자>
오유화 작품의 특징은 정물과 풍경 누드와 인물 등 주어진 소재는 무엇이나 소화해 내는 재능과 기량을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징을 꼽는다면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정신 못지않게 표현기법이나 색채의 마술적인 표현력, 굳이 그가 좋아하는 피사체의 선택 등을 들 수 있다. 가령 그의 작품의 분위기나 톤은 아름다우면서도 넉넉한 윤기가 솟는다. 생명력이 살아 있는 듯 싱싱한 과일, 적요한 어둠을 밝히는 심산유곡의 여명, 청윤한 기운이 감도는 습한 계곡의 정취, 푸른 청색이나 에메랄드 빛깔의 녹색, 회백색을 주조로한 계곡의 다양한 변화 등을 지적할 수 있고, 또한 그가 즐겨 다루는 꽃그림 등은 화사하고 꽃의 향기 등 생경한 맛을 느끼게 한다.
특히 그가 외국전을 통하여 크게 부상한 것은 모란꽃을 테마로한 일본의 동경전, 프랑스 파리에서의 정열적인 장미의 연작전을 지적할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미의 메신저가 되어 민간차원의 국위선양을 한 셈이다.
결론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듯 오유화의 예술세계는 다양한 변화주기를 극복하면서 도전과 시련의 역정을 걸어왔고 체험을 통한 자유의 미학을 구가해 온 것이다. 이제 그의 예술이 새롭게 정착한 곳은 평화와 염원과 행복이 충만한 ‘십장생’의 회화세계다.다시 말해 한국성 미술의 세계성 지향이요, 양화의 한국성 발현이 중요한 목표로 설정을 하고 있는 듯 하다. 그의 행로에 어떠한 미지의 작품세계가 펼쳐질 것인지 큰 관심으로 지켜보고자 한다.
<2000년 모란전 서문 글중에서- 필자>
COVER ARTIST
오유화
Oh, Yoo Wha
오유화의 ‘장생도’
동서양의 미학을 통합하는 신선한 발상
신항섭 / 미술평론가
그림에서 물감은 조형적인 사고를 이끌어 간다. 다시 말해 물감의 재질에 따라 조형언어 및 어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림은 어떤 표현양식이든지 물감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따른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유채화는 기름과 광물성 안료를 혼합한 재료로 그려졌기에 천으로 만든 견고한 캔버스가 필요했고, 명암기법은 유채라는 재료의 특성에 의해 고안된 조형어법이다. 반면에 수채화는 물을 매개로 하기에 캔버스 대신에 종이를 사용했고, 투명성을 살리는 조형어법이 강구되었다.
따라서 유채를 가지고 수묵산수화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거꾸로 수묵으로 극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서양의 표현양식은 유채나 수채 또는 템페라 따위의 재료만으로 그려야 하고, 동양의 수묵화나 채색화는 역시 수묵 및 전래의 채색물감으로만 그려야 했다. 이처럼 이제까지는 동서양의 그림은 그 재료의 특성에 따라 표현양식이나 기법이 엄연히 구별되어야만 했다. 즉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현대미학이 보편화되고 있는 오늘에 와서는 이러한 고유의 영역 또는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재료에 따른 장르 간의 경계는 물론 문학 미술 음악 연극 영화 따위의 예술 전반의 경계마저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오유화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 부응하듯, 그림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새로운 개념의 유채화를 시도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 및 서양과 동양의 조화라는 대명제를 전제로 하는 그의 작업은 다소 엉뚱한 발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이질적인 개념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 이전까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상황의 전개를 예상하는 일은 작가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자 한편으로는 흥분할 일이기도 하다. 무언가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 자체는 창작의 윤리성에 합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 앞에서는 언제나 불안하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재료에 의해 만들어진 동서양의 조형개념 및 조형어법을 극복하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까지 유채라는 재료를 사용하여 사실적인 작업을 해 왔다.
계곡풍경과 모란꽃 또는 장미꽃과 같은 소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에 연유한다. 특정의 소재를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그 소재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특징을 살리면서 세련미와 더불어 깊이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은 기능으로부터 출발한다. 기능이 익어가고 또 정밀해지면 세련미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림에서 세련미는 예술성 또는 미적 가치의 하나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 가운데 모란꽃이나 장미꽃 또는 계곡을 소재로 한 그림의 경우 다른 소재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상응하는 작업량의 결과임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심상이 무르익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림이 단순한 기능의 결과가 아니라 미의식 및 미적 감각의 표출이라면 응당 내적인 세계가 용해되어 나오기 마련이다. 특정 소재에 천착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심상의 명확성을 가져오는 일이기도 하다.
