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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제봉, 고소산성, 천관녀, 김유신, 선덕여왕
성제봉((聖帝峰) 지도
하동과 구례를 오가는 19번 국도상
악양면 평사리 외둔마을 '소상낙원'
`소상낙원'-고소산성-고소대-통천문-봉화대-
신선대-성제봉-샘터- 청학사 (6-7시간 거리)
청학사-성제봉-고소산성-최참판댁
고소산상이 위치한 형제봉의 또 다른 이름.
성제봉에 지명 관한 유래는 여러 설이 분분.
성제(聖帝)봉은 거룩한 성군을 뜻하는 봉우리.
'성제란 과연 누구를 칭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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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신화에 나오는 신시,그리고 하백
성제란 단군조선이 일어나기 훨씬 전..단군의 조상.
한국에서는 인구가 불어나고, 각 종족이 번성했다.
하여, 읍(邑)으로 불리우는 소국들이 많이 생겨났다.
천제를 대리하여 소도를 관리하는 관리자가 필요.
천제한인이 서자 한웅에게 천부삼인을 주어
소도의 관리자로 임명하는 내용이 단군신화.
천부삼인(금악, 삼위, 태백) 중
장차 소도로 쓸 태백으로 보내어,
신시(神市)로 하였다. (<신시본기>)
상고시대 신시를 열 수 있는 곳 = 청구
청구란 많은 사람이 모여 화백회의를 할 수 있는 구릉
천부삼인은 신시를 주관 할 통치자에게 주어지는 증표.
우리나라 역사 상 처음 청구가 생긴 시기는 한웅천왕 때
첫번째 청구는 태백으로 불리우는 쇠머리 형상의 섬.
신시연구가 장동균 씨 주장은 청구는 황하하류 저지대
치우천왕이 다스린 청구국은 탁록에서 황제와 전쟁 직전.
이때 지진이 일어나 바다 속으로 침몰한 청구국
서북계도(西北界圖)에 그려진, 쇠머리형상의 섬
현재 한반도 서쪽 저지대는 서해 속으로 사라진듯
황제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치우천왕의 청구국.
한인천제 당시 시작된 신시제도도 사실상 붕괴
청구국이 멸망한 이후에 생겨난 나라가 단국이다.
단국은 배달나라의 맥을 이어 3대를 유지.
태제(泰帝), 홍제(洪帝), 성제(聖帝)
성제((聖帝)는 단군조선을 창건한 단군왕검.
이 때 배달나라 국호를 숙신(肅愼)이라 한다.
당시 중원의 판도는 홍제와 수분하(綏芬河)를
가운데 두고 제곡고신과 대결구도 상태였다.
(주 : 수분하 = 서쪽에 있는 황하 지류)
제곡고신 영역에 있던 곤오는 풍이족.
한인천제를 조상으로 둔 풍이족 후예
그는 제곡고신 폭정을 피해 홍제에 귀순
숙신의 땅에서 불함산 북쪽에 살게 된다.
소씨(蘇氏) 족보에 의하면,
홍제 8년 제곡고신이 수분하 동쪽으로 침공하자,
이를 기풍(己豊)이 나가 맞이하여 싸워 물리친다.
홍제는 기풍의 공을 치하해 소성(蘇姓)을 사성(賜姓)
소성(蘇城)에 봉해 하백(河伯)이 된, 기풍.
하여, 기풍은 소풍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하백이 된 기풍은 소도를 관리하게 된다.
하백은 구주 통합국의 통치자와 같은 위치.
홍제가 기풍을 소성에 봉했으므로,
그는 불함산 북쪽에서 소성으로 이주.
소성을 부소갑(扶蘇岬)이라 한 것을 보아,
소성은 갑(岬)이 있는 물가인듯 여겨진다.
그곳의 나라 이름을 유소(有蘇)라 부른듯.
한인천제가 처음 도읍한 배곡 = 북소(北蘇)
부소갑 = 남소(南蘇), 하남 업성 = 서소(西蘇)
이들, 북소 남소 서소를 삼소(三蘇)라고 하였다.
부소갑에서 태어난 곤오의 큰아들 이름은 갑(岬)
부소갑의 따님을 하백녀(河伯女)라고 하였는데,
단군 왕검의 둘째 부인이 곧 하백녀(河伯女)이다.
<소도>라는 말이 소풍에게서 나왔다고 추정된다.
소도는 화백회의를 하는 신성한 장소로 자리매김.
곤오가 이곳에서 청동으로 솥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
'이곳 솥터라는 옛 지명이 소도로 변한듯.'
소도의 도(塗)는 도기(陶器)를 의미하는 문자
지나족(현재 중국인 조상) 선진사(先秦史)에는
곤오가 청동솥과 도기를 만들던 곳이라는 기록.
<후한서>에 나오는 진국(辰國) = 삼한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
진(辰)은 뱀과 용이 상징인 '풍이족' 국가.
풍이국은 한인천제가 세운 나라,
이를 승계한 사람이 곧 곤오이다.
곤오의 영역 삼한은 곧 진국에 해당.
마한은 마가의 나라로 볼 수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마고의 나라이다,
즉, 마한(麻韓)은 '마고의 나라'에서 변음.
진한은 풍한(風韓) 곧 '풍이의 나라'에서 변음
변진은 별진(풍이를 상징하는 별의 나라)의 변음
진(辰)은 훗날 진(眞)으로 변음
이들 문자의 변음을 유추하면,
후대에 생겨난 막조선은 마한에서,
번조선은 변진에서, 진조선은 진한에서
각각 고대국가 형태로 발전한듯 추정된다.
이들 중 신시 역할을 수행한 나라가 있었을 듯.
단군왕검은 조선을 선포후 10년에 한번 신시를 개최
단군왕검 관할인 진조선에서 10년에 한번 신시가 열린듯.
'따라서, 성제란 단군 왕검을 상징..'
고소산성.
삼국시대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소산성(姑蘇山城)
축조 시기에 관한 유래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00년 전 즈음 삼국 간 격전이 벌어진 군사 요충지.
1966년 사적 제151호로 지정된 고소산성
하동-화개장터 국도 따라 차로 20분 거리
동북으로 지리산 준령을 등지고 있으며
서남으로 섬진강과 동정호를 내려다 보며
남해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통로의 길목이다.
'지금은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
화개장터 지나 불무장등 끝 지점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전지역.
지리산 형제봉 아래 섬진강 인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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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형제봉이란 봉우리가 셋이나 있다.
구례군 마산면 형제봉, 벽소령과 명선봉의 사이,
남부능선 마지막 봉우리, 함양군 악양면 형제봉.
'셋 모두 우애 깊은 형제 같아.. 형제봉.'
성불재 - 형제봉 - 신선대 - 고소산성 코스.
불일폭포나 쌍계사 못지 않은 아름다운 경관.
그러나, 두 명소 유명세에서 밀려 한적한 코스.
섬진강 풍요로운 물줄기 따라 펼쳐진 지리산 자락.
가고 또 가도 지겹지 않으면서도 구석 구석 볼거리
지리산은 언제 가도 돌아서는 발목을 끌어 당기는 곳.
지리산은 알면 알수록 모르는 곳이 더 많은 곳.
지리산 자락의 고소산에 있는 고소산성이 그렇다.
악양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다.
고소산성은 백제와 나단연합군 간에 치열한 격전지.
산성둘레 팔백m로 장방형 바위를 견고하게 쌓은 석성
남북 양쪽에 성문을 설치했고 성벽 높이는 3.5~4.5m
'아래 폭이 6m 이고 상단 폭이 2m인 사다리 모양.'
이 성터는 지리산에서 뻗어내린 평사리 뒷산 300m 고지
동북쪽으로 험한 산줄기를 등지고 서남쪽으로는 섬진강
고소산성 오르는 길은 처음부터 경사가 급해 무척 힘들다.
일단 올라서 사방을 한바퀴 돌면서 눈길을 주고 보면,
기다란 섬진강 줄기와 평사리, 푸른 악양벌이 보인다.
부산의 동래산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성이다.
비록 그럴싸한 성문도 없지만 축성한 것을 보면 더 든든.
울퉁불퉁한 돌들의 아귀를 맞춰 빈틈없이 쌓은 것이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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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남과 전남의 경계지점은 고소산성 일대.
정확하게는 화개장터 지나 불무장등 거쳐 삼도봉
신라와 백제 접전지역이 오늘날 영,호남의 경계선.
하동은 '한다사군'이었다가
삼국통일 후 경덕왕때 하동군
신라 김춘추 장군이 백제를 공격하려 당 원병을 청해 축조,
나당연합군 주둔기지로 활용하면서 백제와 왜의 협력을 차단
이곳에서 소정방 군이 주둔하면서 주력부대를 지휘했다는 곳.
그러나, 이 설은 산성 이름에 소정방을 끌어들인 느낌.
