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생 꼬마가 여섯살인가? 무지무지하게 추운 겨울 아버지의 손을 잡고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며 찾아 온 시골 할머니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크고 마을 한 복판에 자리잡은 대가집이었다
고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우물가를 돌아 솟을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기억이다
그때의 기억이 자세히 남아 있지는 않지만 한 토막씩 기억에 남은것들을 적어 본다
아버지께서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출판사 생활을 시작하셨고 그 후 어머니도 아버지를 따라 올라가신 후
우리 오남매는 서로 번갈아 가며 한동안 시골 생활을 하게 되었다
위에 오빠는 어쨌는지 기억에 없고 또 누가 나를 학교에 입학 시켰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초등학교 삼학년 초에 아버지 손에 이끌러 내려온 동생을 교무실에 데려다가 입학시켰고
두 해를 같이 다니다가 오학년이 되던 겨울에 서울로 올라와서 나머지 학업을 마쳤다
미아리 언덕에 위치한 서울 집은 어머니가 다른 학생들 하숙을 치셔서 비좁을 뿐 더러
상급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어릴적에 한동안 시골 생활도 좋을거라는게 아버지의 생각이셨다
어쩌면 도시에 나가 사는게 죄송한 아버지는 할아버지 댁에서 심부름도 할 겸
자신의 분신들을 번갈아 내려 보내셨는지도 모르겠다
시골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시집 와서 곧 바로 혼자가 되신 큰어머니와
상주 일꾼인 삼룡 아재가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이른 아침 대문 열리는 소리와 삼룡 아재가 물을 길어와 부엌 문 앞 물항에 물 붓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었다
아버지는 날 데려다 놓고 다음날 바로 서울로 올라가 버리셨다
난 '서울내기'라는 별명과 함께 동네 아이들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홀로 뒷 뜰에서 딸기도 따 먹고 마당가의 감꽃도 주워 먹으며 그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다녀야 했다
나중에는 친해졌지만 오래도록 따돌림을 당하고 또한 싸움이 나면 자매가 함께 달려 들어 몰매를 맞곤 해서
형제들이 있어도 혼자서 당하는 서러움에 자주 울었던 기억이 있다
대개의 시골 출신 아이들처럼 나 또한 아이들과 어울려 개구리도 구워 먹고 메뚜기도 볶아 먹고
엿장수가 와서 가위소리 요란하게 동네를 돌면 집안을 뒤져 낫,호미도 좋고 멀쩡한 고무신도 찢어서 엿을 바꿔 먹었고
시험 공부 한답시고 저녁 무렵이면 동무들과 모여서 공부는 뒷전에 두고 복숭아 서리하러 몰려가다가
할머니 고무신을 논꼬랑에 빠뜨리는 등 무수한 추억들이 남아 있다
할머니는 고무신이 자주 없어진다고 이리저리 찾으셨지만 그 범인이 나라는걸 아셨을까??
