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의 유래
조(趙)의 음운은 찌쏴(直紹)(직소)로 끊어지고 뎐수간(天水角)(천수각)의 발음이니 전욱(?頊)의 셋째 아들 백익(伯益)의 十三代에 이르러 조부(造父)는 주(周)나라 목왕(穆王)을 섬기게 되어 조성(趙城)에 봉(封)하였으므로 인하여 자손(子孫)이 씨(氏)로 하였다. 그 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 齊(제). 楚(초). 魏(위). 韓(한). 趙(조))을 통합하게 되어 자손이 분산되고 경조윤광한(京兆尹廣漢)에 이르러 탁군(?郡)에 세거(世居)하게 되었고 송(宋)나라 희조(僖祖)는 연(燕)나라에서 생장(生長)하였으니 바로 그 후예이다. 出 萬姓通譜(출 만성통보)
송(宋)나라 조성(趙姓)은 그 먼저가 황제(黃帝)로부터 나온 손(孫)으로 고양씨(高陽氏)의 후예이다. 주나라 목왕(穆王)이 조부(造父)를 조성(趙城)에 봉함으로 인하여 씨로 하였고 그후 한(韓)나라 위(魏)나라와 진(晋)나라로 나뉘어져 제후(諸侯)가 되었고 경조윤조광한(京兆尹趙廣漢)에 이르러 탁군(?郡)에 살게 되므로 탁주(?州)사람이 되었다. 그 후 조홍은(趙弘殷)이 후당(後唐).한(漢).주(周)나라 삼조(三朝)를 섬기게 되어 여러번 용첩(龍捷)에 천거 되었고 좌상(左廂)과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이르렀다. 아들 광윤(匡胤)은 후주(後周)를 섬겨 여러번 전공(戰功)을 세워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벼슬에 천거되어 제명(帝命)을 받들어 북쪽의 거란족을 막았고 진교(陳橋)에 이르러 자립(自立)하여 공제(恭帝)의 자리를 이어 받아 제위(帝位)에 나아가 국호(國號)를 대송(大宋)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개봉부(開封府)인 것이다
<出 三才圖會(출 삼재도회)>
한양조씨(漢陽趙氏)
본관 한양은 현재 서울특별시에 해당하는 옛 지명이다. 371년(백제 근초고왕 26) 백제가 먼저 이 지역을 점령하고 한산이라 했다. 392년(고구려 광개토대왕 2)에는 고구려가 점령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한주(漢州)라 개칭하면서 서울 일원을 한양군(漢陽郡)으로 하였다. 1393년(태조 3)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고 이듬해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했다. 이 때 도성을 중심으로 주변 10리에 이르는 5부(東部·西部·南部·北部·中部) 52방(坊)의 행정구역을 확정한다. 1910년 경성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45년에 서울시로 개편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428명이 있다. 문과 91명, 무과 30명, 사마시 284명, 역과 5명, 의과 2명, 음양과 16명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307,746명이다. 서울 79,929명, 부산 8,004명, 대구 7,359명, 인천 20,936명, 광주 11,032명, 대전 9,391명, 울산 3,047명, 경기 78.422명, 강원 12,444명, 충북 14,022명, 충남 18,194명, 전북 10,390명, 전남 14,908명, 경북 11,311명, 경남 3,990명, 제주 4,367명이다. 인천, 경기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다음 충남, 광주, 전남, 충남지역 등에 많다.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하였고,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한양을 본관으로 했다.
고려시대에 시조 조지수의 외아들로 고려 고종 45년(1258) 원(몽고)의 쌍성총관부 초대쌍성총관을 지낸 조휘, 조휘의 아들로 13세의 나이로 제2대 총관이 되고 부원수를 지낸 조양기, 공부상서와 예의판서를 역임하고 삼중대광 용성군에 이른 조돈, 판의덕부사를 지낸 조인벽 등의 인물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 개국공신 한천부원군 양절공 조온과 한평부원군 양경공 조연 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가문의 기틀을 세웠다.
조영무는 이성계를 추대하는데 공이 커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또 태종 이방원의 심복으로 그가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다. 태종이 그의 영정을 그려 장생전에 영구 보존케 할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조영무는 원래 이성계의 휘하 출신 장수로 현달하였다.
조광조는 14세 때 아버지의 부임지인 희천에 가서 그곳에 유배중인 김굉필에게 수학한다. 이때부터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이에 훈구파의 심정 등은 조광조 일파가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공격했다.
이 때 궁중 안에서는‘주초부왕(走肖孚王)’이란 글자로 왕에게 충격을 주었다.‘조(趙)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된 것이다. 중종도 사림파의 체포에 동의하면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조광조는 능주에 귀양 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이후 사림의 등용문인 현량과도 폐지된다.
조병옥은 1909년 평양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콜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고,1937년 수양동지회사건으로 다시 2년간 복역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노선을 비판하며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나섰으며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 했으나 병사하고 말았다. 그에게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조지훈(1920~1968)의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그가 태어난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한양조씨 집성촌이다. 그래서 흔히 주실조씨라고 한다. 입향조는 호은공으로 불리는 조전(1576~1632)이다. 이곳의 종가는 호은종택(壺隱宗宅)으로 불린다. 경북 영양 출신인 조근영(1896~1982)은 보성고보 재직 중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교직을 떠나 고향 주실에서 ‘초경독본(初徑讀本)’,‘소녀필지(少女必知)’를 저술, 마을 청소년들에게 신문화를 가르쳤다.
