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3.27 영화<대부>로 받게 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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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론 브란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입을 모으는 것은 그가 타고난 배우였다는 것이다. 수많은 미국의 명배우들을 배출한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이자 액터스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메소드 연기(맡은 역에 동화되어 감정을 느끼며 연기하는 것)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브란도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반항아들을 연기했다. 그 모습은 브란도의 실제 삶과 닮아 있었다. | |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원주민을 다룬 방식에 항의하며 아카데미상을 거부하다
1972년에 개봉한 <대부>(Mario Puzo's The Godfather)는 저무는 듯 보이던 배우 말론 브란도를 또 다시 주목하게 만들었다. 브란도가 연기하는 마피아의 대부 돈 코를레오네는 미국의 어두운 초상이자 미국 사회의 이면이었다. 브란도의 육중한 카리스마가 아니라면 어둠 속의 아버지를 깊숙이 생각해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 |
브란도가 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무하고 대신 내보낸 리틀페더 공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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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가 선을 보인 이듬해 3월 27일에 열린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메소드 연기의 달인 말론 브란도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브란도는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열린 이 시상식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단상에 오른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친 리틀페더 공주였다. 브란도는 그녀를 대신 내보내어 자신의 수상거부 의사를 밝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미국 원주민(인디언)을 묘사하거나 다룬 방식에 항변을 하며 이런 이유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리틀페더 공주가 손에 들고 단상에 오른 것은 브란도가 작성한 장문의 연설문이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2분 이상 단상에 머물기는 어려웠다(이 장면은 동영상으로 쉽게 검색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녀는 무대 뒤에서 15쪽의 연설문을 모여든 기자들에게 읽어주었다. “우리는 200년 동안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그들을 속여 그들의 땅에서 쫓아냈고 … 그들을 거지로 만들었다.” 브란도의 수상 거부와 대리 연설로 인해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 |
정작 브란도 자신은 이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다. 자신의 연설에 대한 아카데미의 반응에 무척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을 계기로 세계인들이 미국 인디언 학살의 야만적인 역사를 알게 될 거라 생각하며 기뻐했다. 이 사건은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시상식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명연기였다. 할리우드 체제는 그가 울타리 안으로 돌아와 착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란도는 그 순간에 모든 사람을 흔들어 버렸다. 사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시상식은 아주 따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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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부>속의 아들 '마이클 코를레오네'는 닉슨 대통령의 시대를 상징한다는 주장도
1972년 3월 11일에 미국에서 개봉된 <대부>의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개봉 직후에 <대부>를 전국적으로 배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흥행성적은 천천히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모이면 이 영화만은 꼭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상영되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그 결과 <대부>는 미국 내의 배급 수수료로 8,500만 달러를, 해외시장에서는 약 1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대부>는 그 이전까지 <사운드 오브 뮤직>이 지니고 있었던 ‘사상 최대의 성공작’이라는 명예를 빼앗은 것이다. | |
<대부>주인공 비토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친 말론 브란도
<대부>는 당시에는 신진급이었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과 마리오 푸조의 훌륭한 각본, 배우 브란도와 알 파치노의 명연기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성공에 대해서도 때로는 비판적인 시선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로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감정을 이끌어냈으며, 시대가 속한 정치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할리우드의 평론가인 데이비드 톰슨은 <대부>의 유례 없는 대성공에 모두가 들떠서 흥분할 일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결말이 돈 코를레오네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인물인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972년도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면, 이러한 변화는 닉슨 대통령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1970년대와 겹쳐진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의 자리는 닉슨 시대와 연결이 된다. <대부>가 보수적인 정치 시대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설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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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원주민운동' 창립에 관여,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치다
다시 브란도의 행적으로 돌아와 보자. <대부>를 선보인 1972년에 브란도는 또 다른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에서 주목 받는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가 연출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촬영하기 위해 파리에 있었다. 중년의 미국인 폴을 연기하는 브란도의 파격적인 연기는 <대부>와는 또 다른 충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1972년 가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뉴욕영화제에서 시사회를 열었을 때 ‘뉴요커’에 평론을 쓴 폴린 카일은 격앙된 톤으로 “브란도가 한 인물을 깊이 파고들어감으로써 그 인물 속에 다른 어떤 배우보다 많은 것을 융합해 넣었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전성기였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뜨거운 반응을 이뤄내고, 아카데미상을 거부한 뒤 3년 동안 브란도는 자신이 창립에 관여한 ‘미국원주민운동(AIM)'에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브란도는 이제까지 이와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환멸도 컸다. 배우라는 직업은 항상 오해와 왜곡 속에 놓이게 마련이다. 일부 인디언들은 브란도의 행동에 냉소를 보냈고 좋지 못한 소문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브란도에 대한 지지는 지속적인 편이었다. 미국원주민운동의 여러 지도자들을 위해 보석금을 내주었으며, 최고 지도자 몇 사람을 자기 집에서 지내도록 해 주기도 했다. | |
