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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대 신화와 역사
나경수·전남대학교 강사
Ⅰ. 한국 고대 신화의 계통
한국의 고대 신화에서 한국적 토착성을 잘 드러내는 자료로는 단군신화를 꼽는다. 그 이전의 신화적 정황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지금으로서, 현재 최심층(最深層)의 발굴물로서 단군신화는 그만큼 원상으로서의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필자의 기왕의 고찰에 따르면, 단군신화는 한국 건국신화의 전형을 보이는 예로 간주되며, 이후의 신화 자료인 주몽신화, 혁거세신화, 수로신화 등의 심층적 구조에 대해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하나의 가설인 1) 자생형 신화 2) 자생 . 이주 복합형 신화 3) 이주형 신화 등의 자료 평가에서 단군신화를 자생형 신화의 전형으로 꼽는다. 한편 자생형의 토착적 변형으로서 꼽을 수 있는 자료는 혁거세신화다. 혁거세신화는 단군신화에 비해 3대의 신통기가 2대의 신통기로 바뀌고, 내림굿의 구조가 맞이굿의 구조로 바뀌기는 했지만, 일종의 내적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서 남부형 신화의 다른 한 전형으로 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는 자생형 신화에 이주적 내용이 반영된 복합형으로서 주몽신화와 수로신화를 들 수 있다. 주몽신화는 단군신화라는 북부형 토착신화를 모범으로 하면서도 내용적인 변모가 내재적 요인이 아니라 외재적 요인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고, 수로신화는 혁거세신화라는 남부형 토착신화를 역시 모범으로 하면서도 그 역시 외부적 영향을 입어 재편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주몽신화의 경우, 주몽의 탄생 모티프는 이중적으로 장치되어 있다. 하나는 단군신화 계열로서 해모수라는 天神과 유화라는 獸神이 남녀의 교합을 치루는가 하면, 유폐된 유화의 몸에 햇빛이 와 닿는 방식의 感精型 모티프를 통해 주몽을 임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탄생 모티프의 이중적 장치는 분명히 문화적 영향에 따른 신화적 복합현상을 입증해주는 사례로서, 주몽신화는 기마민족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재편된 내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수로신화의 예는 한국의 건국신화 일반이 女系 혹은 母系를 獸神으로 하고 있음에 반해서 유독 수로신화의 경우만은 여계가 아유타국의 출신인 허황옥으로 되어 있다. 이는 남계가 性을 대표하고, 여계가 食을 대표하는 한국 건국신화의 출자율에서 벗어난 것으로서, 허황옥은 여기서 불교를 상징하는 성격이다. 즉 상주표착형이라는 이주형 신화의 한 모티프가 자생형 신화에 장착되어 복합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이주형 신화로서 탈해신화와 무강신화를 주목한다. 이들 두 신화는 단군신화 계열의 자생형의 영향을 입지 않은 것으로서 독자적인 신화 구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한국 신화사에 있어 별종의 한 계통을 이루는 것으로 분류된다. 탈해신화와 무강신화는 모두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는 공통점을 지니며, 또는 정착 단계에서 婦系 의존도가 높고, 또 트릭스터(trictster)라는 점에서 공약수를 지녔다.
