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지
김인현 교수(고려대 법대)
60년을 살았으니 다양한 형태의 편지를 받고 또 보냈을 것이다. 편지란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서 보내는 것을 말한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이 드물다보니 다소 삭막한 기분이 된다. 우편물은 있어도 편지는 없는 것이 오늘날 일상이다.
그리움에 안부를 전할 목적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편지를 주고받는 과정을 통하여 크게 성장하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시골에서 다닌 나는 작은 어머니와의 편지를 통하여 자극을 받고 장래를 준비했다.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에 시집을 오신 작은 어머니는 이 집안을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셨다고 한다. 조카가 5명이 있었지만, 둘째인 나를 좋아하셨다. 중학교 3학년 경부터 나는 작은 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집안 소식과 학업계획을 말씀드리면 작은 어머니는 내게 시골에 있어도 기죽지 말 것과 대학진학을 위한 준비 등 진학상담을 해주셨다. 고등학교를 대구로 나가지 못하였고 고1때 성적이 떨어지자, 작은 어머님이 겨울 방학때 서울로 올라오라는 편지를 보내셨고, 나는 심기일전하여 서울에서 학원에 다니면서 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해양대학에 진학해서 기숙사생활을 하면서도 편지를 계속 주고 받았다. 10년간의 선원 생활을 하면서도 작은 어머니와의 편지는 계속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으로 뵈었는데, 선뜻 붉은 색의 모나미 만년필을 나한테 주셨다. 장차의 편지교환을 염두에 두신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조부님의 용돈 문제이다. 어려운 조부님에게 한달에 5만원을 용채로 드리라고 하여 그렇게 처리한 기억이 난다(용돈의 높임말이 용채라는 것도 편지글을 통해서 알았다). 이렇듯 집안의 대소사도 작은 어머님과의 편지로 해결되곤 했다. 작은 어머님은 대구출신으로 풍족한 집안에서 자라셨다. Y세대 가정학과를 졸업하여 K대 법대를 졸업한 작은 아버지와 만나셨다. 작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작은 아버지의 편지까지 두통이 동봉되어 와서 읽을 거리가 많았다. 나는 한통을 보내는데 돌아오는 것은 두통의 편지이니 나로서는 황송한 편지 주고받기였다. 세상을 앞서가신 넓은 안목을 가지셨던 두분은 축산항과 영해라는 좁은 테두리에 갇혀 있던 조카를 서울으로 인도해주셨다. 작은 어머니의 필체는 둥글고 동글동글하다. 작은 아버지는 명필이다. 아직 글씨체가 잡히지 않았던 나는 두분의 글씨를 흉내내어 따라 적기도 해보았다. 아마도 서로 주고받은 편지는 100통을 넘을 것이다. 작은 어머니는 편지를 모아두셨다가 내가 결혼 할 때 편지를 모두 집사람에게 건네주셨다. 나의 성장이 모두 이 편지글에 담겨있을 것이다.
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께 보낼 편지를 대신 쓴 것도 잊지 못할 어릴적 추억이다. 조부님이 대구로 일을 보러 가셔서 1개월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몰랐다. 할머니는 글을 쓰시는 것이 서투셨다. 그래서 나한테 말씀하시는 것을 적으라고 하셨다. 어찌나 길게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담배를 한모금 피우시고 한마디하시고, 또 멈추었다가 또 한 말씀을 하셨다. 왜 이렇게 말씀하시기가 어려우셨을까? 할아버지가 대구에서 다른 살림을 차리셨을까 걱정하신 탓에 할머니는 조심스레 한글자 한글자 말씀하신 것이다. 할머니 편지가 효혐이 있었던지 할아버지는 곧 귀가하셨다.
