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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둘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되었나 봅니다. 집중호우라는 단어가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그 여파로 산사태 붕괴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는걸 보면요.
풍수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선택' 이라는 대명제하에 '편견'을 버리고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답은 의외로 쉽게 얻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어렸을때 읽었던 이솝우화의 '햇님과 바람'이 생각나지 말입니다.
햇님과 바람이 있었습니다. 햇님과 바람은 심심했습니다. 바람이 말했습니다. “네가 더 힘이 셀까? 내가 더 힘이 셀까?” 그러자 햇님이 말했습니다. “당연히 내가 더 힘이세지! 내가 햇빛을 쨍쨍 내리쬐면 당할자가 없는걸-” 햇님이 으스대며 말하자 바람이 “흥, 내가 더 힘이세! 바람이 쌩쌩 불면 모두다 날아가버릴걸” 라고말했습니다. 햇님과 바람은 서로 자기가 더 힘이 세다고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둘은 결국 내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누가 더 센지 한번 겨뤄보자” “좋아!” “그럼... 무엇으로 해볼까?” 햇님과 바람은 이리저리 길을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저기 아래 길을 걷고있는 사내를 보게되었습니다. 햇님이 말했습니다 “저기 저 사내의 옷을 먼저 벗기는 사람이 이기는거다!” “좋아, 그럼 나부터 해보지” 바람은 입김을 불어 바람을 쌩쌩불어서 사내의 옷을 벗기려했습니다. “아, 추워~ 옷이 날아갈것같아! ” 그러나 사내는 바람이 불수록 옷을 더욱더 세게 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거봐, 이제 내 차례야 잘 보라구” 햇님은 햇볕을 쨍쨍 내리쬐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변덕스럽네, 아이 더워” 사내가 말했습니다. 그럴수록 햇님은 햇볕을 더욱더 세게 내리쬐었습니다. 그러자 사내는 “아 더워- 저기 시냇물에 몸좀 담궜다 가야겠다” 하고 옷을 벗고는 시냇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햇님은 우쭐했습니다. 바람은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화는 어른을 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심오한 뜻을 어린이가 어찌 알까 싶네요. 전대련 前YMCA 회장의 퇴임사 中 '매일 날씨가 좋으면 사막이 된다'는 말처럼 장마도 궂은 날도 다 필요한 것이려니 여기자구요.
1. 답사일 : 2016년 7월 10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출발
3. 답사지
1) 이규동 장군 생가(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184)
이규동은 1911년 11월 7일에 경상북도 고령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이봉년과 결혼하여 만주국으로 가서 슬하에 1남 6녀를 두었으나 딸 셋은 요절하고 3녀만 살아남았다.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는 그의 차녀이다.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에서 육군 경리관으로 일했다. 해방 후에 귀국하였고 1946년에 조선경비사관학교에 2기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이후 육군으로 명칭이 바뀌며 육군이 되었다. 이후 1959년 49세에 육군본부 경리감에 보임되었고 이듬해인 1960년 육군 준장으로 전역하였다.
사위 전두환은 그의 직속 부하 장교였는데 차녀인 이순자가 전두환을 마음에 들어 하여 그와 결혼했고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동생 이규승은 육사 7기로 졸업하여 대령으로 예편하였고 그 밑의 동생 이규광도 육사 3기로 졸업하여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계수인 이규광의 아내 장성희를 통해 장영자와 김대중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2001년 9월 사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묘소는 장군1묘역에 있다.
이순자는 1939년 3월 24일에 만주국 신징에서 아버지 이규동과 어머니 이봉년 사이에서 1남 6녀 중 둘째 딸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규동은 경상북도 성주 출신으로, 고려시대의 재상 이조년의 후손이다. 선대는 경북 고령과 성주에 세거하였다.
장교였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전전하다가 진해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뒤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하여 경기여자중학교와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언니가 요절하여 사실상 집안의 장녀 역할을 하였다.
1957년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1958년 아버지의 관사에 드나들던 육군 위관 장교 전두환과 결혼하였다. [출처] 위키백과
2) 한개마을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308)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경에 입향한 이래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살고 있는 전통 씨족마을이다. 다수의 전통한옥이 보전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개 동에 이른다.
한개마을은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 1587∼1612)에 와서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온전히 자리 잡는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이수성(李壽星, 1610∼1672)이 있었는데, 수성은 달천·달우·달한·달운 등 네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마을에 정착하여 각각 백파(伯派)·중파(仲派)·숙파(叔派)·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되고 각 파의 자손들이 마을공간을 본격적으로 일궜다. 따라서 이 마을이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번성한 것은 이수성 때인 17세기 중엽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 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개’라는 이름은 곧 ‘큰 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 우리말인 것이다.
마을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현재는 69호의 집이 있다. 마을을 구성하는 집들 가운데 하회댁은 1750년경에 지어졌으며, 교리댁·북비고택·한주종택은 1700년대 후반에, 그리고 다른 큰 한옥들은 대개 1800년대에 건축되었다.
6·25전쟁 때에는 큰 피해를 입어 여러 채의 한옥이 파손되거나 완전히 소실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정구 선생 묘(경북 성주군 성주읍 금산리 산57-17)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철산군수 윤증(胤曾)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응상(應祥)이고, 아버지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충좌위(忠佐衛) 부사맹(副司孟)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환(煥)의 딸이다.
6대조 총(摠)과 그 아우인 탁(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대체로 한양에서 살았으나 부친이 성주이씨와 혼인하면서 성주에 정착하였다. 둘째 형인 곤수(崑壽)는 문과에 급제해 병·형조 참판, 의정부좌찬성 등 주요 관직을 지낸 관리였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했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 때에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쫓아내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세종대왕 왕자 태실(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태실은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임시로 설치하여 이 일을 맡게 하였다.
출산한 후 태는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했다.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다음, 항아리를 큰항아리에 담았다. 이렇게 두 개의 항아리에 태를 보관하였다. 항아리에 보관된 태는 태봉지을 선정하여 묻는다. 이것은 안태(安胎)라고 한다. 태봉지가 정해지면 궁에서는 태봉출(胎奉出) 의식을 행하고, 안태사 행렬이 태봉지로 출발했다. 안태 행렬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그곳의 지방관들은 태를 봉안하는 의식이 끝날 때까지 지원하였다.
태실은 대개 대석(臺石)·전석(磚石)·우상석(湡裳石)·개첨석(蓋檐石) 등으로 만들었다. 왕세자의 태실은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를 세웠다가 국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을 가봉(加封)하였다. 국왕 태실은 8명의 수호군사를 두어 관리하였으며 태실 주변은 금표로 접근을 제한하였다.
경북 성주의 세종대왕 왕자 태실에는 세종의 맏아들 문종을 제외하고 안평·수양·금성을 비롯한 여러 대군과, 한남·화의·밀성을 포함한 여러 군, 그리고 세손이던 단종 등의 태실이 있다. 세종 20년(1438)부터 24년까지 차례로 세워진 것이라 한다.
원래 이곳에는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산 이씨의 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었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알려지자 조정에서 이 묘를 이장하고 태실을 세우도록 결정이 났다. 태종의 여섯째 딸 숙혜옹주와 혼인하여 성원위(星原尉)로 봉해졌으며 당시 풍수학제조(風水學提調)라는 관직에 있던 장경의 후손 이정녕이 이 결정을 무시한 죄로 삭직당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답사여행의 길잡, 돌베개. 두산백과)
4. 회비 : 4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회장 김 종대 (010 - 4234 - 7074) 실장 하 태현 (010 - 9239 - 2139)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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