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두고 읽는 니체 - 사이토다카시
“누구나 자기 미래의 꿈에 계속 또 다른 꿈을 더해나가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현재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거나 소소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다음에 이어질지 모를 장벽을 걱정하며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춰서는 안 된다”
-니체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현재의 자신을 뛰어넘겠다는 결의로 미래를 향해 계속 뛰어오르려는 사람을 말한다.
니체는 흐지부지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제일 싫어했다. ‘자기 인생에 온 힘을 쏟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말했다.
“자기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깎아내리지 마라. 그런 태도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를 꽁꽁 옭아매게 한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지금까지 살면서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항상 존귀한 인간으로 대하라”
-니체
니체는 1888년에 쓴 저서(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책으로 인류에게 최대의 선물을 했다”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인가? 자신의 책에 대해 이렇게 오만하리만치 자화자찬을 하는 니체의 자신감 있는 태도가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이 말은 결코 근거가 없는, 안일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썼다
“먼저 대담하게 자신을 믿는 것이 좋다. 그대들 자신과 마음을 믿는 것이 좋다. 자신을 믿지 않는 자의 말은 언제나 거짓이 된다”
니체는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세상의 난관을 돌파하는 힘이 나온다고 말했다. 실력도 안 되는데 무턱대고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주라는 말이 아니다. 당당하게 높은 점수를 줄 만큼 자기 자신을 더 채우고, 더 넓히라는 충고다. 그렇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풍요롭게 해줄 대상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가 풍요로운 사람이 되려고 항상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능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이자 풍요로운 인생을 만드는 지름길이다”
프랑스어로 ‘르상티망’이라는 말이 있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상태를 말하는 이 단어는 현대인들의 가슴에 도사라고 있는 ‘막연한 분노’ 또는 ‘질투’를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사랑을 사랑으로 느낄 수 없다. 사랑하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정확히 아는 것부터 시작하라. 자신조차 모르면서 상대를 알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면 자기 자신까지 기쁨이 넘친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양손에, 그리고 가슴에 기쁨이 가득할 것이다”
“작은 일에도 최대한 기뻐하라. 기뻐하면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념을 잊을 수 있고,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나 증오심도 옅어진다. 부끄러워하거나 참지 말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싱글벙글 웃어라”
“나는 그대가 희망과 사랑을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람이기를, 그대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영웅을 절대 버리지 않기를, 그대가 희망하는 삶의 최고봉을 계속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똑바로 응시하기를 바란다”
“살면서 때로는 멀리 보는 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친한 친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생각하면 함께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처럼 어떤 대상과 얼마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누군가를 간절히 원한다. 자기를 상대해줄 친구를 찾고, 막연한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왜 고독할까?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기쁨을 나누는 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고독으로 인한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인가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자신의 다리로 높은 곳을 향해 걸으면 고통이 따르지만, 그것은 마음의 근육을 튼튼하게 만드는 고통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위험한 법이지만, 무슨 일을 막론하고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니체는 살아 있는 이 순간에 잘 웃고, 잘 먹고, 살아 있음을 자축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면서 잘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이라고 말했다.
“뱀이 허물을 벗지 못하면 끝내 죽고 말듯이 인간도 낡은 사고의 허물에 갇히면 성장은 커녕 안으로부터 썩기 시작해서 마침내 죽고 만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사고의 신진대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삶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나 자신에게 던지는 ‘왜?’라는 물음에 분명하게 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 다음은 아주 간단해진다. 어떻게 해야 할지 금세 알 수 있기 때문에 타인을 흉내내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나의 길이 명료하게 보이기에 이제 남은 일은 그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다”
“한 번도 춤추지 않았던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큰 웃음도 불러오지 못하는 진리는 모두 가짜라고 불러도 좋다”
소크라테스조차도 임종을 맞으며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것은 오랫동안 병들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소크라테스도 인생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원기둥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원기둥은 높으면 높을수록 가늘어지고 아름다워지지만, 그 내부는 더욱 굳세어져서 무엇이라도 짊어질 수 있게 된다”
니체는 정신의 발전 단계를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시기로 구분했다. 낙타의 시기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단계이고, 사자의 시기는 그 의무를 부정해도 되는, 그리하여 새로운 창조를 목표로 진정한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사자 역시 긴장된 상황 속에서 공격적으로 살아간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니체는 천진난만하게 놀고 망각하고 창조하는 어린아이의 시기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최상의 시기라고 여긴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확실하게 밟은 뒤에 창조성이 넘치는 정신의 단계를 지향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진한 어린아이의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꿀을 모아버려서 이제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나의 꿀을 전부 가져가라”
지혜의 과잉으로 시달리는 꿀벌의 기분으로 학생들을 대하면 하나의 지식이라도 더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는 교사가 될 것이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니체가 넘쳐흐르는 지식을 대중과 나누기 위해 평생 쓰고 또 쓰는 작업을 쉬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항상 껍질을 벗고 새로워져야 하고 항상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한층 새로운 자기를 만들기 위한 탈바꿈을 평생 동안 멈추지 마라”
“가짜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처세적인 내용들뿐이다. 이러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판단은 손해를 부른다. 인간관계를 이렇게 하고 인맥은 이렇게 넓혀라...이렇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같이 가치를 판단하는 기술적인 방법뿐이다. 그들은 인간과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피를 쏟아서 쓴 것만 사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피를 쏟아서 쓴 것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피’는 정신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정신으로는 부족하다. 땀과 눈물이 합쳐진, 온몸으로 쓴 생명의 산물어이여 한다.
“그대는 새로운 힘인가. 새로운 권리인가. 시초의 운동인가. 자신의 힘으로 도는 바퀴인가. 그대는 별들에도 지배의 힘을 미쳐 그대 주위를 돌게 할 수 있는가”
“천부적인 능력이 없다고 비관하지 마라. 재능이 없다면, 그것을 습득하면 된다”
“그대가 서 있는 곳을 깊이 파고들어라. 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자기에게 딱 맞는 무엇이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에, 가령 아직 가보지 못한 타국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발아래에 그대가 추구하는 것, 그대에게 주어진 많은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