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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와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의 창시자로 불린다. 우치무라는 서양에서 수입된 교파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기독교만이 일본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독일을 구원한 기독교가 루터에게서 나오고, 영국을 구원한 기독교가 존 녹스와 밀턴에게서 나왔듯이, 일본을 구원할 기독교는 일본인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두 개의 J’, 즉 예수(Jesus)와 일본(Japan)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중심점이 하나뿐인 ‘원’이 아니라, 예수와 일본이라는 두 개의 중심을 가진 ‘타원’이라고 주장했다. 우치무라의 주장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준 새 계명을 자신의 역사적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예수의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제1계명과,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라는 제2계명을 결합한 것이다.
우치무라의 정신은 김교신과 5명의 신앙 동지가 창간한 『성서조선』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성서조선』 창간호(1927년 7월)에서 김교신은 말한다. “다만 우리 마음의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조선’이라는 두 글자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낼 제일 좋은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릴 수 없어서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라고. 1935년 4월 김교신은 다시 강조한다. 그는 「성서조선의 뜻」이란 글에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이것이 우리의 『성서조선』”이라고 밝혔다. 스승 우치무라가 기독교의 진리로써 일본을 사랑했듯이, 김교신도 그리스도의 진리로써 조선을 사랑했다.
우치무라의 아버지
우치무라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일본 사회의 격변기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 후 일본은 사회구조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수백 년간 분산되어 있던 권력이 중앙 정부에 집중되었다. 구체제의 특권층이었던 사무라이 계급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우치무라는 이러한 격변기에 1861년 3월 23일 조슈(上州) 타카사키번(高崎藩)의 무사 우치무라 요시유키(內村宣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치무라의 아버지는 다카사키번의 번주 오오코우치 테루나가(大河內輝聲) 휘하의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무사였다.
유신 정부는 1871년 기존의 200여 개 번(藩)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부현제(府縣制)를 실시한다는 폐번치현(廢藩置縣)의 조서를 공포했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 이후 250년간 일본을 유지해오던 막번체제(幕藩體制)가 해체되고 메이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전제적 중앙집권 체제로 개편되었다. 메이지유신에 반대하여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파(佐幕派)에 속했던 다카사키번은 완전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우치무라의 아버지 요시유키는 번주를 따라 실각하고 은퇴했다. 자신의 주군과 운명을 함께 한 것이다. 막부 질서의 해체와 더불어 40살의 젊은 나이에 그의 경력은 끝을 보고 말았다. 당시 우치무라의 나이는 10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 후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우치무라가 아직 10대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의존하기 시작해 그가 16살 때 가장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아버지에 대한 우치무라의 감정은 복잡했다. 그는 아버지의 능력과 무사의 자존심, 그리고 유학의 스승으로서의 자질, 윤리적 청렴함 등은 존경했으나, 청년기에 들어 부친에 대한 신뢰는 흔들려, 아버지의 인생을 실패로 간주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물려준 정신적 유산도 적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아버지는 향리의 저명한 유학자였다. 어린 우치무라에게 아버지의 유교적 분위기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부친 요시유키는 혈연의 부친에 그치지 않고 유학의 스승이기도 했다. 우치무라의 인간과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면 그의 무사의 아들, 즉 ‘사족(士族)’으로서의 자긍심과 유교적 교양을 무시해선 안 된다.
우치무라의 아버지는 자신의 실패 체험을 기반으로 우치무라에게 성공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반면교사의 역할도 했다. 서양의 영향 앞에서 무력했던 그의 경험은 서양에 대한 지식이야말로 가족과 국가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열쇠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부친은 어린 우치무라에게 외국의 기술, 특히 외국어를 통해 입신출세의 길을 걷도록 종용했다.
우치무라가 처음 영어를 배운 것은 다카사키에 있을 때였다. 다카사키번이 설립한 영어학교에 들어가서 도쿄에서 초빙된 고이즈미(小泉) 선생에게서 처음으로 영어를 배웠다. 당시 나이는 11살이었다. 옛 질서와 함께 부친이 몰락하는 것을 본 소년 우치무라가 유학 대신 다음 세대의 학문으로서 영어에 힘을 쓰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도쿄영어학교 시절
1873년에 12살 소년 우치무라는 혼자 상경해서 도쿄 아리마사학교(有馬私學校)에 입학했다. 우치무라는 여기를 발판으로 해서 이듬해 도쿄외국어학교에 입학했다. 13살 때였다. 그가 의식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아버지로 상징되는 오래된 성스러운 세계의 너무나도 비참한 말로를 목격한 우치무라는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세계를 영어의 세계에서 찾았다. 도쿄외국어학교는 1875년에는 영어과가 독립해서 도쿄영어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1877년 도쿄제국대학 예비학교인 제일고등학교가 되었다. 우치무라는 일본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어학 훈련을 받게 되었다.
우치무라는 도쿄영어학교 재학 중 병으로 1년 남짓 휴학을 했다. 병명은 늑막염 또는 결핵이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단신 상경한 소년이 1년 남짓 병상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 일은 우치무라가 삶과 죽음에 대해 무언가를 느끼게 했음이 분명하다. 신병으로 1년을 늦춘 뒤 복학한 도쿄영어학교에서 그는 훗날 일본의 지도자가 될 두 소년을 동급생으로 만난다. 저명한 식민정책 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와 식물학자로 유명한 미야베 긴고(宮部金吾, 1860-1951)였다. 이들은 우치무라의 평생 친구가 되었다. 세 사람은 동급생이 된 데 그치지 않고 하루 걸러서 만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세 사람이 만나면 대화는 반드시 영어로 하고, 어쩌다 일본어가 튀어나오면 벌금을 내야만 했다.
도쿄영어학교는 1877년 4월에 도쿄제국대학 예비학교로 개칭되었고, 그곳을 수료하면 도쿄대학에 진학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우치무라를 비롯한 많은 학생이 삿포로(札幌) 농학교에 진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동으로 최고학부인 도쿄대학에 갈 길이 열리는데 우치무라 등은 왜 하필이면 북쪽 끝에 있는 삿포로에서 공부하기를 원했을까. 농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과 고액의 월급을 제안했다. 우치무라는 특히 월급에 강하게 끌렸다. 가장이 되었기에 경제적 책임감이 무거웠다. 우치무라의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 미야게 긴고도 함께 진학을 결심했다. 이들 모두가 가난한 사무라이 가계의 출신으로 장학금에 의해 생활을 보장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훗날 우치무라는 “선생님은 왜 제국대학에 진학하지 않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돈이 없어서였지”라고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에는 삿포로농학교라고 하면 그저 수많은 실업학교 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도쿄대학과 어깨를 겨루는 소수 관립의 고등교육기관의 하나였다. 1877년 8월 우치무라와 함께 12명의 학생이 삿포로농학교의 제2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바닷길로 삿포로로 간 우치무라의 가슴속에는 입신출세해서 국가를 위해 쓸모있는 인재가 되려는 열정이 훨훨 타고 있었을 것이다.
도쿄대학 예비학교 재학 중에 우치무라가 삿포로농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의 생애의 대전환점임이 틀림없다. 그 전에 병으로 휴학해야 했고, 나이 어린 소년기에 경제적 이유로 진로 변경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기억해둘 만하다. 우치무라는 인생에서의 질병과 가난의 문제를 일찍이 몸소 경험했다.
삿포로농학교
삿포로농학교는 1876년 농학 전문 교육기관으로 신설되어,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 학장 클라크(William Smith Clark)를 교무주임으로 초빙하여 삿포로농학교로 개교했다. 오늘날 클라크의 이름을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 패전 직후 일본 관료들이 클라크의 묘지를 참배하기 위해 갔을 때 그의 묘지를 찾느라 고생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모국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크게 이바지했고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클라크는 당시 미국과 독일에서 생물학, 광물학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적 교육을 받은 뛰어난 학자였다. 큰 키에 위엄이 있었으며, 남북전쟁에도 참전했던 군인이었다. 학교 교육에 훌륭한 식견을 가진 교육가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애머스트대학(Amherst College) 학생 시절 신앙부흥 운동의 한가운데서 깊은 종교적 회심을 하여, 뉴잉글랜드의 전통적인 청교도 신앙과 윤리를 체현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도 아래 행해진 삿포로농학교의 교육은 서양적 에토스의 철저한 주입이었다. 후일 졸업생들이 ‘세뇌’라고 부를 정도로 종래의 일본 사회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교육 내용이었다.
우치무라는 이 학교가 창설된 이듬해인 1877년 8월 친구 니토베와 미야베 그리고 다른 일행과 함께 삿포로에 들어왔다. 당시 삿포로는 인구 약 2,000여 명의 한촌에 불과했다. 학교 인근에는 끝없는 삼림이 펼쳐져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학교는 더욱더 작은 사회를 구성했다. 학생들은 학교 밖의 세계와는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거의 관계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치무라 일행은 양복을 지급받고 식사도 서양식으로 하는 등 의식주 전부가 서양풍이었다. 우치무라 주변은 이를테면 서양 사회의 한 부분을 뽑아다가 일본의 삿포로에 옮겨놓은 격이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은 외국인 교사의 수업과 독서를 통해 모든 것을 영어로 배웠다. 영어 독서와 외국인 교사와의 회화는 모두 고급 영어 습득에 유용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작은 사회 이외의 현실에 접촉하지 않고, 끊임없이 외국어에 의지해야 하는 긴장감을 동반한 일종의 정신적 온실에서 생활했다. 만년의 미야베는 “우리는 마음 깊이에 있는 감정과 사고는 영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1877년 4월 16일, 일본 정부와의 계약기간이 끝나서 클라크는 마침내 삿포로를 떠나게 되었다. 말을 타고 시마마쓰(島松)까지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한 다음, 다시 말에 올라 “청년이여, 웅지를 품어라!(Boys, be ambitious!)”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클라크가 하얀 눈길을 달려간 이야기는 이제 삿포로농학교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우치무라는 클라크가 떠난 지 넉 달 뒤에 삿포로농학교에 입학했다.
