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정국민학교 13
이제는 탕정의 마지막 해를 맞이했다.
선생님은 한 학교에서 5년 동안만 근속할 수 있다.
‘탕정의 마지막 해, 유종의 미를 거두자’ 힘차게 달려 들었다.
5학년 1반을 그대로 끌고 6학년에 올랐다.
두 번째, 6학년을 맡았다. 이젠 아이들 가르치는데, 성적 올리는 데는 이골이 났다. 그동안 익혀둔 가르침의 방법은 항상 숙련되면서, 계속 시행 됐으니까.... ‘이제부터는 학업 성적 이외로도 가르침의 폭을 넓히자’
그 때 눈에 들어 온 것이 수학영재교육이었다.
수학영재는 교과 수학만으로는 달성이 어려운 고난도의 수학 실력을 요구해 특별 학습이 필요했다.
우리 반 몇 명을 선발해 특별 지도에 들어갔다. 나부터도 먼저 공부해야 할 정도로 깊고, 어려운 수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도 문제를 풀어내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탄탄한 교과 수학 실력을 갖춘 아이들이었지만 처음에는 상당한 어려움에 힘들어 했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실패를 반복되는 학습으로 이겨내고,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주산을 배우면서 익혀진 숫자 감각과 암산 능력도 한 몫을 했다.
충청남도 수학경시대회에 출전할 아산군 대표를 선발하기 위한 수학경시대회에 참가했다. 남자 3명, 여자 3명이 선발되는 군 대표에 우리 반 남학생 한 명과 여학생 한 명이 선발되어 홍성에서 열리는 도 대회에 참가했다.
비록 입상은 못했지만 아산군 대표로 선발되었음도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모든 일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질 수 없고, 연륜이 필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계속되는 주산부 활동도 커다란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급수 시험에서 단 자격을 획득하는 아이가 나오더니 경쟁적으로 2단, 3단까지 치고 올라갔다. 암산 실력도 일취월장하여 세 자리 이상 수 암산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는 온양 김무성 주산학원 원장으로부터 주산 전국대회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40명 이상 단체로 참가해야 하는 주산학원끼리 경쟁하는 시합이었으나 우리도 한 번 참가하여 그들과 겨루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신청을 했다.
어느 일요일, 서울의 전국주산협회에서 고문님이 직접 감독을 하러 학교에 들르셨다. “학교에서 참가하는 유일한 팀이 신기해서 직접 보러왔습니다.”
얼마 후 학교에 내 앞으로 소포가 하나 왔다. 전국 주산협회에서 보낸 것이다.
‘전국주산대회 장려상’이라고 씌여진 커다란 우승기가 들어있었다.
전국에 있는 그 많은 주산학원들과 경쟁해서 받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다음 주 전교 조회날, 우승기 전달식을 하는데 교장 선생님께서 나보고 나와서 받으라고 하신다. “애들이 받아야지 왜 제가 받나요’ 사양했지만 고집을 부리신다. “이 우승기는 이건표 선생님께서 몇 년 간 고생해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직접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학교가 생긴 이래 전국대회 우승기를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건표 선생님 고맙습니다” 하시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6학년 1반의 아이들도 내 뜻에 잘 따라 주었고, 학업성적도 2년 전 제자들에 못지않게 꾸준히 향상되었다.
그 당시 나는 학교에 가면 무한 행복을 느꼈다.
내 집 안의 어려움이나 속상함을 깡그리 씻어내는 카타르시스 자체였다.
눈 만 뜨면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고, 일요일도 없이 매달렸었다.
아이들은 힘들었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잘 따라 주었다.
2년 전 졸업한 제자들의 ‘서울대 프로젝트’도 계속 추진되었다.
학교로 호출하여 성적을 확인하기도 하였고, 전화로 공부하는 상황을 체크했다. 그 때 이장님의 배려로 우리 집에 특별히 놓여진 전화기가 큰 몫을 했다.
그 해 졸업생들이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온양의 네 학교 중 두 학교에서 전교 1등으로 입학했다는 소식은 내 탕정 5년의 백미였다.
우리 집은 그 해에도 순탄하게 지나갈 리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도저히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는 엄청난 일을 저질러 놓으셨다.
‘이 번에는 빠져 나갈 방도가 없겠구나’ 탄식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몇몇 사람과 함께 목천 할아버지께서 누워계신 선산을 ‘아남산업’에 잡히고, 시계로 받았다는데, 아버지는 어디로 사라지셔서 소식도 모른다.
그런데 액수가 너무 컸다. 도저히 감당할 길이 없었다.
앞으로의 과정은 뻔하다.
또 빨간 딱지가 붙을 것이고, 경매로 간다. 그래도 부족하면 어버지 명의로 있는 다른 재산으로 차례차례 달려들 것이다.
이제는 집마저 날아갈 판이다. “엄마, 이젠 우리가 살 집도 없게 됐네요. 동네 어느 집 사랑방이라도 세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엄마와 나는 어린 동생들에게는 알리지 않은 채 준비를 했다.
‘이젠 우리 할아버지 누워계신 곳까지 사라지는 구나.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어쩌나’ 그 때 생각이 떠오른다. ‘작은아버지도 할아버지 자식이다. 작은 아버지가 사달라고 하자. 그러면 할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자식 땅에서 계실 수 있다.
게다가 현 시세대로라면 아남의 빚을 갚고도 꽤 남을 것이다, 남는 돈으로 빚을 조금이라도 끌 수 있겠다’ 작은집은 부자였으니 가능할 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또, 자신의 아버지가 누워계신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형편이니....
즉시 서울 작은집으로 출발했다. 작은아버지께 간곡히 설명을 드리고, 산을 사주십사 사정을 했다. “안 사. 원 하루 한 날 조용할 때가 없으니....” 화만 내신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사정을 해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이젠 끝이로구나. 사방이 다 막혔다. 엄마와 내 동생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 막내 동생이 겨우 중학생인데....’
작은집을 나서면서 이미 눈물도 말라버렸고, 이를 악물고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