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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62.9.19 ~2010.1.14)
이름 : 세례명 요한
출생지 : 부산
직업: 의사, 카톨릭 사제
1962년 9월 19일 부산 산동네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부산의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힘든’ 비탈진 산동네에서 자랐다. 10남매 중 9번째. 동네 성당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머니가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성당에서 다미앵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은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가톨릭 신부다. 그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로 선종했고, 지난해에 성인 반열에 올랐다.
1981년 부산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87년 부산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입학했을때.. 아들 태석이 공부를 잘해 인제의대에 진학했을 때 모친은 “대통령 된 것보다 더 기뻤다.1990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하였고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이미 형(신부)과 누나(수녀)를 하느님에게 바친 모친이 눈물로 말렸지만, 이태석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1994년 1월 30일 첫 서원을 받았으며 1997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하였다. 재학 중 방학 때 아프리카 케냐에서 봉사활동을 하였고, 20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내전으로 수백만명이 죽었다는 남부 수단의 소식을 듣게된다
2000년 4월 종신서원을 하였고 그해 6월 28일 부제서품을 받았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1월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Tonj)로 향했다.
그곳에서 가난과 기아,질병 등으로 도탄에 빠진 마을의 참상을 보게 되고, 남부 수단 톤즈 마을의 유일한 의사. 하루 300여 명의 환자가 몰렸고, 100㎞ 떨어진 곳에서 며칠씩 걸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슬람권 환자들도 반겼다.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의 늪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이슬람교니 하며 사람을 종교로 구분 짓는 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요 조금은 미안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겸한 의료봉사활동과 구호운동에 헌신한다. 진료소를 만들어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돌보며 인근 80여개 마을의 순회진료와 예방접종도 했다. 학교를 만들고, 초·중·고교 11년 과정을 꾸려 수학과 음악도 가르쳤다. 기숙사도 짓고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악기도 가르쳤다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오지로 불리는 수단의 남부 톤즈는 오랜동안 수단의 내전(內戰)으로 폐허가 된 지역이며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흩어져 황폐화된 지역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이곳에서 가톨릭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말라리아와 콜레라로 죽어가는 주민들과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흙담과 짚풀로 지붕을 엮어 병원을 세웠다. 또한 병원까지 찾아오지 못하는 주민들을 위해 척박한 오지마을을 순회하며 진료를 하였다. 그의 병원이 점차 알려지게 되자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원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만들어 병원건물을 직접 지어 확장하였다. 하지만 오염된 톤즈 강물을 마시고 콜레라가 매번 창궐하자 톤즈의 여러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난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하루 한끼를 겨우 먹는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농경지를 일구기 시작했으며, 학교를 세워 원주민 계몽에 나섰다. 처음 초등교육으로 시작한 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차례로 개설하였고 톤즈에 부지를 마련하여 학교 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원주민을 치료하는데 음악이 가장 좋은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치료의 목적으로 피리와 기타를 가르쳤으며 예상을 넘는 효과가 있자 학생들을 선발하여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구성하였다. 그의 밴드는 수단 남부에서 유명세를 탔으며 정부행사에도 초청되어 연주하였다.
2005년 그의 헌신적인 공로가 인정되어 제7회 인제인성대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했다.
2008년 11월 한국에 잠시 입국하였다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톤즈로 돌아가지 못했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암 선고 1주일 후 밝은 표정으로 수단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음악회에 나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리.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투병생활 중 2009년 12월 17일 제2회 한미 자랑스러운 의사상을 수상했다.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어 증세는 점차 나빠졌으며 “우물을 파다 왔는데”라며 톤즈 마을만 생각하던 그는 끝내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다시 타지 못하고, 결국 2010년 1월 14일 오전 5시35분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다미안 신부보다 한 해 이른 48세였다
그는 사제이자 의사였으며 교육자이자 음악가 건축가로 일인다역을 하였고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가 작곡한 묵상(默想)이 대표곡이며 저서로 아프리카 톤즈의 일상을 집필한 에세이집《친구가되어주실래요》(2009)를 남겼다. 2010년 12월 21일 제1회 KBS감동대상 대상에 선정되었다.
홍진기 ㈜두산 부장, 2007년 수단 방문 생활상 촬영
고인의 마지막 함께 해, 영화 ‘울지마 톤즈’에 촬영장면 삽입
“겨울이 오기전에 톤즈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난 2008년 서울에 온 이태석 신부(2010년 1월 14일 선종)을 모시고 병원을 찾은 홍진기 (주)두산 두피디아팀 부장은 이 신부가 대장암 말기로 암세포가 간으로 전이됐다는 절망적인 진단을 들은 후 어떤 말도 건낼 수 없었다.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난감해하던 이 신부는 오히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수단 아이들과 후원자들에게 미안하다며 홍 부장에게 이렇게 말을 전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 신부를 떠나 보낸 홍 부장은 그 때 그의 표정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단다.