기독교 수용
삿포로농학교가 우치무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적 신념이었다. 클라크는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라고 권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기독교적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실천해 보였다. 그로 인해 학교 내의 작은 서양 세계에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극기심을 발휘하여 그것을 고창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클라크가 떠난 뒤에도 다른 외국인 교사들은 같은 영향력을 미쳤다. 우치무라는 이런 학교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에 입신하게 되었다.
근대 일본 사회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기존 일본 사회의 혈연적·지연적 공동체에 의한 규제였다. 따라서 자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집’과 ‘마을’을 떠나 도시에 나와 살던 젊은이들이었다. 삿포로농학교 학생들도 공동체의 규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서양풍 일색으로 채색된 공간에서 격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1기 입학생 전원은 이미 기독교 신자였고, 우치무라의 친구인 니토베와 미나베도 기독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우치무라는 두 사람과의 우정을 지키고 싶다는 바람을 거부할 수 없었다. 고립된 특수한 공간에서 우치무라의 기독교 입신은 ‘고독’을 보완하는 길이었다. 그 결과 우치무라는 또래들 사이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우치무라가 기독교 신자가 되었지만, 아직 각별한 회심(回心)을 수반한 입신(入信)은 아니었다.
1879년 6월 2일 우치무라는 7명의 동기생과 함께 감리교회 선교사 해리스(C. M. Harris)에게 세례를 받았다. 우치무라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이 날을 ‘루비콘강을 건너간 그 날’이라고 불렀다. 세례를 받은 후 세 사람은 세례명을 골랐다. 니토베는 바울, 미야베는 프란시스, 우치무라는 요나단을 선택했다. 우치무라는 『구약성서』「사무엘서」에 나오는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에 감동하여 이 이름을 골랐다고 했다. 기독교 입신에 즈음한 우치무라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혈연관계보다 더 친밀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정과 교제를 갈망했다.
우치무라를 비롯한 제2기생은 그들이 세례받은 해리스가 속한 감리교회에 입회했다. 우치무라는 해리스의 교파와 다른 교파의 차이점을 잘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그 교회에 입회했다. 그가 선량한 인물이니 그 교회도 당연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7인 형제의 작은 교회’를 만들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자유롭게 그리고 자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했다. 이 작은 교회는 제도상 완전히 민주적으로, 7인의 회원은 모두 권위와 의무에서 평등했다. 그들은 주 3회 모임을 가졌다. 7인 중 당번 한 사람이 그날은 목사이고 사제이고 교사였다. 그들은 이 교회를 중심으로 안식일을 준수했고 뉴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엄격한 규율을 지키기 시작했다. (계속)
3인의 우정
이 작은 그룹의 회원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치무라에게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니토베와 미야베는 특히 그랬다. 세 사람은 여름방학 동안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성서를 두세 장 함께 읽었다. 룸메이트를 정기적으로 바꿔야 하는 규칙에 반대해 우치무라는 졸업 때까지 미야베와 한방을 썼다. 차분하고 학구적인 미야베는 성미 급한 우치무라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미야베는 졸업 후 도쿄와 미국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삿포로농학교의 후신인 홋카이도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우치무라는 후일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생각한 『로마서 연구』를 미야베에게 헌정했고, 임종 때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니토베는 언제나 우치무라에게 가까운 친구였으나 미야베처럼 우치무라가 마음을 의지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문학에 매료됐던 그는 학창 시절에는 신경과민으로 늘 초조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도쿄제일고등학교 교장으로서 우치무라에게 많은 학생을 소개했고, 그들은 니토베와 우치무라 두 사람의 충실한 제자가 되었다.
1881년 7월 우치무라를 비롯한 삿포로농학교 제2기생이 졸업하게 되었다. 입학 이래 줄곧 수석을 지켜온 우치무라가 졸업생을 대표해 작별 인사를 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우치무라, 니토베, 미야베 세 사람은 삿포로의 가이라쿠엔(偕樂園) 공원에 가서 장차 한 몸을 두 J, 즉 Jesus와 Japan에 바칠 것을 서약했다. 졸업 후 우치무라는 삿포로 현의 관리가 되어 수산 업무를 담당했다. 어업 조사를 위해 출장 여행을 하는 한편 수산학의 연구도 병행했다.
초혼 실패와 미국 유학
1884년 3월 28일, 우치무라는 아사다 다케(淺田夕ケ)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에는 우치무라의 부모, 특히 모친의 강력한 반대가 있었고, 간조도 일시 결혼을 단념할 정도였지만 간신히 식을 올리는 데까지는 갔다. 모친의 반대 이유는 다케가 ‘너무 영리하고 학문이 너무 많고 지적’이라는 것이었다. 이 결혼은 반년도 되지 않아 파국을 맞았다. 이혼의 이유에 대해서는, 다케의 이성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있었고, 그녀가 ‘양가죽을 쓴 이리’라는 말이 돌았던 것 외에는 오늘날까지도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케와 헤어진 후 우치무라는 구약의 「호세아서」를 애독했다. 이혼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우치무라의 죄의식과 신앙, 여성관 등에 끼친 영향을 매우 컸고, 무엇보다도 이 일이 없었더라면 이후의 우치무라의 일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기대했던 기독교적 가정의 붕괴는 그의 마음에 커다란 ‘공백’을 만들었다. 그는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우치무라는 1885년 1월 1일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 지적장애인 시설의 간호사로서 새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한 일은 격일로 야간 경비를 하고 하루에 세 시간씩 장애아들을 돕는 일이었다. 그는 간호사 겸 조수로서 지적 장애아동 40여 명을 돌보았다. 아동들의 발을 씻기고 오줌똥을 처리하는 혹독한 체험이었다. 일본 농상무성의 관료로서 전도유망한 엘리트였던 그가 미국 땅에서 어린이들에게 “잽(Jap), 잽”(왜놈, 왜놈)하고 조롱을 받으며, 하루아침에 지적장애 아동들의 배변을 처리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이런 경험이 그의 인생에서 갖는 의미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치열한 물음 끝에, “그것이 나의 도덕적 훈련에 도움이 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단순한 자선사업이 아니라, 어린이들의 심령 개발이라는 하늘의 아버지가 주신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칫 멸시당하기 쉬운 그 어린이들에게도 신이 주신 똑같은 영혼이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우치무라의 인간관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일본을 떠나 오기 전부터 안고 있던 마음속의 번뇌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았다. 다케와의 파경이 우치무라에게 던져 준 문제는 그 문제 자체는 아니었다. 그런 여자를 일시적으로나마 정신없이 사랑했던 자신에 대한 가책이 문제였다. 우치무라는 다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눈먼 사랑에 대해 깊은 자책에 시달렸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부모에 대하여, 또 친구들에 대하여도 죄를 범했다고 괴로워했다. 이때 우치무라의 자책은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죄의식이라기보다는 피해자로서의 회한으로, 유교적 수치심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우치무라는 이렇게 이해된 자신의 죄를 극복하기 위해 아동들을 ‘완전한 자기희생과 전면적인 자기 포기’를 요구하는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돌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이기심이 얼굴을 내미는 것을 자각했다.
실리 총장의 영향
우치무라는 1885년 9월 애머스트대학에 입학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 다섯 권만을 가지고 애머스트대학에 도착한 우치무라가 처음 찾아간 것은 실리 총장이었다. 우치무라를 만났을 때 실리의 나이는 61살이었다. 실리는 그 후 우치무라가 귀국하고 나서 급속하게 건강이 악화하여 1890년에 총장을 그만두고 5년 뒤에는 세상을 떠났다. 우치무라와의 만남이 실리에게는 만년을 장식하는 일이었던 셈이다.