소정방이 이끈 나당연합군 주력부대는 당시 금강을 침공
악양도 신라에서 당과의 우호 목적으로 중국 악양을 모방.
백제와 왜(倭)와의 협력을 차단할 목적으로
신라가 나당 연합 전 고소산성을 축조했을듯.
아직 풀리지 않은 '베일 속 수수께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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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연개소문,
신라 김유신.
백제 계백.
3 장군은 삼국을 대표하는 같은 시대의 영웅.
삼국시대에 전력이 가장 열세였던 나라는 신라.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진덕여왕 2년(648년).
김춘추는 당나라 사신으로 가 백제 정벌 원군을 요청
진덕여왕이 지은 '태평송'을 바치고, 당나라 연호 사용.
..................태평송(太平頌)....................
650년 진덕여왕이 당 황제에게 보낸 5언 고시.
당나라 위엄과 문화적 우월성을 칭송하는 내용.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
세계각국 모든 나라의 복속을 요구했다.
하여, 당 고종에게 태평송을 보낸 진덕여왕
647년 즉위한 진덕여왕은
그해 정월 비담 무리를 평정.
10월에 백제가 신라를 침공해왔다.
당시 신라는 백제에게 망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김춘추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러갔지만 실패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으며,
649년 당나라를 본떠 복제를 개편.
당시, 당에서는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
이무렵 신라 김춘추는 사신으로 당에 간다.
그후 당에서 돌아온 김춘추
진덕여왕에게 태평송을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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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생존을 위한 김춘추의 눈물겨운 외교정책 결실
신라는 매년 당 황제에게 보내기 위한 미녀들도 선출.
미인 대회에서 선출되면 친선외교 사절로 당나라에 파견.
신라는 우여곡절 끝에 나당 연합군을 결성.
백제를 집중 공격해 백제는 풍전등화의 위기.
백제는 계백이 이끄는 5천 결사대로서 배수진.
계백은 '죽기전엔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는다'는 신조.
계백 5천 결사대는 신라 5만 대군과 맞서 황산벌을 사수.
신라군은 10 배의 병력으로도 백제 결사대와 싸워 연전연패.
그 사이 당군은 기벌포로 진격, 부여 사비성은 풍전등화.
사비성을 당군에게 빼앗기면, 신라는 '죽 쒀 개 주는 격'
당나라가 백제를 함락하고서 신라까지 삼킬지도 모를 일.
당나라 대군이 백제 사비성을 함락할 것인가?
아니면, 신라군이 먼저 백제에게 항복 받느냐?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신라의 운명.'
신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대로 떨어졌다.
여기에서 김유신이 채택한 전술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전의를 상실한 신라군 사기를 높이는 일.
하여, 꽃다운 화랑을 결사대로 이용한다.
화랑 관창은 선봉으로 나서 장열하게 전사.
그의 죽음은 신라군 분노를 흔들어 깨운다.
두번째, 백제군 결사대의 결의를 역이용한 김유신.
'죽기 전엔 갑옷과 투구를 벗지 않는다'는 백제군.
비오는 날 진흙덩이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인 것이다.
그러자, 계백 결사대의 장점은 단점으로 전환.
진흙탕에 젖은 갑옷을 입고서 싸우기에는 무리.
김유신은 계백의 장점을 단점으로 전환시키고,
패배감에 빠진 신라군의 분노를 일깨워서 승전.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물리쳐 삼국을 통일한다.
신라에서 유일하게 진골 출신이 아닌, 김유신.
김유신은 가락국 왕손이지만 신라에서는 이방인.
신라에서 살아남을 길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일.
김유신은 삼국통일 원대한 야망을 품는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김춘추와 손을 잡는다.
그것은 김유신이 신라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
'나라가 위급하면 반드시 영웅이 필요한 법.'
김유신은 거의 한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까지 몰아낸다.
김유신은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사랑마저 포기.
가락국 마지막왕 구형왕이 못 이룬 꿈.
'구형왕의 손자' 김유신에게 이어진 꿈.
결국, 김유신 대에 이르러서 이루어진 꿈.
'오직 그 꿈을 향해 내달렸던 김유신.'
신라 두 여왕 등극의 든든한 뒷배경은 김춘추와 김유신.
두 여왕을 앞세우고 두 사람은 꾸준히 자파 세력을 확장.
결국, 두 사람은 신라를 장악하고 삼국통일까지 이뤄낸다.
'고소산성은 언제 누가 축조했을까?'
나당연합군을 이끈 소정방이 쌓았다는 설.
삼국통일 후 신라까지 장악하려 했다는 설.
그러나, 정확한 축성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 시대.
신라 삼국통일 열쇠를 쥐고 있었던 인물.
고소산성은 그무렵 쌓았을 것으로도 추정.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을 단단히 움켜쥔 여왕.
자신의 안녕과 나라의 발전을 이룩한 통치자.
7세기 초 신라는 정치적으로 변화가 심했던 시기.
원래, 신라 왕위는 부모가 모두 성골이어야 한다.
하여, 극소수의 성골들에게만 허락된 자리가 왕위.
왕위계승 자격은 진평왕의 딸 덕만(후일 선덕여왕)과
조카 딸 승만(후일 진덕여왕)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성골 다음 계급인 진골 남성 중 왕위 유력한 후보.
김용춘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듯 했다.
그러나, 화백회의는 김용춘을 왕으로 추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평왕의 딸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추대했다.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 왕위는 상상을 초월한 사건.
남성들 화백회의 만장일치로 덕만공주는 왕위 계승자
나라의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왕의 자질.
즉, 통치자의 카리스마를 덕만공주에게서 발견.
덕만공주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권 획득.
선덕여왕이 보여준 군왕의 능력은 바로 인재등용.
그녀는 자신이 매혹적인 여성인 점을 적절히 이용.
김춘추와 김유신을 발탁하여 그녀의 휘하에 두었다.
왕위 계승권을 두고 선덕여왕과 경쟁한 김용춘.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 역시 선덕여왕에게는 정적.
선덕여왕에게 가장 큰 정적이 될 수도 있는 김춘추.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역적으로 몰지 않고
그를 최고의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고 곁에 두었다.
김춘추에게 외교 전반에 대해 전폭적인 권한을 부여
김춘추가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 것이다.
정적을 곁에 두고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한 것.
그것이 바로 선덕여왕의 탁월한 카리스마요, 용병술.
선덕여왕 재위시 김춘추는 왕권에 도전한 적이 없고
오히려 가장 충실한 신하로서 선덕여왕을 보필하였다.
선덕여왕이 그 누구보다도 아꼈던 인재는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원래 신라에게 합병 당한 가락국의 왕손.
김유신 가문은 가야 멸망 당시 신라의 진골로 편입.
그러나, 배타적인 신라 귀족들에게 김유신은 이방인.
명목상 진골일 뿐인 김유신을 발탁한 선덕여왕
김유신에게 신라 군사권 전부를 맡긴 선덕여왕.
잘못하면 국가 전체를 위협하는 파격적인 인사.
그러나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능력만으로 평가
합당한 지위를 부여해 충직한 신하로 곁에 둔다.
자신의 카리스마로 그를 조정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
선덕여왕 재위 때 신라는 문화적 전성기를 맞는다.
웅대한 건축물과 아름다운 조각들이 이 시기에 속출.
정치적 문화적으로 꽃이 폈지만 국외 사정은 어려웠다.
원래 삼국 중 영토가 가장 작고 국력이 약했던 신라.
고구려 남하 정책과 백제 중흥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국가 존립이 문제되던 때에 선덕여왕의 화려한 외교술.
김춘추를 일본과 당나라로 파견하여
고구려와 백제 세력과 동맹관계 결성.
신라를 침범할 수 없는 방어선을 구축.
외교를 통해 국외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은 신라
부지런히 국력을 키워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
선덕여왕의 정치적 성공은 그녀 개인적 삶의 희생.
그녀는 여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독신생활을 했기에 후사가 없었다.
남자를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매력과 미모.
어지간히 남자의 속을 태우는 매력의 소유자.
신라 남자라면 모두 흠모할 만큼 만백성의 연인.
............삼국유사 속 선덕여왕에 관한 고사............
'지귀'라는 청년이 선덕여왕을 흠모하다가 상사병.
영묘사에서 불공 드리던 여왕은 그 소식을 듣는다.
여왕은 불공을 마치고 지귀에게 알현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쳤던 지귀는 잠들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지귀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주고 간다.
뒤늦게 잠에서 깬 지귀는 잠이 든 자신을 원망한다.
'타오르는 사랑을 참지 못해 불 속에 뛰어든 자귀.'
자귀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렸던 선덕여왕.
미천한 자귀의 가슴에 팔찌를 풀어놓고 간 여왕.
자귀가 꿈속에서라도 단 한번 보고 싶었던 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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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사를 보면 짐작가는 선덕여왕의 매력과 미모.
