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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녹색화원 ◎ 2006/5/17(수) | |
성저1리 마을전경
마을 뒤쪽으로는 왕산이 자리잡고 있고, 마을 앞에는 영강이 흐르며 관산들과 새들이라는 넓은 들이 있다. 그리고 왕산 뒤쪽으로는 성저굴이 있으며, 성저굴 아래 굴뜽과 모산이라는 동래가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도살지않는다. 모산 동래를 넘어오면 새트마을이있다. 옛날에는 20여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6가구가 살고있다. 몇년 전만해도 주로 담배농사를 많이 경작하였으나 지금은 인삼을 많이 재배한다. 0 성저(성밑) 마을입구 2 신 농촌마을 기념비 3 성저1리 마을회관 1999년 6월 20일 문경시 우수마을로선정 도비.시비를 보조받아 회관을신축하였다 4 성저리 교회 5 "上敬下睦 " 표석의 글 내용이 가슴에 와 닫는다. 옛날에는 이곳마을도 단합과 단결이 아주 잘 되었다. 학교 운동회때나 읍민체육대회때는 우승을 여러번 찿이했다. 그러나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같은 동족간에도 의견이 맏지않아 수년간 한치의 양보도 없이 지내고있고 마을 일부 주민들도 상반된 의견충돌로 스로 등을 돌리고 있다. 위 표석의 내용과 같이 같은혈육과 또한 주민들간의 단합과 단결된 모습이 하루속히 이뤄 지기를 기대해본다. 시.도비 6천만원과 주민들과 출향인의 선금으로 건립. 노령화대어가고있는 농촌에 없어서는 않될 건립한 건강관리실. 느티나무에 전래되는 설화등 내력은 수령300여년된 느티나무는 둘래가 530cm 놓이약 20m이며 1982년10월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10 이 느티나무는 "조선 선조때 우의정을 지낸 동래정씨 타암공 정언신 선생이 느티나무 9주를 심고 마을이름을 구괴정 이라 하였으며, 동학난때 6주가 고사되고 현재3분만 현존하고있다. 11 이 마을 이장이며 가은읍 이장자치회장인 김인습씨는 뒷편에 보이는 느티나무는 300년이라고 돼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약 450년이 지난것이라고 동래 어르신들께서 말씀했다고 했다 12 이 마을 입구에는 ‘현감김후룡진수세불망비(縣監金候龍鎭永世不忘碑), 현감이공덕령청덕선정비(縣監李公德齡淸德善政碑), 현감정공석범청덕선정비(懸監鄭公錫範淸德善政碑)와 같은 비석이 세 개 남아 있다. 이것은 이 마을이 과거에 현(縣) 소재지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석 내용에 가현(加縣), 가동(加東), 가북(加北), 가남(加南), 가아(加亞)라는 지명들이 나타나 있다. 또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도 이 마을은 가은면 소재지였었다고 한다. 13 성재산 예전에 현 소재지로서 성유 1리와의 경계인 야산에 성이 있어서, 성저리는 성밑 마을이라 하고 성유는 성너머라고 한다. 그러나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성의 흔적인 주춧돌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관산보를 만들면서 주춧돌을 파내어 사용했다고 한다. 14 우봉이씨 정자(성유리 마을 영강천변) 15 성재산 ( 성넘어 ) 16 인삼밭 17 담배 밭 18 성유 (반구머리) 마을 전경 19 성유리 마을 회관 020 성밑 과 성유마을 사이 동바리 20 마을앞 영강천 과 새들보와 사지막골 21 대덕자재백화점 송준명 사장 자택 22 대덕자재백화점 송준명 사장 자택 23 꽃밭을 손질하는 안씨 아주머니 24 마을 뒷 밭에는 담배와 인삼밭을 타지(농암)에서 오신 분들이 많이 경작하고 있다. 이곳에서 밭을 경작하다 보면 썩은 쌀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뒤쪽의 왕산은 그 생김새가 ‘왕(王)’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인 명칭이다. 25 담장넘어 수국이 만개하고.... 26 ( 남성엽씨 모친) 주택물받이 공사를 하는중이라 한다. 27 ( 남성엽씨 모친) 주택물받이 공사중이다. 28 성저1리 마을안 골목길 29 7순이 넘어신 이칠영어르신께서 건강한모습으로 모자리논에 다녀오시는중이라며 반갑게 맞아 주신다. 30 본동 마을골목길. 옛 다니든길과는 많이 다른모습이다. 32 마을 앞 느티나무 마을의 형성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지금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 제일 먼저 이 곳에 들어온 성씨는 남씨인 것 같다. 