하버드대학과 애머스트대학의 비교는 일본의 도쿄대학과 삿포로농학교의 비교를 연상시킨다. 우치무라의 경력을 보면 관군(官軍, 메이지유신 지지파)이 아닌 좌막파(佐幕派, 막부 지지파)의 무사 아들로 태어나, 도쿄대학이 아닌 삿포로농학교에 진학, 미국에서도 하버드가 아닌 애머스트대학을 다녔다. 관군-도쿄대학-하버드대학이 화려한 주류 코스라면, 좌막파-삿포로농학교-애머스트대학은 아무래도 그늘진 비주류 코스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코스를 유유히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치무라가 그 인생에서 후자의 길을 선택하여 걸은 것은, 비주류의 인생을 살아간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대를 키우는 결과가 된 듯하다. 교회에 대한 무교회의 주창도 이와 같은 대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실리 총장의 우치무라에 대한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우치무라는 실리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일종의 이상한 안위를 느끼고 그를 스승으로서보다는 친구로서 사귀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는 참으로 온유하고 참으로 겸손하다. 그를 한번 만나면 백 번의 기독교 증거론을 읽는 것보다 더한 효과가 있다.” 엄격한 동양적 스승이 아니라, 사랑에 뿌리를 내린 기독교적 형제애로서의 실리의 인격에 접한 우치무라는 크게 감동했다. “독수리와 같은 눈과 사자 같은 얼굴에 양 같은 마음을 지닌” 그의 인격에 접해 그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마침내 그의 조언을 하나님의 조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애머스트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뒤로도 죄의 극복을 에워싼 싸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동양에서 온 가난한 청년의 영혼을 사랑하고 그의 내면적 고뇌에 적절한 조언을 준 실리 총장은 어느 날 고뇌하는 우치무라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을 주는 한마디를 해주었다. “우치무라, 너는 너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 되는 거야. 너는 네 밖을 봐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 너는 어린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 그놈을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어. 왜 하나님과 햇빛에 맡기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전형적인 속죄신앙을 표현하는 이 한마디가 1886년 3월 8일의 우치무라의 회심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이날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나의 생애에서 참으로 중대한 날이다. 그리스도 속죄의 힘이 오늘처럼 명료히 계시가 된 적이 일찍이 없었다.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부채를 갚아주시고 나를 타락 이전의 최초의 청정함과 결백함으로 되돌려주셨다.” 인간 존재의 변혁은 도덕적 훈련이나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너의 죄를 구속해 주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에 의한다는 실리의 말을 우치무라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 회심의 체험은 우치무라의 마음의 세계를 한꺼번에 밝혀주었다. 5월 26일 〈일기〉에는 “새, 풀과 꽃, 태양, 대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라는 환희의 눈으로 본 자연 찬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맛본 회심의 체험은 기독교에 입신한 이후 서서히 형성되던 인간관을 확립해 주었다. 그것은 행위주의, 율법주의와 대조되는 신앙주의에 바탕을 둔 인간관, 가치관이었다. 행위주의 인간관에 따르면 선인들, 부자들, 현자들, 강자들이 존중된다. 반면 죄인, 빈자, 병자, 약자, 어리석은 자는 경시된다. 그러나 신앙 만에 의한 신앙주의 인간관은 선행의 많고 적음을 묻지 않는다. 이 신앙주의 인간관에 설 때 비로소 죄인, 빈자, 병자, 약자, 어리석은 자가 남과 똑같은 인간으로 대접받는다.
‘두 개의 J’
미국에서 지낸 수년간 우치무라에게 이른바 문화적 충격은 크지 않았다. 언어의 부자유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의식주 일체를 서양식으로 제공받았던 삿포로농학교 생활 덕분이었다. 우치무라가 충격을 받은 것은,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미국의 ‘이교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를 무엇보다도 경악하게 한 것은 미국의 배금주의였다. 한 식당에 들어가 보이들의 친절한 접대를 받고 감격한 그는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며 식당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치무라의 가방을 빼앗고 ‘서비스 요금’을 요구했다. 우치무라는 미국이 돈을 전능한 힘으로 모시는 ‘배금주의 사회’임을 통감했다. 또한 모두 문을 열어두고 사는 일본과 달리 현관문에서 작은 상자에 이르기까지 마치 도둑의 영(靈)이 모든 대기를 점령하고 있는 듯, 곳곳에 자물쇠를 걸어두고 있는 미국 사회의 상호불신을 보면서 기독교 국가의 비기독교적 현실을 보았다. 또한 인디언과 아프리카인 그리고 동양인에 대한 극심한 인종차별도 그를 실망시켰다. 미국의 맨얼굴을 본 그에게 미국은 ‘이교 국가’ 일본 이상으로 ‘이교적’이었다.
우치무라는 애머스트 시절 기독교와 애국을 결합한 자신의 묘비명을 성서에 영어 문구로 적었다.
I for Japan; 나는 일본을 위해
Japan for the World; 일본은 세계를 위해
The World for Christ; 세계는 예수를 위해
And all for God; 모두는 하나님을 위해
3년 반 만에 미국에서 귀국한 우치무라는 1888년 8월 니가타의 호쿠에츠(北越)학관 교장으로 부임했다. 우치무라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기독교 학교인 호쿠에츠학관에서 초빙 교섭을 받고 있었다. ‘두 개의 J’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우치무라로서는 이 학교가 추구하는 기독교 교육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부임 후 4개월 만에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이 학교가 외국 선교사의 원조를 받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자유·독립의 원칙을 훼손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교육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우치무라는 경영자, 교사, 선교사들로부터 고립되어 싸움에 패하고 말았다.
우치무라는 외국 기독교, 특히 외국의 특정 교파에 의해 지배되는 기독교를 반대했다. 일본인에게 의미 있는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외국 선교 기관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었다. “기독교의 씨앗은 외국인의 손에 의하여 뿌려졌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고 일본 옷을 입고 일본의 땅에서 성장한 기독교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개의 J’의 신념에 따라 일본인으로서의 독립과 참된 기독교 교육을 관철해보려고 하였으나, 현실의 일본 기독교계는 그의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했다.
칼라일의 영향
우치무라는 1890년 9월부터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현 도쿄대학 교양학부) 촉탁 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제일고등중학교는 그가 어린 시절 배웠던 도쿄영어학교의 후신으로, 이 학교 졸업생들은 대부분 도쿄대학으로 진학했다. 그가 제일고등중학교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되어 10월 30일 교육칙어가 발포되었다. 교육칙어는 전통적인 유교 윤리를 열거했지만, 최고의 덕은 ‘충효’에 집약되었다. 궁극적으로 천황을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으로 신격화했으며, 모든 국민은 천황에 대한 멸사봉공의 의무가 있었다.
이듬해인 1891년 1월 9일 제일고등중학교에서는 작년에 발포된 교육칙어의 봉배식(奉拜式)이 새 학기 시작과 더불어 거행되었다. 당시 우치무라는 30살이었다. 교수진 전원과 전체 학생이 모여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를 천황의 초상화 옆에 걸어놓고 그 앞에 경의를 표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교장의 연설과 칙어 낭독 후 교수와 생도들은 한 사람씩 단상에 올라가 마치 불단이나 신도의 예식에서 선조들의 위패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것처럼, 칙어에 명시된 천황의 서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릴 것을 요구받았다. 우치무라는 세 번째로 등단하였다. 그는 60명의 비(非)기독교인 교수진과 천 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독교적 양심에 따라 그 자리에 선 채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입장에서 종교적 예배에 해당하는 봉배(奉拜)는 그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 외에는 절대 바쳐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설사 천황이라 할지라도 지상에 존재하는 자에게 종교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것을 절대시하는 것이다. 인간을 절대시하는 것은 그의 종교적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우치무라가 이런 태도를 보이게 된 원인은 기독교 신앙과 그의 뚜렷한 개성에 있겠으나, 당시 그가 읽고 있던 토머스 칼라일의 『크롬웰 전기』의 영향도 컸다.
칼라일의 『크롬웰 전기』가 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말을 찾지 못할 정도다. 나는 영국판 책을 중고책방에서 샀다. 때는 1891년, 내가 촉탁 교원으로서 제일고등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나는 이 책을 구매한 후, 모든 것을 잊고 몰두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자유와 독립을 사랑할 것을 깊이 깨달았다. 그것을 절반 정도 읽었을 때 고등중학교 윤리 강당에서 그 당시 발표된 교육칙어를 향해 예배적인 경배를 하라고 당시의 교장에게 요구받았다. 그러나 칼라일과 크롬웰에게 마음을 빼앗겨 도저히 양심에 걸려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권유를 과감하게 거부했다.
상상해보라. 천여 명의 학생과 60명의 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허리를 굽히지 않는 광경을. 우치무라는 당장 표적이 되었다.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은 그가 재직하고 있던 제일고등중학교 학생과 교사들 사이에서 먼저 나왔다. 그들 중 일부는 우치무라의 집을 습격해서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하루아침에 역적이 된 것이다.
불경사건(不敬事件)
매스컴은 재빨리 이 사건을 ‘우치무라 간조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포장하여 전국에 퍼뜨렸다. 거기에다 불교의 각 종파의 기관지가 편승하여 기독교 신자에 의한 불경사건이라고 떠들어댔다. 그 결과 사건은 확대되어 기독교와 일본의 국체(國體)의 문제로 비화하게 되었다.
우치무라의 이름은 반역자의 대명사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행하는 동안에는 여관 투숙을 거부당할까 봐 가명을 써야만 했다. 이 와중에 우치무라는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가 2개월 만에 가까스로 회복은 되었지만, 이미 실직자 신세였다. 그동안 우치무라의 아내 가즈코(加壽子)는 박해받는 가운데도 잘 견디면서 우치무라를 간호했는데,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같은 병으로 쓰러져 1891년 4월 19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직장을 잃은 직후에 아내까지 잃게 된 우치무라는 비통함이 극에 달했다.
1893년 그는 『기독교 신도의 위안』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이른바 ‘불경사건’이 있은 지 2년 뒤의 일이었다. 이 책 제2장의 제목은 ‘고향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였다. 그것은 제일고등중학교에서 있었던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책의 제1장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아내 가즈코의 죽음을 뜻한다.
‘불경사건’은 우치무라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신성불가침’이라고 규정한 천황에 대해, 한 개인이 현세를 초월하는 보편적 존재(하나님)를 근거로 천황의 신성을 부정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관행에 대해 ‘노(No)!’라고 할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준 사건이자, 현세와 지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가 엄존함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은 ‘불경사건’ 후 우치무라가 겪은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일궈낸 종교사상의 결정(結晶)이다. 우치무라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인간관은 이 책에서 거의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을 책장이 찢어질 때까지 애독했다는 일본의 소설가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1875-1962)는 이 책을 일본 현대문학 최고의 사소설(私小說)로 평가하기도 했다.