한편 이들 두 이주형 신화는 한국의 고대사적 전개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는 것들로서 필자는 진시황의 천하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주목한다. 탈해신화와 무강신화가 모두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정착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래해 오기 전 본거지는 달리하고 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동반도와 회수에 이르는 중국 연안은 동이족의 거점이었으며, 동이족들은 거기에서 국가를 경영하고 있었다. 거시적으로 보면, 동이족 사이에서 일어난 일종의 민족이동이라는 역사가 탈해와 무강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신화화가 이루어져 지금에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Ⅱ. 신화와 역사의 변주
1. 단군신화와 농경
단군신화의 곰에 대해서 토템, 지모신, 수조신 등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다양하게 논의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 신화 속에 하나의 둔중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현재 북아시아 일반에서 찾아지는 사례를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바시레프(B.A.Vasil'ev)가 “유라시아 아메리카 층”과 “아이누형”으로 이름지은 것들로, 전자는 야생의 곰을 종족의 수호령으로 또는 수렵신으로 간주하는 특징을 지니는 반면, 후자는 곰을 사육하여 의례적으로 죽이는 방법을 취하고 있고, 곰을 조상으로 간주한다. 또한 전자는 시베리아 산림지대에 편재해 있는 현상으로서 시대적으로 고층에 속하고, 후자는 연해주에서부터 북해도에 걸쳐 발견되는 후기적 양식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 이동성 수렵경제를 영위하는 유라시아 아메리카형과는 달리, 조상이며 재생의 상징성에 근거한 아이누형에 가깝다는 사실을 통해 단군신화의 시대적 배경이 순수한 수렵채취기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곰에 포커스를 맞추었을 때, 단군신화는 수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경제형태를 반영해서 재해석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신화학에서는 동물이 인간과 동격시되는 것을 animalism이라고 부른다. 어떤 일정한 동물이 수렵신 또는 종족의 수호령이던 단계를 벗어나 인간과 同位에 서게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의 조상신의 자격을 가진다. 경제형태와 관련시키면, 고층수렵사회에서 고급수렵사회로 전환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고급수렵채취문화 속에서 찾아지는 토템신앙 역시 이런 애니마리즘의 일종이다. 애니마리즘 현상과 더불어서 신화나 의례를 통해 일정한 동물이 사람의 시조가 되었을 경우, 그 동물을 가리켜 수조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곰이 수조신이 되는 지역은 동북아시아 중에도 태평양연안의 諸族에 한정된다. 즉 바시레프가 아이누형이라고 부른 웅제 형태가 그것과 관련된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곰을 그것과 엄밀히 비교하기 위해서 곰의 성격에 대한 확실한 전제가 필요하다. 단군신화의 서사구조는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유용하게 쓰이게 된다. 서사구조 속에서 곰은 상대적 위치에 선다. 즉 환웅의 배우로서 자격인 것이다.
환웅은 알타이계통에서 말하듯 최고신의 아들 중 하나로 문화영웅이면서 시조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환웅이 시조신이라고 하는 말은 웅녀가 상대적이듯 그 역시 상대적이다. 다시 말해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배우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신관의 발달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환웅과 같은 천신 또는 문화영웅은 어떤 환경 속에서는 지모신과 배우관계를 이룬다. 그 환경이란 말할 것도 없이 농경사회를 가리킨다. 단군의 모계인 곰이 수렵신과 수조신의 단계를 거쳐왔듯이, 환웅 역시 최고신에서 문화영웅의 단계를 지나 곰과 만나게 되었다. 환웅과 곰이 각각 최고신과 수렵신이라는 가장 낮은 단계의 신격이었던 일련의 원초적인 속성을 극복하고 문화영웅과 수조신의 다음 단계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남의 순간 둘은 다시 신격의 전환이 필요했다. 즉 문화영웅과 수조신의 단계까지 극복하고, 둘은 만나게 된다. 단군신화의 이런 신격전화의 제양상은 경제 형태의 발전적 도식과 상관될 수 있는 신관의 변모양상이다.
농경사회의 종교적 특징 중의 하나는 혈연적 조상숭배관념과 지모신의 위치가 확고하다는 것이다. 단군신화는 인류기원신화가 결코 아니다. 환웅이 강림하기 전부터 선주민이 있었고, 또 단군도 낳았지만 단군 역시 건국주일 뿐 부족의 시조는 아니다. 이것은 바로 天父地母의 세계상에 근거한 상징체계로 파악해야 한다. 말하자면 천부인 환웅과 지모신인 웅녀의 만남으로 귀결되며, 이런 신화의 구조는 단군신화의 시대적 배경이나 경제형태가 농경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 주는 예이다.
홍적세 중·후기에 네 번의 빙하기를 따라 남하했던 고아시아족들이 후빙기에 순록을 따라 북쪽으로 떠나버린 후, 적어도 후빙기 초의 2∼3000년간 우리나라는 무인지대로 남겨졌던 듯 그 시대에 해당할 만한 유적, 유물이 현재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훨씬 따뜻해진 애틀란틱(Atlantic)기에 접어든 기원전 5500년경부터 3000년경에 우리 나라에 새로운 신석기 주민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시베리아로 북상하는 퉁그스족에 밀려 동북아시아, 특히 북태평양연안으로 자리를 옮긴 고아시아족의 한 일파로 간주된다.