남씨의 14대조가 하괴에 먼저 들어왔다가, 그 후손이 이 마을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송 심씨가 약 330년 전부터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봉 이씨는 이 근처 마을에서는 아주 오래 살았지만, 성저리에 들어온 것은 약 100년 정도이다. 이들 세 성씨가 현재 성저리의 주 성씨를 이루며 살고 있고. 송씨와 김해 김씨도 30여가구가 살고있다. 33 들(논)에 다녀오는 이정무씨는 3일후에는 모내기를 한다고 했다. 34 새트 마을입구 오토바이를타고오는 금중화 씨 성저리는 크게 ‘성밑’과 ‘새터’라는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성밑은 성 밑에 마을이라는 것이고, 새터는 새로운 터전에 형성한 마을이라는 것이다. 35 고인이 된 친구집앞의 곱게물던 단풍나무는 아름답기만하다. 36 어릴때 뒷동산에서 뛰어놀든 동갑내기 친구는 작년겨울에 먼 하늘로 가버리고 백발이된 노모는 나를 보시드니 눈물을 흘리신다. 나. 어린시절 뒷집에 살았던 곱던 형수님도 7순이 머지않아서인지 할머니가 되어버렸네. 37 (현재 남명희씨 자택) 내가 태어난 가은읍 성저리 36번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곳이다. 38 옛날 어릴때는 초가집이었으나 60년대후 기와집으로 변모. 지금은 현대식으로 10여년전 신축된 건물이다. 39 작년 봄 담장을 흘고 새롭게 주변 화단을 잘 가꿔놓았다. 40 세트마을 전경 (앞산) 이곳 새트마을도 60년대 20여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6가구가 살고있다. 정월 열 엿새 귀신달군날에는 성저굴에 푸짐한음식을차려 풍물패들이 한바탕 굿을 벌린다. 11 김정길 가은읍장 동민들과 기세베 제를 지낸다. 이 마을은 음력 정월 보름날 밤에 마을 제(동고사)를 지낸다. 성저 모산굴 모산굴 기세배 굿은 임란 당시 이곳 모산굴로 피란왔다 왜군에 발각된 뒤 고추 연기에 질식돼 숨진 지역민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한판 풍물굿으로 해마다 음력 정월 열엿새 날 열리고 있다. 6 성저리 동민과 이웃 마을에서 구경온 주민들. 이같이 원혼을 위로하는 한판 풍물굿은 한때는 멀리 상주에 이르기까지 마을 기(旗)와 풍물패를 앞세우고 모산굴 앞에 모여 원혼들에게 세배를 올리고, 각 마을의 풍물패들은 서로 장단과 가락을 겨뤘었는데 그동안 사라졌다가 96년부터 재현돼 행해오고 있다. 해마다 귀신달군날에는 문경시장을 비롯한 각 기관장 주민500여명과 가은 불우리풍물패가 성저굴에 가서 제를 지내고 기세베굿을 한판 벌린다. 41 저녘 해질무렵 취재를 마치고 새트마을 입구 배추밭과 멀리보이는 옥녀봉. 어릴적 다니던 꼬불꼬불한 논둑길이 어련풋이 생각난다. |
첫댓글 농암을 지나칠때 무심코 지나던 동네...님의 자세한 취재 설명에 다음에 지나칠때는 감회가 새롭겠군요,고맙읍니다
선배님,,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자랑할만 하십니다 물좋고 공기좋은고향 굿입니다
성저에 고모님께서 사셨기에 어릴적에 자주 갔던 곳이죠!!! 사진을 보니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성저마을과 새터를 잘 몰랐는데 자세한 설명에 감사합니다..지금 저희 둘째고모님댁이 바로 꽃집아저씨님께서 태어나서 자라신곳이군요..새삼 정이 더 가면서 반갑게 다가옵니다..사진과 함께 잘 보고 갑니다..
위에 동해바다가 제 동생이예요..초등학교때 고모네 오빠들하고 저위에 있는 굴에 들어가서 구경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름니다....임종배씨라고 아실련지? 고종오빠입니다.
그랬군요! 임종배씨는 내 친구지요. 지금도 위 사진에 있듯이 지금도 고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 아주 근실한분입니다.
글과 그림 참 잘 보았습니다. 언젠가 개골산 근처에 있는 소양 서원(?)에 가서 서성이다 온 적이 있는데 그 서원의 유래라든가 성저 출신의 한학자에 대해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깨끗한 동내 입니다...
내고향 성저리 지금 보니 더욱더 정감가고 새롭습니다 고향에 모든분들 안녕하시죠???/ 인사 올립니다
내고향 성저리 지금 보니 더욱더 정감가고 새롭습니다 고향에 모든분들 안녕하시죠???/ 인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