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영상 vs 제섭원
2차 직봉대전은 강절전쟁(江浙戰爭)으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즉 강소성과 절강성의 전쟁이었고, 강소성의 지배자는 강소 도독 제섭원, 절강성의 지배자는 절강 도독 노영상이었습니다. 전중국의 땅중에서도 알짜배기로 이름 높은 상해가 문제가 되었는데, 이곳은 강소성 기반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절강의 노영상이 다스리고 있던 곳입니다. 노영상은 상해의 관직을 겸임하게 있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이곳을 경영해 왔기 때문에 여전히 상해에 영향력을 끼치며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상해라는 어마어마하게 부유한곳이, 분명 강소성 기반인데도 자기것이 아니자 강소 도독인 제섭원이 불만이 생길만도 했습니다. 게다가, 노영상은 그즈음부터 상당한 군비 증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변 성들이 모두 불안해했고, 강소 ─ 안휘 ─ 강서 ─ 복건 4개의 성이 연합해서 절강을 도모해버리기로 결의합니다. 1924년 9월 3일의 일입니다.
이 전쟁은 동아일보 등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보도가 될 정도였습니다. 1925년 4월, 작가 주요섭이 '개벽'을 통해 발표한 소설 '인력거군' 에서는 제섭원 군대가 노영상을 친다는 이야기가 퍼져 사람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국내 사람으로서 이 전쟁에 공군으로 참여해서 20차례 출격해 공을 세운 인물인 '서왈보(徐曰甫)' 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왈보 씨는 국내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입니다.
이 싸움을 지켜본 장작림은 조곤 앞으로 전보를 보냈습니다. 직계를 욕하면서 노영상이 이기라고 응원하는 내용이어씃ㅂ니다.
"금년에는 천재지변이 많아 기아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이 들판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찍이 절강 토벌은 불가하다고 진언하여 평화에 주력하겠다는 답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전쟁 개시 명령이 나갔습니다. 동시에 또 봉천으로 들어오려는 산해관 열차를 억류하여 교통을 두절시킨 것은 과연 무슨 뜻이 온지요? 귀하께서 근년에 오패부 괴뢰를 위해 많은 민원을 야기시키고…… 그래서 비행기를 귀하의 처소에 보내 문의하려고 하며 전투 태세를 갖추고 최후의 회답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3군 동원령을 선포하여 백성들의 적을 쓰러트리고 전국 평화의 장애물을 제거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영상에게 무려 300만을 한번에 지원을 해주면서 응원을 했습니다. 게다가 9월 4일, 쑨원이 대본영에서 다시 한번 북벌을 위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에서 북벌에 대한 논의가 통과되었고, 담연개(谭延闿)를 북벌군 총사령관으로 선포하고는 "절강을 돕고 광동을 지키자." 고 선포했습니다. 또 다음 날은 "조곤과 오패부 토벌" 선언 명령을 내렸습니다. 강절 전쟁이 남방과 북방, 중국 전역으로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입니다.
북벌군 총사령관 담연개의 모습.
다음은 담연개 사망후 1930년 9월 24일, 동아일보에 나온 그의 이력입니다.
"담연개는 국민당의 원로로서, 중국 혁명 운동에 다년간 진췌 하야 민국건설과 통일에 많은 공헌이 있었다. 일찍이 군관 출신으로 신해혁명에 가담하였고 원세개의 황제꿈을 깨트리는데도 주요한 분자가 되었다. 뒤에는 손문을 따라 호법의 기치를 들었으며 북벌군이 일매 군장으로서 제일선에 섯고 무한남경정부를 통해 당부와 정부의 요직에 서서, 표면상 중요한 무대에는 출마치 않았다고 해도 국면통일건설의 진전에 숨은 힘이 되었다. 원숙관후한 그의 성격이 그런 데에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강절 전쟁 자체는 10월 13일, 중과부족으로 노영상이 패전한 것으로 끝났지만, 그 파국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노영상은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여러곳을 전전 한 후 봉천으로 와서 장작림에 의지합니다. 장작림은 이미 움직이기로 결정했으나, 일본 측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눈치를 찔러본 결과, 일본측은 불간섭의 방침을 정했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동시에 봉천 주재 총영사는 장작림을 원조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제 망설일 것은 없었습니다.
9월 4일, 장작림은 장군부에서 여단장급 이상 고위 장령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조곤과 오패부 토벌을 천명했습니다. 9월 13일 날 열차의 통행을 중단시키고 15일날에 봉군이 부대를 나누어 산해관과 열하 방면으로 이동했습니다. 봉군의 총병력은 25만 수준이었던 것에 비해 직군은 30만 명 이상으로 병력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봉군은 최근 일련의 개혁으로 사기가 대단히 왕성했습니다. 장작림은 스스로 진위군 총사령관이 되고 동북 삼성의 군대를 6개 군대로 편성했습니다.
진위군 총사령관 장작림
강등선, 장종창, 한린춘, 이경림
제1군 군장 강등선, 부군장 한린춘
제2군 군장 이경림, 부군장 장종창
공군 1개 부대를 배속시킨다.
조양과 능원선에 진군하며 냉구(冷口)로 나온다.
제3군 군장 장학량, 부군장 곽송령
제1,3연합군 사령부를 만들고 산해관을 정면으로 공격하며 구문구(九門口) 이북선에 이른다. 공군 2개 부대를 배속시킨다.
제4군 군장 장작상, 부군장 급금순(汲金純)
흥성 수중 일대에 주둔하며 후방 부대 역할을 한다.
제5군 군장 오준승, 부군장 감조새(阚朝玺)
적봉(赤峰)으로 진군하며 승덕으로 나온다.