시베리아 북쪽에 잔존한 그들의 원맥이나 베링해를 지나 아메리카 북부로 이동한 종족들은 풍부한 순록이 없는 상황에서 가축사육이나 간단한 농경을 영위하는 한편 작은 동물들을 사냥하는 형태로 전환을 보게 된다. 그래서, 원래 그들의 신앙에 뿌리깊게 자리한 곰신앙을 수조신으로 변형시키면서 현재의 아이누족과 같은 반농반렵의 생산경제를 영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더 남하하여 남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일군의 고아세아족들은 본격적으로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제형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들의 세계관 및 종교내용을 혁신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즉 곰을 수조신으로 했던 연해주형에 농경의 재생관념을 재해석하여 지모신의 출현을 보게 된 것이다.
한편 단군신화의 이런 발전과정이나 북방형적 양상은 알타이계에서 일반적으로 찾아지는 신화소, 즉 천손강림의 화소에서도 확인된다. 세계산, 세계수 등 알타이계 공통의 신화적 장치가 삼위태백,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 있는 단군신화는 분명히 북방의 수직적 세계상에 일치한다. 이런 여러 사실은 곰에 대한 해석이 수렵신으로 믿어지는 원초형, 수조신으로 변화된 중간 발전형에서 급기야 곰을 지모신으로 하는 발전과정과 합치해서 환웅이 마침내 웅녀의 배우자가 되는 상태로까지 발전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역시 농경문화가 그 근저에서 작용한 때문이다. 천신과 지모신의 신성혼은 농경의 발달과 더불어 전개될 수 있는 신관형태이기 때문이다.
2. 주몽신화와 기마민족
기마민족과 그 문화란 기원전 1천년 경에 출현한 것으로 세계문화사상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 기마민족은 그 남동부의 농경지대에 비해 경제력에 있어 상대적으로 취약한 유목민들이 마차를 끌게 했던 말에 직접 올라 타 기마전술을 익혀 이들 농경지대를 주목표로 약탈문화를 사직하면서 출현했다.
소위 스키타이 문화로 대표되는 이들 기마민족은 점차 그 세력을 확장하여 동서로 뻗어 나갔다. 동으로는 만주와 몽고의 접경지대인 흥안령 산맥에서부터 서로는 동부 유럽, 헝가리에 이르는 유목집단이 점점 스키타이 문화에 침윤되면서 기마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를 받아들여 북아시아에서 최초로 흥기했던 것은 흉노족이었다. 이들의 성쇠와 더불어 기마문화가 만주의 선비, 오환에 까지 이르자 마침내 이들 동호족에 의해 기마민족문화가 부여와 고구려에 미치게 되고, 다시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건너갔다.
주몽신화는 부여계통의 동명신화와는 분명히 다른 신화구조를 가졌다. 주몽신화는 동명계신화를 기저로 하면서도 별전 부루신화와 복합되어 있다. 동명계의 감정형신화는 동북아시아에 보편적으로 편재해 있고, 유목민이나 수렵목축민들에게도 찾아지지만 유목민이나 수렵민 고유의 것은 아니다.
감정형신화는 중국의 신화시대서부터 있었던 중국적인 신화 모티브이며, 대신 유목이나 수렵 겸 목축을 하는 종족들에게는 대부분 수조신화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중국의 감정형신화는 버림을 받지않는 반면에, 수조형신화는 십중팔구 죽을 고비를 지나거나 쫓겨 난다. 이것은 일종의 기아 모티프다.
기아란 원시민들 속에서 어디에서나 찾아지는 보편적 통과의례의 하나이다. 이런 의례적 양상이 세계적으로 넓은 분포를 보이면서 설화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 농경지대의 경우는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아이를 낳거나 농경과 관계가 깊은 도구 또는 식물을 이용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얼마 전까지 대명대수의 방법으로 더러운 이름을 붙이는 경우, 또는 더러운 곳에다 아이를 낳는 경우들이 있었다. 또한 애를 파는 풍속도 있었는데, 이것들 모두가 이중탄생의 기제며, 거기서 파생된 풍속들이다.
동명신화에서 보면 많은 이본이 있으나 하나같이 갓난애인 동명을 돼지우리나 마굿간에 버린다. 이것을 통해 목축민의 기아 양식이 동명신화에 핵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또한 그것에 그치지 않고 돼지와 말이 갓난애에게 숨을 불어넣는다. 여호아가 흙으로 사람의 모습을 만든 후 숨을 불어넣자 아담이 생명을 얻은 것처럼, 숨이란 곧 목숨이며 생명인 것이다.
