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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2019년 무기력해지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열정과 냉정을 유지하려 애를 썼습니다.
지쳤을 수도, 좋아하는 마음이 옅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진심 이해하고 인정하니
다시 마음은 평온해졌습니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이고
부디 돌아 돌아가더라도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오늘을 지탱하게 합니다.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하고 기도합니다.
편집후기
혼자 보다는 함께 가는 여행이 즐겁다 했던가요?
인생에 좋은 길잡이, 길동무로
함께 하는 “꽃자리” 회원님들이 너무 소중하고 늘 감사합니다.
14호 출판에 애써주신 장호병교수님, 김은영선생님을 비롯해
회장님, 우석선생님 그리고 여러 회원님 고맙습니다.
2020년도 서로 아끼는 마음 변하지 말고 항상 함께 하길 소망해봅니다.
<약력>
수필동인 꽃자리회원
현, Gem'美 대표.
MV.KOREA(한국주얼리평가협회)중앙회이사.
2018년<한국수필>신인문학상.
기생충
지난 5월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혹 실망할까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갈 정도로 영화에 몰입했다. 배우들의 연기력과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현실에 대한 구체적 공감이 뛰어났다. 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이야기하자면 예술성이 뛰어나지는 않았다. 특히 내가 제일로 손꼽는 영상미가 부족했고 또한 여운이 남는 ost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는 게 아쉽다. 다만 감독이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는 섬뜩하고도 잔인하게 뇌리에 꽂혔다. 요즈음 현실을 비꼬듯 풍자하고, 비판하듯 반전의 연속은 슬프기까지 했다.
세 가족의 삶, 지하와 반 지하 그리고 복층의 구조를 오가며 속이고 속는 과정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이 영화에서는 빈부의 격차를 상징적으로 높고 낮음, 좁고 넓음으로 설명하면서도 모호한 경계인 ‘선’, 그리고 냄새를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다.
선(線).
이선균(극중 박사장)이라는 자가 여러 번 언급한 선(線)은, 감히 넘겨보지 못하는 경계이면서 침범 받고 싶지 않은 경계를 말하고 있다. 땅을 기준으로 땅 아래, 그리고 땅 위의 삶은 빈부의 격차, 신분의 차이로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위로 올라가려 해도 현실에서는 절대적 불가능으로 해석하고 있다. 송강호(극중 기택)는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지하로 숨어들어가는 것과 박서준(극중 민혁)이 절친인 최우식(극중 기우)에게 박사장 딸의 과외를 대신 부탁하는 것은 감히 연인으로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에 일말의 의심을 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왠지 씁쓸한 장면이다.
냄새(smell).
역시 이선균이 언급하고 그의 아내 조여정(극중 인교)이 느끼기 시작한 냄새. 빨아도 없어지지 않는 반지하의 냄새, 가난의 냄새……. 지하철에서 맡아본 기억이 있다는 그 냄새는 평범한 사람들이 냄새이기도 하다. 봉준호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냄새는 인간에 있어서는 민감하면서도 가장 개인적인 것이기에 상대의 불쾌한 반응이 영화에서는 살인의 충동까지 이르게 한 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상대에게 불편한 냄새가 난다고 해도 쉽게 말하지 못하고 애써 참거나 그 자리를 피하고 만다. 특유의 냄새, 향이 좋게 기억하는 것은 상대와 나눈 추억이나 감정의 설렘 때문이 아닐까.
기생충은 숙주의 영양분을 빼앗아 먹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숙주의 외부에서 기생하는 것과 내부에서 기생하는 것이 있다. 내부에서 기생하는 숙주는 반드시 중간 숙주를 통해 들어온다. 기생충은 숙주가 죽길 원하지 않는다. 숙주의 죽음은 곧 자신의 파멸일 테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숙주는 기생충의 존재를 모르고 살아간다. 기생충의 존재를 아는 순간부터 괴롭거나 심각해진다. 이선균이 언급한 선과 냄새처럼 그들이 느끼는 순간부터 갈등의 시작되었고 복잡하게 얽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본주의가 낳은 기생충들로 득실거린다. 극과 극을 오가다가 반전의 구렁텅이에서 맞이하는 죽음과 살인이 의미 없이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어떤 경계선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을까?
나에게는 또 어떤 냄새가 날까?
나는 그 애매한 선과 특유의 냄새로 고민하고 싶지 않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 위태롭지 않고 적어도 나에게는 오랜 여운이 남는 향기로운 사람 냄새가 나면 좋겠다.