조부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희한한 편지를 보았다. 달산에 계시는 나의 외조부님이 사돈이 되시는 조부님에게 보내는 인사편지였다. 모두 한문으로 되어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길이 50센티미터 폭 10센티미터 되는 문종이로 만든 한지로 된 봉투에 역시 한지로 된 편지글이 들어 있었다. 1955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을 하셨는데, 1950년대의 사돈간에 주고받은 편지이다. 우표가 붙어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딸을 잘 부탁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음식과 함께 명절에 인편으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 유품중에 또 다른 편지가 한통 있었다. 보내지 못한 편지인지 아니면 복사본인지 모르겠는데 일본의 지인에게 보내시는 편지글이었다. 나에게 과년한 딸아이가 있는데 시집을 보내야겠으니 신랑감을 소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1950년대에 적으신 편지이다. 나의 고모님은 그렇게 미인일 수가 없다. 흰 피부와 큰 눈에 키도 크시고...영덕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모님은 대구에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싶었지만, 조부님은 딸은 외지로 보내지 않으셨다. 집에서 계셨는데... 20세가 넘어서니 조부님이 조바심이 나셔서 이런 편지글을 지인에게 보내셨나 보다. 고모님은 어떻게 되셨냐고요? 배필은 따로 있는 법! 나의 고모님은 남정 쟁바우의 K 고모부님께 시집을 가서 아들하나에 딸 셋을 낳으셨다. 고모부는 성균관대학을 졸업하셨고, 감사원에 고급공무원으로 오래 근무하셨다.
편지는 기다리는 마음, 그리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우체국에 가서 우체통에 편지를 보내면 답장이 오기를 하루 하루 기다리게 된다. 그러면서 그 당사자가 무엇을 하는지, 왜 답이 오지 않는지 무엇을 하는지, 편지의 내용은 무얼까 궁금해 했다. 그렇게 하면서 서로간의 정이 두터워지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편지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 적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필체를 가지는 것도 중요했다. 나도 좋은 필체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 당시 우리들은 대게는 윗사람들의 편지에서 글씨체를 흉내 내면서 자신의 필체를 만들어나갔다. 나도 작은 아버지의 필체를 닮으려고 노력했다. 30대 초반에 힘차고 균형잡힌 글씨체, 특히 한자를 익히게 되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 좋은 필체를 가지면 인기가 많았다. 한 계단 높게 평가되었다. 친구들을 위해 연애편지 대필을 해주기도 했다. 필체가 좋은 사람은 이러저리 많이 불려다녔다. 필경사라는 직업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지금은 어떨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카톡이나 이메일로 즉각 즉각 보낸다. 너무나 가볍다. 편지글을 적을 때에는 가필을 했다가 정서를 하는 과정을 거친다. 생각을 깊이하고 수정할 기회가 있다. 지금은 여러 사람과 소통을 해야하니, 막 글을 적어도 보내버린다. 짧게 적다보니, 상대방에게 질문을 하는 것인지 나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지 오해도 많이 생긴다. 상대방에게 하는 질문이면서도 의문부호가 하나없는 경우가 많다. 자동 저장기능이 있으니 복사본을 남겨두지도 않는다. 글로서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이모티콘으로 마음을 전한다. ^^라는 표시가 없으면 상대방이 100% 긍정의 의미가 아니라고 또 생각되어진다. 글씨로 적힌 내용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소통의 방법이 이제 크게 달라지면서 편지 시절이 다시 그리워진다.
문명의 이기의 발달에 따라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만든 멋진 필체를 선보일 기회가 없어진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안타깝다. 대게 미인이나 미남은 필체가 좋지 않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필체로서 그를 만회하는 것이 그 시절 인생전략이었다. 그래서 좋은 필체를 가지려고 무지 노력했다. 그런데, 이런 필체는 워드 자판으로 모두 동일시되어 처리되니,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경쟁할 수 있는가?
정을 듬뿍담은 편지글이 너무나 그리운 요즈음이다. 우편물로 무엇이 왔다면 모두 행사안내이다. 친구나 지인들이 정성을 담아 보내는 편지는 받은 지 이미 10년은 넘은 것 같다. 내년에는 내가 멋진 필채로 지인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보고자 한다. (2019.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