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부의 엽전 한 잎
길거리 목사로 소문이 나자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사람들도 나를 찾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어려운 일이 생겨서 한강성심병원 영안실로 같이 가달라는 전화를 받고 가면서 이야기를 들으니 고향사람의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간밤에 연탄가스로 죽었다는 것이다.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경상도 청도라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시커먼 농투성이인 이 양의 아버지가 상경해서 영등포 경찰서로 갔지만 담당 형사가 사람대접도 제대 하지 않는데다 낯선 객지에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몰라서 애를 먹는다는 것이다. 답답해하다 못해 고향사람들을 찾다 보니 어렸을 때 고향을 떠나 별 소식도 없이 지내는 자기에게까지 연락이 오게 되었고, 또 이런 일은 처음 당하는 일이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를 몰라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영안실에 가보니 희생자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전라도 시골에서 온 오 양과 함께 변을 당한 것이었다. 오양이 먼저 돌아와 방 안쪽에서 잠을 잤는데 12시가 넘어 들어온 이 양이 옷도 벗지 않은 채 한 발은 구두를 신고 한 발은 맨 발로 문지방에 걸 터 누운 채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농촌에서 어렵게 자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그녀들은 공장보다는 서비스업종이 편하다는 생각에서 중국집에 들어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술을 먹고 잔 것 같았다. 추리를 해본 결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연탄을 갈고서 뚜껑을 제대로 덮지 않았고, 나중에 들어온 이 양이 술을 먹고 들어와서 방바닥에 몸을 걸치자마자 나가떨어져 잠이 들어 변을 당한 것이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지만 오 양은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늙은 할머니만 있고 이 양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밖에 없어서 허술하게 그대로 보내는 도리 밖에 없었다. 누구 하나 책임성 있게 일의 결말을 보도록 추진해 볼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경우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고 그저 같이 왔다 갔다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평생 쓸데없는 짓들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의미나 가치가 없어서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죽자고 애를 써서 해봐도 결과가 없는 많이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결과를 볼 수 없는 일 즉 효율이 낮은 일들에 매달려야 했다.
1992년 6월에 어느 날 알지 못하는 학교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은 신촌성결교회에 주일학교 담당 교육전도사로 있는데 자기 교회의 신자 한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 주변 사람의 일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큰 교회 교인의 문제까지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지만 하도 간곡히 부탁을 해서 일단 만나 보기나 하기로 했다.
나를 찾아온 사람은 아주 왜소한 모습의 30대 중반의 주부였다. 중소기업체의 과장으로서 성실하게 일하면서 오랫동안 학생회 지도를 맡고 있던 남편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그만 차에 치어 사망을 했다.. 무면허 음주 과속운전을 하던 가해자가 남편을 병원에 실어다 놓고 도망을 가버렸다.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서 가해자를 알 수는 있었지만 경찰이 잡을 생각도 안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싸고도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럴만한 것이 가해자가 여러 번의 전과가 있는데다 큰 호프집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에 관내 경찰과는 상당히 유착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담당형사는 합의를 해주지 않으니까 가해자가 자수를 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빨리 합의를 하라고 종용하고 있다. 하늘같은 남편을 갑자기 잃어버린 것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판에 경찰이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서서 일을 처리하는 꼴을 보니 기가 막히고 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그녀는 세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교통사고에서는 경찰이 돈이 나올 일이 없는 피해자보다 돈이 나올 만한 가해자 위주로 사건을 처리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인 것이다. 가해자는 계속해서 숨어 다니면서 형을 내세워 합의해 주기를 요구하는데 그나마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어음을 끊어주겠다고 한단다.
그녀에게 더욱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일은 그의 가족이 십 여 년을 다닌 교회의 목회자들의 태도이다. 장관도 있고 국회의원도 있는 큰 교회이지만 담임 목사는 가난한 신자가 당한 불운을 알 리가 없고 부교역자들만 처음에는 관심을 좀 가지다가 일이 계속 어렵게 꼬이자 은혜롭지 못한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하기를 꺼려한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보다 못해 신학생이 나에게 신고(?)를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별 일이 없을 때는 모르지만 뒤로 쳐질 때 붙잡아 줄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었다. 이 여인은 빽 없고 돈 없고 아는 것 없는 민초들이 당하는 재난과 소외를 몽땅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경찰 측에도 연락을 해보고 변호사와도 의논을 해보았다. 결론은 가해자가 끝까지 피해 다닐 수는 없을 테니 조급하게 합의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또 한 가지는 경찰서 앞에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밖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어 그저 함께 아파할 뿐이었다.
