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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산중학교 제27회 동창생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오덕종
여산은 본시 여산군에 속한 곳이다.
여산군은 여량(礪良)과 낭산(朗山)의 두 현을 합쳐 두 지명에서 한자씩 따 붙인 명칭이다.
여량현은 백제 때에는 지량초현(只良肖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여량으로 바꾸고 덕은군(德恩郡-恩津)의 영현
(領縣)이 되었더니 고려 현종 9년(1018) 전주에 속했다가 공양왕 3년(1391)에 감무(監務)를 두어서
낭산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여량과 낭산을 병합하여 여산현으로 개칭하고 세종 18년(1436)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의 외향(外鄕)이라하여 군으로 승격되었고, 숙종 25년(1699) 부로 승격되었다.
고종 32년에 다시 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익산군 여산면이 되어 아래와 같이 구성되었다.
·호산리, 두여리, 대성리― 전의 여산군 천동면(川東面)·원수리,
재남리― 전의 여산군 천서면(川西面)·
여산리― 전의 여산군 군내면(郡內面)
1. 여산리(礪山里)
1914년 주막리, 창전리, 파청리(把靑), 북변리(北邊), 노상리(路上), 화류리(花柳)의 전 지역과 영전리, 천동면의 신리,
교동, 유성리의 각 일부로써 구성되었다. 전의 여산군 치소였다.
☞ 교창(校倉)·교동(校洞, 생교골)·창전(倉前, 社倉, 사창앞)
교창은 1972년 교동과 창전을 합쳐 지어 붙인 분리명. 교동은 향교가 있어 생긴 이름.창전, 사창등은 여산군 때
사창이 있던 앞마을이므로 일컫던 이름.
☞ 동촌(東村)·닥채골
동촌은 읍의 동쪽 마을이었기에 붙인 이름.닥채골은 당채산(堂祭山) 근처이므로 생긴 명칭이고, 당채산은 당집이
있던산이니 당제산→당체산→닥채산이다.
☞ 서촌(西村, 읍내, 여산읍내)서촌은 읍의 서편 마을.
☞ 영전(營前)·영너머 영전은 여산군의 아사(衙舍·營) 앞이라 해서 일컫던 이름.
☞ 유성(酉城, 독지동) 유성은 당채산의 서북편이므로 당집의 근처 재라는 뜻의 당재→닥재→酉城 인지?
2. 제남리(濟南里)
1914년 남변리, 외상리(外相), 내상리, 사현리, 옥금동의 전 지역과 남산리, 진사리, 천동면의 교동, 금곡리의 각 일부로
구성되었다. 이 이름은 여산군 행정 중심지에서 내 건너(濟) 남편에 위치했다 하여 제남리라고 붙였다,
☞ 후석(後石)·후촌(後村, 뒷말)·입석(立石, 독선바우)·웃주막거리·수랑골·배다리
후석은 1972년 후촌과 입석을 합친 분리명이다. 후촌의 본이름 뒷말은 여산 행정 중심지의 뒤이므로 일컫던 이름.
독선바우에는 입석(立石)이 있다. 배다리는 여산교를 이르고여산리 서촌과 제남리 후석마을의 경계선이 된다.
☞ 충용(忠勇)
1976년 육군 하사관 학교의 군인 및 가족의 아파트로 2동 30세대를 지어 후석마을에 편입시켰으나 차차 세대수가
증가함으로써 1994년에 후석마을로부터 독립할 때 마을 이름을 충용이라고 지어 붙였다.
☞ 상옥(上玉, 玉錦洞, 윗옥금동)상옥은 옥금동을 상하로 수분한 것.
☞ 하옥(下玉, 옥금동, 아랫옥금동)상옥 참조.
☞ 사월(社月)·사현(社峴, 사직재)·설월(雪月, 서리울, 오래골, 법당거리)
사월은 1972년에 사현과 설월을 합친 분리명이다. 사현은 사직재의 한문자 표기고, 사직재는 여산군 때 사직단(社稷壇)
이 있던 재(峴)이므로 일컫던 이름.
설월은 서리울의 준말이고 서리울은 사직재와 옥금동 사이에 있어 사잇골이라는 뜻의 옛말 서리골이 서리의 끝소리
ㅣ음 밑에서 골이 굴이 되고 ㄱ이 탈락되어 서리울 →설월이 된 것.
☞ 남산(南山, 남살매)·감나무골
남산은 전에 여산군 행정 중심지의 남쪽 산 옆 마을이므로 붙은 이름.감나무골은 감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 석교(石橋, 독다리골)·중상골전에는 여산천의 돌다리가 있었고 그 돌다리 옆의 마을이므로 독다리골이라 하였다.
3. 원수리(源水里)
1914년 연명리, 상양리, 하양리, 신막리의 전 지역과 진사리, 남산리, 천동면에 속했던 내당리, 외당리의 각 일부로 구성됨.
이 이름은 여산천의 상류라 해서 붙인 것.