이 영화로 하여금 저마다 삶에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선과 악의 관점이 저마다 다른 것과 그 다름이 때로는 불가항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객관적인 잣대는 누구의 손에 들려있냐가 관건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기택이 기우에게 한 말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 이라는 결과물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실망을 할까봐 시도조차 안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매순간 스스로의 의지로 자생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Hello, 개할미
집안에서 은은한 향이 밀려오던 시절이 언젠가 싶다. 막내의 대학진학 후 남편과 둘만 지내던 지난 4년의 생활. 평온의 시절이었다. 일주일에 물걸레질 두어 번만 해도 손가는데 없이 깨끗한 집이었건만……. 청소기와 물걸레질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야 할 만큼 나를 분주히 움직이게 하는 애물단지와 동거를 한 지 한 달. 아침저녁으로 환기는 물론 탈취제를 손에 들고 다니며 틈틈이 뿌려도 특유의 냄새는 살림살이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큰애가 입양한 폼피츠(포메라니안과 스피츠의 믹스 견)가 한 달 즈음 내 품으로 왔다. 털색깔이 과자 중에 “칸쵸”색을 닮았다고 해서 칸쵸라 이름지었다한다. 7개월을 가득 채운 그 녀석은 또래아이들 보다 몸집은 1.5배. 천방지축에다 먹성은 또 얼만 좋은지. 사료는 그릇에 담기기 무섭게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며칠 굶은 표정으로 바라보기 일쑤다. 간절한 눈을 보고 있자면 더 주고도 남음이 있겠지만 사료와 간식 이외에 주지 말라는 딸아이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사람이 먹는 것을 주게 되면 사나와질 뿐만 아니라 빨리 죽는다며 통화할 때마다 당부를 잊지 않는다. 저희들 바쁘다고 드문드문하던 전화를 어찌된 것인지 매번 화상통화다. 그럴 때마다 “칸쵸”를 얼마나 절절하게 그리워하는지. 살짝 섭섭한 마음이 생겼지만 그나마 그녀들의 근황을 거의 매일 볼 수 있어 용서하기로 했다.
피곤했던 하루, “칸쵸”의 재롱을 보며 그 옛날 딸애들 키울 때 얘기를 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때를 회상하며 남편이 진심으로 이야기를 한다.
“혼자 육아하느라 정말 애썼다. 고맙고 미안해.”
“칸쵸” 덕분에 이제서라도 위로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남편 또한 어깨 수술과 갱년기로 힘든 나날이었는데 남편의 품에 안겨 격하게 안겨 재롱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많이 UP 된다는 것이다. 남편의 함박웃음이 내게는 안도의 기쁨이 되더란 얘기다.
전 주인의 파양으로 어쩌다 내게로 온 아이. 남편과 나는 미래 손주 돌보는 예행연습이라 생각하며 정성을 쏟을 것이다. 강아지를 가끔 혼자 아파트에 두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현실에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칸쵸”도 이해하리라 믿고 시간되는 대로 산책하며 놀아줄 것이다.
아프지 말고 무탈하게 오래오래 잘 지내야 할 텐데.
아울러 “칸쵸”의 냄새를 못 느끼게 되는 날이 빨리 오길 바란다. 근데 솔직히 민감한 내 후각이 무뎌지는 건 무리가 있지만 애써보고 싶다.
“칸쵸야, 우리 잘 지내보자.”
엄마의 외출
엄마가 한 달째 병원에서 생의 첫 휴가를 보내고 계신다. 엄마 말로는 식사시간이면 밥도 차려서 턱밑까지 가져다주고, 벨만 누르면 도우미가 달려와 척척 해결해 주니 너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왜 모를까 혼자 계셔야하는 아버지와 늘 오가며 정성 쏟던 텃밭 걱정을. 친정엄마는 몇 년을 망설이며 몇 번이나 미뤘던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다. 결혼 후 지금이 두 분은 가장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고 계신다. 늘 옥신각신 하시지만 함께 하셨는데, 회복까지 두 달여간 본의 아닌 별거를 해야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런데 아버지는 생각보다 너무 잘 해내고 계신다. 청소, 식사, 빨래는 물론 엄마의 작은 심부름도 말 떨어지기 무섭게 신속 정확하게 해내신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가족들로부터 전해 듣자니 마음은 놓이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게 너무 불효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뒷짐을 진 아버지의 뒷모습이 낯설다. 한쪽 어깨가 살짝 기운 듯 불편하게 걸으신다. 아침이면 등산 가방에 빈 물통 몇 개를 짊어지고 가까운 약수터에 운동 삼아 다니셨는데……. 아버지가 약수터에 발길을 끊은 지가 몇 달이 넘어 간다 들었다. 항상 꼿꼿한 자세로 재빠르게 걷던 아버지는 올해로 여든이 되었다. 작년과 다르게 눈에 띄게 쇠약해지신 듯하다. 항상 옆에서 챙겨주시던 엄마가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 중이라 그런지 더 야위어 보이고 까칠해 보였다. 예상은 했지만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티가 크게 난다. 청바지를 즐겨 입고 까만 선글라스에 통기타 들고 아가씨들 마음을 훔치던 숯검정 눈썹의 청년은 언제부터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가 된 걸까?