신라의 많은 남자들이 그녀를 흠모하고 사랑했었다.
정작 그녀는 여왕이기에 누구에게도 정줄 수 없었다.
만백성의 연인으로 남는 것이 여왕의 길.
그녀는 당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평.
'선덕여왕은 어떻게 당태종을 사로잡았을까?'
독신생활로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지 않았던 여왕.
국가 안정에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화려한 독신생활.
그것이 신라 통치자로 존재하게 했던 그녀의 카리스마.
강력한 카리스마로 남자 신하들을 사로잡은 여왕.
평생 고독을 감수하며 국가 안정을 도모한 정치가.
신라의 제 27대 (632~647 재위) 선덕여왕(善德女王)
삼국시대의 애환과 비화를 간직한 고소산성.
수많은 역사를 침묵으로 대변하는 고소산성.
신라에게 삼국통일 기회를 안겨준 고소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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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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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전선 동맹.
7세기에 접어들어 삼국은 치열한 전쟁을 전개.
그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협공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당나라도 고구려를 견제할 목적으로 신라와 연합.
신라는 고구려 백제가 침입때마다 당에 사절 파견
당나라는 신라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입장
고구려·백제에 대해 외교공세를 강화하기도 했다.
648년(진덕여왕 2) 나당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한다.
그 내용은 삼국통일 후 패강(대동강)을 경계선으로
한반도를 당나라와 신라가 나누어 통치한다는 협약
이 협약에 의해 나당연합군이 구체적으로 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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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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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군은 산발적인 침공으로 고구려 국력은 피폐
660년 백제멸망후, 나당연합군의 고구려 공세 강화.
661년 당나라 소정방은 35만 대병으로 고구려 침입
연개소문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당군 패퇴.
그런데, 백제 멸망으로 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
고구려를 공격하며 당나라 군대에 군수물자 공급
이에 당나라 군대는 겨울철에도 군사 작전을 감행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 간의 내분
이때 당나라 고종 황제는 고구려 침략 감행.
666년 12월 당나라 이세적 장군이 총사령관
한편,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케 했다.
고구려는 내부 분란과 외부 침략 때문에 멸망.
고구려는 결국 668년 9월 평양성 함락으로
28대 705년에 걸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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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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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2~667 중국 당나라 무장으로 당 태종 때 동돌궐 정벌
657년 서돌궐을 쳐 중앙아시아 제국을 안서도호부에 예속.
660년(백제 의자왕 20) 3월 13만 대군 나당 연합군 대총관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한 덕적도...........
삼국통일 전쟁 때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도착하자
660년 신라 세자 법민이 작전회의를 하기 위해 덕적도 방문.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전진기지였던 유서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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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반도에서 황해 건너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
의자왕, 태자 융 ,신하, 백성 1만 2천명을 당으로 압송
그 이듬해 661년(고구려 보장왕 20) 고구려 평양성 공격
661년 정월 당이 35군대(軍隊)를 수륙으로 나누어 침공.
662년 정월 연개소문과 사수에서 싸웠으나 전군이 몰살.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소정방은 평양 포위를 풀고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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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소정방 피살사건 미스테리.
1천3백년전, 다리 밑에 매장된 소정방의 피살 사체.
소정방의 시체가 묻혔다는 당교는 상주와 문경 경계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을 살해하고 묻었다고 전해온다.
'소정방 피살사건의 단서를 제공해주는 사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당나라가 천하통일을 꿈꾼 곳.
소정방은 백제까지 정복해 최고의 전공을 기록한다.
이 업적으로 소정방은 왕 다음 높은 작위를 받는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소정방
그의 죽음은 어디에도 기억되고 있지 않다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공격
소정방의 당군은 서해안에서 백마강으로 진입
신라도 황산벌 거쳐 진격 후 사비성에서 합류
소정방과 김유신 사이에서 갈등이 시작.
백제점령 후 소정방은 신라까지 치려 했던 것.
삼국통일을 꿈꾼 신라에게는 절대절명의 위기.
소정방이 피살됐다는 당교에는 당군 주둔 흔적
전쟁터도 아닌 당교에 왜 당군이 주둔한걸까?
김유신은 소정방을 살해하고
그 머리를 다리 밑에 묻은 탓.
신라와 손잡고 이땅에 왔던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
기벌포를 통해 백제군을 공격하고 백제왕국을 점령.
하지만 이 기벌포에서 당나라 군대는 신라에게 패배.
당나라 군대가 점령한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세력.
신라와 뭉쳐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낸다.
당나라가 한반도를 점령 통치하려 한 때문이었다.
........신라 고전(新羅古傳).......
"소정방이 고구려·백제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김유신은 그 뜻을 알아채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
독약을 먹여 죽이고는 시신들을 모두 쓸어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당교(唐橋)가 그들을 묻은 곳이다.
"<당사唐史>를 상고하건대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죽었다고만 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감추기 위한 것인가?
만약,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신라가 소정방 군사를 죽였다면
후일 어찌 당나라에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할 수가 있었겠는가?
고구려를 멸한 후에
당나라 신하로서 섬기지 않고
만대로 그 땅을 소유한 일은 있었으나
소정방 이적 두 공을 죽인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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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의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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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씨(蘇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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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산성은 한자로 고소(姑蘇)라고 쓴다.
姑는 마고를 뜻하고 蘇는 소씨를 뜻한다.
마고는 한반도 모계사회 여왕이자 제사장
소는 단군조선의 전신인 우리나라 국호.
마고와 소가 결혼하여 조선을 일궜다는 신화.
그 사이에서 태어난 8딸이 팔도를 다스린 무당.
고대 모계사회에서 무당은 공주의 신분를 뜻한다.
'공주가 통치자 후계자였던 모계사회.'
..................... 蘇(소)..................
한단고기는 단국을 일컫는 우리나라 옛 이름.
단군 조선의 전신으로 단군이 태자였던 나라.
소(蘇)는 단국(檀國)의 홍제(洪帝) 8년에
황제(黃帝) 손자인 제곡고신과 반목하던 기풍
홍제에게 귀순하여 숙신(하얼빈 북쪽)에 정착
단국과 제곡고신국 국경 수분하를 건너 침입 때
이를 물리쳐 하사받은 성씨가 晉州 蘇氏씨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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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소씨(蘇氏)의 유래.....................
소씨는 동구이(東九夷) 중 풍이(風夷) 후손
기원 전 4241 년 풍주 배곡에 도읍을 정하고
전 국토에 무궁화(蘇)를 심어 성을 소(蘇) 씨,
이름을 복해(復解)라 한 것이 소씨의 시초이다.
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길림성)의 하백에 봉해졌고,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이
기원전 209년에 진한(辰韓)을 건국했다.
660년(태종무열왕 7) 3윌 3일 알천(閼川)이 진주(晋州)로 낙향,
경(慶)으로 이름을 고쳐 진주 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 따님이 헌종의 비가 되어 회순왕후(懷純王后)
그가 진산 부원군에 봉해지며 관향으로 삼은 진주.
소경(蘇慶)은 577년 (진지왕 2)에 태어나
647년 (진덕여왕 1) 2월에 상대등에 올랐다.
상대등(上大等)이란 신라 6대 귀족회의 의장.
진덕여왕이 서거하자 귀족들은 공에게 섭정을 요청
그는 섭정을 사양하며 그대신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신은 늙었으며 또한 덕행을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나,
춘추(春秋)는 덕망이 숭중하고 실로 제세의 영걸이라"
태종 무열왕은 경(慶)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공의 조상 소벌을 문열왕(文烈王)에 봉하였다.
<신유보>에 보면 공은 소백손의 29세손이요,
또한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25세손으로
소알천(蘇閼川)인데 팔순 넘도록 손이 없었다.
어느날 꿈에 나타난 선조 백공
"그대가 도사곡으로 옮겨 살면
반드시 9치(9장군)을 얻으리라"
그 후 무열왕 3년 3월 도사곡(진주 상대동)으로 이사
결국 며느리 석씨(昔氏)가 손자 복서(福瑞)를 낳았다.
그 기쁨으로 자신의 휘를 경(慶)이라 개휘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공의 3세 복서(福瑞), 4세 억자(億滋),
5세 후준9後俊), 6세 검백(劍白), 7세 상영(尙榮),
8세 목(穆), 9세 은(恩), 10세 송(淞), 11세 격달(格達)
9세 9장군(9世9將軍)이 이어져 현몽의 내용과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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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소씨 족보서문..............
「옛날에 적제(赤帝) 즉 황제요,
휘가 부해(復解)이고 호가 축융(祝融)」
한국의 제(帝)가 되어 기묘년에 나라를 세우고
풍주의 배곡에 도읍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인천제의 깃발인 휘가 부해,
즉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상징.
축융은 '불을 다스리는 사람'
즉, 하늘에서는 태양을 상징.
땅위에서는 불을 다스리는 신.