동명신화에서 돼지와 말이 숨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그것대로 목축경제의 신화적 상징성이 읽어진다. 말은 물론 기마민족적 문화를 반영한 것이고, 돼지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있듯이 돼지를 사육하여 그 살을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겨울에는 기름을 몸에 발라 한기를 막았다는 손루의 돼지 사육이 이것과 관련된다.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살펴본 감정모티브와 기아모티브가 동시에 하나의 신화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바로 부여의 동명신화다. 따라서 주몽신화 이전의 동명신화에는 벌써 중국의 문화와 유목 및 목축을 하던 지역의 문화가 습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동명의 어머니가 한결같이 신분이 천한 시비였다고 하는 것은 수조형의 동물이 감정형에 의해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미천한 신분으로 해석되어 버린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동명신화에는 일광감정모티브가 아니라 유기감정모티브가 들어 있다. 유기감정이란 한족계의 은조 계나 진조 대업의 출생신화와 같은 계열에 속한다. 이렇듯 동명신화에는 없는 기마민족 공유의 신화소인 일광감정형이 주몽신화에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은 또 다시 기마민족의 문화가 유착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한다.
昔寧稟離王 侍婢有娠 相者占之曰 貴而當王 王曰 非我之胤也 當殺之 婢曰 氣從天來 故我有娠 及子之産 謂爲不祥 損圈則猪噓 棄欄則馬乳 而得不死 卒爲扶餘 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之王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 寧稟離乃夫婁王之異移也
위 기록 중 분주를 보면 일연은 동명과 주몽을 동일인으로 보고 있지만, 이는 동명신화와 주몽신화의 유사성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이다. 따라서, 북부여와 졸본부여도 혼동하고 있다. 동명과 주몽의 혼동 부분을 빼고 원상태로 동명만 취해보면 북부여조에 있듯이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가 되고, 이때의 동명은 고구려의 주몽과는 다른 어떤 종족의 수장인 것이다. 또한 동부여의 천도에 대해서 신성현시라는 분식이 가해진 것을 감안할 때 이를 합리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東明帝奪北扶餘 移都于東扶餘”로 문자의 순서와 글자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동명신화와 주몽신화를 구분하여 보게 되면, 일광감정 신화소가 동명신화에 첨가되어 주몽신화가 된 과정이 이해된다. 이러한 유착과정을 시대순으로 나열할 떄 정확한 연대는 결정할 수 없지만, 한족문화와 수렵목축민인 동이족 일단의 문화가 먼저 합해져 복합 문화권이 형성되고 나서 기마민족의 문화가 거기에 덧씌워졌다는 순서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몽신화가 여기까지의 단계를 밟은 것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고조선의 후예로서 이미 농경을 영위하고 있었던 고아세아족의 농경문화와 만나게 된 동명신화는 새롭게 주몽신화로 탈바꿈한다. 즉 이 지역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단군신화계열, 다시 말하면 단군신화의 한 파생태인 별전 부루신화와 만나게 된 것이다. 별전 부루신화란 단군신화계열로, 환웅이 동물인 웅녀를 통해 단군을 얻었듯, 단군 역시 동물(물고기)인 서하 하백녀를 통해 부루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것을 일단 정리하여 보면 주몽신화는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형성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제1차 : 한족의 감정신화와 수렵목축의 비한족계문화가 유착하여 동명신화를 낳는다.
제2차 : 동명신화에 기마민족의 신화모티브인 일광감정형이 습합된다.
제3차 : 이런 신화가 부여를 거치면서 별전 부루신화와 만나 이중의 탄생모티브를 가지는 부자연스러운 구조적 변형을 이룬다.
주몽신화는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성립되어 가지만, 이것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고, 도작문화와 다시 접속하계 되어 4차에 걸친 문화변용을 경험한다.
주몽신화 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해모수의 강림과 유화의 人身化는 엄연히 별전 부루신화의 계열에 속한다. 이미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는 단군신화의 구연집단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초기 농경산업을 근간으로 하여 상당히 발전된 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족의 감정형과 북방의 수렵목축의 기아 및 동물보호 모티브를 결합시킨 일군의 동명신화 구연집단이 들어서고 뒤이어 일광감정형신화의 기마문화가 크게 활약하는 단계에 와서 주몽신화는 하나의 서사문학적 구조를 완성했다.