☞ 진사(眞絲, 진사동, 참수골)·
모새골참수동은 앞 골짜기에서 찬물이 끊임없이 흐르므로 찬실골→참실골→眞絲洞이라 했다.
모새골은 모새가 많은 골짜기.
☞ 독양(獨陽)·독적(獨笛, 독적골)·하양(下陽, 아랫샴골)·
샴골독양은 1972년 독적과 하양을 합쳐 지은 분리명.독적골은 근처에 도자기를 굽던 가마가 있었으니 독을 짓는다 하여
독짓골이라 하던 것이 독적골이 되었다. 하양은 상양의 아랫편이므로 생긴 이름.
☞ 상양(上陽)·도순날·신양(新陽, 윗샴골)
상양은 분지로 된 안쪽에 있는 남향한 마을이니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명칭. 도순날은 도순사(都巡寺)가
있던 묏날이다.신양은 근세에 새로 생긴 마을로 상양의 양(陽)에 신(新)을 붙인 것.
☞ 연명(延命)·삼거리(三巨里)·방죽골(방죽안)·육조동(육조골)·
원수동삼거리는 금마, 왕궁, 여산으로 각각 뻗은 갈림길.방죽안은 방죽이 있는 안쪽.
육조동은 풍수설에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 학동(鶴洞)·내동(內洞, 안골, 약방말)
1972년 내동과 합쳐 한 분리가 되었다. 학동은 뒷산에 학(황새)이 많이 서식하여 생긴 이름.
내동은 학동의 안쪽 마을이므로 일컫던 이름이다. 약방말에는 1940년대까지도 한약방이 있었다.
☞ 신막(新幕, 새술막)·사기장골·당새미·외당리
새술막은 전에 새로 생긴 술집을 일컫던 이름.사기장골에는 사기점이 있었다. 사기점골→사기장골. 당새미는
당(堂)집 샘이 있어 생긴 이름.
4. 호산리(壺山里)
1914년 호월리, 유점리, 신촌, 외사리, 서당리, 신평리, 부흥리의 전 지역과 교동, 외당리, 신리의 각 일부로써 구성됨.
이 이름은 산이름인 호산에서 취한 것.
☞ 신리(新里)·독다물·기와골
신리는 당시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이루어진 이름.
독다물은 전에는 새가호만이 외따로 살았었는데 주위에 돌이 많아 그것을 처치하기 위하여 모두 돌로 담을 쌓고
살았다 한다. 물은 말(마을)의 변한 말이다.기와골은 기와를 굽던 곳으로 근처에 찰흙(陶土)이 많았다.
☞ 신부(新富)·신평(新坪)·즛절·부흥(富興, 부엉골, 사당모퉁이)
신부는 1972년 신평과 부흥을 합치면서 붙인 분리명.
신평은 앞의 하방들을 새로 개척함으로써 붙인 이름.부흥은 부엉골(부헝골)의 한문자 표기.
사당모퉁이는 전에 사당 성황사(城隍詞)가 있던 모퉁이, 동국여지승람에도 호산리, 성황사가 기록되었다.
☞ 외사(外沙, 삿골)·서당골·텃골·새터
외사는 삿골의 구분된 이름이고, 삿골은 유점, 호월, 신평의 사이에 있는 마을이기에 사잇골→삿골이거나 사이의
옛말은 슷이니 슷골→삿골이다.
☞ 호월(壺越)·중말·횟독배기
호월은 천호산과 관계된 이름.중말은 가운뎃 마을.
횟독배기는 현재에도 석회석의 채석장이고 배기는 박혀있는 곳.
☞ 유점(鍮店)·문수골·분통골
유점은 유기점이 있었던 곳.
문수골에는 문수사(文殊寺)가 있다.분통골은 산 밑 깊숙한 곳으로 지형이 예전의 분통(粉桶)처럼 생겼다.
5. 태성리(台城里)
1914년 전동( 洞), 현천리, 신사리, 덕곡리, 화산리, 노동, 태성리, 관동, 누동의 각 일부로 구성됨.
여산군 천동면에 속했을 때에는 대성리(臺城里)였는데 뒤에 臺자를 약자인 台로 쓰게 되자 태성리로 읽게 되었다.
☞ 누항(漏項, 시어목-세목)·성치(城峙, 성잿골)
1972년 성치와 합쳐 한 분리가 되었다.
누항은 시어목의 한문자 표기고 시어목은 물이 새어(시어) 들어가는 목(좁은 부분)이라는 말이다.
천호산 북쪽 근처에 지형이 삿갓을 뒤집어 놓은 듯한(圓錐形) 곳이 있는데 비가 오면 물이 그 속으로 흘러 들어감으로
(천호동굴 속으로) 시어목이라 했다. 성치에는 나백전(羅百戰) 때 쌓았다는 천호성이 있어 성잿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관연(冠淵, 가뿌내-가뿌래)·사리밭들·질바탱이
관연은 가뿌내의 한문자 표기다.
사리밭골은 싸리가 많아서 싸리밭골이라는 뜻. 싸리의 옛말은 리이니 사리로 변음된 것이다.