부해란 해가 둥글게 떠오르는 것.
부상(扶桑)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즉,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이 부상이다.
항(姮)자를 파자해 풀이하면 '해맞이 여자'.
즉, 하늘과 땅 사이 태양을 맞이하는 여자.
신년 초하루에 한인천제를 맞이하는 해맞이.
일년동안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기원
9천년전 한인천제가 해맞이를 하며 기원했듯
한인천제는 최초로 태양을 숭배했던 제관
한인천제는 5제 중 남방적제(南方赤帝)
축융(祝融)은 축(祝)은 빌다, 기원하다.
또는 신을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융(融)은 화합하다, 녹이다, 녹다 는 뜻
한인천제가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인간들 간 서로 화합할 수 있도록
하늘에 제사를 맡아 지내는 제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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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녀.
경주 인왕동 국립박물관 앞 도로로 이어진 남천내.
개울따라 한참 가다보면 천원동네에 천관녀의 절터.
김유신을 죽도록 못잊은 비련의 주인공이., 천관녀.
논 둑길을 따라 도착한 곳에 천관녀 절터 안내문
그녀의 슬픈 사랑을 더욱 아프게 떠오르게 한다.
석등 받침대와 탑 조각들은 바닥에 깔아 놓았다
그녀는 조국 가야의 멸망을 김유신과 함께 겪는다.
천관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박혁거세의 왕릉
천관(天官)은 원래 제사장의 역활을 하는 직업.
천관사에서는 저멀리 김유신의 생가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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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
역사 속에 그녀는 기생이었다고 전해온다.
김유신은 청년시절 그녀에게 흠뻑 빠진다.
'김유신과 같은 가야인이었던 그녀.'
김유신이 사랑에 빠져 학업을 게을리하자
이를 걱정한 어머니가 김유신을 꾸짖는다.
김유신은 그녀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맹세.
그러던 어느날 김유신은 활쏘기 연습에 지쳐
말등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그녀 집 앞에 간다.
애마가 평소의 버릇대로 그녀의 집앞에 멈추자
김유신은 칼로 애마의 목을 쳤다는 유명한 일화.
뒤늦게야 제 정신을 차린 김유신
스스로 결심을 가다듬기 위한 자책.
그 광경을 목격하고 비구니가 된 천관녀.
김 유신의 앞날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그녀.
사랑하는 님의 오고 계시는 말발굽소리.
그 소리만 듣고도 반갑게 달려나온 천관녀.
님을 싣고 온 말이 님의 손에 베어지는 광경.
'두고 두고 피맺힌 한이 되었을듯.'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힘을 합쳐
삼국통일을 하고 다시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끝내 비구니의 길을 간 천관녀.
진평왕 때 태어나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거쳐
태종 무열왕까지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김유신
여동생 문희를 무열왕의 정실부인으로 등극시켰고
가문을 일으킨 김유신 가슴속에는 늘 첫사랑 천관녀.
평생 김유신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다가 죽은 비구니.
천관녀가 죽은 그 집에 절을 세워 명복을 빈 김유신.
천년 세월이 지나 그 탑도 무너지도 터만 남은 천관사
탑의 잔재가 두 사람의 가슴아픈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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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이란 춤 노래 풍류로 흥을 돋우는 예기의 총칭.
그 원조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 원화(源花)에서 발생
고려를 거쳐 이조시대에 들어와 많은 관기가 생겨났다.
관기는 지방 관아에도 딸려 지방관 위락(慰樂)의 대상
기생을 즐긴 성종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 안평대군.
기생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성천(成川)
해주(海州)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등이었다.
시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는 황진이 매창 소백주 등이 있고,
의기(義妓)로는 계월향, 논개(論介),가산(嘉山)의 홍련(紅蓮)
천민이지만 시와 서예에 능한 기생은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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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녀는 원래 기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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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 원화였던 듯.
노고단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의 여사제.
여신을 모신 국가 제사라 여사제를 등용한 듯.
'천관녀는 김춘추와 김유신 둘 다 반할 미모.'
신라에 불교가 중흥하며 여사제 제도 폐지.
신라에서 여사제 신녀는 기생 신분으로 전락
따라서, 천관녀는 기생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24대 진흥왕 재위기간에 일어난 일.
급변했던 신라 개혁시대 실상이 짐작간다.
삼국시대에 국가 존립이 위태로웠던 신라.
고구려 백제보다 국력이 약했던 신라.
꽃다운 화랑들이 위기 속 신라의 대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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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의 국가 제사를 주관했던 여사제.
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높은 신분이었다.
성서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인이 여사제.
'신라의 <천관녀>는 <라합>과 같은 여사제.'
신라에서는 높은 신분이 보장되는 여사제.
노고단의 성도성모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
신라에서는 여사제가 성도성모를 모셨던 듯.
훗날, 불교가 중흥하며 제사 풍습이 쇠퇘.
천관녀 여사제 높은 신분도 무당으로 전락.
통일 신라시대 이후에는 기생으로 전락한 듯.
하여, 김유신을 사랑했던 천관녀.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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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바뀌어가는 과정.
동서양을 막론하고 급변했던 사회적인 변화.
모계사회가 붕괴되고 부계사회가 정착될 무렵.
메소포타미아(히브리 또는 합비아) & 이집트.
두 문명사회를 오가던 대상들이 지배한 노예층.
이집트 내에서 문명건설의 노역을 맡거나 떠돌이.
당시 이집트로부터 탈출한 노예들이 팔레스타인
이 탈출을 이끈 영도자가 성서속에 나오는 모세
모세가 죽고 여호수와가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정착한 히브리인들.
이집트나 로마의 천민 계급 내지는 노예층.
민족지도자 모세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탈출.
이집트 - 아라비아 - 요르단강 - 팔레스타인.
노예층이 요단강 건너가 정착한 축복받은 땅
일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곧 팔레스타인
그런데, 요단강 도하를 가로막는 견고한 성 '여리고.'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내 여리고성 일대 지형을 탐지
정탐꾼들은 여리고성 내 '라합' 여인 집에서 정탐 업무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정탐꾼들을 내놓으라 성화.
라합은 그들이 이미 떠났다며 정탐꾼들을 도와준다.
여호수와 군에게 점령된 후 여리고 성 주민들은 전멸
라합은 정탐꾼들읠 도와서 구원받고 유다 청년과 결혼.
예수는 바로 그들의 후손이라는 것이 성서의 기록이다.
'<라합>이란 어떤 여인일까?'
개역 성경에는 기생이라 번역
공동번역성서에는 창녀라 번역.
히브리는 노예와 유랑민의 집단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을 노예로부터 벗어나게한 해방신.
유랑민에게 정착할 수 있는 땅을 찾아주었던 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여호와(야훼)라 명명.
만군 = 군대를 총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라는 의미.
하여, 야훼는 신전이 없었고
광야에서 민중과 함께 행군
일정한 숭배 장소도 없었다.
그들이 정착한 팔레스타인 지방은 농경지방.
그곳은 그들이 조상대대로 농사를 짓는 농토.
그들은 비옥한 그 땅을 지킬 많은 자손이 필요.
'그 꿈을 이룰려면 건강한 여인과의 성생활.'
그래서 땅과 여인을 상징하는 신을 섬기게 되었고
이 신에 대한 경배와 제사의례로 거룩한 성교 의식
성교에 의해서만 자손을 번식시키고 농축산물의 결실
대표적인 여신 '아세라'를 섬기는 아세라 신전.
여사제가 상주하며 신전 순례자들과 성교 의례
이러한 여사제를 점령군 야훼 쪽에서 보면 기생
라합은 몸을 팔고 웃음을 파는 창녀가 아니라
신전에서 성교의례를 수행하는 여사제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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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부여 신녀(神女) 여미을
금와왕이 국가에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여미을과 의논.
예지력을 지닌 그녀의 자문을 받은 후 중요사안을 결정
고대국가에서 무당인 신녀(神女)는 제 2 인자.
신분 상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나라의 제사장.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할 막강한 힘을 가진 권력자.
삼국시대 통치이념 불교 정착후 사라진 신녀(神女)
기생으로 전락하거나 비구니가 된, 신녀.
천관녀 역시 그러한 '운명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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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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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산(天冠山, 723m)은 천관녀가 머리를 깎은 산.
비구니가 된 천관녀에 관한 전설이 서려있는 명산.
오매불망 못잊을 김유신 장군을 잊으려 한 천관녀
천관녀가 여생을 보냈다는 경북 월성의 어느 암자
전국을을 다녀보면 수많은 기암괴석 명산들.
환희대에서 바라 본 지나온 천관사 능선
대세봉, 구정봉, 천주봉 농안제쪽 지장봉
하나같이 천관산의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
구룡봉 능선에서의 진죽봉과 지장봉은 압권.
연대봉 억새밭에 술자리 펴고 복분자 한잔술
천관녀의 풀어헤친 젖가슴 속살 품에 안긴 듯
바람에 허리 꺾을 듯 억새의 유혹적인 춤사위.