1972년에 선보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러한 관심은 영화제작으로도 이어졌다. 브란도는 ‘수족’ 출신의 원주민 러셀 민스와 함께 원주민 학살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시도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몇 번의 자리에 동참했지만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아서 펜 감독이 연출한 서부극 <미주리 브레이크>(The Missouri Breaks, 1976)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브란도는 5주간 일을 하고 125만 달러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추가로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기로 했다. 가능한 단기간에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많은 돈을 벌었고, 남은 기간 동안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후원 사업들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브란도의 주요한 계약 방식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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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으로 칸 영화제를 사로잡다
<대부>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어 브란도의 연기가 돋보인 영화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과 또 다시 손을 잡은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 이었다. 1976년 필리핀에서 촬영을 시작해 1979년이 되어서야 완성된 영화이다.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베트남 전쟁으로 바꾼 시나리오 속에서 브란도는 130킬로그램이나 되는 살집을 지닌 커츠 대령을 연기한다. 커츠 대령을 살해해야 하는 임무를 띤 윌라드 대위 일행이 베트남을 지나 캄보디아 깊숙한 곳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커츠 대령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도살장의 소처럼 자신에게 가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코폴라 감독은 커츠 대령의 죽음을 소가 도살되는 장면과 함께 편집하여 그의 죽음을 신화적인 차원으로 만들어 낸다. 원작의 대사를 빌어 ‘호러, 호러, 호러’를 외치는 최후의 장면은 유명하다. 이 작품은 <양철북>(Die Blechtrommel, 1979)과 함께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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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란도, 그 거칠고 섹시한 반역아의 태도는 로큰롤을 예고했다
영화 <대부>의 한장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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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 3일 미국의 중서부에서 태어나 바람기 많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고통을 받았던 브란도는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권위에 도전해 성공하는 것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도 내가 무가치하게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내가 왜 무가치한 것에 적의를 가지고 반응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그의 전기를 다루는 수많은 저작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다.
액터스 스튜디오를 통해 엘리아 카잔과 인연을 맺으며 그는 배우라는 날개를 본격적으로 달기 시작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1951),<워터프론트>(On the Wat erfront, 1954)로 시대의 반항아이자 아이콘이 된 브란도는 무대와 스크린과 연출을 오가며 연기를 통한 삶의 편력을 펼친다. 특히, <워터프론트>에서 형제로 출연한 로드 스타이거와 택시 뒷좌석에서 입씨름을 벌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동생 테리 역을 맡은 브란도는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 것은 형 찰리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이 장면은 브란도가 전 인생에 걸쳐 보여준 일관된 태도일 수 있다. | |
브란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을 살펴보면, 그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고, 영화 촬영 중 제작에 지장을 초래하는 언행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이 여전히 매력적인 것은 그 자신이 완전한 인물이 아니라 핑계 대고, 스스로 통제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은 브란도가 짊어진 배우로서의 과업이었다. 그 시작은 1947년 12월 3일. 브로드웨이 배리모어 극장에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무대를 통해서였다. 카밀레 필레아는 이 시절부터 꽃을 피운 브란도 연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브란도, 그 거칠고 섹시한 반역아, 도대체 말이 없고 한없이 건방진 그 태도는 1960년대 세대의 위대한 예술 형식, 즉 로큰롤을 예고했다.” 브란도가 연기한 것은 미국의 얼굴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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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말론 브란도에 관한 전기로는 패트리샤 보스워스가 쓴 <세계를 매혹시킨 반항아 말론 브랜도>(푸른숲, 2003)가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단, 제 7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날짜에는 오류가 보인다. 전반적으로는 브란도의 복잡한 삶에 대한 훌륭한 정리와 코멘트를 언급해 주고 있다. 브란도의 면모를 살피기에 좋은 저작이다.
브란도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엘리아 카잔과 브란도와 같은 할리우드의 주류 인물에 관한 뒷이야기이자 할리우드의 영화사를 재구성한 데이비드 톰슨이 쓴 <할리우드 영화사>(까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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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도 추천할만한 필독서이다. 기존에 번역되어 나와 있는 연대기적 서술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교차하면서 비판적인 견해를 곁들이는 톰슨의 식견에 탄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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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이상용 / 영화평론가
- 글쓴이 이상용은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다. 여러 신문과 매체에 영화와 문화에 관한 글을 써 왔으며, 지은 책으로는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권의 공저가 있다.
발행일 2009.03.27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