1892년 1월부터 우치무라는 교바시(京橋)에 있던 일본 조합교회 강의소의 설교자가 되었다. ‘불경사건’으로 이제는 교직에 종사할 길이 막혀버린 그에게 우선 가능한 일은 전도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는 그해 9월 오사카 타이세이(泰西)학관에 초빙되어 영어와 역사를 담당했다. 타이세이 학관은 조합교회의 학교였다. 타이세이학관은 신임 교사 우치무라 간조를 신입생 모집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오사카아사이신문(大阪朝日新聞)에 게재된 타이세이학관의 생도 모집 광고에는 큼직한 활자로 우치무라 간조가 교사로 부임한다는 선전이 나와 있었다. 그 덕분에 신입생의 숫자도 현저하게 불어났다. 그의 불경사건은 이때가 되면 그에게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치무라는 교토의 판사 오카다(岡田透)의 딸 시즈와 일본식으로 결혼했다. 오카다는 오카자키번(藩)의 무사로 궁술에 능한 인물이었다. 딸 시즈를 우치무라에게 시집보내려 할 때, ‘불경사건’ 이야기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오히려 우치무라에게 적이 많아서 좋다고 하면서 딸의 결혼에 동의했다. 사위의 인물됨을 알아보는 안목과 대범함이 놀랍다. (계속)
저작 활동 우치무라는 1893년 『기독교 신도의 위안』 간행에 이어 『구안록』(1893), 『전도의 정신』(1894), 『지리학고』(1894),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1895) 등을 잇달아 출간했다. 놀라운 다산(多産)이고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명저들이 저작된 시기였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의 제3장 ‘기독교 교회에 버림을 받았을 때’에는 ‘무교회’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온다. 교회에 다니던 신도가 하나님과 성서가 아닌, 외국에서 도입된 예배 의식 때문에 성직자, 교직자의 중재를 인정하지 않아서 교회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흰 벽과 붉은 기와 속에 있지 않고 하늘 아래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우치무라가 외국의 원조로부터 교회가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교회로부터 소외된 체험이 깔려 있다. 『구안록』에서 우치무라는 죄로부터의 탈피를 목적으로 탈죄술(脫罪術)과 망죄술(忘罪術)을 갖가지로 시험한 끝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고, 속죄의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우치무라의 신앙고백이다. 『전도의 정신』은 건물이 아닌 우주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한 우치무라의 ‘무교회론’과 연결된다. 우치무라는 전도자의 자질로서 다방면의 세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나타내 보일 직책에 있으므로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이 넓은 우주에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더욱 밝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자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학문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신학만을 아는 전도자는 신학생의 교사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목수·미장이·농민·서민·학자·정치가 등 평신도의 지도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특히 다음 분야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첫째로, 경제학과 사회학 등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이며 사회를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가는 것이므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연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이를 배워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을 공부해야 한다. 역사학은 인류 발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밝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역사학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해준다. 역사학은 국민은 인류보다 작은 것이며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민의 발전보다 긴요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전도자는 역사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끝으로, 이상적인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성서의 원어를 비롯하여, 충분한 성서 연구가 필요하다. 성서 연구 없이 전도에 나서려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다. 요컨대 우치무라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사람’을 알기 위해 역사와 사회과학을, 그리고 ‘자연’을 알기 위해 과학을 연구할 것을 주장한다. 우치무라는 이 세 가지가 합하여 ‘트리니티’(三位)를 이루며, 하나가 빠지면 다른 나머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셋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하고 건전한 지식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지리학고』는 초판 간행 3년 뒤 재판본(1897)부터 『지인론』으로 제목을 고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류의 역사를 땅과 사람과의 교섭 속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 책에서 우치무라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제9장 ‘일본의 지리와 그 천직’이다. 그는 섬나라 일본이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다고 보고, 일본이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인류 문명사적 사명이 있다고 보았다. 우치무라의 제자인 지리학자 김교신이 「조선지리소고」를 쓰는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는 우치무라의 전반(前半) 생애의 자서전이다.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삿포로농학교에서의 기독교 입신, 독립 교회 설립, 미국에 건너가 지적 장애아 병원 근무, 애머스트대학에서의 학업 등을 일기를 기초로 해서 쓴 책이다. 이 책은 영어, 독일어, 핀란드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특히 독일에서는 판을 거듭해 인기를 끌었고, 신학자 에밀 브루너, 신학자이자 의사인 슈바이처 등이 애독했다. 일본의 양심 1897년 초 어느 날 일간지 『요로즈초호(萬朝報)』 사장이 우치무라를 필진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다. 우치무라는 평생의 사업으로 전도자가 되기로 방향을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도 그것이 넓은 의미의 전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기자라는 직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세의 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입사하기로 동의한 것은 우치무라의 저작이 출판가에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켜서 펜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치무라는 신문기자로서 ‘펜을 통한 전도’에도 기대를 걸게 되었다. 1897년 2월 14일 『요로즈초호』 제1면 톱에 우치무라의 필진 합류 소식이 실렸다. 우치무라가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입사했는지 알 수 있다. 우치무라 간조 씨 입사. 농학사 우치무라 간조 씨는 이번에 당사의 간청에 응하여 『요로즈초호』 편집국에 들어왔다. 진지한 평론가로서 오늘의 사상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는 독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요로즈초호』는 이 기회에 지상에 몇 가지 쇄신을 단행하여 전진하여 마지않는 본래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한다. 독자가 지켜주기를 바란다. 『요로즈초호』에서 우치무라의 직책은 영문(英文) 지면 주필이었다. 우치무라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게 논평했다. 자신의 주장과 견해가 일본을 대표한다는 심정과 기개로 글을 썼다. 그는 서양 대국의 남부끄러운 비행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그중 하나가 터키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우던 작은 나라 그리스를 지지한 일이었다. 극동의 한구석 일본에서 보낸 성원은 멀리 그리스에까지 알려져 아테네의 언론사 『엠프로스(Empros)』가 우치무라의 기사를 취재해 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펜으로 쓴 한 편의 글이 멀리 떨어진 소국을 격려했다는 사실은 우치무라에게도 커다란 보람과 만족감을 주었을 것이다. 우치무라의 기본 입장은, 기독교적인 정의관에 근거해서 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소국을 두둔하고, 대국( 그것도 기독교국을 자처하는 대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메이지(明治) 사상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자유와 민권과 평화의 챔피언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잇달아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군문(軍門)으로 항복해 들어가는 모습이다. 청일전쟁 직후 언론인이자 비평가인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1863-1957)는 평민주의에서 군국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어제까지 원수처럼 탄핵했던 정부의 칙임참사관 자리에 올랐다. 그 과정은 너무나 극적이고 노골적이어서 세간의 손가락질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1890년 전후 관료 국가주의자들에게 과감하게 공격했던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1847-1901),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 1864-1917) 등 기독교인들이, 그로부터 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본제국주의의 사상적 나팔수 역할을 스스로 자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도도한 흐름에 저항하면서 예전 동지들의 전향에 배신감을 느끼며 지켜보던 인물이 있었다. 일간신문인 『요로즈초호(萬朝報)』를 기반으로 활동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 등 몇몇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인 중엔 단 한 사람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가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도 결코 처음부터 반전(反戰)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청일전쟁(1894) 때 「조선 전쟁의 정당성」이란 논문을 영어로 써서 해외에 널리 호소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역시 전쟁에 관한 한 ‘전향자’였던 셈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상적 전향은 객관적 정세에 떼밀려 ‘흐름을 따르는’ 전향인 데 비해, 우치무라의 경우는 반대로 일반적인 사조의 ‘흐름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국민의 국가적 자부심을 급속히 고양했으며, 굴러들어온 2억 냥(兩)의 보상금은 일본 자본주의에 많은 양의 기름을 부어 일본의 자본주의는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우치무라는 승리의 현실에서 비전(非戰)의 논리를 도출했다. 청일전쟁은 일본 국민의 도덕적 타락만 가져왔을 뿐이며, 동양 전체를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다.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타올랐던 그의 애국적 열정은 격렬했던 만큼이나 실망과 회한 또한 그만큼 컸으며, 이것은 그대로 전쟁을 부정하는 정신적 에너지로 작용하게 되었다. 1901년 우치무라는 이렇게 썼다. “특히 나의 큰 과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청일전쟁 때 나의 졸렬한 붓을 휘둘러 세계를 향해 일본의 행위를 변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이르러 그것이 완전히 탐욕을 위한 전쟁이었음을 깨닫고 나는 양심에 대해, 세계 만국에 대해 실로 면목이 없다고 느꼈다. 