주몽의 출원지에 대한 혼란은 신화에 의해서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졸본부여는 동명계와 부루계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니 만큼 새롭게 등장한 기마계통의 주몽집단은 도시국가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여러 부여를 통합해 갔고, 그 일부는 물길에 의해 병합되어 말갈을 이루면서 동만주와 연해주에 걸쳐 여진으로 발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몽신화가 동명신화와 해모수신화(부루 또는 금와계열)를 이원적으로 구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과 함께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주몽의 출계는 어디까지나 농경족이었던 원부여계통이 아니라 그러한 농경문화를 수용했던 기마족에 가깝다. 그런 예는 주몽신화의 문면에 뚜렷이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주몽이 말을 길렀고, 또 말을 몰아 이동했으며, 주몽이 죽었을 때 승천하여 버리자 말채칙을 靈代物로 하여 장사를 지냈다는 예들이 기마민족적인 유습을 단명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다.
3. 수로신화와 불교
유, 불, 도의 고등종교사상이 중국으로부터 우리 나라에 들어오고, 한문자가 보급되면서 문화사적 일대 혁신이 일었다고 하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이런 문화사적 패러다임의 변혁이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건국신화에까지 영향을 미쳤음 직한 사정도 알 만하다.
예를 들면, 주몽신화의 하백은 중국에서 하신을 지칭하는 신명을 빌려서 표기해 놓았고, 단군신화의 천부인이라는 것도 기실은 도교나 불교의 용어를 차용해서 추상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비록 불교나 도교의 용어로 바뀌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는 이미 불교나 도교의 전래 이전부터 믿어졌던 것이라는 점이다. 스키타이계통은 왕의 신보로 배, 전부, 경구를 가졌고, 일본의 왕실에도 경, 검, 옥의 삼보가 전한다. 고구려나 신라에도 궁중에 삼보가 있었던 것처럼 고대왕실에서 지니고 있던 삼보가 신화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신화 文面에서 고등종교의 영향이 읽어지는 것은 신명 또는 신기의 명칭 등으로, 신화의 구조 자체와는 무관하다. 신화의 구조는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바뀌는 경우라고 하여도 대개는 전대의 신화구조에 근간을 두고 변형될 뿐이다. 유, 불, 도 삼자 중에서 우리 나라 건국신화의 구조에 변화를 초래한 것은 불교만을 꼽을 수 있다.
가락국기의 수로신화가 바로 그 예다. 단군, 주몽, 혁거세신화 모두는 신혼이 건국의 전제적 요소가 되었다. 신혼은 난장(orgy)과 상응한다. 제의적 또는 신화적 사실로서 난장은 질적 변환의 분기점이다. 이는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분기점이라는 말이 되기도 하며, 따라서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여 질서를 세우는 것은 창조적 행위로서 결혼에 의해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수로신화는 그런 궤도를 벗어나 있다. 수로가 건국을 한 연후에 허황옥을 맞아 왕비로 삼은 것이다. 건국신화의 일반적 구도에서 벗어나 하나의 변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저나름대로의 어떤 필연적이고 문화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수로는 신성원리에 의해서 인간화한 존재임에 비해서 허황옥은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세속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건국신화의 인격으로 자리를 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즉 신의 현몽을 통한 계시에 의해 왕비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계시란 근원에 있어 초월적이면서도 결과적으로 실재에 영향을 주는 행위로서 계시의 수용자는 신화적 인물로 전환되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3에 실린 소위 탑상출현인연설화의 유형에 있어 해안표착형식은 한 전형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탈해신화의 상주표류형과 일치되는 형식을 지닌다. 그러나 형식의 일치에도 불구하고 탈해는 수로에 의해 거부되는 대신 허황옥은 받아들여지는 내용의 차이가 보인다. 신화에서는 탈해가 수로에게서 왕권을 노렸기 때문에 거부되고, 허황옥은 수로의 왕비가 되기 위해 도래했기 때문에 수용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문화사적으로 해석하여 탈해가 회이족 또는 회이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허황옥은 불교의 표상으로 대응시킬 수 있다.
우선, 수로신화가 우리 나라의 일반적인 건국신화의 구조적 틀을 훨씬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불교 때문이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한 후 문제에 접근하여 보도록 하겠다. 기존의 신화적 틀에서 남신은 천신이며, 천상에서 강림했고, 여신은 동물에서 인격전환을 하여 국모가 되었다. 수로신화의 수로는 이런 공식에 맞아떨어지면서도 여신의 격에 들 허황옥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동물이 아니라 불교가 여성화해 버린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로시대에 불교가 우리 나라에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훨씬 후대에 일어난 불교의 수용과 관련하여 신화의 내용이 뒤바뀐 것이다.
