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퇴계의 정신 중 가장 빛나는 것 중 하나가 '물러남'"이라며 특히 귀향부터 별세까지 1년 9개월을 두고 "퇴계가 정말 감동적인 것은, 노쇠한 시기에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점"이라고 했다. 일례로 퇴계가 평생 쓴 편지 가운데 약 20%에 가까운 573통이 이 시기에 쓴 것이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김 원장은 "내용이 기가 막힌다"며 일부를 소개했다. 대를 이를 증손자에게 젖을 먹일 여종을 보내달라는 손자의 요청에 여종의 갓난아기가 죽을 수 있다며 보내지 않은 것도 그 중 하나.
또 금슬이 좋지 않았던 제자 이함형에게 도중에 열지 말고 고향집 앞에서 열어 보라며 써준 편지에는 부부의 도리와 남편의 역할을 강조하며 "나는 두 번 장가를 들었지만 내내 불행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결코 마음을 박하게 먹지 않고 노력해온 것이 거의 수십년이 됩니다"라고 썼다. 퇴계의 첫번째 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두번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원장은 "제자의 부부 금슬을 위해 자신의 치부까지 드러낸 것이 퇴계의 진면목"이라고 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상대를 존중하는 퇴계의 면모는 일찍이 고봉 기대승과 8년에 걸친 논변에서도 유명하다. 대학자로 이름을 떨치던 퇴계가 26세나 어린 젊은 학자 고봉에게 처음 쓴 편지에는 "제가 전에 말한 것이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머리를 숙입니다" 등의 표현이 나온다. 김 원장은 "퇴계 선생은 고봉의 논박을 논박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동반자로 여겼다"며 지금 시대의 상충하는 견해들에 대해서도 "판을 깨지 않고 협의·조정해 나가는 지혜"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