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삼승령 ~ 창수령(자라목이)
1. 산행 일정
1) 일 시 : 2011. 07. 02. (월) 09:30 ~ 15:00(날씨 : 맑으며 습도 높음)
2) 주요산 : 독경산(684m) / 학봉산(689m)
3) 소재지 : 경북 영덕군 창수면 및 영양군 영양읍
4) 동 행 : 백양동문산악회
5) 산 행 : 창수령 - 독경산 - 631봉 - 646봉 - 옷재 - 저시재 - 쉰섬재 - 689 - 창수령
2. 아래삼승령 ~ 창수령(자라목이)의 개요 (수평거리12.21km / 실거리 13.06km)
아래삼승령(약600m)에서 창수령(약500m)까지는 최고봉이 718m이지만 압정을 뿌려놓은 것처럼 높고 낮은 봉우리가 많다. 전체적인 평균고도가 높지 않고, 평이해도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봉우리잔치에 더해서 여름철더위와 싸워야 한다. 대체로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으나 이번에는 남에서 북으로 향한다. 창수령에서 독경산으로 오르며 영덕에서 올라오는 창수령고갯길과 맹동산의 풍력발전시설이 고비와 바람을 불어준다. 독경산에서 ⊃자형을 따라서 631봉에 이르러야 북쪽으로 향한다. 652, 646, 714 봉을 지나면서도 수많은 봉우리들을 헤쳐가면 옷재에 이른다. 옷재에서 저시재, 쉰섬재를 지나며 임도도 만나고, 더덕넝굴, 야생화, 산딸기, 오디 등으로 지루한 길을 달래며 간혹 깊은 골짝에 마을도 보이지만 산속의 산이라 길을 잃으면 꼼짝없이 갇힐 것 같다. 718봉에서 한참을 내려와 학봉산(689봉)으로 올라서 내려서면 아래삼승령에 이른다. 아래삼승령에는 정자와 소나무가 나그네의 쉼터를 마련해 두었다.
3. 산행의 흐름과 메아리
1) 들머리에서
하지가 지난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새벽이라도 밝은 훤하다. 방긋 웃는 햇살을 품으며 달려가는 차창에 비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웃음으로 보며 오늘 산행도 저렇게 밝았으면.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내일은 비가 많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흘러도 내일은 내일이고, 시원하게 들어오는 동해바다를 침대삼아 잠속으로 빨려든다. 꿈을 떨치고 도착한 창수령. 예전 3월에는 그렇게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바람이 자장가를 불러준다.
2) 창수령 - 독경산 - 558 - 595 - 631 - 652 - 646 - 714 - 옷재 (09:30~12:40)
산속의 시원한 기운이 흘러서 그런지 창수령은 여름이라도 시원하게 다가오며 간지럼을 태운다. 옛날의 그렇게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은 어디로 가고 오늘은 이렇게 희야가시를 하는지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유수같이 흐르는 세월에 옛 일들을 회상하며 창수령에서 독경산으로 향한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며 바람이 그리워진다. 영덕 창수령에서 올라오는 고갯길이 구정양장(九折羊腸) 인생길로 다가오고, 저 멀리 맹동산의 풍력발전시설이 겨울을 회상시키며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살피란다. 과거의 경험이 많다고 과거에 안주하면 퇴보이므로 과거를 거울삼아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노력을 기우리며 헬기장이 반듯한 독경산에 이른다. 독경산(獨慶山)은 저 홀로 아름답다는데 이해할 수 없으며, 경사지와 ⊃형으로 길을 둘러놓고 독경산을 보고 631봉까지 가야 북진할 수 있단다. 독경산을 북극성과 같은 산의 이정표로써 아름다움을 찾으며 631봉까지 다리를 놓으면 건너갈까? 다리가 있더라도 고지식해서 낙동정맥의 주된 등산로를 따랐을 것이고, 그러면서도 다리를 건너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 갈등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은 자신이 결합한 최대공약수가 나타날 때 과감하게 베팅할 수 있어야 가능하리라 여기며 652, 646봉을 이어간다. 연속되는 봉우리에 좌표를 찍어가도 산속의 산이라 설명이 어렵다. 714의 동쪽은 영덕 창수면 백청리(잣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라는데 찾을 수가 없고, 백청리 망상(忘霜)골은 서리가 내리지 않는 곳이란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무료한 시간을 달래며 걷는데 전해주는 말에 신뢰할 수가 없다며 50%정도는 맞는 것 같단다. 100%에서 50%를 신뢰하다면 나머지 50%는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설명한 것이므로 믿을 것이 아니라 미래개발의 동기로 삼아야 된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사실은 대부분 과거의 상황이고, 이것에서 한정된다면 미래에 대한 비전(Vision)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전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전하는 의미를 미래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며 옷재에 이른다. 옷재(烏峴 : 오현)는 보림리의 옛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밤나무골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동행하는데 지도에는 임도가 없다. 이제는 오지도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고 있었다.
