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正史)
위서(魏書)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유표전(劉表傳)
유표는 자가 경승(景升)이고 산음군 고평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유명하여 ‘팔준(八俊)’이라고 불렸다. 그는 키가 8척이 넘었고, 자태와 용모에 위엄이 있었다. 대장군(하진) 속관에 있다가 북군중후(北軍中侯)로 임명되었다. 영제가 붕어한 후, 그는 왕예(王叡)를 대신하여 형주자사가 되었다. 이때 효산 동쪽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나, 유표도 군사를 모아 양양(襄陽)에 주둔시켰다. 원술이 남양(南陽)에 주둔하고 있을 때 손견과 연합하여 유표의 형주를 습격하여 탈취하려고 생각하고 손견을 보내 공격했다. 손견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고, 그의 군대는 패배하여 원술은 끝까지 유표를 이길 수 없었다.25) 이각과 곽사는 장안으로 들어온 후 유표와 연합해 원군으로 삼으려고 생각하고, 유표를 진남장군․형주목으로 임명하고, 성무후(成武侯)로 봉했으며 절을 주었다. 천자가 허창에 수도를 세우자, 유표는 사자를 보내어 공물을 바쳤지만, 북쪽으로는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치중(治中;州의 자사, 지방장관의 부관) 등희(鄧羲)가 유표에게 간했지만, 유표는 듣지 않았다. 등희는 병을 구실로 하여 사직하고 유표의 시대에는 벼슬하지 않았다. 장제는 군사를 인솔하여 형주의 국경지대로 침입하여 양성(穰城)을 공격했지만,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형주 관원들이 모두 축하하자, 유표가 말했다.
“장제는 빈궁하여 왔고, 주인(자신)이 빈객을 맞아 예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형주목인 나의 본뜻이 아니오. 나는 단지 조의만을 받아들일 뿐, 축하의 말을 받지 않겠소.”
유표는 사람을 보내어 그의 군사들을 거두어들였다. 그의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유표에게 복종했다. 장사태수 장흠(張 )이 유표를 배반하자, 유표가 포위하여 공격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흠은 병으로 죽고, 그의 아들 장역(張懌)을 장사태수로 옹립하였다. 유표는 계속하여 장역을 공격하고, 남쪽으로 가서 영릉(零陵)․계양(桂陽)을 수복하고, 북쪽으로 가서 한천(漢川)을 점령하니,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수천 리이고 군사는 수십만 명이나 되었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대치하던 중에 원소는 사람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는데, 유표는 그것을 허락했지만 가지는 않았고, 또 조조를 돕지도 않고 장강과 한수 일대 지역을 지키며 천하의 형세가 변화하는 것을 관망했다. 종사중랑 한숭(韓嵩)과 별가 유선(劉先)이 유표에게 진언했다.
“호걸들이 서로 다투고 두 영웅이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의 중대한 임무는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장군이 큰 일을 하려고 한다면, 군대를 일으켜 그들의 쇠약함을 이용하시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장군께서 다른 사람을 선택해야 합니다. 장군은 십만대군을 갖고 있으면서 편안히 앉아 그것을 관망하며, 현명한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고, 사람들이 조절하여 화해시키기를 요청해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양쪽의 원망은 반드시 장군에게로 집중될 것이며, 장군은 중립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명찰함에 의지하므로 천하의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그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 추세를 보니, 반드시 원소를 공격한 이후에 병사를 일으켜 장강․한강 일대를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마 장군은 대항하여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주를 인솔하여 조조에게로 귀순하는 것만 못합니다. 조조는 반드시 장군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장군은 영원히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후대에까지 전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전한 책략입니다.”
유표의 대장군 괴월(蒯越)도 권하였지만, 유표는 의심하고 결정하지 못하고, 한숭을 조조가 있는 곳으로 보내어 허실(虛實)을 살펴보도록 했다. 한숭이 돌아와서, 조조의 위엄과 은혜와 덕망에 관해 온 힘을 다해 서술하면서 유표에게 그 아들을 인질로 하여 보내도록 권하였다. 유표는 한숭이 조조의 입장에서 진언하는 것은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매우 노하여 한숭을 죽이고 한숭을 수행했던 사람들도 조사하여 죽이려 했지만, 한숭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음을 알고서야 그만두었다. 유표의 외모는 유약했지만, 내심 시기와 의심이 많았으므로 모든 일이 이와 같았다.
유비는 유표에게로 도망쳐 왔으며, 유표는 그를 후하게 대접했으나 중용할 수는 없었다.
건안 13년에 조조는 유표를 토벌하였지만, 형주로 돌아오기도 전에 유표는 병으로 죽었다.
처음, 유표와 그의 처는 모두 어린 아들 유종(劉琮)을 좋아하여 그에게 자리를 잇게 하려고 채모(蔡瑁)․장윤(張允)으로 유종을 지지하는 도당을 만들게 하고, 맏아들 유기(劉琦)를 강하태수로 임명하여 내보내니 모두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게 되었으며, 유기와 유종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붕월․한숭 및 동조연(東曹椽) 부손(溥巽) 등은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유종에게 진언했지만, 유종은 말했다.
“지금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초(楚)나라를 전부 점유하고 선친의 사업을 지키며 천하의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겠소?”
부손이 대답하여 말했다.
“순리를 거역하는 것은 기본적인 이치가 있고, 강하고 약한 것은 고정된 추세가 있습니다. 신하의 지위에 의지하여 군주에게 항거하는 것은 배반하는 것입니다. 방금 일어난 초나라에 의지하여 국가(천자)의 힘에 항거하는 것은 그 상황이 부당한 것입니다. 유비에 의지하여 조조에게 저항하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습니다. 세 가지가 모두 부족한데, 천자의 군대에 저항하려 한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자신과 유비를 비교할 때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유종은 말했다.
“나는 그만 못하오.”
부손이 말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유비가 조공에게 대항한다면 초나라를 보존할 수는 있을지라도 장군의 자력으로 보존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비가 조공에게 대항할 수 있다면, 유비는 장군보다 낮은 지위에 위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조조 군대가 양양으로 오자, 유종은 모든 주를 인솔하여 투항했으며, 유비는 하구로 도망갔다. 조조는 조정의 명에 따라 유종을 청주자사로 명하고 열후에 봉했으며, 괴월 15명을 제후로 봉했다. 또 괴월을 광록훈(光祿勳)으로 삼았으며, 한숭을 대홍려(大鴻臚)로, 등희를 시중으로, 유선을 상서령으로 삼고, 그 나머지 많은 사람들도 높은 관직에 임명했다.
*평하여 말한다. ----- 동탁은 사람이 비뚤어져 계통이 없고 잔인하고 포악하며 비정했으니,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이래로 이와 같은 자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26) 원술은 사치스럽고 방자하고 음탕하였으므로, 자신의 일생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지킬 수 없었던 것은 자업자득이다. 원소와 유표는 모두 위엄과 무용이 있었고, 넓은 도량과 식견이 있었기에 그 당시 이름을 떨쳤다. 유표는 한강 남쪽을 지배하고, 원소는 황하 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략을 좋아하였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을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므로,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없어졌어도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항우는 범증(范增)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항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