나는 이후 모든 메이지 정부의 행동을 옹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의 과감한 노선 변경이었다. 그가 가장 강력하게 비전론을 주장하고, 메이지 정부에 대해 가차 없는 필봉을 휘둘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때마침 일본이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 저항을 대표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정반대 방향, 즉 제국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 분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거대한 국제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치무라는 영일동맹을 이 같은 전환의 결정적인 조짐으로 보았다. 영일동맹은 영국 제국주의가 보어전쟁(Boer War)에서 위선과 파렴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체결되었다. 일장기(日章旗)와 유니언 잭(Union Jack)이 거리에 범람하는 광경을 『요로즈초호』사(社) 집필실에서 바라보면서 우치무라는 이렇게 썼다.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정부와 동맹하여 일본은 체임벌린의 적을 적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체임벌린과 동맹함으로써 남아프리카에서 그들 자유의 전사들을 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의 실망과 낙담을 어떻게 헤아릴 것인가. 그들은 동양에 군자의 나라(君子國)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군자의 나라는 사쓰마-조슈 출신의 가장 저열한 자들이 지배하게 되어, 강한 자에게는 굽히고 약한 자는 억누르는 기술에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보어인들이 마지막까지 고투를 계속했음에도 결국 영국군에게 압도당했을 때, 우치무라는 “아, 내가 사랑하는 보어여, 너는 마침내 너의 자유와 독립을 잃어버렸구나. 너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자가 일본이라는 것을, 나는 이 일을 생각하면서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부의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며 영일동맹의 의미를 세계사적 연관 속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출정(出征) 유가족의 원호와 하루빨리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전론자로서는 이례적인 모습이다. 그는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하지 않고, 다만 개전 후에도 결코 전쟁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확고히 지켰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비(非)정치적·반(反)정치적 성향에 뿌리내리고 있다. 정치 지상주의를 배격하는 이런 성향은 무교회 그룹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쿠토미 소호와 이광수 ‘불경사건’으로 직장을 잃고 교토에서 불우한 시절을 지내던 시절, 우치무라는 기독교 저작을 다수 집필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치무라는 한때 저술 활동으로 입신할 것을 고려할 정도도 많은 저작을 출간했다. 그러나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이 불우했던 교토 시절 우치무라를 도운 인물 중에는 도쿠토미 소호(1863-1957)가 있었다. 우치무라는 수많은 글을 『국민의 벗(國民之友)』에 발표함으로써 생활비를 벌고 그의 필명을 높일 수 있었다. 도쿠토미 소호는 1887년 출판사 ‘민우사(民友社)’를 설립하고 『국민의 벗』을 창간했다. 우치무라는 평생 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 도쿠토미 소호가 청일전쟁 직후 군국주의자로 변신해 제2차 마쓰카타(松方) 내각에 내무성 칙임참사관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치무라는 그의 ‘변절’에 가차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국민의 벗』으로 이름을 날린 ‘민우사(民友社)’의 사장이 정부 관료로 변신했으니, 민우사라는 이름을 ‘관우사(官友社)’로 바꾸라고 빈정댔다. 도쿠토미 소호는 『국민의 벗』을 통해 우치무라를 세상에 알린 은인이었고 우치무라는 그 은혜를 일생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이고 그것을 의(義)와 혼동할 수는 없었다. 도쿠토미 소호는 식민지 조선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그를 ‘조선의 정신적인 초대 총독’이라 부른다. 언론학자 정일성은 그를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요, ‘선전 선동 정치의 귀재’라고 부른다. 그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막역한 사이로, 조선의 언론을 통폐합했다. 공식 직함은 『경성일보』 감독이지만 사실상 언론 정책 총책임자였다. 언론인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은 데라우치 마사다케 당시 조선 총독에게 식민정책을 조언하는 정책보좌관이나 다름없었다. 데라우치의 조선 통치 시책은 도쿠토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성일보』에 쓴 「조선 통치의 요의(要義)」에는 그가 만들어낸 ‘민족동화정책’이 요약되어 있다. 총칼로 조선을 짓밟았던 공포의 무단통치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어준 ‘조선 통치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조선 통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여 일본에 동화되도록 체념케 하고, 만약 제대로 말을 듣지 않을 때는 힘을 사용하라”라는 구절은 그의 민족동화정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언론 감독을 위해 ‘꼬붕(子分)’으로 박아둔 인물이 아베 미츠이에(阿部忠家, 1862-1936)였고, 아베의 눈에 띄어 중용(重用)된 식민지 지식인 청년이 바로 춘원 이광수(1892-1950)였다. 이광수는 1910년 3월 26일 일본 메이지학원 보통부(5학년 과정)를 졸업하고 귀국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 생활(1910년 4월~1913년 11월)과 중국, 시베리아 등지의 유랑생활 끝에 23살이던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 덕분에 다시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다. 9월 30일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7월 이 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청년 이광수가 유학 생활에서 경험한 바로는 일본이 너무나 발전해 조선 독립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허황한 꿈으로만 느껴졌다. 따라서 그는 일본 눈치를 보아 적당히 처신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정일성은 춘원의 친일은 이때부터 머릿속에 계산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창작 의욕이 왕성했던 그에게 발표 무대가 눈에 띄었다. 총독부 기관지이자 우리말 신문으로는 국내에 하나밖에 없던 『매일신보』였다. 24살 청년 이광수는 1916년 9월 이 신문에 「대구에서」라는 서간체 기행문을 기고한다. 독립투쟁을 강도 사건으로 조작한 이 글을 『매일신보』는 9월 22일과 23일 이틀로 나누어 실었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당시 가는 곳마다 화제였던 ‘강도 사건’을 거론한다. 독립운동가 몇 명이 대구의 이름난 친일파 부호 세 명에게 독립자금을 대라고 요구했고, 부호가 불응하자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다. 이광수는 독립투쟁 목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파렴치범으로 정죄했다. 임헌영은 「대구에서」가 이광수의 첫 번째 친일 행적을 드러낸 글이라고 평가한다. 이 글 한 편으로 이광수는 출셋길에 오른다. 조선 언론의 사령탑이자 도쿠토미 소호의 ‘꼬붕’인 아베 미츠이에를 감동하게 한 것이다. 이광수는 아베의 소개로 1917년 8월 도쿠토미를 만난다. 이때 도쿠토미는 54살의 중년, 이광수는 25살 청년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도쿠토미가 탄 관부연락선이 도착하는 부산항 부두에서 이루어졌다. 이광수는 미리 부산에 와있던 아베 사장과 함께 마중을 나갔다. 세 사람은 스테이션 호텔 라운지로 옮겨 아침을 먹고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아베는 이광수의 글재주를 극찬하며 『매일신보』에 실린 글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도쿠토미도 이광수의 글을 칭찬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가 이광수를 이처럼 치켜세운 까닭은 이광수의 뛰어난 문장력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광수를 『매일신문』에 묶어두고 동화정책의 하수인으로 써먹을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 아들’과 ‘친동생’ 1936년 아베가 죽은 뒤 이광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민우사에서 도쿠토미 소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도쿠토미는 이광수의 어깨를 안으며 “자네도 내 아들이 되어주게. 내 조선 아들이 되어주게.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네. 크게 되어주게. 알겠나?”라면서 마치 아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그는 이광수가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의자에서 일어나 이광수의 손을 잡고 “잘해주게. 감옥에 들어갈 일은 하지 말아 주게. 자네는 일생을 문장으로 나아가게. 문장보국(文章報國) 말일세”라고 당부했다. 이광수는 감읍했다. 이광수는 1940년 2월 12일 이름을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고치고(創氏改名) 경성부 호적계에 신고한 다음 도쿠토미에게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은 편지로 토로한다. ‘내 자식이 되어다오’라는 선생의 말씀을 들은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야말로 천황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야마토(大和)와 조선 두 민족은 천황을 끈으로 이음으로써 일가(一家)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조선의 올바른 민족운동은 황민화의 한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행히 옛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혈액의 교류는 인식상이든 정치상이든 두 민족의 동일국민화를 자연 복귀로 생각게 해 실로 홀가분한 느낌마저 듭니다. 나이를 초월한 이광수와 도쿠토미의 교제는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광수는 조선과 일본이 같은 뿌리라는 신념을 간직한 채 일제를 위해 더욱 있는 힘을 다했다. 이광수가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 아들’다운 삶을 살았던 반면, 도쿠토미 소호의 친동생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는 단호한 반(反)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는 심지어 도쿠토미와 형제의 연마저 끊었다. “경세의 수단으로서 형은 제국주의를 취하고 나는 인도(人道)의 대의를 취했다”라고 선언하며 형제지간의 의를 끊겠다는 「고별의 말」(1903)을 공개하고, 성을 고쳐 형 이름의 부(富)자와 달리 갓머리 위의 점을 없애(冨)버렸다. 1910년 5월, 일본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비판하는 진보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대역(大逆)’ 조작 사건을 일으켜 3심제가 아닌 단심으로 처형한다. 그러자 로카는 명문 도쿄 제일고 변론부가 주관한 특별강연에서, 국가란 모자와도 같아서 “머리 위에 쓰지만, 머리를 지나치게 누르지 않게 해야” 하는데, 머리를 무겁게 하면 모반(謀反)할 수밖에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모반이란 반역이고 배반이다. 그럼 무엇을 배반하는가? 낡은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 시대가 변하는 것 아니던가. 모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반인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모반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여러분, 우리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대하여, 그리고 주위에 대하여.” 일본 문단은 동생 로카의 인격과 품성, 괴팍한 신앙심, 또는 형에 대한 열등감이 형제간 불화의 원인이었다며 동생의 평화주의를 깎아내렸지만, 도쿠토미 로카를 지지한 인물도 있었다. 