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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식-이정희의원 팬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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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의원님 글모음 스크랩 토요일밤, 백석전집을 읽다
semper paratus 추천 0 조회 23 11.03.16 21: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토요일 밤, 아이가 근초고왕을 보는 사이에 남편과 느지막히 서점에 갔습니다. 신림동 녹두거리에 <그날이 오면>이 생긴 것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흔히들 가방 맡겨놓던 곳. 휴대폰은 물론 삐삐도 없던 시절, 어디로 가니 찾아오라는 쪽지가 수 십 장 붙어있던 그 서점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남편은 <안티조선운동사>와 <검찰공화국, 대한민국>을 사고, 저는 <백석전집>과 이미 몇 년 전에 나와 오래도록 서점 책장을 채운 듯한 리처드 포티의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와 아들 몫으로 만화가 오세영의 <한국 단편소설과 만남>을 골라 남편에게 사달라고 밀어 넣습니다. 서점에서 동네 분들을 만나고 학생들과 고시생들을 만나 인사를 주고받다가, 차 한 잔을 나누다가, 빨리 오라는 아이의 문자를 받고서야 일어납니다. 책을 가득 안고 신나서 돌아와 식구들 한 책상에 모여 앉아 책을 봅니다.

 

남편은 자를 들고 책에 줄을 그으며 읽고, 아이는 회전의자에 다리를 올리고 오세영을 보고, 저는 백석전집을 군침을 흘리며 빠른 속도로 훑어나갑니다. 백석을 읽으면 배가 부릅니다. 감칠맛 나는 우리말의 향연, 어릴 적 명절 때 잠잤던 할머니댁 초가삼간 흙벽 같은 깊은 곳 향수의 되새김. 아이도 남편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토요일 밤, 잠깐의 행복입니다.

 

... 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난골족(族)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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