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한때 학교 운동장에는 어김없이 구령대가 있었다. 구령대는 군대 연병장의 풍경이 학교 안으로 들어온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었다. 교사는 지휘관이 되고, 학생들은 대열을 맞춰 선 채 교사의 구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구령대의 원리는 나름 합리적이었다. 많은 학생을 한꺼번에 통솔하려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아야 했다. 같은 눈높이에서는 뒤쪽에 선 학생들이 잘 보이지 않아 전체를 살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령대는 대개 1미터 이상 높게 만들었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은 학교에서는 쇠파이프로 조그맣게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많아야 두세 명이 올라설 수 있는 크기였지만, 대개 교사 한 사람이 올라가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도시의 큰 학교에는 철근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지은 구령대도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만큼 견고했고, 규모가 큰 것은 그 자체로 위압감을 주기도 했다.
구령대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날은 월요일이었다. 이른바 ‘애국조회’가 열리는 날이다. 교무부장이 조회를 진행하고, 마지막에는 교장의 훈화로 마무리했다.
월요일 아침이면 이른바 월요병 때문인지 눈꺼풀은 무겁고 머리는 멍했다. 출근해도 나른함과 피로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행진곡이 동네가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교사와 학생들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행진곡은 애국조회가 시작된다는 신호였다. 군대 행진곡이나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우렁차게 울려 퍼지면 아이들은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체육부장은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을 줄 세우느라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앞줄 맞춰! 줄 똑바로 서!”
아침부터 운동장에는 고함과 발소리가 뒤섞였다. 세월이 갈수록 아이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도 그 무렵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달라진 것인지,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기준이 달라진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봄과 가을에는 그나마 운동장 조회를 견딜 만했다. 그러나 여름방학을 앞둔 뙤약볕 아래서 하는 애국조회는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교사들도 싫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쩔 수 없이 운동장에 서 있어야 했다. 아이들은 오죽했을까. 햇볕 아래 오래 서 있다가 몸이 약한 학생이 픽 쓰러지는 일도 간혹 있었다.
겨울이라고 사정이 나을 리 없었다. 12월과 2월의 아침바람은 동상이 걱정될 만큼 매서웠다. 발가락 끝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어붙고, 양쪽 귀에는 떨어져 나갈 듯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그래도 조회는 빠지지 않았다. 춥다고, 덥다고 예외를 두는 법은 없었다.
애국조회는 애국심을 고취하고 극기 정신을 기르기 위해 마련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춥고 더워도 운동장에 모여 국민의례를 했고, 애국가도 반드시 4절까지 불렀다. 국민의례가 끝나면 학교장의 훈화가 이어졌다.
훈화는 교장에 따라 내용과 길이가 달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길어지면 아이들은 몸을 비틀고 하품을 했다. 교장 선생님은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했지만, 학생들의 마음은 어느새 운동장 저편을 떠돌았다. 당시의 교육은 위에서 아래로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주입하는 성격이 강했다. 그러한 권위주의적 교육 풍토가 애국조회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귀가 따갑도록 훈화를 들었다. 그런데 교사가 된 뒤에도 32년 동안 훈화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교장이 되고 나서는 입장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번에는 내가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 앞에서 훈화를 해야 했다.
‘시집살이를 지독하게 한 며느리가 나이 들어 며느리를 보면 더 모질게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말이 있다. 나 역시 학생이나 평교사 시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으면 어느새 내가 중심이 되어 하고 싶은 말을 길게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듣는 사람의 지루함은 생각하지 못한 채, 좋은 말이니 많이 들려주면 좋으리라 여겼을 수도 있다.
돌아보면 나 또한 그 시대의 학교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비판의 대상이었던 권위주의적 관행에서 나 역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애국조회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침부터 고생했던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반면 공부를 잘했거나 체육·예능대회에서 상을 받은 학생에게는 높은 구령대에 올라가 상장을 받던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같은 운동장에 서 있었어도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억으로 남는 것은 아니다.
애국조회는 군대식 집단교육이 학교에 스며든 대표적인 모습이었다. 강제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던 당시의 교육은 민주적 시민의식을 기르기보다 국가와 집단의 가치를 앞세우는 데 가까웠다. 다만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극기 정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을 찾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한 시대의 교육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밀레니엄 시대에 접어들면서 학교 현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키던 애국조회가 점차 방송조회로 바뀌었다. 방송실에서 조회를 진행하게 되면서 찜통더위나 엄동설한에 학생과 교사가 운동장에 서 있을 필요도 없어졌다. 행진곡이 울리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던 풍경도 하나둘 사라졌다.
집합교육의 상징이었던 애국조회가 사라지면서 학교의 풍경도, 사회의 가치관도 달라졌다. 민주화가 진전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국가와 집단의 가치만을 앞세우던 분위기도 달라졌다. 억압적이고 강제적이며 권위주의적이었던 애국조회는 어느새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이제 애국조회는 과거의 한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그 문화 속에서 살아온 나 같은 노년층에게는 아직도 행진곡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며 노파심을 드러내곤 한다.
“요즘 아이들은 예전보다 참을성이 부족한 것 아닌가?”
“애국심도 예전만 못한 것 같아.”
“개인주의가 너무 팽배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 번 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사회와 문화는 끊임없이 변한다. 어제의 기준으로 오늘을 재단할 수만은 없다. 예전의 질서가 사라진 자리에는 또 다른 가치가 자리를 잡는다. 과거의 방식이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며, 지금의 방식이 낯설다고 해서 반드시 잘못된 것도 아니다.
이제는 노파심 어린 지적을 앞세우기보다 서로 다른 목소리와 문화를 인정하고 존중할 필요가 있다. 지나온 시대를 무조건 부정할 일도 아니지만, 그 시대의 기준을 오늘의 아이들에게 그대로 요구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느 날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래전 구령대 위에서 들려오던 힘찬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차렷! 경례!”
수많은 아이와 교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친다. 운동장에는 터키 행진곡이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줄을 맞춰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 시절을 바라본다.
구령대는 보이지 않는다. 그 위에 서서 학생들을 향해 목청을 높이던 교사도, 마이크를 잡고 훈화하던 교장도 이제는 기억 속의 인물이다. 그러나 그때의 목소리와 행진곡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남아 있다.
아마 그것이 애국조회가 내게 남긴 마지막 풍경일 것이다.
2026.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