백수를 채우시고 돌아가신 울 할매의 댁호는 녹산댁이었다
아마 친정 동네 이름이 녹산이란 곳이었을까? 나중에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로는 영광 근처라는데
알고보니 지금의 백수 해안길로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한 곳이다
내 기억의 울 할매는 지독한 일벌레여서 자고 깨면 들에 나가 일 하시는 할머니셨다
할아버지는 늘 친구분들과 노시는 게 대부분이었고 할머니는 늘 일하시던 기억만 남아 있다
그 시절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작은댁과 살림을 하시는 할아버지께 한이 맺혀,
차라리 들에 나가 일하시면서 마음에 맺힌 한을 달래셨는지도 모르겠다
자그마한 어른이 억척스레 일하시고 일꾼들을 부리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육십대에 중풍을 맞고 노망까지 나신 할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을 입에 달고 사셨고
내 보기에는 할머니께서 무척이나 할아버지를 미워하신 것 같은데
막상 그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마루 귀퉁이에서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도 부부라는게 그런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다음은 어머니께 들은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군이 뺏어갈까 무서워 날마다 보리밭에 숨겨져 사셨다는 이쁜 쳐녀가
다만 양반이라는 이름과 호탕한 생김새 뿐, 달리 볼 것이 없는 할아버지께 시집 왔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친정댁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부농이라고 하셨다
지지리 가난한 집에 시집 온 할머니는 시집살이 또한 힘들게 하셨다고 한다
하루 종일 길쌈을 하시다가 너무 배가 고파 옆에 사시는 큰 집에 밥 때 쯤에 들여다 보셨다
큰 집 동서가 밥 먹었냐는 인삿말에 그저 먹었다고 대답하시고는 돌아서서 울타리 둘러 논 찔레 순을 꺾어 드시고
물 한 대접 들이키고는 거적문 열고 들어가 날이 저물도록 베를 짜곤 하셨다고 한다
어느날 그동안 짜 둔 베를 들고 영광장에 가셨다
거기서 친정 오라버니를 만나 인사를 하는데 여동생의 행색에서 어려움을 아시고
소 한 마리를 주면 몰고 갈 수 있겠는냐고 물으셨다고 한다
할머니는 농사 지을 암소 한 마리를 받아 몰고 왔는데 그 소가 얼마 후 새끼를 났다
그 후로 계속 새끼를 쳐서 몇 년 후에는 어린 소 꼬뚜레가 애기 머슴 등 짐으로 하나 가득 되도록
억척을 부리셨으며 조금이라도 돈이 모아지면 밭을 사고 논을 사서 살림 늘이는데 열심을 내셨단다
한번은 전쟁후에 빨찌산이 내려와 소를 끌어가는 걸 쫓아 가서 기여이 찾아 오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시골집에 내려 갔을땐 동네에서 둘째라면 서럽다할 만 한 부자 소리를 듣고 있었다
생활이 나아지고 어느정도 살 만 하니 풍류를 좋아하시는 할아버지께서 한동네에 작은집을 들여 거기서 지내셨다
할머니가 고생고생 일하고 가꾼 곡식을 추수할 때면 할아버지께서 논 밭에서 직접 타작하여
작은집으로 홀라당 가져가시곤 하셨다니 더욱 독기를 품고 일에만 파묻혀 사셨을 것이다
백세가 되어 돌아가실 때 까지 몸에 진을 다하셨어도 정신이 멀쩡하셔서 초저녁에 한잠 주무시고 깨서는
누구에게 얼마 주고 못 받았고, 또 어디에 땅이 얼마 있고 하는 등 내내 손가락 산수를 하셨다고 한다
구십이 넘어도 자꾸만 밖에 나가 일하시다 다치시곤 하자 걱정이 되신 아버지께서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께서 서울 살림을 접고 귀향하셨다)
넓은 마당을 텃밭으로 만들어 거기서만 일하시고 밖에 나가시지 못하게 하셨지만
아버지가 안 계실때면 또 나가시고 하시며 돌아가시기까지 일에 대한 욕심은 여전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는 미국 생활을 하고 있어서 찾아 뵐수는 없었지만
요즘에는 볼 수 없는 아주 성대한 장례식을 집에서 오일장으로 치르셨다고 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살림을 일으키고 칠남매를 낳으셨으나 이래저래 다 잃으시고
큰 딸과 막내 아들(울아버지) 두 분만 겨우 생존해 계신다
자그마한 체구에 야무져 보이는 입 모습, 평생을 일 만 하며 지지리도 짠순이셨던 울 할매는
하늘 나라 어디에선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굽어다 보시며
흥청망청 아쉬움을 모르고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보시다 혀를 차고 계실지도 모른다
첫댓글 조근 짠 하지만 우리 할머니 세대의 가부장적 암울하면서도 일구월심 가정을 지키시고 자녀들을 성취시킨 할머니.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하신 희생의 대명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나날 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