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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 안시앙과 프레게지아 안시앙
다시 걷기 시작한 N348 도로.
눈에는 같은 길이지만 가슴에는 전혀 딴 길이 되어 있는 도로였다.
공복감에 시달리던 1시간여 전과 달리 행복감으로 충일한 길이 되어 있으니까.
비프와 비뇨 등 먹거리의 무게가 상당했으나 그 중량감은 모두 행복감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지층 터널로 IC8(N237) 도로와 입체 교차했다.
터널을 지나면서 생각난 것은 하나의 반도인데도 두 나라의 판이한 낙서문화다.
스페인이라면 터널의 양쪽 벽이 괴상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으련만 거의 말짱하게 보전되고 있으니.
신축 건물의 벽과 담장이나 터널의 벽, 기타 그릴만한 공간에는 무자비하게 그려대도 개인은 물론 사획적
이슈(issue)가 되지 않는지 갑론을박을 들어본 적이 없는 스페인인데 뽀르뚜갈은 다른가?
우리나라라면 당사자 간에는 쌈박질이 벌어지고 심하면 칼부림으로 번져서 사상자가 날 수도 있는 일이며
민형사 재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일 일일 것이다.
남행하며 터널을 건넌 후 하이냐 산따 이자벨 길(R. Rainha Santa Isabel)이라는 이름을 더 단 길(N348)
을 따라 나방 강(Rio Nabao)에 놓인 다리(Ponte da Cal/깔 橋)에 당도했다.
프레게지아 안시앙의 마을(lugar)인 알렝 다 뽄치(Além da Ponte)를 지나 안시앙(지자체와 프레게지아)
의 다운타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한데, 프레게지아 안시앙의 인구밀도가(2015년기준) 829.3명/㎢인데 지자체 안시앙은 71.51명/㎢이다.
11.6배의 도시 집중을 의미하는 수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종일 사람을 만나지 못한 이유의 설명도 된다.
다리에 도착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행사 준비에 열중하는 듯이 보였다.
넓지 않은 강폭이지만 60km가 넘는 길이의 강이라는데, 강물이 불어나는 우기(雨期) 외의 시기에 다목적
용도로 유용하게 설계되고 공사가 이뤄진 다리 일대의 천변에서.
천막들을 가설하고 대소 기물들과 탁자와 의자들을 배치하기 바쁘고 음식류로 보이는 다양한 포장물들이
속속 들어와 쌓여갔다.
가설된 스테이지(stage)에서는 음향과 조명 기기들의 설치와 테스트로 소란스러웠다.
소교구마을(freguesia) 안시앙의 어떤 행사(축제)가 바야흐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려는 듯 한데 이해되지
않는 점이 목의 가시처럼 걸려왔다.
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진 2번의 뻬레그리노 생활 중 대소 마을들의 갹종 축제에 자주 참석했다.
모두 마을 주민들의 적극적 권유로 말미암았지만 평일(月~金)에는 없었다.
주말인 토요일 또는 일요일이었고 대개 하루 행사였으며 주말의 이틀인 경우에는 첫날 또는 끝날이었다.
평일(금요일)에 갖는 이 마을이 이해(理解)될 리 있는가.
이해 관계가 없으면서도 글루미(gloomy)해졌기 때문이었을 텐데 온후한 이미지의 초로남이 다가왔다.
독심술로 내 표정을 읽기라도 했는가.
자기네도 하루 또는 이틀이었던 예년과 달리 어떤 사정으로(for a certain reason) 하루 더(3일) 필요하게
된 최초의 행사라는 것이다.
평일 하루(금요일)가 포함된 이유를 말한 그.(사정이란 어떤 자선기금이 더 필요하다는 뉘앙스)
내 나이를 알게 된 그는 최고령 뻬레그리노와의 조우가 영광이란다.
이 축제에 잠시 참석하면 여정에 지장이 되겠느냐고 물어왔다.
권유하는 우회적 표현인데, 그는 이 곳 자원소방서가 내 숙소가 될 것이라는 응답에 환호했다.
실은, 본래의 계획은 없었다.