3) 옷재 - 706 - 저시재 - 쉰섬재 - 718 - 안부 - 689 - 아래삼승령 (12:40~15:00)
옷재에서 706봉을 지나며 백청리의 본 마을인 저시마을에서 저시재의 유래를 살피며 산림이 우거진 마을길을 다라서 쉰섬재로 들어선다. 옷재, 저시재, 쉰섬재 등의 명칭을 산악용GPS로 좌표를 찍으며 쉰섬재는 조를 50섬이나 수확했다는데 산림이 우거져서 지명에 대한 유래에 고개를 까웃뚱거린다. 먹거리가 부족한 시절에는 선조들께서 험한 오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돌투성이 산간지역을 오로지 손으로 개간하여 문전옥답(門前沃畓)으로 완성한 노고는 어디에 견주겠는가? 세월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아쉬움에 쉰섬재 서쪽은 대체로 완만하고 동쪽은 경사라 개간할 의지가 있다면 가능하리라. 그리고 산딸기와 오디, 그리고 더덕이 시간을 돌려놓는 것 같다. 길쭉길쭉한 소나무들의 위용에 시원함을 안고, 보랏빛 엉컹퀴꽃에서 생명력을 발견하며 서서히 718봉으로 올라서 한참을 내려간다. 떨어지는 나락에서 화장(다비)을 하는 사람은 죽어서 지옥으로 갈 이유가 없다. 지옥은 불구덩인데 화장(다비)으로 지옥가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아무리 악해도 당연히 아귀세계로 갈 것이다. 이후 축생과 아수라를 거쳐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천상세계에 머무는 방식으로 윤회할 것이다. 천상세계를 넘는 것은 득도 등을 통하여야 가능하다니 일반적으로 6단계에서 윤회과정을 거치는데 화장단계를 한 단계 건너뛰는 것도 기술이다. 어쩌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도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러한 일을 만들지 않고, 해소하면서 살면 사후 세계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리라. 상대를 배려하는 삶을 넓히면 세상은 밝다며 학봉산(689m)으로 상승한다. 지도상의 무명봉이 학봉산으로 탄생하였네. 지명의 이름을 기록해 주면 산도 이름을 얻어서 미소를 지으며 길을 안내하듯이 우리도 무명인을 유명인으로 만들려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함을 느끼며 아래삼승령에 도착한다. 정자와 아기자기한 쉼터 및 키가 큰 소나무에 오늘의 여정이 무사히 끝났음을 알린다.
4) 날머리에서
영양으로 가며 농사철에 사용하는 살림집, 고랭지 배추와 고추, 기암절벽과 S자 계곡 등이 원시자연의 비경이다. 수비면 송하리를 지나 비포장도로는 덜컹거리는 달구지를 타는 기분이다. 검마산휴양림에 안착하여 숯불 돼지고기로 체력을 회복하고 잠자리에 든다.
* 창수령 (자래목이)
창수면 배암골은 마을이 자라형국으로 자라가 목을 내민 목 부분에 남씨가 살았다. 남씨는 깨만으로도 천석(千石)을 하는 부자 집으로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원구까지 흘러갔다. 어느날 보를 만들려고 땅을 파는데 피가 나와서 지관(地官)에게 알아보니 마을 형국이 자라 형국이며 피가 난 곳이 자라 목부분이라 하였다. 가래를 댄 사람은 죽고 남부자도 얼마 가지 않아 패가(敗家)를 하였다 한다. 지금도 이곳의 봇물은 역수(逆水)로 흐른다.
* 독경산
저 홀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운 산이라고 붙여짐
* 쉰섬재
넓직한 안부에서 조를 50섬(쉰섬)이나 수확하여 붙여진 지명
* 저시재
저시마을은 골짜기가 깊으며 땅이 거름지지 않으므로 곡식이 잘 안 되었다. 서민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며 기산리 저시마을은 1박2일을 촬영했다고 한다.
* 나옹 선사
고려말 불교계의 고승(高僧)이며 왕사(王師)인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 나옹선사는 고려 충숙왕 7년 경북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339년 이웃 친구의 죽음에 무상을 느껴 출가한 후 중국 원(元)나라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만나 2년간 수도(修道)하였고, 1374년 공민왕이 승하하고 우왕(瑀王)이 즉위한 후 왕사로 봉해졌다. 조선조 왕사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그의 제자 32명 중 한사람이다
* 신돌석장군
의병장으로 본관은 평산, 자는 순경이고 호는 장산, 본명은 태호이고, 이명은 돌석,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로 알려졌다. 187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출생하여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 봉기하자 영해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차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영릉의병진으로 창군하여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 일원에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하였다. 1908년에 이르러 의병장들이 많이 순국하고 전세가 불리해져 의병활동이 위축되자 11월에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신돌석은 지품면 눌곡리 외가의 동생들인 김상렬, 상태, 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이 독주를 먹여서 도끼로 살해되었을 때 장군의 나이는 31세였다.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고,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이 조성되고 그 기념관이 영해에 세워졌다.
첫댓글 매번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