환희대에서 연대봉으로 이어지는 억새평원 춤사위
천관사 능선 오름길 진죽봉, 지장봉 능선의 기암들
지장봉 내림길 천관사 능선의 대세봉, 구정봉, 천주봉
아름다운 기암괴석들의 승천하려는 듯한 산세.
수정재 돌아 산죽 터널을 지나면 천관사 주차장
하산후 회진항 포구 횟집 창밖엔 어둠의 그림자.
포구를 벗어난 귀경길에도 눈앞에 삼삼한 천관산.
'절세가인 천관녀의 미모를 알듯 모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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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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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을 달성한 김유신이 사랑했던 여인 천관녀.
큰 뜻을 품었던 김유신이 잊을 수 밖에 없었던 여인.
잠든 자신을 등에 태우고 천관녀의 집으로 갔던 애마
그 목까지 자른 김유신의 혹독하면서도 냉엄한 결단력
사랑하는 김유신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긴 천관녀의 비애.
결국, 스스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고
그녀 죽은 후 김유신이 그녀를 위해 지은 사찰.
그녀의 영혼이나마 위로했다고 전해오는.. 천관사.
아무튼 천관녀가 죽도록 이루지 못한 사랑
천 오백년 흐른 지금까지도 가슴 아픈 사랑
.........
천관제.
.........
천관녀의 애달픈 사랑을 위로하는 추모제.
김유신과의 못 다한 사랑을 추모하는 행사.
그날 하루라도 두 사람을 맺어주려는 천관제.
재매정 입구에 밝혀놓은 촛불.
두 영혼을 위해 밝혀놓은 화촉.
경주문화축제위원회가 주최하고
신라문화학교(대표 이홍렬)가 주관
매년 음력 칠월 칠일에 열고 있는 천관제.
견우직녀가 일년에 한 번 오작교에서 만나듯
천관사에서 칠월 칠석날 밤에 이루어지는 행사.
오작교를 만들기 위해 5 색깔의 흙과 물감을 준비.
하늘을 그리고 참가자들이 생각한 새를 그려 넣는다.
김유신 생가 연못인 재매정에서 열리는 천관제.
사랑을 이루지 못한 두 영혼을 위한 수백 촛불
천관녀 혼백을 천관사지에서 자매정으로 모신 흰 가마
천관녀의 한맺힌 혼백인 듯 가마 위로 날아 앉은 메뚜기
조금 있다가 또 다른 메뚜기 한 마리가 가마 위로 날아와
조금 전 날아와 먼저 앉은 메뚜기와 짝짓기를 하는 진풍경.
가마꾼들이 조심스럽게 신방으로 꾸민 초석 위에 옮긴 가마
'혹시, 날아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도 아랑곳 않고 짝찟기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이별의 한을 달래듯 부둥켜 안은 한 쌍.
김유신과 천관녀 영혼이 메뚜기로 변해 만난 듯 생각한 참석자들
정화수와 은은한 등불로 감싸여진 가마 안에는
두 혼백처럼 청색과 홍색의 작은 보자기 두 개.
두 혼백인 듯 짝찟기 하는 동안 오작교 퍼포먼스
두 영혼이 만났음을 알리고 칠석제물을 진설한 후에
헌다와 헌악, 헌시를 올리고 참가자들이 함께 둘러 앉아
떡과 막걸리로 음복했는데 마치 이것이 결혼 피로연인 양.
늦은 밤까지 피로연에 하나 둘 발길 돌리는 참가자들.
하지만 흰가마 위에 여전히 사랑을 나누는 메뚜기 한쌍
메뚜기 한쌍이 진정 환생한 '김유신과 천관녀'란 말인가?
당대를 풍미했던 신라 영웅.. 김유신.
김유신의 연인이자 절세가인.. 천관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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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넘어 그대를 기다리리니
그대 내게 천 년을 살라 하네
즈믄의 새벽 두 번째 맞이한 오늘에도
또 한 천년 그저 그대만 그리며 살라 하네
천관! 천관 !
애마의 말머리 베어내고 돌아서며
속으로 토해냈을 그리움
내 가슴으로 애끓게 느껴졌으니
그대 기다림이야
두 천년을 지낸들 무슨 불만이 있겠냐마는
통일 대업 이룬 그대의 당당한 얼굴
아니, 단석의 혈기 서린 굳은 손
아니, 풍진 세상에도 흔들림 없는 다리
아니, 구름의 장난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대의 그림자 한번만이라도 더 볼 수만 있다면…
하여, 견우직녀 만나는 오작교에 그리움의 넋 실네
천관! 천관! 남의 입이 부를 때는 목석이 된 내 이름.
그대 매정하게 돌아서 가던 길
흔적마다 민들레로 피어나
채이고 밟히길 기원하던
그때의 그 심정으로
오늘 여기 한시도
잊을 수 없는 그대의 집
차라리 재매정 우물물이 되어
그대의 몸에 스며들 수 있기를 고대하리니
천년의 꽃 우담바라 되어
재매정 어귀에 무장무장 피오리니
천관! 천관!
그대도 나를 부르며
칠월칠석 오작교 타고
내게 오소서.
천년인들 만년인들
그대를 기다리리니….
김유신.
환갑이 되도록 독신으로 지낸 김유신.
김유신은 죽어도 못잊을 연인이 있었다.
김유신이 애절하게 사랑했던 연인 천관녀.
삼국통일을 위해 사랑을 포기했던 김유신.
그 꿈을 이룬 후 그녀를 잊지 못했던 김유신.
가락국의 영화를 되살리려 사랑을 버린 김유신.
김유신에게 버림 받은 그녀가 숨어 살던 곳.
경북 월성군 내남면 일남리 뒷산에 있는 암자
그녀는 그곳에서 평생 김유신의 성공을 빌었다.
훗날 그 소문을 듣고 천관녀를 찾아갔던 김유신.
함께 경주로 돌아가자고 했으나 그녀가 끝내 거절
김유신이 그녀를 위해 그곳에 지은 사찰이 천관사.
'김유신의 연인 천관녀는 누구인가?'
천관은 원래 국가 제사를 관장하는 여사제.
불교가 성행하기 전까지 여사제는 높은 지위.
그후 화랑을 이끄는 원화가 맡게된 국가 제사.
'불교 정착 후 국사가 국가제사를 주관.'
신라에서 불교가 중흥하며 국가 제사는 쇠퇴.
따라서, 천관녀의 지위도 한낮 무당으로 전락.
천관녀는 천관녀 신분에서 기생으로 전락한듯.
'하여, 신분 격차가 더욱 벌어진 두 연인.'
당시 급변하는 개혁시대에 만났던 두 사람.
신라는 귀족과 평민 계급차이가 엄격한 나라.
결국은 신분의 격차를 극복할 수 없었던 연인.
결국, 그녀는 김유신을 위해 비구니가 된다.
김유신과 천관녀의 못다한 사랑이 가슴 아프다.
1500년 전 삼국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고소산성.
죽어서 왕이 된 김유신(흥무대왕).
신라 삼국통일의 실질적인., 주역.
당시 고구려의 멸망은 내분 때문이라고 하지만
연개소문 장군의 독단이 적을 많이 만든 것 같다.
김유신 장군에 관해서는 오늘날 재평가 되어야할듯.
만약,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지 못했다면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으리라는 역사관.
그러나, 당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겼을듯.
김유신 장군의 리더십과 김춘추의 탁월한 외교
그것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 남는 비법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에 많은 교훈을 주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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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을 이룬 장군.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실의 후손으로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
삼국지배를 꿈꿨던 당나라를 물리친다.
[출신 및 배경]
본관은 김해. 가야국 김수로왕의 12대손으로,
증조 할아버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
'금관가야 10대 마지막 왕' 구해왕이 곧 할아버지.
아버지는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를 지낸 서현(舒玄).
어머니는 지증왕 증손녀, 갈문왕 손녀 숙흘종의 딸 만명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文明王后)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백제·고구려 정벌]
609년(진평왕 31) 15세에 화랑이 된 김유신.
신라는 6세기 이후부터 비약적으로 팽창한다.
고구려에 싸우기 위해 나제동맹을 깨뜨린 신라.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는 서로 연합해 신라를 위협.
이에 신라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수,당과의 연합.
629년 신라가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할 때, 큰공.
중당당주로 참가한 김유신은 적진을 돌격해 유린
신라군 사기를 북돋워 고구려군을 격파한 김유신
641년(선덕왕 10) 백제가 신라 서쪽 40개 성을 함락
대량주(경남 합천)를 점령, 김춘추 딸과 사위를 사살.
신라는 적대국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원병을 청한다.
이때 압량주(경북 경산) 군주로 고구려에 억류된 김춘추
김춘추 귀환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김유신이다.