점심 식당에서 안시앙의 자원소방서를 점찍은 것은 내 숙소 선정의 원칙을 말한 것일 뿐이다.
해와 동행하다가 알베르게가 없거나 있다 해도 10€를 초과하면 내 집(tent)을 짓는 것만이 계획이다.
먹거리가 충분하므로 이 날에는 그 계획이 최선인데 축제장의 그가 이 봄베이루스로 확정하게 한 것이다.
즉시 남서쪽 500m 지점인 소방서로 향했다.
여기, 안시앙의 소방서는 정부의 관립 소방서가 아니다.
지자체 내의 자원(Volunteer) 소방서답게 입실 과정이 유머러스(humorous)했다.
입실료는 프리(free)지만 화재보험료가 비싸다는 젊은 봄베이루(bombeiro/소방대원).
알베르게에서 이따금 화재가 발생하는데 화재위험률이 0%니까 거액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
나도 질세라 이 빌(Bill)이 나를 축제에 초대한 마을 행사의 주체측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응수했다.
초청이 없었다면 이 봄베이루스에서 묵을 일도 없을 것이니까.
이 장군멍군은 부드러운 입실을 위한 무드(mood) 조성용 익살인 셈이었다 할까.
나는, 단층 싱글베드 3개만이 ㄷ자로 배치된 자그마한 침실의 첫 입실자가 되었다.
또한 매상 많이 올리고 오라는 그(bombeiro)의 말에서 3일 행사에 대한 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구체적 용도는 그도 모르는 듯 했지만.
안시앙 축제장의 전어
준비에 여전히 어수선한 행사장.
스테이지쪽 방송기기의 말썽으로 아무 멘트(announcement)도 없이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다리 밑 화덕의 점화가 오프닝 세레머니(opening ceremony)를 대신하여?
화덕에서 최초로 구워낸 것은 전어(箭魚/sável)였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속담(우리나라)이 나왔을 만큼 자극적인 냄새가 행사장에 두루 퍼지게
함음으로서 축제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연령대가 기본적 조건인지 비슷한 나이끼리였다.
열기가 수그러드는 시간대지만 한여름이다.
더운 때라 젊은 세대에게는 생맥주 코너가 인기라면 구은 전어는 여름인데도 시니어의 음식인가.
뜨거운 열기의 전어구이 화덕을 들락거리는 단골은 단연 시니어들이었으니까.
날 기다렸음이 분명한 듯이 반긴 그(온화한 이미지의 초로남)도 나를 전어구이 코너로 안내했다.
그가 우리 탁자에 가져온 것은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통통한 전어 3마리와 1잔의 바이하다 비뇨와 바게트1
토막, 야채샐러드와 소스, 냉수(페트병) 등이 나뉘어 담겨있는 2개의 쟁반이었다.
나는 낮의 폭식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는데도 3마리의 전어를 순식간에 치워버렸다.
왕성한 식욕에 스스로 경악하고 있을 때 내 빈 전어접시는 2마리의 새 접시로 바뀌었다.
그도 놀라며 리필했을(refill)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제했다.
냄새의 유혹에 잠시 홀려 이성적이지 못했음을 자책하며.
뻬다상이스(Pedaçães)축제장에서 그랬듯이 내가 먹고 마신 음식의 빌(bill)이 내게 직행한다면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것이 이 축제의 의미를 더 빛나게 하며 다다익선이겠지만 내게 그는 정중한 호스트(host)다.
그러므로 게스트(guest)의 소비가 많아질수록 호스트의 지갑은 더 가벼워지는 관계다.
어둑발이 내리기를 기다렸는가.
방송과 조명 기기가 정상 작동하고 축제장은 바야흐로 조명발을 받아 분위가가 고조되어 가는 듯 했다.
나이 지긋한 MC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으나 여러 모션(motion)으로 보아 그리 짐작되었다.
단조로운 악단이 분위기를 잡는 곳도 있으나 비용 문제로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며 이 곳(Ansião)은 간주
와 노래 반주를 기타리스트(guitarist)가 담당하고 있는데 이 지역 청년이란다.