심상이 명확하면 그 순간부터 현실적인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하지 않게 된다. 사실적인 작품의 경우에도 실제와 같아 보이지만 작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심상이 만들어낸 새로운 이미지로 바뀌는 것이다. 이 단계부터 그림 그리는 일에는 작가의 미의식 세계가 관여하기에 이른다. 시각적인 이미지야 사실적인 형태를 따를지라도 그 전체를 이끌어 가는 미적 감각의 세계는 미의식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다.
그의 최근 작업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은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익은 맛이 배어나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기능이 숙련되어 세련미로 변환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실제의 물상을 눈앞에 두지 않고 심상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개별적인 세계에 대한 눈과 감각이 열리게 된다. 어쩌면 ‘장생도’(10가지의 장수를 상징하는 화목 가운데 불로초 따위의 그 일부가 제외되었음)라는 명제를 가진 일련의 최근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강구된 것인지 모른다. 이제는 스스로 소재 및 대상을 보지 않고도 능히 원하는 풍경을 얻을 수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조형적인 사고를 통해 독자적인 형식미의 창안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기에 이르는 것이리라.
‘장생도’는 기본적으로 표현양식에서 자연주의 및 사실주의 개념을 따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풍경화임에도 어딘가 생경하게 보인다. 계곡을 소재로 한 일반적인 풍경화에서 보기 힘든 해 달 학 사슴 대나무 따위의 소재가 등장하는 까닭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들 소재는 다름 아닌 전통회화인 십장생도의 형태미와 동일하다. 느닷없는 전통회화의 화목인 장생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시각적인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의표를 찌르는 의외성이야말로 그가 노리는 새로운 차원의 조형어법이 가지고 있는 호소력이다.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 회화양식에 전통회화의 회화양식이자 소재인 십장생의 이미지가 끼어든다는 것은 확실히 낯선 체험이고 파격이다. 이는 동양회화와 서양회화의 만남과 동시에 화합 및 조화를 모색하는 실험적인 성격이 짙다. 이런 상황은 예기치 못한 것이기는 해도,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왜일까? 익숙한 풍경인데다 소재 또한 보아온 것이니, 설령 십장생의 형태 및 존재방식이 다르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이들 소재는 굳이 장생의 의미가 아니더라도 풍경화에서 등장할 수 있는 소재들이다. 만일 채색화의 십장생도에 볼 수 있는 형태미만 아니라면 전혀 낯설게 보일 리가 없다. 다만 그의 그림에서는 십장생의 소재 몇 종류가 동시에 화면에 등장함으로써 십장생도의 이미지를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장생도’는 이질적인 표현양식 및 소재가 만남으로써 새로운 표현형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새로운 그림의 형식이란 언제나 일반성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조형적인 사고의 산물이다. 새로운 표현기법, 새로운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을 두려워해서는 창의적인 사고, 즉 조형적인 사고가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다. 동양적인 조형개념과 서구적인 조형개념은 그 문화적인 배경은 물론이려니와 재료적인 차이, 그리고 사고의 차이로 인해 결코 합일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관점이었다. 하지만 그의 최근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기존의 풍경화와도 다르고 전통적인 십장생도와도 다른 새로운 형식이 만들어지고 있다. 물론 조형적으로 무리가 없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 즉 승화된 현실로서의 유토피아와 마주하고 있는 듯싶다.