엄마는 오늘도 씩씩한 목소리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하루의 두어 번의 안부 통화에는 시시콜콜한 병원풍경과 매일 출석도장 찍는 아버지 이야기는 물론, 일기 쓰듯 하루일과를 술술 풀어놓으신다. 오늘은 퇴원하면 달리 살아보시겠다는 말씀에 힘을 주신다. 그리고 본인을 돌보지 못한 아쉬움과 놓쳐버린 젊은 시절의 회안으로 서글프다는 말씀에 마음이 아팠고 너무 죄송했다. 남편과 자식에 대한 무한한 배려를 당연한 의무로 살아오신 날이 헛되지는 않다는 말씀도 하셨다. 수술을 결정하기까지는 여생을 더 건강하고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엄마의 용기와 염원이 함께 했을 것이다. 엄마의 결심이 헛되지 않아서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번 주 퇴원을 하시고 다시 재활 전문 병원에서 2주를 보내신다. 수술 후 관리가 더 중요한 만큼 가족 모두 엄마의 회복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엄마의 긴 외출로 가족의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엄마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그동안 노고에 감사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 되었다. 묵묵히 엄마 곁은 지키는 아버지와 알아서 척척 잘 해내는 두 동생이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다. 부부의 인연,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 형제간의 인연은 천륜이다. 서로 빈 곳을 채우고 보듬으며 지켜봄으로서 완성되는 듯하다. 엄마는 곧 긴 외출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일상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또랑또랑한 엄마의 콧노래 소리가 봄바람에 실려 나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더불어 아버지와 두 손 꼭 잡고 남은 생은 꽃길만 걸으시길 소망해본다.
구름사다리
먼지가 폴폴 날리는 학교 운동장에는 알록달록 놀이기구들이 옹기종기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등치의 정글짐, 하늘에 닿을 듯이 쭉쭉 뻗은 기다란 철봉, 아치형의 구름사다리는 놀이터에서 형으로 한 몫을 하고 그 주위로 미끄럼틀, 그네. 시소 등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수많은 아이들이 오가며 살을 부비고 몸을 맡겨도 싫은 기색을 안 한다. 언젠가 읽었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어릴 적 놀이터는 우리들만의 세상이자 우주였다.
나는 그 중 구름사다리를 제일 좋아했다. 제법 폭이 넓은 층층이 쇠봉을 밟고 올라가 아치형의 고른 간격을 지나면 다시 폭이 넓은 층층을 내려왔다. 난 겁 없이 중간쯤에서 다리를 벌리고 두 개 사이에 걸터앉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아래 친구들이 오가다 내 신발을 벗겨 장난도 치며 놀고는 했다. 전봇대 외등에 불이 들어오고 해가 제 집으로 가면 그제야 내려와 나도 집으로 향한다.
일요일. 부업을 하는 엄마는 옆에서 동생과 토닥거리는 게 신경이 쓰였는지 학교 운동장 가서 놀다가 오라고 했다. 우린 과자 한 봉지를 사이좋게 나눠먹으며 학교로 갔다. 그때까지는 가던 골목으로 아무 탈 없이 잘 갔고 도착해서는 늘 하듯 정글짐으로 구름사다리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잘 놀았다. 그런데 키 작은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여동생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순식간에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정수리 옆이 찢어졌는지 피가 제법 많이 흘러내렸다. 제 피를 본 동생은 겁에 질려 떠나갈 듯 울었고 나도 덩달아 눈물 콧물 다 뺐다. 함께 놀던 아이들도 놀라 발을 동동 굴렀다. 집까지는 멀고 상처를 누를 손수건도 없어 바로 옆 수돗가로 가서 상처 주위를 씻었지만 젖은 머리카락과 피가 엉켜서 동생의 몰골은 영락없는 전설의 고향의 속의 귀신이되어있었다.