나와 함께 하느라 이 축제에서 맡은 자기 본연의 임무에 소홀했던 그도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홀로가
된 나는 의외의 주제로 골돌하게 되었다.
전어의 주 산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한국의 늙은이를 대서양의 전어가 괴롭히는 꼴이 되었으니까.
몸 길이가 15cm~30cm 되는 전어는 동아시아 연안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고기다.
우리나라에서는 서 남해에서 두루 잡히며 일본, 중국, 인도와 폴리네시아 등지에서 많이 잡힌단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 전(30여분)에 먹은 전어가 한국산이거나 인근 아시아에서 수입한 물고기란 말인가.
그는 우리가 먹고 있는 이 전어는 대서양에서 잡아왔으며 죽기는 했으나 아직 싱싱한 물고기라고 했느데.
대서양은 이 곳(축제장)에서 서쪽 도로를 빨리 달리면 30~40분 소요되는 거리(60여km)에 있으며, 전어는
성질이 급한데다 산소량이 많이 필요한 물고기라 잡히면 곧 죽는다고 설명까지 했건만.
해양 생태계의 변화로 아시아지역 연안의 전어들 중 일부가 멀고 먼 대서양 연안으로 이주한 것일까.
뽀르뚜갈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를 연 해양 강국이다.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1460년대~1524), 마갈량이스(Fernão de Magalhães/1480~1521/영어
명-마젤란Ferdinand Magellan)를 비롯해 유명 해양탐험가들이 5대양을 누비고 다닌 나라다.
그들이 아시아 연안에서 배로 실어다가 대서양에 퍼뜨린 건 아닐까.
아무튼, 대서양 산(産)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전어.
이 전어로 인해 나는 이 축제장에서만 경악을 거푸했다.
비프와 비뇨로 만복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전어 3마리를 순식간에 삼켜버린 왕성한 식욕과 새 접시의
전어에 군침을 삼킨 과도한 식탐에 이어 전어를 먹는 방식에서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어 이야기
나의 전어와의 인연 시기는 1964년(1963년?) 여름으로 기억된다.
내가 맡아 도움을 준 소규모 단체를 이끌고 간 하계 봉사 마을에서 라고.
(당시에는 고등학교상급반 학생, 대학생, 고교와 대학 혼합 등 단체들이 친목과 봉사 기타 목적으로 학교
외적 활동을 했는데, 주간 또는 월간 정기적 모임을 가질 장소가 없어서 전전긍긍햐는 형편이었다.
이들을 돕기 위해 한 외국선교단체가 자기네 건물을 개조하여 조건부 대관을 했는데, 건물주가 신임할만한
인물을 지도자로 선임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지도자가 없는 모임에는 선교회측에서 알선해 주었는데, 내가 그 케이스였다)
서해의 해안마을인데, 당시의 교통수단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의욕만으로는 쉽지 않은 행사였다.
15일간의 봉사활동을 마지고 귀경하기 전날 밤에 마을의 4H그룹(Head/智育, Heart/德育, Hands/勞育,
Health/體育)이 베푼 송별 파티에 등장한 전어.
군침이 돌게 하였으나 잔가시가 많기 땜문에 1마리로 끝나고, 봉사대원 아무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한 마을 이장이 시식(구운 전어를 쉽게 먹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그는, 마치 연주하기 위해 하모니카(harmonica)를 입에 물듯이 전어 한마리를 통째로 입에 물고(등뼈 쪽
이 밖이 되도록 배쪽을) 힘껏 빨았다.
그의 입에는 전어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가시들만 원형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신기하고 신비스럽기 까지 했으며 이장이 요술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대원들은 너나 없이 따라 했고 먹는 것 보다 버리는 것이 많았을 정도로 시행착오가 속출했으나 이 파티가
끝나기 전에 모두 요술사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반세기 + 1년이 지난 2015년 여름에 나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서양 연안국인 뽀르뚜갈에서 전어를 먹을 때
그 때 익힌 방식을 사용했다.
