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3.11:30 水. 흐림
앉으면 모란牧丹이요, 서면 작약芍藥이고...
오늘 이른 아침에는 하얀 눈이 내렸으나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에는 가을비로는 조금은 많다싶게 투명한 비가 내렸다. 비는 집에서 나설 때도 내렸고, 화성휴게소에서도 내렸고, 제1주차장에서도 내렸고, 차를 산기슭 공터에 주차시키고 나선형의 돌계단을 오를 때도 계속해서 내렸다. 입정入定 중에도 지시랑물이 되어 투욱..투욱.. 처마 끝에서 떨어지던 그 비는 법회를 마치고 법당에서 나왔을 때야 슬그머니 멎어있었다. 비는 그쳤지만 물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하며 멀고 가까운 하늘을 짙고 두텁게 드리운 잿빛구름은 산중의 작은 암자를 하얗고 부연 그림자 속에 담쑥히 가두어놓고 있었다. 비와 구름과 바람은 ‘담푸르고 그윽한 산, 그 산 안에 똑 작은 방이 하나 들어있네’에서의 똑 작은 방으로 천장암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작다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천장암에서 커다란 것이 딱 두 가지가 있다면 하늘을 향해 툭 트인 허공과 음력 보름날밤 하늘을 구르는 보름달 정도라면 그저 아쉽잖게 고개를 끄덕여줄까.
대낮의 등불처럼 평소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가 어쩌다 비가 올 때면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 본명이 윈드실드 와이퍼라고 부르는 자동차의 창닦이이다. 차창車窓에 부딪혀 혼탁해진 빗방울들로 인해 시계視界가 불확실할 때 창닦이가 한 번 지나 가고나면 세상의 풍경들이 거짓말처럼 맑고 투명하게 바뀌어버린다. 그것은 마술이나 요술이 아니라 있고 없음의 차이다. 모자라거나 없는 것을 충분히 있게 함으로써 편리하게 하는 것이 있는가하면 어수선하거나 있는 것을 아예 없애줌으로써 편리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빈 것과 채운 것은 상호 견제牽制와 조화調和를 통해 자연의 이법을 완성해가고, 생명 있는 것들의 삶과 죽음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비가 내릴 때면 평소보다 자동차의 속력을 낮추어야한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지식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깃털 파릇한 청춘만이야 하겠는가마는 구태여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이 어쩌다있다면 도로 위에서 더 이상 자동차의 스피드에 매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대목에서 은근히 들춰내보고 싶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날에는 나는 평소보다 자동차를 천천히 운전을 한다. 그런데 이 천천히가 우리들에게 주는 미덕美德이 있다면 주어진 시간 속에 잠깐 생각의 겨를을 만들어준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우리 주변에서도 한동안 이런 말들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천당天堂아래 분당이 있다고. 그 당시에는 같은 신도시인 일산이나 산본 주민들에게는 서운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투의 말이 괜히 나왔을 리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눈부신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를 않았는가? 하늘엔 천당,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라고 중국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떠들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또 소주蘇州는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다고도 했다. 그리고 소주蘇州에서 태어나서, 항주杭州에서 살고, 광주廣州에서 먹고, 류주柳州에서 죽자.라는 긴 속담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온화한 날씨에 비단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해서 부유했던 소주와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미인들이 많았던 항주, 음식문화가 다양하게 발달했던 광주와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었던 류쥬가 중국사람들을 한통으로 꿰뚫는 라이프스타일의 이상향理想鄕이 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한 귀착점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중국사람들이 태어나고 싶고, 살고 싶어 하는 옛 오吳나라 땅의 소주와 항주는 날씨가 온화하고 경제가 부유한데다 미인美人 배출이 많은 내력 있는 고장이니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곳인지라 다음의 긴 속담도 아마 이 지방 부근에서 생겨났을 듯한 생각이 든다.
‘앉으면 모란牧丹이요, 서면 작약芍藥이로다.’
미인美人을 형용하는 입담을 문학의 수준으로 올려버린 이 문장을 어떤 사람들은 일본속담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立てば芍藥 座れば牧丹 步く姿は百合の花’ 서면 작약이요, 앉으면 모란, 걷는 자태는 백합이라. 그런데 이 일본 속담에서는 야릇한 냄새가 피어난다. 일본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좋아하는 꽃은 벚꽃이고, 일본 황실 문장으로 국화문장을 쓸 만큼 국화를 좋아하는 분위기인데, 미美의 최상급을 지칭하는 꽃으로 갑자기 모란과 작약이 뛰쳐나왔다는 말은 왠지 어디선가 이 문장을 차용해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모방을 했거나 차용을 했다면 아마 ‘앉으면 모란牧丹, 서면 작약芍藥이로다’가 원문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도 꽃 중의 꽃인 작약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군대를 제대한 다음해인 26살이 되던 해의 어느 늦은 봄날, 고향집 대청마루에 앉아 널따란 화단에 활짝 피어있는 작약꽃을 보면서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벼락처럼 내리쳤던 것이다. 이다음에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으면 첫째는 禪彬, 둘째는 秀彬, 셋째는 漢彬, 넷째는 文彬이라고 이름을 지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실제 결혼은 6년 뒤에야 하게 되었지만 아이들 이름은 태어나는 순서대로 禪彬과 秀彬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우리부부도 시류에 따라 둘만 낳았기 때문에 漢彬과 文彬은 사용을 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가슴속에 남겨두게 되었다.
‘앉으면 모란牧丹이요 서면 작약芍藥이고...’ 윈드실드 와이퍼가 훑고 지나간 말간 차창車窓 밖의 비오는 풍경으로 가멸찬 눈 호사豪奢를 해가면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가는 내내 모란과 작약을 생각하면서 운전을 했다. 일요법회를 마치고 점심공양을 들고 나서 일행들은 평소보다 다소간 적었으나 기꺼운 마음으로 사찰순례를 하는 동안에도 모란과 작약을 생각하면서 돌아다녔다. 월越나라의 서시西施나 왕소군王昭君이 아니라도 미인이 되고픈 사람들은 모두 모란이요 작약의 형상을 스스로 노력하는 만큼씩 닮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다. 원래 미인美人이라는 말의 근본이 美라는 글자에서 나왔던 것처럼 원래 美란 羊 大, 곧 커다란 양처럼 순일純一하게 위엄이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었을 테니까.
(- 앉으면 모란牧丹이요, 서면 작약芍藥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