644년 소판(蘇判)이 되고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백제국의 가혜성 등 7성을 점령하고, 매리포성 방어
647년(진덕왕 1) 반란군 상대등 비담 염종 등을 진압.
그해 10월 압량주 군주로서 신라를 침공한 백제군을 격퇴.
648년 백제가 점령한 대량주를 공격해 12성을 함락시킨 공
김유신은 이찬(伊飡)이 되고 상주행군대총관 직위에 오른다.
이듬해 백제장군 은상이 석토 등 7성을 공격하자,
중앙군 편대를 지휘, 백제군을 도살성에서 격파했다.
그뒤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에서 뚜렷한 공적을 세운다.
당시 신라에 귀화한 가야왕족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신라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
[삼국통일]
654년 진덕여왕이 후손이 없이 죽자
귀족회의에서 추대된 상대등 알천과 상의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고 그가 곧 태종 무열왕.
무열왕의 즉위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귀족회의의 결정을
원점으로 돌릴 만큼 신라에서 영향력 행사.
김춘추가 즉위한 다음해에
김유신은 대각간이 되었다.
그해 10월 무열왕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한다.
660년 5만 군사를 이끌고 당 소정방과 연합한다.
황산벌에서 계백 결사대를 물리친 뒤 당군과 합류,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661년(문무왕 1)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던 당나라
식량부족으로 위기에 처한 소정방 군대에 군량미 지원.
663년 백제 부흥군이 일본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자
물리치고, 그 공으로 밭 500결을 상으로 받은 김유신.
665년 당 고종이 김유신을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에 봉.
666년 김유신의 아들 대아찬 삼광(三光)
당나라로부터 좌무위익부중랑장으로 임명.
668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연합군 사령관격 대총관이 되었으나 병든 김유신.
원정을 떠난 문무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를 통치.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
그뒤 신라 지배층 원로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 자문
[당의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나라
백제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
평양 안동도호부에서 고구려 군정을 실시.
심지어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
삼국 지배권을 확보하려 한 당나라.
이러한 당나라와 맞서 대응한 김유신
아들 원술이 당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자
참수할 것을 주장하며 결전의 의지를 표명.
.....................원술.................
김유신이 환갑을 넘어 결혼해 얻은 아들 원술.
김춘추와 결혼한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
김춘추는 환갑 넘은 김유신에게 셋째 딸을 보낸다.
평생 전쟁터에서 신라를 위해 늙어버린 김유신
김유신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김춘추.
김춘추에게 자신의 셋째 딸을 시집보냈던 것이다.
김춘추에게는 외손자인 원술.
김유신에게는 늦동이 아들 원술.
김춘추는 김유신의 처남이자 장인.
근친 결혼은 신라 진골 귀족의 전통.
근친혼은 왕위 계승권과 관련이 깊다.
신라왕실에서는 양가 혈통 서열이 높을수록
진골 귀족회의에서 뽑는 왕위 계승권에 유리.
.................................................
그 귀한 아들까지 전쟁터에 내 보낸 김유신.
그 아들을 희생시켜 신라를 구하려 한 기백.
신라군에게 임전무퇴의 기상을 심어준 김유신.
672년 석문벌판 전투에서 신라가 당에게 패배.
김유신이 늙어 전쟁터 일선에서 싸우지 못한 탓.
김춘추는 원로 김유신에게 전략적 자문을 구한다.
673년 79세에 운명한 김유신 유해는 금산벌에 장사.
676년 신라는 당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쫓아낸다.
문무왕은 유사(有司)에게 비를 세워 그의 명예를 기록.
835년(흥덕왕 10) 흥무대왕에 추존,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현재, 김유신의 묘소는 경주시에 있으며 사적 제21호로 지정.
.................
김유신의 생가.
.................
흥무대왕 김유신 탄생지. 화랑무예 태권도 성지
보통 김유신 장군 생가라면 경주와 김춘추를 연상.
그 생가가 충청북도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할듯.
천안-진천 간 도로에서 태령산에 이르는 길
김유신 생가터에는 비각과 우물터, 옛집 한채가 고작
화랑 무예 태권도 성지도 조형물 하나만 달랑 있을 뿐
소재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문봉리 계양마을
김수로왕 13세 손, 만노군(진천) 태수 김서현 장군 아들
진평왕 17년(595년)에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탄생.
김유신은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609년) 화랑이 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냈고, 삼국통일의 대업(668년)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 신라의 자주성을 지키는데 공헌했다.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은 대대각간(大大角干)을 지냈고,
흥덕왕 10년에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고려 시대까지 국가에서 주관하는 제사를 봄,가을에 올렸다.
화랑무예 태권도 성지.
아득한 옛날 흰빛 하늘 자손이 터전을 열었네
백두대간 차령산맥은 우뚝하고 화랑벌은 넓어라
흥무대왕 바로 이곳에 나시어 삼한일통 뜻 세울제
고구려 백제 신라 용자들 말발굽소리 천지를 덮었으리
살과 뼈가 부딪는
생사의 전장에서
화랑정신 찬란하고
태권무예 그 고절한 권과
각의 비의는 완성되었네
인생은 흰 이슬처럼 찰라였으되
나라사랑 부모사랑 친구사랑 의무사랑 생명사랑 속
화랑정신 태권무예의 장엄함은 영원으로 흘러갔네.
천 수백년 후 자손들은 결코 부끄럽지 않으리
바람이 전해주는 고인의 자취 그리워하며
겨레의 상무 기풍 다져진 성스러운 땅 이곳에
오천만 명 세계 태권도인들의 경외로운 뜻을 모았네
깊고 강고한 돌 속에는 세계평화의 염원
우리 마음은 태권정신으로 한 가족이라네
다시 천 수백년이 흐른다 해도
사해 염원은 표석처럼 생생하고
게양 옛터 이곳은 우리의 고향으로 영원하리
단기 4335년 1월 1일
화랑무예태권도 성지 선포에 즈음하여
세계 태권도인들이 삼가 받들다.
...... 찾아가는 길...........
1. 천안에서 갈 때
독립기념관 - 병천 - 동면 - 진천방향,
천안-진천 경계지점에서 5km 지점 이정표
2. 진천에서 갈 때
천안 방향으로 16km정도 달리다가
태령산 가는 길로 접어들면 된다.
..................................
...............
김유신의 외가
................
김유신은 609년(진평왕 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린 낭도(郎徒)를 이끌고
611년과 이듬해 중악(中嶽)과 인박산(咽薄山)에서
삼국통일을 기원(祈願)하고 무술을 닦은 뒤 국선(國仙).
본래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2대손,
증조부는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仇衡王),
조부는 신주도 행군총관(行軍摠管)을 지낸 명장 무력(武力)
본관 김해(金海). 아버지는 소판(蘇判)·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역임한 서현(舒玄),
어머니는 숙흘종(葛文王 立宗의 아들)의 딸 만명(萬明).
만명부인의 조부인 갈문왕 입종은 진흥왕의 부친.
만명부인의 아버지인 숙흘종은 진흥왕의 동생이다.
만명부인의 어머니인 만호태후는 진흥왕의 며느리.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 +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9대 손 구형왕(김유신 증조부) + 가야인 계봉의 딸 계화
10세손 김무력(김유신 조부) + 신라 진흥왕의 딸 아양
11세손 김서현(김유신 부친) + 갈문왕 입종의 손녀 만명
12세손 김유신
선덕여왕은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의 딸.
김유신의 어머니는 진흥왕의 아버지의 딸.
선덕여왕은 진흥왕의 증손녀
선덕여왕은 김유신의 먼 조카 뻘
선덕여왕
중생사, 선덕여왕릉 주변 유물로 보아
이 일대에 큰 사찰이 있었던듯 보여진다.
이곳 중생사는 원래 '선덕사'였다고 한다.
9세기 경 보물 665호 마애지장삼존불
큰 귀에 위엄을 지닌, 얼굴의 보살상
선덕여왕릉 밑둘레는 73m에 달하는 원형 봉토분
봉분 아래 2~3 단 보호석, 능주위에 많은 소나무
능을 호위하는 신하인듯 모두 능을 향해 굽어 있다.
진평왕의 큰 딸이며 신라 최초의 여왕이며
김춘추, 김유신 같은 영웅 호걸을 거느리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기반을 닦았던 여왕
분황사, 첨성대 ,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불교문화의 금자탑을 이룬 여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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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왕(재위 632∼647).
호 성조황고(聖祖皇姑), 시호 선덕.
진평왕(眞平王)의 맏딸.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
진평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백성들의 옹립으로 왕위를 계승.
634년(선덕여왕 3)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고치고 분황사 창건,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에 책봉된다.
638년 10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오자 11월 격퇴,
642년 백제 의자왕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 당항성(唐項城)을 빼앗아
나당(羅唐) 통로를 끊자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고
백제에게 대야성 함락후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으나 실패.
