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감악산에 얽힌 사연들
김 윤 욱(경남 거창 출생)
감악산은 경기도 파주와 강원도 원주에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감악산은 경남 거창에 있는 감악산을 말한다. 이 산은 일명 대덕산이라고도 일컬으며 해발 952𝐦의 아름다운 산이다. 내 고향인 신원쪽은 경사 40도에 가까운 악산이지만 남상쪽은 10도 정도의 완만한 경사지로 고냉지 채소재배와 골프장 부지로 개발하다가 경기 불황으로 일시 중단된 상태다.
감악산이 일찍부터 알려진 것은 천년 고찰 연수사와 수령 600년이된 은행나무의 유명세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한국방송공사와 문화방송의 송신소가 설치되었고 대구 진주 김천등지로 부터 등산객이 이 산을 많이 찾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최근 감악산 정상에 풍력발전단지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대형 풍차 12기가 설치되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정상 능선에까지 개설됨으로서 명승지가 되었다.
이런 감악산은 우리 가문과 100여년전부터 깊은 인연을 가진 산이다.
할아버지께서 독립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시다가 쫓기는 몸이 되자 심산 유곡인 감악산으로 숨어들어 움막을 짓고 사시기 시작한 때가 100여년 전이며 그후 할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제의 침략전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떠나라고 엄명을 하셨다. 따라서 큰아버지는 할아버지 말씀에 따라 만주 길림성으로 떠나셔서 그곳에서 평생 고국을 그리며 사시다 돌아가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부모님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끝내 남으셔서 농사를 지어 양식등 생필품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으로 10여리 산길을 걸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공급해 드리셨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등 맹수들이 많았으나 밤길에도 화를 당하지 않았으니 이는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너무도 지극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뿐만 아니라 10대 후반이었던 삼촌도 학비와 만주 길림성 왕복 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약초를 캐러 깊은 산속을 다녔으나 역시 아무런 화를 입지 않으셨으니 이 모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삼촌은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문교부에서 일하시다가 병환으로 산청군 금서면 외과댁에서 휴양을 하고 계시던중 금서중학교를 설립하셨으며 역시 산청 생초에도 중학교를 설립해서 6.25후 공비들의 출몰로 학업을 중단했던 거창 함양 산청등 오지의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훗날 이들 학교출신들중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 되었으니 보람되고 자랑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할아버지는 내가 5살 때 돌아가셨고 감악산의 식기봉에 산소를 쓰셨다. 당시 감악산은 재를 넘나드는 외길밖에 없었으며 산소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할아버지께서 손수 자리를 잡으셨으니 별수없이 그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후 현재까지 차량으로는 연수사로 들어가는 산 중턱 지점까지 밖에 못가고 나머지 길은 풀숲을 헤치며 일년에 두 세차례 성묘와 벌초를 하기 위해 다녀 오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는데 이제 산소 바로 옆으로 아스팔트 길이 조성되었으니 감히 상상도 못하던 행운을 얻은 셈이다. 덩달아 개발 지역으로 수용된 선산 15,000여평에 대한 거액의 보상금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중의 행운을 얻은 셈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증조모 산소도 감악산 등잔설이라는 곳에 봉안하시고 일제의 압제를 피해 멀리 떠나 보내는 자손들의 앞길에 밝은 빛이 비쳐지기를 소망하셨다고 한다. 대개 산소는 부부를 한곳에 쓰셨는데 할아버지가 밖으로 활동할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증조부와 증조모의 산소를 한곳에 쓰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일제의 감시망을 어느정도 벗어난 할아버지의 말년에는 감악산에 집도 번듯하게 짓고 거창 함양 합천등지의 유림 거사들을 초청해서 시국에 대한 담론과 학문을 논하시는 한편 음주 가무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식객을 모시는 일이 계속됨으로써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그 뒷바라지에 참으로 많이 힘드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후 이 자리에 함께하셨던 분들이 뜻을 모아 영남 유림단체에 건의하여 아버지께 농은(農隱)이란 호와 함께 효자 효부상을 주셨으니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감악산과의 인연에 이어 나 또한 중학생 시절 정신력과 체력단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고마운 산이다. 지금 다시 그시절로 돌아가 단련(?)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된다면 죽어도 못하겠지만 지난 일이라 고마운 추억거리가 되는것 같다. 중학교 재학시절 내고향은 거창과 합천을 잇는 좁고 울퉁불퉁한 도로가 있긴 했으나 이 길도 하루에 한 두차례 목재를 실어나르는 트럭만 운행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차를 이용하려면 아버지께서 지서주임의 힘을 빌려야 했고 그부탁도 한 두번이지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토요일 오후 귀가때와 월요일 새벽 학교 등교를 위해 일주일에 네 번씩 952𝐦의 감악산을 넘어 40리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그 험하고 먼길을 걸어서라도 집에 안가고는 못배기는 그때의 심정을 지금은 이해가 안된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에 학교가 있는 거창으로 가는게 시간적 여유도 있고 편했을 터인데도 하루밤이라도 집에 더 있고 싶어서 월요일 새벽 첫닭이 울면 밥을 먹고 이동네 저동네에서 모여든 다섯명의 또래 학생들이 어두운 길을 헤치며 산을 넘어 다닐때 때로는 늑대나 여우가 앞을 스쳐 가기도 했으나 그럴때면 큰 소리로 함께 노래도 부르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무서운줄 모르고 다녔으니 그때 조금이나마 호연지기(?)를 기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시절 우리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여파로 인근 지역의 친인척집에서 피난생활을 하느라 대부분 1~2년 학업중단의 공백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기에 학업뿐만 아니라 체력면이나 정신면에서도 단연 앞섰다고 생각된다. 고등학교 축구선수들의 절대다수가 감악산을 넘어 다닌 아이들이 찾이 하는 상황이었음은 그 실증이 될 것이다.
감악산은 지금 골프장, 풍력발전소, 대형 저수지와 무공해 고랭지 채소 재배지 조성등 살아 숨쉬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발이 이 천혜의 청정지역을 훼손하고 오염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약력;경남 거창군 신원면 출생(거창 양민 학살지), 수필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함. 한국수필문학가협회 회원, 남강문학회 회원
첫댓글 개발 하면 이미 청정지역이 훼손됨은 필연 이지요
그래도 어쩔수없이 개발하고 발전 시키고 .............
나는
절대 개발을 반대합니다
고스란히 보존됐으면 ................
건강하십시요
안병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