실로, 51년 만인데(그 긴 세월에 구운 전어를 먹은 적이 없으니까) 그 방식으로 3마리의 전어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것이다.
이 때, 나를 경악하게 한 것은 그들의 전어 먹는 방식도 나와 판박이라는 점이었는데, 그들도 내가 전어를
먹을 때 나와 동일한 경악을 했다고 실토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는 서양 속담이다.
군침이 돌도록 맛은 있으나 잔가시가 많아서 먹기가 거북했던 구운 전어.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전어를 먹는데도 거북하지 않고 효과적인 방식으로의 변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모니카 방식은 한국과 뽀르뚜갈, 양국(구운 전어를 먹는 지구촌 전체)의 민초들이 애로를
타개하려고 각기 노심초사한 결과물이며, 동일한 방식인 것은 전혀 우연일 뿐인가?
지구에서 극동의 한국과 서단의 뽀르뚜갈은 언제부터 이 방식이었으며,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나도 모르고 그들(뽀르뚜갈인)도 모른단다.
다만, 우리나라는 1964년 이전부터(내가 그해에 그 방식을 터득했으니까) 였다는 것 만은 분명하다.
편하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먹으면 됐지 시시콜콜 그런 걸(선후관계) 왜 따지냐는 일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통승용구와 통신기기의 혁명적 발달로 지구 전체가 당일생활권이 된 지금은 당연하지만 문명과
문화의 차가 현격했던 과거를 이해하는데는 그 규명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면?
이씨조선은 19c말까지 쇄국정책을 강행했다.
선진국들의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우리의 것이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설영, 우리 조상이 진작에 개발한 방식이었다 해도 뽀르뚜갈은 물론 어느 외국도 우리를 모방할 수 없었다
는 것이며, 역으로 우리도 수입할 수 없는 문화였다.
우리가 쇄국정책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있을 때 일본은 무엇을 했는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문물을 주저없이 받아들였다.
당나라의 불교와 신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서 견당사를 지속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16c에는 서양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수입할 목적으로 예수회(Societas Iesu/1534년에 스페인의 Ignatius
de Loyola가 세워 1540년에 교황의 승인을 받은 남자 수도회)의 입국을 무조건 개방했다.
1549년 하비에르(Francisco Javier)를 시작으로 기독교의 전래는 순풍을 만난 듯 했다.
1582년에는 10대(13, 14세) 소년들로 소위 덴쇼견구사절(天正遣歐使節)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예수회의 알선으로 스페인과 뽀르뚜갈, 로마 교황청 등을 방문하여 기독교를 빙자, 신 문물 수입에
구걸하였으며 괄목할만큼 성과를 올렸다.
10대에 출국해서 20대가 된 1590년, 8년만에 귀국할 때는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비롯하여 서양악기, 해도
등 필요한 것들을 잔뜩 지참했다.
(그러나, 서양의 최신 발명품인 총기를 비롯하여 예수회를 채널로 한 국가적 발전의 기틀이 확보된 후에는
곧 기독교에 대한 무분별, 무자비한 박해를 시작했다.
斬草除根의 방식이 어찌나 강력하고 잔혹하였는지 전래 5c가 지났는데도 일본 기독교의 신도가 초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일본은 미개한 섬나라에서 문명 선진국으로 변혁되었으며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의 제국이 되고 미국을 상대로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을 만큼 강대국이 되었다.
텐쇼견구사절단의 귀국 보따리에는 구운 전어 먹는 방식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단코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그 방식을 식민지에, 마치 시혜를 베풀 듯이 퍼뜨린 것 아닐까.
그들은 우리나라 전어의 주 산지인 서해와 남해에 간척사업을 많이 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군량미 증산이 진충보국이다" 는 슬로건(slogan)으로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이 기간에 그들에 의해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골돌한 생각이 이에 이르게 되자 아무 생각도 않았느니만 못하다는 전어먹는 방식.
기분이 디프레스(depress)되어갈 때 그가 왔다.
뻬레그리노스와 순례자
그는 춤을 추는 쌍이 늘어나고 있는 스테이지를 가리키며 내게 춤추기를 권했다.