기독교 평화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 등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의 거물급 인사였던 도쿠토미 소호와 형제의 의를 끊으면서까지 신념을 고수한 동생 도쿠토미 로카, 그리고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 아들’로 살았던 이광수, 두 사람의 삶이 엇갈린다. 혼탁한 시대는 의로운 삶과 불의한 삶을 구분하는 시금석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시간이 올 때마다 우치무라는 양심 세력과 함께했다. 역사 앞에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 삶이다. 일본의 예언자 우치무라가 1898년 6월 창간한 『도쿄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의 영문 제목은 The Tokyo Independent로 표기되었다. 창간호의 영문 면에는 『구약성서』 「아모스」 3장 8절이 인용되었다. 일본의 예언자로서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논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도쿄독립잡지』는 20쪽 남짓한 작은 잡지였지만 내용은 매우 다채로워서 ‘사회, 정치, 문학,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었다. 정부, 군인, 부자, 귀족 등 상류 사회의 부패, 배금주의, 편협한 애국주의를 공격했다. 반면 농민, 어부, 상인, 인력거꾼 등 평민을 벗 삼아 자유, 평등, 세계주의, 고결한 윤리·도덕을 주장했다. 우치무라는 진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청년 김교신, 함석헌 등이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삼았던 이유를 다시 확인한다. 『도쿄독립잡지』 12호(1898년 11월 5일)에는 「우리가 원하는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7항목을 내세워 우치무라가 일본 사회에 바라는 개혁이 어떤 것인지를 밝혔다. ○군비를 축소해서 교육을 확장할 것. ○화사족(華士族)·평민의 신분제도를 폐하고 전체를 일본 시민으로 칭할 것. ○군인을 제외하고는 위훈(位勳) 제도를 전폐할 것. ○지방에 완전한 자치제를 펴고 자치단체장은 민선할 것. ○정치적 권리에서 금전적 제한을 없앨 것. ○상원을 개조하여 지식수준이 낮은 자가 그 의원이 되지 못하게 할 것. ○번벌(藩閥) 정부의 잔재를 소탕할 것. 우치무라는 “이런 대담한 개혁이 오늘의 정치인이 결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지만, 하늘이 만일 일본을 버리지 않고 올리버 크롬웰 같은 위인을 우리에게 내린다면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 개혁안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도저히 결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군비 축소, 의무교육의 확대, 신분제도의 철폐, 위훈의 폐지, 지사·시장의 민선, 지방자치제, 참의원의 설치 등 ‘크롬웰 같은 위인’의 역할을 맥아더의 ‘일본점령군사령부(GHQ)’가 해낸 것이다. 자체 역량으로 이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일본 사회의 한계일 것이다. 『도쿄독립잡지』는 청년들의 사적인 불만이나 분노를 공적 분노로 바꾸어 놓았고, 도시 청년뿐만 아니라 농촌 청년 사이에도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한 청년 중에서 나중에 사회주의 운동가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독자들 사이에서 차차 자신의 개혁을 돌아보지 않고 바깥세상의 개혁만을 부르짖는 단순한 불평꾼들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치무라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우치무라는 얼마 후 사회주의 개혁운동과 선을 긋게 된다. 『도쿄독립잡지』는 1900년 7월에 폐간된다. |
『성서의 연구』와 제자들 『도쿄독립잡지』 폐간 후 『성서의 연구』 제1호(9월 30일 자)가 1900년 10월 3일에 출간되어 서점에 진열되었다. 잡지 첫머리에서 우치무라는 『성서의 연구』가 『도쿄독립잡지』의 후신이라고 천명하면서 요한복음 1장 17절을 인용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도쿄독립잡지』가 ‘의’를 가르치는 모세의 율법이라면 『성서의 연구』는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본 것이다. 『성서의 연구』는 일본 최초의 성서 잡지이고 그것이 팔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성서의 연구』는 의외로 잘나갔다. 발매 후 사흘만인 10월 6일에 창간호 3,000부가 거의 매진되어 2쇄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 후 『성서의 연구』는 한때 2,000부 정도로 발행 부수가 줄어든 일도 있었지만, 만년에는 4천 수백 부로 올라갔고, 우치무라가 별세할 때까지 필생의 중심 사업이 되었다. 우치무라는 이제야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천직을 만난 셈이었다. 『성서의 연구』 발간으로 천직을 발견했으나 우치무라가 진정 원했던 건 직접 전도였다. 우치무라는 1901년 여름부터 『성서의 연구』 독자들을 대상으로 자택 서재에서 성서 강의를 진행했다. 공간 문제로 수용 인원은 25명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한 독지가 등장하여 성서연구회 공간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도쿄독립잡지』의 애독자로 오사카의 향료상(香料商)였던 이마이 구스타로(今井傽太郞)의 미망인이 우치무라를 위해 기부한 돈으로 1908년 이마이칸(今井館)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마이칸은 이후 무교회 기독교의 본거지가 되는 건물이 되었다. 1909년 가을에는 성서연구회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다줄 일단의 회원들이 입회했다. 도쿄영어학교 시절부터 우치무라의 절친이었던 니토베 이나조는 당시 제일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의 지도로 독서회 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학생들이 니토베의 소개장을 들고 우치무라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니토베의 독서회에는 일고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해서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이 많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문부대신이 4명이나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불경사건’으로 한때 일본 교육계에서 가장 위험시되고 기피되었던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패전 후 국가 교육의 최고책임자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 구로사키 고키치(黑崎幸吉), 후지이 다케시(藤井武) 등도 이 무렵에 우치무라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의 모임은 가시와키회(栢會)로 불렸다. 가시와키회에 속한 사람들은 우치무라의 제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취직이나 다른 일로 니토베의 신세를 지는 기회가 자주 있어서 니토베를 일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우치무라와 니토베 두 사람을 같이 인생의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우치무라가 인생의 ‘아버지’라면 니토베는 인생의 ‘어머니’였다. 이렇게 약간 유형을 달리하는 두 스승의 인도를 받은 것이 그 청년들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룻의 죽음 우치무라는 ‘불경사건’ 후 재혼한 시즈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1892년에 태어난 딸 룻과 1897년 태어난 유시였다. 이름을 룻이라고 한 것은 구약성서의 룻기에서 따온 것이다. 룻은 외모가 부친 우치무라와 아주 닮은 꼴이었고, 그래선지 우치무라도 룻을 몹시 사랑했다. 그런데 1911년 여학교를 졸업한 봄에 갑자기 병상에 눕는 일이 거듭되었다. 아마도 결핵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치무라는 딸의 병구완을 하느라고 성서 강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해를 넘기고 1912년 1월에 나온 『성서의 연구』에는 부활, 내세, 희망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죽음은 ‘생명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단언하는 말이 나온다. 우치무라는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일 뿐”(누가복음 8장 52절)이라는 상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아무리 우치무라라 해도 자식을 가진 어버이였다. 자식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러나 룻은 기도의 보람도 없이 1912년 1월 12일 숨을 거두었다. 임종하기 3시간 전에 우치무라는 룻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을 받게 했다. 병으로 여윈 손으로 잔을 받아 마신 룻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분명한 목소리로 ‘감사, 감사’를 되풀이했다. 룻은 임종의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젠 갑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우치무라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영혼 불멸은 명백히 증명되었다”라고 썼다. 1월 13일에 치러진 룻의 장례식을 우치무라는 영원한 이별로 보지 않고, 룻을 천국으로 시집보내는 결혼식이라고 했다. 성서연구회에 출석하기 시작해서 얼마 되지 않은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처음 참석한 기독교 장례식에서 이 말을 듣고 놀랐다. 더구나 묘지에서 매장 예식을 치를 때 우치무라가 관에 뿌릴 흙을 쥐고는 그 손을 높이 쳐들고 “룻 만세”라고 절규하는 것을 보고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선 채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는 것이 대단한 일이로구나 하고 긴장감을 느꼈다. 당시 19살 청년이었던 야나이하라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사건이다. 룻의 죽음은 우치무라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신앙적으로는 영생, 내세, 부활이라고 하는 세계의 실재감을 한층 깊게 해주었다. 재림신앙 우치무라가 후반생에 힘을 쏟은 최대의 운동은 1918년에 시작한 재림운동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시작한 전쟁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교전국들은 하나같이 소위 기독교 국가였다. 우치무라는 비전(非戰)을 주장하는가 안 하는가가 종교의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시금석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는 모두 허위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즈음하여 우치무라에게 현저히 나타나는 사상은 ‘근대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근대인에 대한 우치무라의 정의는 이렇다. ‘근대인’은 자기중심의 인간이다. 자기의 발달, 자기의 수양, 자기의 실현과 자기, 자기, 자기, 무엇이든 다 자기다. (「근대인」) 우치무라는 근대인은 자아는 발달해 있지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근대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근대문명’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인류의 최선, 이것을 가리켜 문명이라고 한다. 정치, 경제, 생산, 공업이라는 것. 그리고 그 귀결은 전쟁이다. 국민은 문명이 발달한다고 하면서 실은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하는 데 불과하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노동의 결과는 모두 이와 같다. 대포 연기 속에 사라져 버린다. 문명을 최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헛수고라고 해야 한다. 문명은 사람을 속이는 사막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문명=포연」) 우치무라는 인류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혜와 힘에 의지해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문명’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이 근대문명의 특징이며, 그 근대문명이 낳은 ‘응석받이’가 ‘근대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문명은 자기중심의 ‘근대인’을 기르고, 자기중심적인 ‘근대인’은 국토 확장의 야심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주의 문명의 소산이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일은 기독교 국가 미국에 의한 평화 회복의 희망마저 완전히 깨버렸다. 