허황옥이 배를 내려 들어올 때, 입고 있던 비단 바지(능고)를 벗어 산령께 바쳤다. 여자의 바지란 속곳을 말하는 것으로 女性性을 대표하는 것이다, 한자에서도 바지 “袴”가 사타구니 “과”로도 쓰이는 것은 이런 사정을 말한다. 바지를 벗어버린 허황옥은 여성성을 송두리채 노출시킨 알몸이다. 여성의 발가벗는 행위는 신혼을 위한 전단계로써 치루어지는 입사식의 신화적, 제의적 표현이며, 성혼을 위한 인격전환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는 탄생과 등가적인 의미를 가진다.
허황옥이 바지를 벗은 것은 수로가 알을 깨고 나온 것에 대응되는 이중탄생의 모티프가 읽어지는 내용이다. 동물이 그 피각을 벗고 여성지향을 성취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허황옥도 유사한 전철을 밟아 수로와의 성혼에 이른 것이다. 이때 허황옥이 속곳을 벗어던진 사실이 웅녀, 유화, 알영 등과 등위의 인격전환의 항목이라면 이는 분명히 어떤 신화적 전철을 밟고 있는 사례의 하나라고 간주된다. 신화 구조가 어떤 변환에 대해 자동제어(autoreglage)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불교의 도래라는 새로운 사실까지도 점검하여 일반적 신화구조에 알맞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불교문화에 의해 분식된 수로신화지만 구조의 불변성에 기대어 그 원형적 구조를 재구해낼 수는 있었다. {삼국유사} 권3 어산 불영조에 수로가 부처의 영력으로 독룡을 퇴치하고 어룡을 다스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신화에서 독룡이나 어룡은 불교 팔부상 중의 하나인 호법룡과는 전혀 다른 부정적인 존재다. 다시 말해 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부정적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 권5에는 그것이 왜 부정적으로 파악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밀본최사조에 승상 김양도가 어려서 병이 들었을 때 무당이 치유치 못하던 병을 큰스님인 밀본이 퇴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기존의 무당 자리에 불력이 뛰어난 승려가 대신 앉은 모습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무당은 부정적이다. 고등종교인 불교가 토속적인 무속을 부정시하게 되는 흐름 또는 대체 현상이 수로신화의 전승과정에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특히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싣고 가락에 왔다고 하는 연기설화에 대해 일연 자신도 회의를 나타내고 있듯이, 수로신화가 훗날 불교의 영향을 받아 재편성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다.
수로신화가 원형으로부터 훨씬 멀어져버린 것은 불교의 수용과 함께 불교설화 또는 불사연기설화들이 대거 신화에 삽입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이렇듯 불교는 유교나 도교에 비해 우리 나라 설화형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이해된다.
4. 탈해신화와 민족이동
주나라 때부터 중국 사서에 심심찮게 나오던 회이 또는 서국의 기록이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함께 자취를 감춘다. 진이 육국 및 회이와 서이를 병합하니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일반 백성들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전서의 위 기록은 회수와 사수에 살던 동이족들이 진시황의 천하통일정책에 의해 붕괴되고, 한족 속에 흡수되어버린 역사를 말해 준다. 한편 때를 같이 하여 한반도 남부에 일어난 역사적 정황을 전해주는 유력한 자료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진한조의 다음 기록이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의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스로 일컬어 말하기를 秦나라의 부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오자, 마한은 그 나라의 동쪽 경계지점을 할애하여 그들에게 주었다고 했다. 그들은 성책이 있으며, 그들의 언어는 마한과 달랐다.
