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엿과 주전자
만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소제목들만 봐도 책을 고르는 안목이 생겼다.
장웅진의 책은 제목부터 남다르다. "물엿과 주전자"라는 이름이 주는 특유의 끈적함과 달달함이 함께한다. 읽는 내내 그러 했다. 단편 10편과 중편 1편의 이야기들이 술술 읽힌다. 물엿처럼 혀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이 있다.
우리가 무엇을 상상해도 그는 모든 것들을 넘어선다. 장 선생은 실로 대단한 역사꾼이다.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곳곳에 놓인 고인돌과 불상과 화차와 종교와 아소카 왕과 포르투갈 용병 오귀자(흑인)의 이야기를 실록의 석판에 담아 바다를 그리고 지평선을 넘어 상상의 경계를 허물었다. 파워풀한 역사적 식견을 덧붙이고 이었다. 시대의 격랑을 헤치고 나온 글을 썼다.
어린 시절 고열에 시달리고 목이 부어서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웠을 때 어머니께서 건네주시던 달달한 물엿의 맛을 음미하면서 읽었다. 고뿔은 아픔이지만 물엿은 하나의 특혜였다. 때로는 물엿에 생강, 콩나물이 함께 하기도 했다.
지식에 지식을 더하고 역사에 상상력을 덧입히는 지독하게 끈적이는 이야기이다. 집을 지을 때 못을 쓰지 않고 정교한 이음새로만 연결된 잘 지은 한옥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방대한 역사에 색을 입히고 다시 틈을 맞춰 써 내려간 글이다.
무겁고 진득하고 달달하다. 지나온 시대의 달달한 약으로서의 역할을 해온 푹 곤 물엿의 향이 난다.
장웅진의 글을 떠먹고 혀 위에 올리고 음미해 본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과감하게 상상의 옷을 입혀 치장했다. 이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확증을 주고 때로는 과감한 공범이 되기도 했다. 장웅진 실로 위대한 세공사이다. 왕관 위에 보석을 다는 일을 과감하게 실행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생애를 한 번쯤은 파헤쳐 보고 싶었다. 그의 진성여왕을 향한 사랑의 설정은 왕과 신하의 신분을 벗어버린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사랑의 절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국에서 공부하느라 주변을 돌아 보지 못한 천재의 두뇌에 여왕의 자태는 치유의 에너지였을 것이다. 난 어쩌면 사랑의 포로가 되어 사랑엔 진심인 진골, 성골을 꿈꾼 시대의 이방인이었으리라. 매미들이 밤새도록 구애를 하는 여름밤, 그의 이야기들이 빛나는 불꽃같은 향연의 밤이다.
우리에겐 언제나 역사가 있다. 고정된 틀을 벗어나 언제나 부활할 수 있는 거대한 이야기가 그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습니다. 부족한 머리로 생각하느라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늙은 여대생의 여름방학이 너무 귀해서 알차게 보내려고 오전에 한 권, 오후에 한 권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허리에 무리가 가서 이제서야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