인류 역사가 호전되기를 바랄 수는 없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바뀌려면 그 역사가 질적으로 바뀌는 때를 기다려야 했다. 역사의 질적인 변화는 예수가 다시 한번 인간의 세상에 강림함으로써 시작된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그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치무라의 믿음이었다. 재림운동 1917년 10월 31일,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우치무라는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집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우치무라는 일본에도 종교개혁의 때가 오고 있다고 느꼈고, 이를 위해 일어설 때라는 각오를 다졌다. 1918년 1월 6일 우치무라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림운동의 막을 올렸다. 그날 우치무라의 강연 제목은 「성서 연구자의 측면에서 본 예수의 재림」이었다. 우치무라는 교회를 위시한 평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의 노력으로는 지상에 평화가 오지 않으며, 그 사업을 완성하는 이는 예수라는 것, 진실로 이것이야말로 성서의 중심적 진리라는 것이었다. 성서를 재림의 희망을 보여주는 책으로 읽을 때 성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약동한다고 했다. 우치무라의 신앙 생애에는 세 단계가 있었다. 제1단계는 삿포로농학교에서의 입신이고, 그것은 예수의 품으로의 초대였다. 제2단계는 애머스트대학에서의 회심이었다. 속죄신앙으로 죄에서 해방된 것이다. 제3단계는 재림신앙이다. 죄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아직 세상에 그 영광은 찾아오지 않았고, 예수의 재림에 의해서만 우주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우치무라는 이제 현세를 인간의 행위로 궁극적으로 개량할 수 있다는 사상과 완전히 단절했다. 이 단계에서 우치무라의 마음속에 작으나마 남아있던 행위주의의 요소가 온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우치무라는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인간에 의해 어쩌면 현세가 개량되고 평화가 도래하는 영광스러운 상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인간은, 설령 그가 하나님의 도구로 일한 것에 불과했어도 그 사람에게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재림신앙의 단계에서는 어떠한 인간이라도 현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일지라도 한 조각의 영광도 나타낼 수가 없다. 현세적 행위는 물론 신앙적 행위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신앙인 것이다. 행위주의의 철저한 부정이다. 우치무라의 재림신앙은 행위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한 인간관 위에서 가장 높고 깊은 곳에 도달했다. 우치무라의 행위주의 부정은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실명(失明)의 노래(On his blindness)」를 떠올리게 한다. 한창나이에 시력을 잃고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쓸 수 없음을 한탄했던 밀턴은 행위주의의 부질없음을 깨우친다. 그리고 절대자 앞에 묵묵히 견디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밀턴 역시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대망한 청교도였다. (게다가 밀턴은 우치무라가 존경했던 올리버 크롬웰의 혁명정부에서 10년간 외교부 장관을 맡으면서 전 유럽을 상대로 잉글랜드 공화국의 대의를 옹호하고 천명한 종교개혁가이기도 했다.) 내가 이제는 앞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니 이 어둡고 넓은 세상에서 내가 살날의 반도 아직 지나지 않았구나. 그리고 숨겨두면 죽고 마는 한 재능이 나와 함께 쓸모없이 머물고 있다. 나의 영혼은 그 재능으로써 창조주를 섬기기를 열망한다. 그분이 돌아와 나의 삶을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은 내가 앞을 못 보게 하시고는 낮의 노동을 강요하시는가?” 나는 어리석게 묻는다. 그러나 인내는 나의 불평을 막으며 이내 대답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나 재능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의 순한 멍에를 가장 잘 견디는 자가 그분을 가장 잘 섬기는 것. 그분의 나라는 장엄하도다. 천 천의 천사들이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육지와 대양으로 쉼 없이 내달리고 명령을 전하거니와,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다.” 밀턴은 인생의 한창때인 44살 나이에 앞을 못 보게 된 것을 생각하며 불평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 이상 영적인 죽음까지 의미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을 인용해, 달란트 곧 그의 문학적 재능이 시력 상실과 더불어 땅에 묻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에 괴롭고 슬프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나를 앞 못 보게 하시고는 낮의 노동을 강요하시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 ‘낮의 노동’이란 밀턴이 가진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하나님 앞에 항의한다. 이때의 밀턴은 구약성서의 욥과도 같다. 그러나 이때 그의 내면에서 음성이 들린다.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요, 암흑의 심연에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재능이나 업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로 행위나 업적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보증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자 앞에서 피조물이 이뤄야 얼마나 이루겠는가.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나 업적 아닌 믿음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각자에게 주어진 순한 멍에를 잘 견디면 된다는 것이다. |
로마서 강연
재림운동 후에 우치무라가 성서연구회에서 다룬 주제는 모세의 십계, 다니엘서, 욥기 등이었다. 모두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인간만의 자족적인 문명으로 치닫는 ‘근대인’을 다루면서,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는 문명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될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강의했다.
이어서 시작한 것이 로마서 강연이었다. 로마서의 중심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1장 17절)이라고 했듯이, 사람의 구원은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앙 만에 의한다는 신앙 의인(義認)의 사상이었다. 로마서 첫 강의에서 우치무라는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의롭게 여김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깨끗함을 받고, 재림하실 그분을 우러러봄으로써 영화롭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자기의 공로, 행위, 선행, 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그가 이루신 공로로 말미암는다. 오직 그를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고 그를 우러러봄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여김을 받고, 깨끗함을 받고 또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처음 출석한 것은 1921년 1월 16일이었는데, 공교롭게 이날부터 로마서 강의가 시작되었다. 로마서 강의는 1922년 10월 22일까지 모두 60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로마서 첫 강의에서 우치무라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의롭게 여김을 받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러러봄으로써 깨끗함을 받고, 재림하실 그분을 우러러봄으로써 영화롭게 된다. 어느 것 하나 자기의 공로, 행위, 선행, 노력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로마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본대로 우치무라의 재림신앙 제창은 인간의 행위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었다. 자기의 공로나 행위나 선행이나 노력으로 의인이란 인정을 받는 게 아니고, 신앙에 의해 그것을 인정받는다는 사상이 전제된다.
믿음에 의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는 사상이 세계사에 가져다준 큰 복음의 하나는 ‘차별의 타파’였다. 우치무라는 로마서 3장 22절을 강의하면서 율법주의, 행위주의와 대비되는 복음주의, 신앙주의를 천명했다.
전에는 유대 사람만이 택함을 입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것을 확신한 바리새 사람 사울도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후로는 국적의 차별은 헛된 것이기에 버렸다. 그러므로 국적의 차별 없이 사람은 신앙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국적의 차별만이 아니다.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고, 학자·무학자의 차별도 없고, 부자·가난한 자의 차별도 없다. 또한 의인과 죄인의 차별도 없고, 선인과 악인의 차별도 없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연속강연이 정점에 달한 건 8장 22절에 나오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고 함께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안다”는 대목에서였다. 젊은 날의 우치무라는 『전도의 정신』(1894)에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서와 역사와 자연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자연은 홋카이도의 대자연처럼 타락한 인간세계와는 대조적으로 아름답고 찬양받을만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로마서 강연 무렵에는 자연도 인간과 같은 타락한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자연을 썩어짐의 종으로 보는 바울의 자연관은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보통 사람은 자연을 아름다움이 가득 찬 것으로 보고 그에 비해 사람의 더러움을 탄식하며, 자연에서 영구불변을 보고 인간 세상의 덧없음을 슬퍼한다. 그러나 이것은 천박한 자연관이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겉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한 단계 더 깊이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추악함, 혼란, 잔인, 투쟁으로 가득하다.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숲속에서는 무서운 생존경쟁, 살벌한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저보다 약한 것을 학대하고 저보다 강한 것에는 학대받는 비참한 상태다. … 참으로 자연계에서는 밤낮으로 괴로움의 부르짖음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해방과 자유를 원하고 있다.
자연은 허무한 데 매여있다. 자연계에 이런 불운이 임한 건 인류의 타락 때문이었다. 인간의 호전성, 이기적 욕심, 기업가의 탐욕이 석탄이나 석유 같은 지하자원을 남용하여 땅의 타락을 초래했다. 타락한 인류가 자연을 정복한다고 하면서 자연을 타락시켰다. 그러므로 자연계는 하나님 아들들의 영화와 함께 자신도 부활,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구원을 갈구하는 건 인류뿐만이 아니라 자연도 마찬가지다. 우주에 있는 만물이 모두 고통의 신음을 내고 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그것이 산고(産苦)의 신음이고 새로운 우주의 완성을 맞으려는 희망의 고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우치무라와 김교신
식민지 청년 김교신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철심(鐵心)을 가지고 동해를 건넌 자”라고 일본행 당시의 심경을 술회한 바 있다. 조선을 짓밟은 일본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마디로 말하면 ‘적개심’이었다. 학문을 쌓아 입신하여 언젠가는 적국을 쓰러트리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가 청년 김교신의 마음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끓어올랐던 청년 김교신의 눈에 우치무라의 모습은 어떻게 비쳤을까?