원하면 파트너(partner)를 데려오겠다며.
그러나 이미 저기압 상태가 된 내게 그런(춤출) 의욕을 일으킬 만한 분위기가 되지 못하는 축제장이었다.
게다가 심야에 들면서는 빗방울까지 떨어지고 있는 야외 스테이지다.
그래도 올나이트(all-night)는 변함 없다는 행사장.
독심술을 가진 그는 내가 숙소로 돌아가려 함을 점치고 있는가.
봉지에 바게트를 담으며 파띠마 경유 여부를 물어왔다.
까미노 뽀르뚜게스의 안시앙~또마르(Tomar)~산따렝(Santarem) 사이에 비켜있는 파띠마 경유를 고집할
경우에 까미노에 생기는 변수에 조언하기 위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파띠마는 1c 의 2년전(2015년기준)인 1917년 5월 어느날, 성모 마리아(Nossa Senhora de Fátima/뽀르
뚜갈어)의 발현(發現)으로 일약 순례자들의 성지로 거듭남으로서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변수가 되었다.
순례가 개시된 이래 여러 세기에 걸쳐 순탄하던 까미노에서 고심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다니까.
파띠마 순례를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우선시하는 뽀르뚜갈인이 속출하고 있다는데 대세가 될 수도 있기 때
문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1)까미노와 파띠마를 모두 충족하려면 까미노에서 최근거리인 또마르~파띠마 간을 왕복해야 한다.
철두철미한 뻬레그리노스라면 파띠마는 부수개념일 것이므로 그 구간은 대중교통 이용이 무난할 것이다.
2)단지, 파띠마 순례에 무게를 두는 뻬레그리노스라면 순. 역코스 모두 까미노의 또마르를 포기하면 된다.
역(순)코스는 안시앙(산따렝)~파띠마~산따렝(안시앙)으로 이어지니까.
3)애오라지 파띠마 순례뿐이라 해도 까미노 뽀르뚜게스에 의존했다면 안시앙과 산따렝은 중요 지점이다.
까미노 뽀르뚜게스를 버려야 하니까.
'슈어'(sure)라는 파띠마 경유에 확신적인 내 응답에 그는 위와 같이 3가지 경우를 제시했다.
나는 시한인 봄베이루스를 나서는 시점, 또는 프레게지아 안시앙을 벗어나기 전에 택해야 하는 2)의 길을
파띠마 이후의 유보를 전제로 이미 택했다.
프레게지아 안시앙 이후는 당분간 까미노를 버리고 까샤리아스를 경유하는 파띠마 순례길을 걷는 것.
짧은 기간이기는 해도 뻬레그리노의 신분을 내려놓고 파띠마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까미노에는 아직 없지만 일본의 시코쿠 헨로에는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야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88개 유명 템플(Temple/寺刹) 중 일부가 외따로 있기 때문에 방문한 후 그 길로 돌아나와야 한다(往復)
미리 선정한 사찰들을 연결했기 때문에 불가피하지만 까미노는 획정할 때 그렇 여지를 두지 않았다.
까미노는 선교를 위해 걸어야 하는 길 위주였고 헨로는 방문할 사찰 위주였기 때문이다.
까미노 노르떼 길의 산띠야나 델 마르(Santillana del Mar)에 있는 알따미라 동굴(Cueva de Altamira)
은 UNESCO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1985년) 탐방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뻬레그리노스 중에 더러 왕복하지만 까미노는 아니다.
한데, 까미노 뽀르뚜게스는 여느 까미노와 달리 이전(移轉) 경력이 화려하며 복수(複數)의 길이다.
새 성소가 된 파띠마의 역사도 1c에 불과하며 가변적이다.
또마르~파띠마 사이와 파띠마 양편(안시앙과 산따렝)의 길이 기존의 까미노와 함께 까미노가 된다면?
변수와 긴장 관계를 일시에 제거할 수 있다.
뻬레그리노스의 신분적 부담도 사라지고.
이득만 있는 일을 왜 사양하거나 주저하겠는가.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