홍 부장이 이 신부를 알게 된 것은 2003년 방영된 KBS의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서였다. 이 신부는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광주 가톨릭대를 거쳐 살레시오회에 입회에 2001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수단으로 파견돼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방송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2006년 여름 휴가차 서울 살레시오 수도원을 방문해 잠시 머물러 있던 이 신부를 찾아갔다. “첫 만남 이었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동안 나누게 됐다. 특히 야생동물을 촬영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라는 소개를 받았다”며 “제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드리려고 하자 신부님은 ‘직접 톤즈로 와서 찍는게 어떻겠느냐’며 초대를 했다”고 말했다.
별 생각 없이 “가겠다”고 답했는데, 1년 뒤인 2007년 홍 부장은 정말로 톤즈로 가게 됐다. 남북으로 나뉘어 내전 중이던 수단에 들어서기 위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를 통해 북부수단 카르툼에 들어간 뒤 가톨릭 선교사 신분으로 위장해 경비행기를 4시간이나 타고 날아간 끝에 남부 와우로 날아갔다. 공항에는 이 신부가 마중을 나와 있었고, “여기가 어디라고 이곳까지 찾아왔느냐”며 반갑게 홍 부장을 안아줬다.
이 신부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톤즈는 말 그대로 불모지 였다.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 우기만 되면 습지로, 건기에는 땅이 갈라지는 그곳에서 이 신부는 새벽에는 가톨릭 사제, 아침이면 의사와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 점심때는 학교를 짓는 벽돌공, 저녁이면 브라스밴드 지휘자와 음악선생님, 밤이 되면 다시 응급실 의사가 돼 병원으로 불려가는 일상을 8년 여간 버텼다.
선교사로서 의사로서의 봉사활동도 어려운데 선생님 역할까지 자임한 이유는 “교육만이 수단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이 신부의 소신 때문이었단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만 이 아이들이 커서 아프리카가 달라지게 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이 신부는 학교를 짓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현지 상황이 워낙 열악했던 탓에 자재를 공급받기가 쉽지 않았다. 마을 주민, 아이들과 직접 벽돌을 만들고, 망고나무 서까래를 올려 건물을 지어야만 했다. 홍 부장이 촬영을 위해 온지 일주일이 지나서는 쌀이 떨어져 먹을 것이라고는 뒤뜰의 토마토가 전부였다. 홍 부장이 보기에 도움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원주민이 아니라 이 신부 자신이었다.
2008년 왕복표를 끊어 서울로 왔다가 병명을 알게 된 이 신부는 고통스러운 항암제 투여를 견뎌내며 다시 톤즈로 돌아갈 희망을 놓지 않았단다. 그 해 자랑스러운 의사로 선정되자 이 신부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병세는 악화됐다.
영면 하루 전 홍 부장이 병실을 찾아갔을 때 침대에 잠시 앉아 있던 이 신부는 “서울의 야경을 보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이 신부의 감동적인 삶을 다룬 영화 ‘울지마 톤즈’ 엔딩 크레딧에는 ‘촬영 두산 홍진기’라는 이름이 들어있다. 이 신부와의 인연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한 홍 부장이 수단 현지에서 촬영한 장면을 기꺼이 영화 제작을 위해 내놓았다.
잠들지 않는 톤즈 병원, 톤즈 병원의 유일한 의사 이태석신부는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린 그의 톤즈을 향한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
그의 사랑이 많은 소중한 생명들을 살려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아.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이태석신부 인터뷰 중-
병원과 학교의 전기를 위해 이태석신부는 직접 태양열 집적판을 설치했고
그것은 약 보관을 위한 냉장고를 위한거였다고 한다.
이태석신부는 이렇게 톤즈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그들을 사랑햇고
그들의 친구이자 아버지 교육자 의사였다고 한다.
이태석신부는 한센인(문둥병)들을 특히 사랑했는데 감각이 없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한센인들을 위해
한사람 한사람에게 신발을 만들어 신겼다고 한다.
톤즈 사람들이 들고 있는 이태석신부의 사진을 보며 알수 있는건.....
이태석신부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톤즈를 사랑했는지 알겠네요.
이태석신부는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한 것이
바로 사랑이었다고 밖에 말을 못하겠네요.
누군가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다른 나라 사람을 이토록 사랑한다는 사실 앞에 머리가 숙여진다.
이태석 신부의 죽음에 톤즈는 오열했고 아무도 믿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이태석 신부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톤즈는 이제 다시 10년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울지마 톤즈'라는 제목인가 보다.
정말 이태석 신부를 위해서라도 톤즈는 이제 울지 말고 잘 살았으면 좋겟다.
울지마 톤즈!! 울지마 톤즈!!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이 죽어서라도 울지마 톤즈!!라고 할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