일상적으로 보아온 풍경 속에 단지 전통적인 십장생의 이미지가 놓임으로써 이처럼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은 조형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작업에서는 장생도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화면을 수직으로 분할하여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화면 중심에 장생도를 두고 그 양쪽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배치하는 식인데, 이와 같은 구성은 현대회화에서는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서구의 사실주의 조형개념에다 한국의 전통적인 십장생의 이미지를 보탠 뒤, 다시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현대미학과의 제휴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그림은 이미 실험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미감에 호소하는 현대회화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시도는 사뭇 의도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적이면서도 서양적이며 동시에 현대적이라는 조형어법을 성립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의 소산인 것이다. 추상적인 부분에는 전통적인 문양인 구름 파도 따위가 연속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가 하면,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색채이미지로 꾸며진다. 이들 이미지가 개입되는 추상적인 부분은 이처럼 한국적인 정서가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인 이미지 및 정서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개별적이 조형세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모색일 수도 있지만, 그에 앞서 여러 차례 해외전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얼굴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서구의 재료와 미학을 따른다고 할지라도 전통적인 조형언어 또는 형식을 접목함으로써 무언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각은 최근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최근 작업을 통해 나 자신으로부터 납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하는 것이야말로 개별적인 세계를 앞당겨 줄 수 있는 지름길임을 확신하고 있는 듯싶다. 그 성과가 최근 작품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전통적인 작업도 중요하지만 창작을 윤리성으로 하는 작가에게는 현대인의 미감에 호소할 수 있는, 즉 시대감각에 일치할 수 있는 새로운 미학을 탐구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장생도’는 전통과 현대, 동양미학과
COVER ARTIST
오 유 화
Oh, You Hwa
상징적 풍경화와 화면의 이중구조
윤진섭 / 미술평론가, 호남대 교수
사물의 외관을 화폭에 옮기는 화가에게 있어서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어느 것을 그리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구상화가들은 소재에 신경을 쓰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남과 차별화하기 위해 고심한다. 가령, 풍경을 그리는 화가에게 있어서 다른 작가와 비슷한 화풍은 이런 차별화 전략에 결정적인 흠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시점(視点)이라든지 질감, 색조 등에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상화가가 굳이 소재에 연연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풍경만 그리는 소위 풍경화가니, 정물만 그리는 정물화가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질없는 일이다.
화가라면 풍경이건 정물이건 인물이건 두루 능해야 화가로서 대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유화는 풍경과 인물, 정물을 가리지 않고 그리는 화가다. 초상화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단계에 이른 그녀는 오랜 세월동안 인물을 그리면서 익힌 묘사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를 화폭에 옮긴다. 최근 몇 년 간 그녀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소재는 ‘십장생’이다. 그 중에서도 소나무, 학, 사슴이 주요 소재다. 그런데 이 소재들이 등장하는 배경은 평범한 자연이다. 그것은 가령 민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상화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 속에서 바라보는 평이한 경치라는 데서 차별성을 띤다.
만일 그것이 포용의 관계가 아닌 대립의 관계로 설정돼 있다면, 그녀의 그림이 주는 목가적인 느낌이나 서정성은 훼손될 것이다.
이 상생의 관계야말로 오유화의 <십장생>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다. 동물과 식물이 자연이란 울타리에서 한데 어울려 합일을 이룬 상태, 그 푸근한 정취야말로 우리가 십장생을 통해 인간의 복락을 누리고자 하는 염원의 근본인지도 모른다. 녀는 이 <십장생> 연작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그리고 있는데, 이 연작은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작품이다.
오유화는 비단 <십장생> 연작뿐만 아니라 장미, 코스모스, 목련, 해바라기, 모란을 비롯한 꽃 그림과 인물화, 풍경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 중에서도 꽃 그림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장미는 꽃 그림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다. 분홍, 흰색, 노랑, 빨강 등 다양한 장미들이 화폭에 옮겨진다. 그런데 그녀의 꽃 그림을 보면서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몇몇의 작품들이 그림의 배경으로 풍경을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의 꽃 그림 대부분은 꽃 자체를 클로즈업한 상태, 다시 말해서 꽃의 묘사에 치중한 것이나, 이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건물을 배경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띤다. 가령, <고궁에 핀 백목련>(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2001), <고궁에 핀 자목련>(45.5x37.5cm, 캔버스에 유채, 2001), <붉은 장미>(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2003)과 같은 그림들은 꽃의 너머에 기와집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들은 꽃만을 그린 여타의 꽃 그림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전경에 있는 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도 원경에 기와집을 배치함으로써 ‘정물-풍경’이란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풍경화인가, 아니면 정물화인가? 이러한 시도야말로 기존의 평범한 정물화가 지닌 진부함을 넘어서려고 하는 의도로 읽혀진다.
녀는 이 <십장생> 연작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그리고 있는데, 이 연작은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작품이다.