위 기록은 『삼국유사』에도 부분적으로 인용되고 있는데, 진나라의 고된 사역을 피해서 중국으로부터 한반도 남부의 마한에 도달한 일군의 집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대표적인 사업을 들어 보면 아방궁과 진시황릉 및 만리장성의 등의 大役事와 분서갱유 등이다. 이러한 진시황의 정책입안은 漢族 중심의 것이었다. 동이족의 일맥으로서, 비한족인 회이가 당시 아방궁이나 만리장성의 역사를 위해 당했을 핍박과 착취는 역사적으로 뚜렷이 이해될 수 있고, 따라서 회이족 대부분은 한족으로 흡수되어버렸더라도, 회이족 속에서 상류층에 속해 있던 집단은 그 고통을 감내하기 어려운 나머지 길을 달리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앞의 『삼국지』 진한조의 기록은 바로 이런 사실을 입증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그 연장으로 회이의 徐偃王神話와 구조적으로 동일한 脫解神話가 왜 반도의 남부에서 구전되고 있었겠느냐 하는 의문을 풀 수 있다. 탈해신화에서 탈해는 결코 개인적인 인격체로서 탈해가 아니라 민족적 이동을 단행했던 집단을 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락에서 쫓겨난 탈해가 신라에 도착해서 다시 알로 태어난다고 하는 신화 내용은 역사적 실존인물로서 탈해가 아니라, 신화원형의 반복성에 부회된 인물이기 때문에, 탈해신화는 일정한 신화원형을 보유한 집단의 민족적 이동상황을 표상한 신화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대개 신화적 인물의 이름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보통명사일 경우가 많다. 壇君, 朱蒙, 赫居世, 首露 등이 모두 보통명사로 해석되는 것이다. 昔脫解의 경우도 이러한 관용어적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보통명사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석탈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연유를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누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 수 없으므로 처음 독이 떠내려올 때 까치가 울며 따랐으니 작(鵲)의 한 편을 떼어 석으로 성을 삼고, 또 얽어맨 독 안에서 풀려났으니 탈해라고 이름하여 마땅하다고 하였다.
구전이란 기억된 역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노인들의 말이란 저 먼 옛날의 역사가 구전으로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秦의 노역을 피해서 정치적 망명을 단행한 회이족의 역사적 사건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먼 옛날의 일이었던 것이다. 昔脫解의 昔은 이런 점에서 그 옛날, 말하자면 석탈해가 구체적인 고유명사로서의 이름을 얻기 훨씬 전의 정황을 시사하고 있는 말로 생각된다. 이 때의 옛날이란 말할 것도 없이 진시황의 압정을 피해 도망해온 회이족 일파의 일에 대한 시간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의 연장에서, 脫解를 '벗어나 해방되다'는 축자적 의미로 해석하여 역사적 사실과 결부시켜 보면, '진시황의 학정에 못이겨 도망하여 해방된' 사람(들)으로 읽어 하자가 없을 줄로 안다. 결국 昔脫解란 이름은, 저 먼 옛날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하고 나서 소수민족에게 가했던 노역과 학정을 피해서 한반도로 도망쳐온 사람들의 역사를 압축시켜 놓은 하나의 言語的 遺跡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탈해 일족의 이동 사실은 탈해 탄생의 불합리성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탈해가 서쪽인 가락에서 알로 태어났다가 수로에게 패하고 나서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여 신라에서 알로 태어난 것이다. 두 번에 걸쳐 알 속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불합리하다. 즉 두 번에 걸쳐 탄생했다는 것은, 사실을 중시하는 역사로 보아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설화적 해명에 의존하게 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 확실한 자료는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한 후,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다른 지역으로 망명을 했다는 것과 진한의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이, 그 일족 중 일부가 한반도의 남부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일족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역사적 과제지만, 그것을 해결할 만한 정확한 사료를 가지지 못한 지금 단계에서는 설화에 반영되어 있는 역사를 재구해 보는 것이 유력한 방법일 것이다.
5. 무강신화와 마한
무강왕은 한편으로는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의 30대 무왕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箕準과 武王은 8백여 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모두 武康王이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익산군편의 佛宇條에 실린 미륵사의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미륵사는 용화산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과 더불어 사자사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 곳에 절을 짓기를 소망하였다. 임금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방술을 물었더니 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불전을 창건하였으며, 또 세 미륵불상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왔다"고 한다. 석탑이 있는데 극대하여 높이가 여러 길이나 되어 동방의 석탑 중에 가장 큰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사를 백제의 무왕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서, 여기서는 마한의 무강왕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世傳을 옮겼다는 위 기록은 큰 불합리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마한시대 무강왕의 役事를 신라 진평왕이 도왔다는 내용이다. 시작은 마한의 무강왕이지만, 끝에 가서는 800여년 후인 백제 무왕시대의 일로 바뀌고 말았다.