그날 밤, 상처는 다행히도 깊지 않아 집의 상비약으로 치료가 됐고 저녁을 먹은 후 여동생은 빨리 잠자리에 들었다. 난 동생을 잘 돌보지 못했다고 혼이 났다. 그날은 나만 혼내는 엄마가 그날따라 밉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생이 피를 많이 흘려 혹시 어떻게 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혼나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도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흰 거즈에 반창고를 정수리에 붙인 동생의 손을 잡고 등교를 했다.
“다 나을 동안 놀이터 근처는 얼씬 말아라. 마치면 곧장 집으로 와.”
그 후 일주일이 흘러서야 학교 놀이터를 찾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함없이 구름사다리에 앉기를 즐겼다.
여동생의 정수리 옆 흉터는 우리 둘만 간직한 어릴 적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여동생의 숱이 많아 얼마나 다행인지 감사할 따름이다. 흔적도 없이 꽁꽁 감춰져서 쉽게 찾을 수도 없다. 떨어질 때 얼굴에 상처 났으면 어쩔 뻔 했을까. 두고두고 마음 아파하며 자책했을지 모를 일이다. 엄마도, 나도 참 운 좋았다며 옛 이야기를 한다.
그 시절 아이들은 골목으로 운동장으로 그리고 가까운 뒷산 언덕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많이도 놀았다. 지금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놀까? 구름사다리에 앉은 그 기분을 알기나 할까?
어머니의 달력
“오늘 몇 월, 며칠이에요?”
“몰라.”
“어머니 몇 살이에요?”
“몰라.”
하고 시어머니는 멋쩍은 미소를 보내신다. 질문에 대한 답은 오로지 “몰라” 로 안타깝게 하시거나 대부분 대충 얼버무린 단답형 또는 혼잣말 같은 이야기를 무한 반복하신다.
주인을 닮아 몸을 기운 채 멈춰있는 가엾은 달력이 있다. 달력은 2016년 9월을 붙들고 놓지 않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몇 해 전만 해도 안방 달력에는 “약 치는 날”, “대구병원”, “보일러 기름” 커다란 숫자 아래 삐뚤빼뚤한 글씨가 바람에 펄럭이듯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 덩그런 숫자만 남아있었다. 어머니의 모든 기억과 의지력의 상실은 그 누구도 모르게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3년 전 이맘 때, 30년 된 시골집을 대대적으로 수리보수를 했다. 남편의 주도하에 작업은 진행되었고 다른 형제를 대신해 시간 나는 대로 남편은 시골을 수차례 오가며 진행 상태를 살폈다. 무덥던 그 해 여름은 그렇게 두 달을 넘겼고 묵은 때를 털어내고 시골집은 새 옷으로 바꿔 입었다. 추석에 수리한 새집에서 다들 기분 좋게 모여 자축의 시간을 보내며 기뻐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기뻐하셔야할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기뻐하지 않았다. 평생 농사를 짓고 손때 묵은 살림과 시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던 헛간의 농기구를 많이 내다 버려서인지. 섭섭하고도 아쉬운 마음이 커서인지, 그 후로 어머니의 말수는 급격히 줄어만 갔다.
어머니 기억의 회로에 빨간 불이 들어온 것이다. 요즘 어머니는 과거만 드문드문 기억해 내신다. 현재 당신의 상황, 상태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시다. 다 좋은 수는 없나 보다. 새 단장한 집에서 소일거리하며 동네 친구분들과 봄, 가을로 놀러 다니시며 지낼 줄 알았다.
유감스럽게도 이듬해 여름부터 어머니는 ‘의지’ 의 가방을 내려놓으시고 말았다. 어머니의 상처같이 얼룩져 있는 벽지와 방바닥, 마당 안작은 텃밭에 대책 없이 자란 풀, 옷가지가 뒤엉킨 서랍장, 켜켜이 쌓여있는 설거지통. 집안의 살림살이는 엉킨 실타래가 되었다.
2016년 9월에 멈춘 어머니의 달력, 가족들에게는 새집을 기뻐하는 시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어둠의 터널이 시작된 시간이었다. 치매는 본인만 모르고 지켜보는 이만 힘들고 슬픈 병이라 했던가. 우연히 구석방의 커튼 뒤에 숨었던 달력을 발견하고 떼서 없앴다. 안방, 거실의 달력은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내가 계속해 넘겨야할 것 같다. 2년 전부터 형제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당번을 정해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내가 갈 적마다 시어머니는 내 곁에서 노래를 부르신다. 세상 걱정, 근심 없는 얼굴로 그저 평화롭다. 어머니 읽고 아실까 모르지만 오늘 어머니 달력 숫자 아래에 ‘둘째 아들, 내외 다녀감’ 이라고 썼다. 어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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