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아이가 근초고왕을 보는 사이에 남편과 느지막히 서점에 갔습니다. 신림동 녹두거리에 <그날이 오면>이 생긴 것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흔히들 가방 맡겨놓던 곳. 휴대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시절, 어디로 가니 찾아오라는 쪽지가 수 십 장 붙어있던 그 서점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남편은 <안티조선운동사>와 <검찰공화국, 대한민국>을 사고, 저는 <백석전집>과 이미 몇 년 전에 나와 오래도록 서점 책장을 채운 듯한 리처드 포티의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와 아들 몫으로 만화가 오세영의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을 골라 남편에게 사달라고 밀어 넣습니다. 서점에서 동네 분들을 만나고 학생들과 고시생들을 만나 인사를 주고받다가, 차 한 잔을 나누다가, 빨리 오라는 아이의 문자를 받고서야 일어납니다. 책을 가득 안고 신나서 돌아와 식구들 한 책상에 모여 앉아 책을 봅니다.
남편은 자를 들고 책에 줄을 그으며 읽고, 아이는 회전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오세영을 보고, 저는 백석전집을 군침을 흘리며 빠른 속도로 훑어나갑니다. 백석을 읽으면 배가 부릅니다. 감칠맛 나는 우리말의 향연, 어릴 적 명절 때 잠잤던 할머니댁 초가삼간 흙벽 같은 깊은 곳 향수의 되새김. 아이도 남편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토요일 밤, 잠깐의 행복입니다.
...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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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주노동당 대표 이정희 원문보기 글쓴이: 이정희의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