☞ 원태(元台, 원태성)
태성은 본시는 대성(臺城-이명 참조)인데 그것은 마을 뒤의 상여봉이 대(臺)나 성 같아 생긴 이름이라 한다.
☞ 덕사(德寺)·덕곡(德谷, 두덕실)·신사(新寺, 사자골, 민마구동)
덕사은 1972년에 덕곡과 신사를 합쳐 지은 분리명이다.
실의 덕은 언덕의 옜말이므로 언덕골이라는 말이다. 두덕실도 둔덕이나 언덕을 두덕이라고도 했으니 같은 말이다.
신사에는 절이 있었다. 사자골은 새 절골→사자골이다.민마구동은 밑의 마구동이라는 말.
☞ 노동(蘆洞, 가리울)·무중굴·정샘
노동은 본 이름 가리울의 한문자 표기다. 울은 가리가 ㅣ소리로 끝나니까 골→굴이 울이
된 것이 가리울이다. 가리울의 가리는 갈라졌다는 말이니 원태나 무중굴에서 갈려 나온 마을이므로 생긴 명칭이다.
☞ 화산(花山)옆의 산 화산에서 취해진 이름.
☞ 현천(玄川, 가무내)·수박골
현천은 가무내의 한문자 표기고(옛말에 검다는 감다라고 함) 가무내는 갊아 있는(藏) 내, 숨겨져
있는 내의 뜻이란다. 즉 원태와 사자골까지는 내가 넓은데 가무내 근처에 이르러 좁아져서 예전 냇가에 수목이
무성했을 때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갊은 내라 하던 것이 감으내가 되었다.
6. 두여리(斗余里)
1914년 천서면에 속했던 두여리의 전 지역과 천동면의 월곡리, 신기리, 용기리, 금곡리, 군내면의 영전리, 서이면의
마산리, 북삼면의 평촌리, 고행리, 지장리의 일부로써 구성되었다.
☞ 월곡(月谷, 월고리)
우리나라 수백군데에 분포된 월곡(月谷)의 본 이름은 거의 다리실이고 그 뜻은 들골이라는 말이다.
달의 옛말은 다리고 들(野)의 옛말도 다리다. 그런데 이곳 월곡의 본 이름은 월고리이니 다리실이 일찍부터 한문자
이름으로써 월곡리→월고리가 되었는지?
☞ 금곡(金谷, 쇠목)·여단지·개정거리·갱변들·매봉
여단지는 자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과 돌림병에 죽은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인 여단( 壇, 祭壇)이 있던 곳.
개정거리는 도수장이 있고 개정(보신탕, 개장국)을 팔던 곳. 갱변들은 강변(江邊) 들이다.
☞ 용기(龍機, 용털, 부분명-상·중·하룡)·뙤장고리(뗏장거리)
용기는 본 이름이 용틀인데 용틀도 용들에서 변한 말일 것이다.뗏장거리는 근처에서 뗏장을 떠 쓰던 곳이다.
☞ 수은(秀恩, 坪村-들말)
본 이름은 들말이고 수은은 일정 때 홍수로 들말 전체가 유실되어 당시의 면장 김수한(金秀漢)씨가 갖은 노력을 기울여
마을을 그 위의 높은 지대로 옮겨주니 동민들이 본 마을 이름을 버리고 면장 이름에서 수(秀)자를 따고 그 은혜를
입었다 하여 은혜 은(恩)자를 붙여 마을 이름을 삼았다.
☞ 원두(元斗, 두내미, 갱이)·물방아거리
원두는 원 두여의 뜻. 두여의 본 이름은 두내미인데 그것을 한문자로 斗余(余=남)로 표기한 것.
갱이는 여산천이 동리 머리로 흐름으로 강에 접미사 이를 붙인 것. 물방아거리에는 물방아가 있었다.
☞ 신기(新基, 새터)·오리울
새터는 당시에는 새로 생긴 마을.오리울은 외딴 곳으로 가자면 5리나 되는 곳이라 해서 오리골이라 했다 한다.
오리울의 울은 오리가 ㅣ소리로 끝나니 골→굴이 울이 된 것.
☞ 가재(加才, 가재골, 가재동)
골짜기에 가재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라 하나 혹 진터나 갱이 등에서 가직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작골이라고 부르던 것이
가자골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진기(陣基, 진터, 갑옷터)
신라와 백제의 진터였다는 설과 근처 논밭에서 20년 전까지도 돌살촉(石鏃)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삼국 이전의
진터였으리라는추측도 있다.
첫댓글 여중27 후배님 카페에서
수고했다~형철!
아~ 정겨운 이름들 ....../서리울 ...가리울...두덕실...부엉골...즛절...가무내...물방거리...가재골....월고리.../아쉬운 이름들.....그리운 이름들.....고마우이....형철이...
승운이와 마찬가지로 어릴적 수없이 듣던 그 동네 이름들을 그토록 절절히 설명해 밝혀 놓았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