643년 고구려 백제의 침입을 당나라에 호소하고 원군을 간청
이듬해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 함락.
647년 비담(毗曇) 염종(廉宗) 등이 여왕의 무능을 구실삼아 모반
곧 진압했지만 이 해에 여왕은 신병으로 죽어, 낭산(狼山)에 장사.
여왕은 내정에 선정(善政)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
구휼 사업에 힘썼으며 당나라의 문화를 수입했다.
자장법사(慈藏法師)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
첨성대(瞻星臺)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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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당 태종이 선물한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자
그가 선물한 모란 씨앗에 향기가 없음을 미리 알았다.
신라 신하들이 꽃향기가 없음을 미리 안 이유를 묻자
여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음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
그것이 홀로 사는 자신을 풍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겨울에 못[玉門池]에서 개구리가 삼사일 계속 울자,
그것으로 적군이 어느 곳에 숨어 있다는 징조임을 알고
여왕은 군사들을 풀어 여근곡(女根谷)을 찾으라고 했다.
과연 그곳에 백제군들이 숨어 있어 그들을 모두 무찔렀다.
여왕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병화(兵火)를 예견했던 것.
옥문(玉門)은 여성의 음부이고 그곳 흰 빛깔은 서쪽을 의미.
'하여, 서쪽에 병란이 일어났음을 미리 예견한 여왕.'
한편, 자신이 운명할 날을 미리 알았다.
하여, 선덕여왕 무덤 아래 사천왕사 건립
그녀가 재위 16년 동안 미리 맞춘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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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聖德王, 702~737년 재위)은 13세에 즉위
재위 36년 동안 통일 신라를 절정에 올려 놓는다.
중국의 당 현종(玄宗, 713~755년 재위)도 태평성대.
당시 고구려 옛땅에서 발해왕국(698~926년)이 일어나고,
백제 피난민을 대거 수용한 일본은 백제 문화를 기반으로
나라시대(奈良時代, 710~793년) 번영을 누리기 여념 없었다.
국제적인 소강상태에서 신라는 부강과 안정을 이룬 것.
삼국통일 과정에 200년 전쟁후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
그 동안 백제와 신라는 각기 자기 나라에 미륵보살이 하생
미륵불 국토를 이룩하려고 경쟁적으로 사찰 건립에 총 매진.
백제는 미륵보살이 하생한 미륵불 국토임을 먼저 표방한 것.
신라 선화공주가 미륵보살 화신임을 만천하에 표방.
신라는 선덕여왕을 왕위에 올려 미륵보살임을 표명
신라 진흥왕(540~576년 재위)은 말년에 화랑을 창설
원화(原花)란 이름을 붙여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표방
이는 화랑 소년 군단을 이끌게 하려 한 것이 그 발단.
석가모니불 부모와 이름이 같은 백정반(白淨飯) 진평왕
마야(摩耶)부인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진평왕의 왕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덕만 공주가 훗날 신라 선덕여왕.
덕만공주를 원화로 삼아 성장한 화랑 1기 김유신(595~673년)
30대 후반이 되어 군권의 실세를 장악해 선덕여왕 통치를 보좌.
백제가 미륵사를 대규모로 지어 민심을 사로잡아
신라는 백제에 대항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었다.
여왕이 미륵보살 하생을 표방해 민심을 사로잡기
이미 중국 북위(北魏)로부터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
그러나 선덕여왕은 그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보수적인 반진골(反眞骨) 세력들이
끊임없이 그 위상에 도전해왔기 때문.
이에 선덕여왕은 진골 승려 자장율사를 당에 파견.
장안 동북쪽의 오대산(五台山) 문수보살을 만나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 화신임을 확인받으려 했던 것.
자장은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여왕 당위성을 문수보살로부터 확인받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란 말도 듣고 온다.
그 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예언 때문.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에 귀국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공표하자
황룡사에 9층 목탑을 건립하게 된다.
따라서 선덕여왕 14년(645) 3월 착공
그 다음 해 완공을 본 <황룡사 구층탑>
선덕여왕이 하생한 아름다움의 화신이며
신라가 미륵불국토임을 상징하는 조영물
신라는 구층탑 건립을 왜 서둘렀을까?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과 때를 맞추어 착공.
구층탑이 완성되면 고구려가 멸망하리란 염원.
하여, 국력을 기울여 1년 만에 탑을 완공해냈다.
그런데 당 태종은 645년 2월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해 5월 요하를 건너 6월에 요동성을 함락.
안시성을 60일 간 공격해도 끄떡 없자 9월에 회군한다.
다음해 3월에 장안으로 돌아온 당 태종
고구려 침공이 불가능함을 깊이 깨닫고
윤 3월에는 요동성 점령 포기를 선포한다.
이에 신라는 황룡사 구층탑 건립의 의미가 무색
미륵불국토를 표방하던 선덕여왕은 위기에 빠진다.
진골 세력들이 여왕에게 책임을 물어 반기들 든 때문.
여왕은 구층탑이 완공될 무렵 반기를 든 진골세력을 회유
진골귀족 수장인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발탁한다.
그러나 비담은 그 다음 해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이 진압.
반란 주모자들의 9족을 멸하여 그 가문의 씨를 말린다.
그러나 68세 고령이던 선덕여왕은 반란의 충격으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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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위에 오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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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여왕제도는 골품제에서 비롯.
진평왕이 승하했는데 아들이 없자
공주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세웠다.
덕만은 성골 핏줄이라 여왕이 된것.
또한 자신의 능력으로 국왕이 된것
덕만은 진평왕의 장녀가 아닌 차녀
덕만에게 천명(天明)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천명공주는 사랑을 얻기 위해 왕위를 포기
천명이 사랑했던 진지왕의 차남 용춘(龍春)
그에게는 형인 용수가 있었다.
용수는 진지왕의 장남이었으나
진지왕 폐위로 왕위 계승 탈락
대신, 진흥왕의 장남인
동륜 태자의 아들이 즉위
즉, 진흥왕 손자가 진평왕.
태상태후는 진지왕의 왕비였던 지도에게
다시 진평왕을 모시라 명령했기에 진평왕은
왕후 마야부인과 숙모까지 부인으로 거느렸다.
어머니 지도태후와 궁중에서 자란 용수와 용춘
어린 시절부터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천명공주와 선덕공주도 같이 자라 잘 아는 사이.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 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 선덕의 숙부
신라 왕실은 근친간의 사랑을 장려
그러나, 용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남자 중엔 용숙(龍叔)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용춘이 용수 동생이라‘젊은 숙(叔)’자를 써서
그렇게 말했는데, 용수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마야부인과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으려 했다.
아울러 왕위까지 물려주려고 한 진평왕.
아들이 없던 진평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
천명은 일이 꼬이자 기회를 엿보아 용춘에게
‘첩이 그리워 한 사람은 당신’이라고 고백
용춘은 ‘가정의 법도는 장자(長者)가 귀한 법인데,
신이 어찌 형과 같겠습니까?’라며 구애를 거절했다.
천명공주는 이에 좌절하거나 용춘을 원망하지 않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 용춘의 직위를 높이려 노력.
13세 풍월주 용춘은 골품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발탁.
진평왕은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천명공주에게 왕위를 양보하라 말했다.
그러나 선덕공주가 반발하고 나섰다.
그녀는 남자만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상식에 도전.
그녀는 용춘이 자기 사신(남편)이 되야 한다고 주장.
천명공주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발상에 진평왕은 감탄.
진평은 선덕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
이 정도라면 선덕이 여왕의 재목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진평왕은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라고 명령.
이는 선덕의 사신이자
남편이 되는 것을 의미.
용춘은 사양했으나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여왕은 남편 셋을 둘 수 있는 삼서지제(三▩之制)
용춘 외 흠반(欽飯) 을제(乙祭)까지 남편으로 삼았다.
천명은 양보함으로써 왕위와 용춘을 모두 놓쳤으나
선덕은 상식에 도전한 결과 왕위와 용춘을 모두 차지
선덕여왕은 배포만큼 총명했다는 삼국유사에 있는 기록.
그러나 신라 최초 여왕이라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당 태종은 선덕 여왕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643년 선덕여왕이 고구려·백제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당 태종은 선덕여왕을 업신여겼다.
“그대 나라는 부인을 왕으로 삼아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니
나의 종친을 보내어 임금으로 삼겠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불쾌감을 꾹 참고
이듬해 선물을 보내어 태종을 달랬다.
선덕은 재위 11년(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을 받아
서쪽 변경 40여 성을 빼앗기는 등 내우외환을 겪었다.
그녀는 김유신을 군주에 임명해 백제의 공격에 맞서고
한편 김춘추를 고구려 왜 당에 파견해 군사지원을 요청.
그녀는 당에서 귀국한 자장법사 건의에 따라
황룡사 9층탑을 축조한 이유는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고구려·백제)은 항복할 것이며,
아홉 이민족이 조공(朝貢)할 것’이란 말 때문.