오유화는 비단 <십장생> 연작뿐만 아니라 장미, 코스모스, 목련, 해바라기, 모란을 비롯한 꽃 그림과 인물화, 풍경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 중에서도 꽃 그림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장미는 꽃 그림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다. 분홍, 흰색, 노랑, 빨강 등 다양한 장미들이 화폭에 옮겨진다. 그런데 그녀의 꽃 그림을 보면서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몇몇의 작품들이 그림의 배경으로 풍경을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의 꽃 그림 대부분은 꽃 자체를 클로즈업한 상태, 다시 말해서 꽃의 묘사에 치중한 것이나, 이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건물을 배경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띤다. 가령, <고궁에 핀 백목련>(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2001), <고궁에 핀 자목련>(45.5x37.5cm, 캔버스에 유채, 2001), <붉은 장미>(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2003)과 같은 그림들은 꽃의 너머에 기와집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들은 꽃만을 그린 여타의 꽃 그림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전경에 있는 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도 원경에 기와집을 배치함으로써 ‘정물-풍경’이란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풍경화인가, 아니면 정물화인가? 이러한 시도야말로 기존의 평범한 정물화가 지닌 진부함을 넘어서려고 하는 의도로 읽혀진다.
만일 그것이 포용의 관계가 아닌 대립의 관계로 설정돼 있다면, 그녀의 그림이 주는 목가적인 느낌이나 서정성은 훼손될 것이다.
이 상생의 관계야말로 오유화의 <십장생>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다. 동물과 식물이 자연이란 울타리에서 한데 어울려 합일을 이룬 상태, 그 푸근한 정취야말로 우리가 십장생을 통해 인간의 복락을 누리고자 하는 염원의 근본인지도 모른다. 녀는 이 <십장생> 연작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그리고 있는데, 이 연작은 그녀의 작품에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작품이다.
오유화는 비단 <십장생> 연작뿐만 아니라 장미, 코스모스, 목련, 해바라기, 모란을 비롯한 꽃 그림과 인물화, 풍경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 중에서도 꽃 그림은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장미는 꽃 그림 중에서도 가장 빈번히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다. 분홍, 흰색, 노랑, 빨강 등 다양한 장미들이 화폭에 옮겨진다. 그런데 그녀의 꽃 그림을 보면서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몇몇의 작품들이 그림의 배경으로 풍경을 삽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의 꽃 그림 대부분은 꽃 자체를 클로즈업한 상태, 다시 말해서 꽃의 묘사에 치중한 것이나, 이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건물을 배경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띤다. 가령, <고궁에 핀 백목련>(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2001), <고궁에 핀 자목련>(45.5x37.5cm, 캔버스에 유채, 2001), <붉은 장미>(45.5x37.9cm, 캔버스에 유채, 2003)과 같은 그림들은 꽃의 너머에 기와집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것들은 꽃만을 그린 여타의 꽃 그림과는 다르다. 그것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전경에 있는 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도 원경에 기와집을 배치함으로써 ‘정물-풍경’이란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풍경화인가, 아니면 정물화인가? 이러한 시도야말로 기존의 평범한 정물화가 지닌 진부함을 넘어서려고 하는 의도로 읽혀진다.
근자에 와서 오유화는 구상의 화면과 추상의 화면을 병치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결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의 김흥수나 데이빗살(David Salle)도 이런 병치 화면을 오래전부터 구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유화는 자신의 화풍이 잘 녹아있는 풍경이나 정물화의 양 쪽에 색 띠나 디자인된 문양을 병치하여 그림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것이 지닌 장점은 장차 이러한 시도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른다는 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풍경화와 정물화의 양 쪽에 이와는 성질이 전혀 다른 요소를 첨가하여 그림이 새로운 문맥에서 읽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구상화가로서는 용기있게 시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유화의 풍경화가 지닌 장점은 콘트라스트가 강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원시림이 지닌 싱싱한 느낌을 잘 표현한 것이다. 나는 오유화의 <빛의 유희 Ⅳ>(116.8x91cm, 캔버스에 유채, 2002)와 <빛의 유희 Ⅰ>(162x130.3cm, 캔버스에 유채, 2001)를 주목해서 보는데, 이 연작은 모두 숲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나무와 풀, 바위, 계곡물이 어우러져 자연의 신비한 원시적 느낌을 자아내는 이 풍경화 연작은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함께 빛과 어둠이 강한 콘트라스트가 강점을 이룬 작품이다. 특별히 고안했다기보다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평원법의 구도로 잡은 이 작품들은 초봄의 쌀쌀하면서 생명이 터오는 숲의 신령한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바위에 낀 이끼가 세월의 퇴적을 말해주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계곡의 물은 청량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인공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의 경치는 원시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 사물의 형태는 물론이거니와 바위면 바위, 나무면 나무 그 자체의 질감을 다르게 표현하여 대상의 생생한 느낌을 잘 전달해 준다. 이 연작을 통해 우리는 자연의 싱싱한 비경을 느낄 수 있다.
