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
부모님에게 가서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야만이란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만든 말로 자신의 문화가 다른 문명보다 우수함을
말하기위해 만든 말이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고 그 이후가 700년간의 무신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현재 천왕이 사는 도시 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가문의 수장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있는데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난립해 싸우는
전국시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청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현단위의 땅에 지배자인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집단이 영주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시킨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문화가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욕이라 알고있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5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소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를 발달시키게 되었고
일본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이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과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부는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고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이룬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께 논다는 겸손의 뜻이 원형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으로 부르던 정자를
지은후 그곳의 뜻이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나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령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 담장의 일부,북촌을 밀어버리고 빌라단지를 만들자는 사람들,
창덕궁의 아기자기한 산책로를 시원스럽게 밀어버린 사람들,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조선시대 세운 단성사가 헐릴때 우리 영화인들은 돈세는 일만했다.
돈에 미친한국영화인들,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어버리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바로 종로의 '피맛골'이다.
종로통 대로변 정승판서행차의'말을 피하다'에서 유래된 피맛골은 종로통의 뒷골목이다.
지금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문화유산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은 한국이 지닌 약점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세월이 지나면 무엇이든 잊혀지는 법이지만 역사의 현장은 고이 보존되고 간직되어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져야하는 법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하고 있는 것일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 있는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낡은 것은
허물고 처음부터 새로 짓는다는 한국식 개발과정으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국민들은 무관심하거나
부순사람을 지지한다.
옛날 것을 없애는 것은 한국의 약점 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이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떄
도 되지 않았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우리는 이런 야만의 시대에 살아야하는가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서울, 북촌에서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일생에 한 번은 독일을 만나라
세계는 기다리지 않는다
내사랑 백석
맨큐의 경제학 페이지230 (역사적건물의 외부효과)
구석구석 찾아낸 서울의 숨은 역사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