근현대인물은 조맹선(독립운동가), 조영원(독립운동가), 조창선(독립운동가), 조종승(국회의원, 6.25때납북), 조진만(대법원장), 조병일(법무부장관), 조시형(농림부장관, 국회의원), 조윤형(국회의원), 조순형(국회의원), 조경목(국회의원), 조병봉(무임소장관, 국회의원), 조일문(국회의원), 조종익(국회의원), 조종호(국회의원), 조광하(성균관대총장), 조근영(성균관대재단이사장), 조기준(고려대교수), 조병하(경북대교수), 조병화(시인, 경희대교수), 조성환(서강대교수), 조홍식 (성균관대교수), 조경희(여류수필가), 조병학(의학박사), 조성욱(검사), 조운해(의학박사), 조의영(변호사), 조찬형(검사, 국회의원), 조태형(검사, 법무연수원장), 조경서(대한생명보험사장), 조국원(한학자), 조흔파(소설가), 조병준(쌍용양회회장), 조봉구(동광기업사장), 조덕송(조선일보논설위원), 조상원(현암사사장), 조동화(평론가), 조동규(경희대교수), 조병국(이화여대교수), 조병찬(한양조씨대종회장), 조영환(한양장학회창설자), 조종석(치안본부장, 국회의원)씨 등이 있다. 조헌영 제헌의원은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경북 안동시 서후면 저전리는 한양조씨 집성촌이다. 이곳은 모시밭이 많아서‘모시밭’이라 했다. 저전(苧田)은 모시밭의 한자 표기이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한양조씨가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조종의 아들 5형제가 경북 영주로 몸을 피했다. 이후 넷째 아들 조신완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대현리에 정착하여 세거하였다. 조신완의 증손자인 조적이 세상을 뜨자 부인 청송심씨는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저전리에 정착했다. 190여 가구 가운데 한양조씨는 약 160가구에 이른다.
그밖의 집성촌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충북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 충남 당진군 면천면 자개리 등이다.
본군(本郡)에는 중종(中宗)때 학자(學者)인 진사(進士) 단구(丹丘) 조정(趙貞)과 숙종(肅宗)때 승지(承旨)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그리고 진사(進士) 조현익(趙顯翼) 등(等) 삼파(三派)가 봉성동양(鳳城桐陽) 법전사미정(法田四未亭) 명호삼동(明湖三洞)을 비롯하여 각처(各處)에 살고 있다.
조정(趙貞) 1508~1599 자(字)는 정경(正卿) 호(號)는 단구(丹丘)으로 충령공 인벽의 후손으로 중종때 진사하였다. 영주에서 봉성면 와란으로 옮겨 살았다.
조덕린(趙德隣) 1658~1739 자(字)는 택인(宅仁) 호(號)는 옥천(玉川)으로 숙종(肅宗)17년 신미(辛未) 1691년11월19일 정시병과(庭試兵科) 31인자로 합격하여 사관, 교리, 사간을 거쳐 필선 재직중 당쟁의 피혜를 상소한 문장속에 노론의 득세를 비난한 구절이 있어 당쟁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하여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1727년 귀양에서 풀려나와 부응교 이듬해 이인좌난이 일어나자 경상도 호초사가 되었다. 영조12년 서원의 남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노론의 탄핵으로 제주도에 귀양가는 도중 당진에서 사세하였다. 저서로는 독선집이 전한다.
조성도(趙性道) 자(字)는 천명(天命)이고 호(號)는 졸천(拙川)이며 문과급제(文科及第)하였다.
조시성(趙時成) 자(字)는 사원(士元)이고 호(號)는 두남(斗南)이며 천성(天性)이 온후(溫厚)하고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여 진사(進士)하고 임천(林泉)에서 독서(讀書)하며 자적(自適)하였다.
조이주(趙以周) 생원(生員)을 하였다.
조현익(趙顯翼) 1826~1902 자(字)는 세경(世卿)이고 호(號)는 죽헌(竹軒)으로 고종(高宗) 때 진사(進士)를 하였다. 저서(著書)로는 죽헌집(竹軒集)이 전한다. 필자(筆者)의 이홍선(李弘善)의 처외(妻外) 고조부(高祖父)있다.
조한좌(趙漢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하였다.
조춘식(趙春植) 자(字)는 원숙(元淑) 호(號)는 모현재(慕賢齋)로 학행(學行)과 덕망(德望)이 있었다.
조병태(趙炳泰) 1933년생(年生)으로 물야가평(物野佳坪)에서 출생(出生)하여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와 대학원(大學院)을 졸업(卒業)하여 경제학박사(經濟學博士) 학위취득후(學位取得後) 동대학교수(同大學敎授) 대학원장(大學院長)을 역임(歷任)했다.
글; 봉화 일보 인터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