가시가 박힌 손가락으로 물건을 만질 때면 조금만 닿아도 아파서 모든 것을 조심조심하면서 만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마음에 상처가 있으면 모든 일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나의 예민한 상처가 때로는 남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몇 달 후에 그 여인이 다시 나를 찾아왔는데 다행히도 합의를 하고 가해자가 자수를 해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건이 해결되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한다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보상 받은 돈의 십일조의 절반은 본 교회에 절반은 생활교회에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보상금, 그것도 사람을 잘못 만나서 정당하게 받지도 못하고 헐값의 보상을 받은 돈으로 십일조를 하겠다는 그 여인의 생각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가 당한 고통에 무관심 했던 큰 교회에 십일조를 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큰 교회는 그녀의 헌금을 회계장부에 기록하겠지만 우리 교회는 십일조를 받을 수 없다고 하자 그녀는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나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일단 돈이 들어오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그녀의 단순한 믿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이 돈을 우선 내가 보관하는 걸로 하자, 그러나 생각이 달라지거나 더 좋은 곳에 쓸 곳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가라”
그러나 그 여인은 그 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이 돈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 동안 생각만 해오던 교회 건물을 얻는 데 사용하기로 했다. 몇 명 안 되는 생활교회 식구들이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데는 조용한 카페나 우리 집에서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지역사회를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건물이 절실히 필요했었다.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고인도 자기의 죽음을 밑거름 삼아 교회가 세워진다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뜻을 그녀에게 전했더니 그녀도 그렇게만 되면 더 이상 기쁠 일이 없겠다고 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다시 건물을 얻으려는 노력을 시작해서 그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돈에 대한 부탁을 하지 않았었지만 모금을 하기로 하고 후원자들 가운데 부담이 크게 되지 않을 분들에게 부탁을 해서 조금씩 돈을 모아나갔다.
드디어 가난한 과부의 십일조 450 만원을 종자돈으로 해서 3000 만원이 만들어져서 역곡에 25평 짜리 지하 건물을 얻게 되었다. 병원 원장과 헤어지면서 사라졌던 공간을 7년 만에 가난한 과부 탓에 다시 마련하게 된 것이다. 국회의원이었지만 역시 가난한 안동선 의원이 외상으로 250만원을 들여 교회 책상과 의자들을 마련해 주었다. 기적적으로 마련된 공간에 교회를 꾸미면서 처음 석관동에서 생활교회를 시작 할 때 가졌던 서구적인 아닌 한국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교회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강원도 횡성의 산골짜기에 가서 솔잎 파리병으로 죽은 70년생 소나무들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차를 빌리고 청년들과 함께 가서 산 주인의 허락을 어렵게 얻어냈다. 그렇게 베어낸 죽은 소나무를 목재소에 부탁해 인류 최초의 신앙 모델인 고인돌 모양을 본뜬 강대상을 만들었다. 남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드디어 지하실 교회에 입당하는 날 안동선 의원을 비롯해서 그 동안 후원을 했던 분들, 중동 철거민들이 지하실이 꽉 차게 모여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흘릴 눈물들
이 생명 다한 후에 다 씻어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 보다 더욱 귀한 건 생명을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 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이 세상 사는 동안 내 받을 상처들
이 몸이 묻힌 후에 다 잊혀지리니
이 길을 가는 동안 지쳐 쓰러져도
그 보다 더욱 귀한 건 자유를 봄이라
곤한 내 혼아 눈을 들어 저 빛을 향하여
아무도 뺏지 못 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교회 입당을 하자마자 첫 번째 행사로 신학대학 후배들끼리 하는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지하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을 보고 이웃 주민이 ‘이렇게 조그만 교회에서도 결혼식을 하나?’라고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교회 전세금을 마련하려고 애를 쓰다가 혹시나 끊어진 관계를 회복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닥 미련을 품고 연락이 두절되었던 원장 부부를 찾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장 부인이 3억 5천만 원의 부도를 내고 의정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감옥에 갔다는 소식이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인생과 사회를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되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서 염장을 지르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를 해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사 님!
면회를 갈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그 동안의 옥바라지 경험으로 보아 형식적인 면회보다 편지를 쓰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교도소에 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도 막상 들어가게 된다면 힘이 들 터인데 얼마나 견디기가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되어서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더욱이 그 이야기는 오늘과 같이 집사님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에 집사님이 무엇이든 열심히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한다고 믿는 믿음이 좋은 믿음은 아니냐고 물었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질문이 바른 질문이었는지 스스로 한 번 가다듬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을 가진다면 구치소 안에서 마땅히 보아야 할 사실들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사님도 이제 아시게 되겠지만 구치소에는 남에게 전혀 피해를 준 사실이 없거나 혹은 피해를 주어보았자 아주 사소한 손해를 입힌 사람들이 그들이 입힌 피해에 비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경우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곧 풀려 나올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만 그 동안 집사님 주위의 사람들이 입었던 상처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집사님을 섭섭하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집사님이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실까 염려가 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축복은 돈 잘 벌고 건강하고 자식들 출세하는 값싼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모두 장차 축복을 받기 위한 연단이나 환란도 아닙니다. 모쪼록 이번의 경험이 집사님의 생애에 가장 복된 기회가 되기를 바라며 나올 때까지 건강을 빕니다.
‘혹시나’는 ‘역시나’로 답장은 오지 않아서 우리들은 영원히 다시 만날 일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원장 부부는 나를 광야의 훈련을 받도록 안내한 천사였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직업적인 목사로서 제도권 교회에서 무사안일하게 목회를 하다가 은퇴 후 교회에서 대접 받는 것에만 의존하고 있을 평범한 목사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이 땅의 민중들이 먹고 싸고 숨쉬고 죽는 현실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