이 통일염원탑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濊貊)을 진압시킨다는 뜻으로 천하제패를 꿈꿨다.
황룡사 9층탑은 선덕여왕의 포부가 담긴 탑
신라는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 기초를 세웠다.
天明공주는 사랑 때문에 왕위 포기,
용수가 죽자 형사취수 유풍에 따라
천명공주와 아들을 용춘에게 맡겼다.
천명은 비로소 꿈에 그리던 사랑을 얻었다.
이는 용수가 우애 깊은 동생에게 주는 선물
천명은 용수가 죽음에 따라 그 사랑을 얻었다.
화랑세기는 (용춘) 공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선덕에게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고 기록
이는 용춘이 선덕에게 애정이 없었던 사실을 의미.
사랑에 관한 한 승리자는 천명공주.
또한 선덕여왕은 자식을 낳지 못했다.
용춘이 다른 부인에게서 낳은 다섯 아들
문제는 선덕에게 있었던 셈.
............
진덕여왕
............
김유신은 미륵보살 원화 진덕여왕을 추대.
신라가 미륵불국토 임을 표방하기 위한 것
하여, 647년에 진덕여왕(眞德女王)이 등극.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숙부인 국반의 딸로
선덕여왕과 함께 원화로서 활동한듯 추정된다.
풍만한 미모에다 손이 무릎을 지날 정도로 긴 팔
'미륵불 보살' 32 대인상(大人相)을 갖춘 용모'.
그 신체적 특징으로 여왕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춘추가 당태종 이세민을 면대하고 나서
'미륵불 보살' 표방 명분으로는 한계를 느끼게 된다.
'국제 정세에서 살아 남으려면 미륵불 화신이 필요.'
당나라를 다녀온 자장 율사도 이미 김유신과 같은 생각
하여, 진덕여왕은 7년이라는 짧은 통치 기간이 끝 맺고
김춘추가 하생성불한 미륵불 자격으로 왕위에 등극한다.
처남인 김유신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를 뒷받침.
진흥왕 이래 전륜성왕을 표방하며
미륵불 국토 구현을 꿈꿔오 김춘추
비로소 미륵여래가 다스리는 미륵불국토를 구현
신라는 미륵불국토 신념으로 백제와 고구려에 대응
당태종과 당 고종의 정복 욕구를 부추겨 백제를 멸망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극한 문무왕
당군의 힘을 빌려서 고구려까지 멸망.
그러나, 당 고종은 영토 확장의 야욕.
신라마저 당의 속국으로 전락할 위기.
결국 문무왕은 삼국통일 감격을 누릴 겨를도 없이
당군을 국토 밖으로 몰아내는 힘겨운 전쟁에 총력
문무왕 16년 당의 평양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이전.
공주에 있던 웅진도독부는 건안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당 태종은 김춘추와 밀약대로 대동강 이북으로 일보 후퇴.
............
선화공주.
.............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선덕여왕의 동생.
<삼국유사〉서동설화(薯童說話)의 여주인공.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공주로 아름다웠다.
서동요의 여주인공이 곧 선화공주.
백제의 의자왕이 곧 선화공주 아들.
선화공주 미모 소문을 듣고 경주로 찾아간 서동.
마를 주고 아이들을 꾀어,퍼트린 노래가., 서동요.
선화공주가 자신과 몰래 정을 통하고 있다는 내용.
그 일로 인한 귀양길에서 서동을 만난 선화공주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백제로 사랑의 도피행각.
서동이 알고 있던 장소에서 황금을 캐어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 신통력을 빌어
하룻밤 사이에 신라의 왕궁으로 날아갔다.
진평왕은 그 신통력에 반해 늘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등극.
선화공주는 왕비가 된 후 어느날 사자사로 가는 길
꿈에 본 용화산 아래 큰 연못의 미륵삼존불
무왕에게 그곳에 절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하여, 지명법사가 그곳에 지은 절이 미륵사
꽃 다운 젊은 나이에 운명한 선화공주.
생전에 백성들 신망이 두터웠던 선화공주.
백성들이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따랐을 정도.
선화공주는 미륵불로 성불했다는 설.
신분과 지위를 초월한 선화공주의 사랑.
그것만으로도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던듯.
선화공주가 환생하길 염원했던 백제 백성들.
'그러한 백성들의 염원이 담긴.. 미륵불.'
.................궁남지..................
1400년전 선화공주를 기리는 궁남지.
부여에 있는 국내 최고(最古)의 연못.
백제시대 별궁으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
서동과 선화공주의 전설이 흥미로운 곳.
궁남지의 용과 법왕의 시녀 사이에서 태어난 서동
왕의 밀명으로 신라에 잠입해 국정을 살피던 서동.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만나 운명적 사랑.
국적과 신분이 달라 서로 맺어질 수 없는 사이.
서동은‘서동요’를 만들어 서라벌에 퍼트렸다.
서동요가 신라 안에 퍼지자 선화공주는 귀양간다.
이를 미리 알고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이야기.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17
궁남지는 신라의 안압지보다 40년이나 앞서 조성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궁성의 남쪽에 못을 파
동쪽으로 20여리 떨어진 곳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연못 안에 중국 전설 속 방장산 모양의 섬을 조성.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사랑의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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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영생불멸 미륵불로 환생한 선화공주.
신라 백성들의 민심마저 백제에게 쏠릴 정도.
하여, 신라에서는 <원화 제도>를 만들어 낸다.
신라의 공주를 화랑의 우두머리로 삼은 제도.
신라 장래를 지킬 소년 군단 화랑을 모집한다.
신분 구분없이 누구나 화랑이 될 수 있는 제도.
공주와 결혼하면 신라를 다스릴 수도 있다는 제도.
당시, 신라 계급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
신분의 벽을 넘어 평민도 공주와 사랑할 기회.
국가존망 위기에 있던 신라 왕실로서는 비상수단.
'원화제도로 구름 같이 몰려 든 화랑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은 원화 출신의 공주.
백제와 경쟁국 신라가 만들어낸 비로자니불.
훗날, 비로자니불은 신라 삼국통일의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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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 = 미륵보살 후신인 '미래의 부처'.
최초의 살아있는 미륵불 원조는 선화공주.
동학혁명 이후 지리산 일대 미륵불 정토신앙.
선화공주 그리고 선덕여왕, 진덕여왕에서 비롯.
미륵불은 비로자니불에서 유래.
삼신불 중 하나인., 비로자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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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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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근본 비로자나불은 청정 법신이라 불리며,
천백억화신 석가모니와 더불어 삼신불이라고 한다.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
빈손으로 태어났다가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가는 것
대자연 속에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가는 삶.
생전에 자연에게 신세진 것을 보답하는 마음이 보시.
비로자니불은 광명을 의미
햇빛은 모든 곳을 비추지만
그늘에는 미치지 못하는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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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법보전 불상(비로자나불) 뱃속의 기록
한 정승 연인의 성불을 기원하면서 만든 불상.
기록 속 쌍동이 불상 반쪽을 찾아낸 곳도 해인사.
심지어 콧방울까지 똑같은 쌍둥이 비로자나불
성불해서라도 사랑을 이으려던 신라시대 로맨스
진성여왕과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그 주인공인듯.
죽고 없는 연인을 위해 왕위를 버렸던, 신라 진성여왕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두 사람의 사랑
'유모의 남편인' 각간 위홍을 사랑했던 그녀.
그녀는 위홍이 사는 소량리를 늘 드나들었고
위홍도 여왕이 된 그녀의 규방까지 드나들었다.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한지 2년 만에 죽은 위홍.
그녀는 죽은 연인 위홍을 대왕으로 추존(追尊)
해인사에 그의 원당을 짓고 9년만에 왕위를 하야.
북궁(北宮)에 들어가 그곳에서 죽어
황산(黃山)에 묻혔다는 삼국사기 기록.
여왕은 위홍이 죽은 후 미소년들을 궁에 끌어들여
그 허전함을 달래려 했지만 허전함을 채울 길 없어
위홍과 같이 묻히려 왕관을 벗었을 만큼 짙은 사랑.
이조 성종 때 해인사를 중창하며 서까래에서 나온 문서들
이를 읽고 조위(曺偉)가 남긴 기록에 의해 전해오는 로멘스.
신라 말 해인사를 북궁 해인수(北宮海印?)라 했고
진성여왕이 왕위를 버리고 해인사에 든 것은 죽어서
위홍과 같이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라는 기록 내용.
쌍둥이 불상을 만든 시기는 882년 위홍이 죽기 전
진덕여왕이 즉위하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너와 나는 하나' 불교 교리 & 한 쌍의 비로자니불.
'비로'는 높다는 뜻이고 '비로자니'는 부처의 몸 빛.
비로자나불= 법신불, 비로전= 비로자니불을 모신 법당
'비로봉은 그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 최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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