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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2:5~16
자녀들이 이미 장성하여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부모의 마음속에는 3,4살 아이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이란건 뭔가를 되갚음 받을 목적의 투자가 아닙니다. 그저 애처롭고 안타깝고 해준 것보다는 결핍의 기억을 오래 기억하는 것인 듯 합니다. 그래서 잘 되는 자식보다 못난 자식이 더 눈에 밟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런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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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 23장 3절에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는 엄격한 규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여인인 룻이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몇 가지 주요한 해석이 존재합니다.
1. 신앙적 귀화 (언약적 우선순위)
가장 핵심적인 해석은 '혈통'보다 '신앙'이 우선했다는 점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기 1:16)라고 고백했습니다.
* 영적 변화: 룻은 단순히 거주지를 옮긴 것이 아니라, 모압의 신인 '그모스'를 버리고 여호와 신앙으로 완전히 개종했습니다.
* 율법의 완성: 하나님은 율법의 '문자'보다 그 안에 담긴 '긍휼'과 '회복'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룻의 진실한 신앙이 이방인이라는 결격 사유를 덮은 것으로 봅니다.
2. 율법의 대상 (남성과 여성의 구분)
유대교 전승(탈무드 등)에서는 신명기의 금지 명령이 **'모압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 이유: 광야 시절 이스라엘을 영접하지 않고 대적했던 주체가 모압의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 해석: 이 관점에 따르면 모압 여성이 이스라엘 남성과 결혼하여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은 율법적으로 가능했다는 판단입니다.
3. 헤세드(Hesed)의 실천
룻기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헤세드(인애, 자비)'**입니다.
* 룻의 헤세드: 시어머니를 향한 룻의 헌신적인 사랑.
* 보아스의 헤세드: 이방 여인이자 과부인 룻을 환대한 보아스의 자비.
* 하나님의 헤세드: 율법의 장벽을 넘어 소외된 자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결국 룻이 받아들여진 것은 율법이 정죄와 배제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는 통로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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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품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_룻 스토리의 핵심 주제
오늘 본문에서 룻과 나오미는 소외된 이웃의 대명사입니다. 공식적인 가문의 대가 끊기고 정식 노동력이 부재한 극빈층의 삶입니다. 흉년을 피해 나갔다가 남편과 자식을 다 잃고 홀로된 며느리 하나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온 듯한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탕자보다 못한 상황인 것은 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롯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호소하고 그의 앞에 심정을 토로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삶,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인생의 황혼앞에 나오미는 좌절하며 주저 앉습니다.
'고엘'이라는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 경외함을 잊어버린 사람들사이에서 그런 기대는 희박한 가능성만을 던져줍니다. 이삭줍기라는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룻은 이방인이면서 여자라는 핸디캡을 안고 가장 불쌍한 사회의 저변으로 내몰리는 매일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웃들은 그녀의 정절과 근면과 신의를 칭찬했지만 이웃들의 호의가 배를 부르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나오미는 이 모든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르바처럼 현실적인 선택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녀의 설득은 합리적이었습니다. 아무도 오르바를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와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내심 그녀의 이런 결단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홀로 된 나이 많은 여인의 삶은 비참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룻은 비 현실적인 선택을 했고 그 댓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다행히 추수시기에 들어와서 이삭줍기라도 하게 된 것에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사치스런 바램이나 기대는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아 보였습니다. 룻은 매일의 일상에서 성실한 모습으로 이웃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그 신뢰는 쉬지못하고 허리도 펴지 못하고 이삭을 주워야하는 고된 노동의 수고와 희생위에 쌓여진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쉽게 벌어 편하게 살기 어려운 팍팍한 현실에서 룻의 삶은 어쩌면 흔하고 평범한 이웃의 모습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예비하심이 일하기 시작한 사건이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입니다. 마침 보아스가 도착했고 룻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끌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달려간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던 무엇을 발견합니다. 모세가 타는 떨기나무를 보고 달려간 사건도 기억합니다. 자신의 옷과 띠와 칼과 마음까지도 다 주었던 요나단의 마음속에 있던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보아스는 친절을 베풉니다. 하인들에게 그녀를 배려해 달라고 명합니다. 점심시간에는 넉넉히 먹이고 돌아갈 때 시모에게 줄 양식을 넉넉하게 챙겨줍니다.
저는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런 지점에서 드러나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인색함과 계산과 부정한 결탁과 원망과 불신과 미움이 가시처럼 돋은 사람의 마음에서 풍성한 베풂이 흘러나오는 시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후대하시는 하나님의 마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넘치도록 후히 되어 꼭꼭 눌러담아주시는 친절한 마음,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메마른 광야같은 인생의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마치 물이 흘러넘치는 오아시스 같으신 분입니다. 광야에서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한 히브리인들에게 엘림의 70주의 종려나무와 물샘 12은 하나님의 풍성함의 상징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를 마라라고 불러달라는 나오미의 절규처럼 고통과 불신과 원망의 늪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로 마라(bitter)를 나오미(joy)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연히 보아스에 밭에 다다른 룻처럼 우리는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허황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시고 이름을 불러주시면서 사실은 내가 너를 눈여겨 보았다고 하십니다. 너는 나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너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 병이 났노라고 하십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긴다고도 하십니다. 그의 한량없는 자비와 긍휼과 은혜가 오늘 우리를 살게 합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인도하심이었음을, 고통의 시간들이 우리를 빚어내는 용광로였음을,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였음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허망한 인생의 뒤안길에서 늘 함께 하셨고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주의 깊은 배려와 사랑하심을 바라봅니다. 그저 주만 바라보겠노라고 다짐하며 룻의 다짐을 기억해 봅니다.
그러나 룻이 대답했습니다. “자꾸 저한테 어머니를 떠나거나 어머니에게서 돌아서라고 하지 마십시오.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갈 것이고 어머니가 머무는 곳이면 저도 머물 것입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제 민족이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이십니다.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저도 죽을 것이고 저도 거기에서 묻힐 것입니다. 죽음 외에 그 어떤 것도 어머니와 저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내게 심한 벌을 내리고 더 내리셔도 좋습니다.” (룻기 1: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