“국적(國賊)으로 전 국민의 비방 중에 매장된 지 반생여일(半生餘日)에 오히려 그 일본을 저버리지 못하는 애국자의 열혈(熱血), 이것이 무엇보다도 힘 있게 나를 끌었었다. 조선에 만일 그와 같은 애국자가 출현했다면 쏟아 바쳤을 경모(敬慕)의 염(念)을 전혀 저에게 봉정(奉呈)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를 가리켜 ‘모발부터 발톱까지가 전부 참 애국자의 화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1921년 1월부터 7년 동안 우치무라 문하에서 신앙을 배웠다. 그는 우치무라를 기독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 이해하면서, ‘진정한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식민지 청년으로서 침략국 일본의 애국자를 스승으로 삼는 데 대한 거부감 같은 건 김교신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김교신은 오히려 이를 송구스럽게 여겼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연은 강당의 600여 좌석도 번번이 부족하여 늦게 가면 좌석도 없고 목소리를 듣기도 쉽지 않았다. 김교신은 대개 반 시간 전부터 가서 앞줄 중앙에 자리를 잡고 강의 시작을 기다려 한마디도 허투루 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김교신은 강의 들을 욕심에 앞줄에 자리 잡고 듣고 있으면서도 예수의 말씀이 생각났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명하여 가라사대 외방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태 10:5-6)고 말했다. 또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를 다른 데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심이라.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마태 15:24 이하)라고 했다.
일본의 애국자가 일본의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온 힘과 정성을 기울이는 자리에 조선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김교신은 너무나 황송했다. 애국자에 대한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앉고 있던 의자를 일본 청년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의자 다리 밑으로 들어가거나 천장에 구멍을 뚫고서라도 들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일본에는 우치무라 같은 진리에 입각한 애국자가 있는데, 조선에는 그런 애국자가 없다는 것도 아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교신이 검열 등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성서조선』을 15년 동안 158호까지 발간한 배경에는, 우치무라가 일본에 바친 애국을 자기 조국인 조선에 대해 바치겠다는 결의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우치무라가 자기 조국에 진리를 설파한 것처럼, 김교신 또한 조선에 진리를 전하고 싶었으리라. 조선인의 힘으로 조선인에게 진리를 전하겠다는 김교신 방식의 애국심이 이때부터 싹텄을 것이다.
우치무라의 1922년 10월 24일 일기에는, 그가 1921-22년 로마서 강연을 마친 뒤 강연을 들은 한 조선인 청년이 보내온 감상문 이야기가 나온다.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연을 들은 수강생은 7백 명이었는데, 강연을 끝내고 그에게 감사를 보내온 사람이 그중 네 명이었다고 했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이 조선인 김교신이었고, 그 한 명의 감상문이 우치무라의 마음을 제일 강하게 끌었다.
“우치무라 선생님, 60여 회에 달한 로마서 강의를 아무런 권태 없이 기쁨에서 기쁨 중에 배울 수 있었음을 기뻐합니다. 소생은 작년 1월을 시작으로 그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참석을 허락받았습니다만, 이제 오늘 ‘대관(大觀)’으로 천하의 대서(大書)에 대한 강의를 완료하셨습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행운의 기쁨에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느껴 흘리는 눈물이 흘러내림을 깨닫고 부끄러웠습니다. 자녀들이라면 혹은 그 양친으로부터 넘치게 받은 노고에 대해 감사의 마음이 안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상 밑에서 자녀가 떨어뜨리는 찌꺼기를 바랐는데, 자녀들과 같은 빵을 받았을 때의 개로서야 어떻게 그것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마태 15.26 이하). 선생님, 전 국민의 박해와 참기 어려운 국적(國賊)이라는 비방 가운데서도 극동의 일각에 굳게 서서 십자가의 거룩한 깃발을 하늘 높이 지켜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감상문을 읽은 우치무라는 깊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신앙의 일에서 전체적으로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위에 있다. 아마 나의 신앙이 조선인 중에 뿌리를 내려 세월이 지난 후 일본에 전해질 것이다. 소수의 조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도 성서연구회를 하는 보람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장차 나의 기독교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조선인 가운데 나오지 않을까”라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1923년 봄 도쿄에 가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1924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새로 입학한 기쁨에 교회를 찾아가려 나섰던 어느 일요일, 한 해 전에 입학한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경연구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김교신의 소개로 성경연구회에 나가게 되었다. 함석헌이 처음 가던 날 우치무라는 예레미야를 강의하고 있었다. 애국심이 강한 우치무라는 “이것이 참말 애국이다” 하면서 신앙을 강조했다. 함석헌은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확신이 생겼다. 참 믿음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오랜 번민이 해소되면서 크리스천으로 서서 나갈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훗날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1970)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함석헌의 우치무라에 대한 평가는 놀라울 정도다. 한민족이 36년간 일본제국으로 인해 봤던 피해를 우치무라 한 사람으로 충분히 갚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함석헌 개인의 주관적 판단이자 평가다.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이란 전제를 붙였다. 그 정도로 함석헌의 젊은 영혼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꿈에 본 스승
김교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은 확고했다. 그에게 우치무라 간조는 둘도 없는(無二의) 스승이었다. ‘유일(唯一)의 선생’이었다. 김교신은 단언한다. “나는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선생’이 없는 사람도 있다. 공자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앎)의 인물이다. 사도 바울은 선생을 모시지 않았음을 자랑했다. 공자는 성인이라 일컫고, 바울은 비길 데 없는 대사도(大使徒)였다.
김교신은 비범했던 공자, 바울과 달리 자신은 평범한 길을 걸었다고 말한다. 이점에서는 우치무라 역시 평범한 길을 걸었다. 김교신에게 선생이 있듯이 우치무라에게도 선생이 있었다. 미국에서 신앙을 지도받은 실리(Seelye) 선생이다. 우치무라와 김교신 둘 다 선생을 가진 사람이다.
김교신이 평생 우치무라를 얼마나 극진히 존경했는가 하는 것은, 〈일기〉에서 여러 차례 꿈에서 스승을 만났다고 기록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기〉 1933년 11월 18일. 간밤에 꿈에 우치무라 선생을 보다.
〈일기〉 1937년 10월 8일. 근래에 은사를 꿈에 보기 여러 차례. 곤란한 일을 당하거나, 영성이 다소 각성한 때에 종종 있는 현상.
〈일기〉 1937년 10월 13일. 어젯밤 꿈에 또 스승을 만나다. 환난이 새로 임하려 함인가 곤란이 해결되려 함인가. 어쨌든 단순한 믿음에 돌아서서 겨뤄야만 할 것은 명약관화.
〈일기〉 1939년 6월 4일. 간밤 꿈에 은사를 만나 뵙고 생전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였다.
‘성서조선사건’으로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 다음 날(1943년 3월 30일) 신앙 동지 가타야마 테츠((片山徹))에게 보낸 편지에도 스승 우치무라를 꿈에 만나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생 어제 29일 밤중에 주 예수 안에서 무사히 출감을 허락받았습니다. 함석헌, 송두용 두 분과 함께 일동 13인 영육 함께 버틸 수 있어 감사와 찬미 가운데 귀가했습니다. …
조선에 와 있는 우치무라 선생의 문하로 자칭하는 사람 가운데는 우치무라 선생의 가르침은 본토에서는 좋으나 조선에서는 부적합하다고 함부로 말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듣습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저는 지난 만 1년간의 옥중생활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꿈에 우치무라 선생이 나타나 혹은 격려하고 깨우쳐주시고 혹은 위로로써 나를 지도해주셨습니다. 과연 지난 1년간은 우치무라 선생과 기거를 함께한 365일간이었습니다. 본토인을 살리는 진리가 조선에서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저는 아직 발견할 수 없습니다.
『논어』 「술이(述而)」편에 보면, 공자는 만년에 “심하도다, 나의 노쇠함이여! 내가 다시 주공(周公)을 꿈속에서 뵙지 못한지도 오래되었도다(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탄식한다. 주공은 공자보다 600년 전 사람이다. 주(周)나라의 이상 정치를 실현한 인물로 공자가 가장 존경하여 사숙(私淑)한 성인 중 하나다. 그 공자가 늙어서는 꿈에도 주공을 뵙지 못한다고 탄식했다는 것이다. 공자가 주공을 사모하던 모습에서 김교신의 스승에 대한 존경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19세기 영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리는 예언적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이 「시대의 징표」에서 한 다음의 말은, 진실한 두 인격이 만나는 아름다운 장면을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다.
기독교는 인간 영혼의 신비로운 심연 속에서 발흥했으며, 그것의 확산은 어디까지나 말씀의 전파에 의해, 그리고 자연스럽고 소박한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기독교는 마치 ‘신성한 불꽃’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마침내 모든 사람이 그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되었다.
진실한 인격이 그리스도를 만나 그 영혼이 ‘신성한 불꽃’에 의해 정화되고 빛을 받게 된다. 그에게 흘러 들어간 신성한 불꽃은 다시 이웃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어 둘 사이에는 존경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가 성립한다. 우치무라와 김교신의 관계가 이런 것이었다. 국경과 민족을 초월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두 인격의 만남이었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영웅과 추종자의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례를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라고 언급했지만, 무교회 그룹에서의 선생과 제자 관계도 그에 버금가는 관계로 볼 수 있다. 농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질적으로 같다.
무교회 기독교의 사제 관계는 일반 제도권 교육과 차이가 있다. 학교 간판을 보고 입학해 이미 구성된 교사진 중에서 담임 배정 등을 통해 ‘우연히’ 교사와 학생 관계가 정해지는 제도권 교육과 달리, 무교회에서의 사제 관계는 제도권 바깥에서 선생의 신앙과 인품과 언행을 제자가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선생에게 다가감으로써 인격적 교감을 나누게 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도 이런 식이었다. 김교신과 우치무라의 관계도 그랬다. 둘 사이에 맺어진 사제 관계는 평생을 지속한다. 아니,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한 관계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