다시 풍경과 추상을 병치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오유화는 소나무와 학, 사슴이 있는 수풀의 정경을 그린 풍경화의 양 옆에 색 띠를 덧붙여 추상화면을 덧대고 있다. 그 양 옆의 화면에는 여러 색으로 숲을 추상화한 위에 해가 떠 있는 정경이나 물결 모양 혹은 특정한 디자인들이 있다. 문제는 이전의 십장생을 다룬 풍경화들과는 달리 왜 이 그림에는 성격을 달리하는 화면이 등장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단순히 그녀의 풍경화들이 여타 다른 작가들의 풍경화와는 다르게 보이기 위해 이런 시도를 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특별한 장점을 지닌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녀가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풍경화 속에 원을 설정하는 일의 의미를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원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가운데 화면에 색 띠로 이루어진 원을 말한다. 오유화는 최근에 들어서 기존의 십장생 그림 한 가운데에 원을 그리고 다시 그 안에 사슴이나 학을 그리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의 구조는 이원론으로 돼 있다.
첫째 하나는 가운데에 그려진 십장생 풍경화, 둘째는 양 옆의 색 때로 구분된 추상화와 풍경 가운데의 원이다. 그러니까 바탕을 이루는 십장생 풍경화는 후경층이고 양 옆의 추상화와 풍경화 속에 있는 원은 전경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풍경화는 가라앉아 있고 양 옆의 추상화와 풍경 가운데의 원은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나의 화면에서 두 요소가 분리돼 보이는 이러한 시각적 효과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학과 사슴이 공존하는 기존의 십장생 풍경화에서 학과 사슴을 각기 원안에 가둠으로써 분리시키는 아이디어가 화면을 분리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는 이 점을 주목해 보고 싶다. 아무튼 이 시도는 특별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이유는 기존의 병치화면이 평면적인 나열에 그쳤다면 오유화의 이 시각적 장치는 화면의 깊이 측면에서 이원론적인(double) 차원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장생을 다룬 오유화의 풍경화는 단순히 대상을 사실적인 필치로 그린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세계다. 장수를 누리는 열 가지의 동식물 중에서 유독 학, 소나무, 사슴만을 선택하여 주요한 화제로 삼고 있는 그녀의 풍경화는 일종의 상징적 풍경화라 할 수 있다. 약간의 무속적 신비감마저 풍기는 그녀의 십장생 풍경화는 그 싱싱한 비경의 느낌만큼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오유화 작품의 특징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그것에 덧붙여 그녀는 이제 화면의 깊이 면에서 이중(double)의 구조를 시도하고 있다. 이 실험의 다음 단계가 궁금해진다.
오유화 Oh, You Hwa
주요약력
• 미국 퍼시픽 웨스턴대학 순수미술명예박사
• 예원예술대학교(서양화 전공)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수료
• 프랑스 그랑쇼미에르 연수
• 개인전 17회 (서울, 파리, 동경, 센다이, 위해,
베이징, 러시아)
• 전국 새마을 예술제 최우수상 (국립극장)
• 대한민국 청소년 예술제 우수상 (세종문화회관)
•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2회, 입선 3회
(과천국립현대미술관)
• 목우회 공모전 특선(국립현대미술관)
• 신미술대전 특선, 입선(서울시립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전
(움직이는 찾아가는 미술관)
• 독일 베를린 시장 초대전 (독일)
• 페르프록 드스도르프 바이젠 시장 초대전
(오스트리아)
• 상파울로 이민 박물관 초대전 (브라질)
• 하얼빈 시립미술관 초대전 (중국)
• 뉴-싸롱 6개국 초대전 (서울시립미술관)
• 청담미술제 초대전 (조선화랑)
• 한국미술협회전 (예술의 전당)
• 한일 창작 교류전(동경, 주일대한민국 대사관 문화)
• 전라남도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남농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 대한민국 교직원 공모전 심사위원 역임
• 대한민국 서예작가협회 운영위원 역임
평론
• 작가작품론 연재 <한국미술평론지 ‘미술과 비평’>
• 작가작품론 연재 <순수미술평론지‘화인아트’>
• 스포츠월드 (세계일보) 칼럼 연재
현재
• 한국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회장
• 미술과 비평 운영위원장
• 한국미술협회, 목우회, 전업작가회, 한일창작회,
국제화우회 회원
• 예원예술대학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