한편 {동국여지승람}에는 미륵사의 창건주가 마한의 무강왕으로 되어 있음에 반해서, 일연이 보았던 傳에는 무강왕이 백제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는 무강왕이 마한의 기준이라는 설과 백제의 무왕이라는 설 등 각기 다른 두 사료를 가졌지만, 일연이 보았던 자료에는 무강왕이 백제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을 착안하고 보면, 여기에 새로이 부전 자료 하나를 더 추가하게 된다. 이 세 번째 자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기왕의 두 자료에 비해서 극히 미미할 수 있다. 그러나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해줄 수 있는 자료일 수도 있다. 일연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면, 그가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두 종류로서, 하나는 무강왕을 마한의 왕(기준)이라고 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백제의 왕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 중에서 일연이 취득했던 것은 무강왕을 백제의 왕이라 한 자료였다. 따라서 일연은 백제의 무강왕을 백제의 무왕으로 고치는 역사의 굴절을 단행했던 것이다. 만일 그의 일차 자료가 무강왕을 마한의 왕이라고 한 것이었다면, 일연은 지금 전하는 것과는 다른 고증을 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일반적으로 알려진 온조 백제와는 다른 계통의 백제 기원설이 있어 그에 대한 주목이 요망된다. 후백제의 개국조 견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견훤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에 일렀다. 내가 삼국의 시원을 상고해 보건대,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가 발흥하였으므로 진변이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육백여년이 되었다.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을 했다는 위 견훤의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난다. 이병도는 이를 한 마디로 역사의 착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견훤의 착각으로 보아넘길 일은 아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글에도 이와 다르지 않은 내용이 적혀 있다. 외교문서일 수도 있는 왕의 친서에 이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견훤의 잘못된 사견으로 보고 말 일은 아닌 듯싶다. 잘 알려진 대로 위례성에서 온조가 개국했던 백제를 이처럼 금마산에서 개국했다고 하는 까닭 뒤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앞의 글에 계속하여 견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 고종이 신라의 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어 해군 13만으로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유신이 권토하여 황산을 거쳐 사자에 이르러 당병과 합세하여 백제를 쳐 없앴다. 지금 내가 과감히 완산에 도읍을 세워서 의자왕의 숙분을 풀어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후백제왕이라 자칭하였다.
인심을 얻은 견훤이 후백제를 개국하면서 그 정통성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삼한시대로부터 백제가 망하기까지의 역사를 개관하고, 건국의 필연성을 백제의 부흥논리에서 찾고 있다. 또한 거슬러 올라가면 후백제가 백제의 정통성을 이어받듯, 백제가 마한을 이어받은 것으로 역사를 편수하려는 논지다.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했다는 그의 말에는 백제의 역사를 마한대로 끌어올려 신라에 앞서는 역사를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배어 있다. 그래서 "마한이 먼저 서고 후에 혁거세가 발흥했다(馬韓先起 後赫世勃興)"는 선후 시차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마산에서 백제가 개국을 했다는 이러한 견훤의 역사 인식은 그 개인의 사견이나 강변 차원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인식의 장이 이미 사회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강왕을 백제의 왕으로 기록하고 있던 자료나 백제가 금마산에서 개국했다는 견훤의 글은 모두 백제가 신도래족인 비류 온조에 의해 건국된 정복국가라는 지금까지의 단선적인 이해를 재고하도록 유도한다. 역사는 기록자의 사상이나 의취에 따라 다르게 기록될 수도 있다. 비류나 온조계의 입장에 선 기록자인가 한족계통의 입장에 선 기록자인가에 따라 역사의 내용은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온조계, 비류계, 진왕계 중에서 가장 많은 왕을 낸 계통을 온조계였다. 현존 자료에 백제가 온조백제로만 기술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가장 장기적인 집권을 했던 온조계가 역사를 자의적으로 기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러한 사료를 근거로 한 후세의 사가들은 다시 그를 근거로 해서 역사를 편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조백제의 정통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게 되면, 일연이 비록 백제에 무강왕이라는 왕명이 없어서 무왕으로 고쳤던 역사의 굴절이 있기는 했지만, 이를 원상으로 교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뜻에서 일연의 고육책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보다는 무강왕의 역사적 실체를 재조명해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무강왕에 대해 무왕설, 동성왕설, 무녕왕설, 원효설 등으로 압축되는 여러 설이 제기되어 왔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들은 오히려 무강왕을 역사의 미아로 만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그를 미아로 만든 가장 주요한 원인은 위에서 보듯 어느 일편에 치우친 요소주의였던 것이다. 다른 요인의 하나로서 還元主義 역시 해석을 흐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부분 설화를 역사로 환원시키려 한 연구도 그렇지만, 김종우의 연구 역시 그 전형적인 예의 하나다. 그는 무왕설화와 서동요를 불교 주지의 작품으로 보고 佛神에 맞춰 작품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하나의 전체인 무왕조 이야기를 특정 요소의 자의적 비대화나, 종교나 역사에 환원시켜 이해하려는 점에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