제6군 군장 허란주, 부군장 오광신(吳光新)
건평 평원선으로 나와 직군 배후를 위협한다.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합당한 부대 배치를 하고, 각군의 지휘관들이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주어진 임무가 뚜렷하자 봉군의 사기는 가히 하늘을 찔렀습니다. 게다가 장작림은 정치적으로도 오랜 시간 고생해서 쑨원, 단기서 등을 이용해 최대한 직예군을 고립시켰습니다. 당장 쑨원이나 단기서가 그들이 도움을 줄 순 없더라도, 일단 일이 이렇게 되면 직예군은 저쪽을 견제해야 하느라 병력을 원할하게 기동시키는데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풍옥상을 충돌질해 직계군의 안쪽에 폭탄을 심어놓았던 것입니다. 이는 오패부가 꿈에서라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일단 위풍당한 봉군의 출정 소식을 들은 조곤은 경악해 9월 10일 오패부를 북경으로 불렀고, 17일 그를 토역군(討逆軍)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토역군은 삼로군으로 편성되었습니다.
토역군 총사령관 오패부
부사령관 겸 직노(직예 산동) 후방군 총사령관 왕승빈
제1군 총사령 팽수신
산해관 정면에 진을 펼치고 공격을 주 임무로 한다.
제2군 총사령 왕희경
조양(朝陽)으로 나온다
제3군 총사령 풍옥상
적봉으로 나와 봉군 배후를 공격한다
장복래는 응웡군 사령관으로 한다.
각 부대는 동시에 출발했습니다. 오패부는 육군 3군 외에 후방에 육군 10개 지대를 배치하고, 요동의 항만에서 해군을 움직였고, 공군 4개 부대를 편성하고 제1부대는 북대하, 제2부대는 남현, 제3부대는 조양, 제4부대는 항공처에 주둔하도록 했습니다. 모두 70여대의 비행기였습니다.
이 당시 오패부는 자기 마음대로 했는데 옷도 마음대로 입고, 가슴을 풀어 헤친 채 단추도 잠그지 않고 입에는 담배까지 물면서 지휘를 해던 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있을때는 의자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탁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는데 시골의 게으른 아낙같았습니다. 다만 그 기록을 남긴 사람이 풍옥상이라는 점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어찌되었건 60여명이 넘는 고급 장령들이 단정히 군복을 입고 긴장을 하고 있는 판국에 오패부의 이런 태도는 이상했습니다.
직계는 모순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북경을 장악하고 주인이 되긴했지만, 사방이 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직계 내부에서도 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제2차 직봉대전은 굉장한 규모였는데 쌍방의 병력을 합하면55만이 넘으며 실제 투입된 인원만 해도 35ㅏㄴ명 이상이었습니다. 다만 군벌 항쟁이 그렇듯 전투 자체는 그럴듯하진 못했습니다.
전투의 시작은 열하부터였습니다. 1924년 9월 13일, 장종창과 이경림의 봉군 제2부대는 둘로 나누어 열하로 진격해들어왔습니다. 봉군은 파죽지세로 밀고나가 10일만에 조양을 점령했습니다. 산해관 방면에서는 직계가 꽤 선전을 했고, 직군 장군 팽수신은 유리한 지형을 믿고 버텨내었습니다. 10월 22일까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수뇌회의에서 곽송령이 기습 작전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강등성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둘은 한참동안 의견을 나누다가 결국 말싸움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수하 장교를 임명하는데도 둘은 다투면서 의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한동안 회의에서는 곽송령과 강등선의 힘겨루기가 이어졌습니다. 곽송령은 한린춘과 곽송령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공동점 때문에 서로 당을 짓고 다니는것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이렇게 서로를 의심하다보니 논의가 제대로 될 리가 있어, 회의석상에서 곽송령은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장학량이 말렸지만, 듣지도 않았습니다. 강등선은 강등선대로 이건 군법회의 감이라면서 장작림에게 보고했습니다.
제2차 직봉대전 무렵의 장학량
너무나 화가 난 곽송령은 흥분해서 수하 부대를 철수시키기까지 합니다. 곽송령의 말을 들은 여단장들은 부대를 거두어 후방으로 가거나 이동할 준비를 하였고, 아침 8시 무렵 이 소식을 들은 장학량은 급히 달려와 즉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멈춰! 이 일을 다 멈추란 말이다!"
그러고는 곽송령의 행방을 묻고 급히 그를 쫒아갔습니다. 10여리 쯤 달려가다보니 큰 나무 밑에서 곽송령이 있었고, 부하들이 제발 마음을 바꾸라고 그를 설득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장학량이 다가오자 곽송령이 울었고, 장학량도 울었습니다. 장학량이 곽송령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부대로 돌아가십시오, 형님!"
"……."
"형님이 지금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요, 형님에게 주먹을 한대 날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형님만 아니라면 그냥 한 방 날려버렸을 겁니다!"
곽송령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둘은 의형제를 맺은 상태였고, 이 일은 야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천만 다행이도 직계군은 전혀 사정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장학량이 가 버리자 곽송령은 다시 공격에 나서, 본래 자기가 주장한대로 기습 작전을 폈습니다. 3개 여단의 보병대와 1개 포병 부대를 이끌고 이루어진 기습부대는 야간에 행군하고 낮에는 쉬었습니다. 27일 곽송령의 부대는 직예군을 공격했고, 직예군은 버티지 못해 전선이 붕괴되었습니다. 곽송령은 3개 여단을 이끌고 계속해서 앞으로 진격했습니다.
10월 10일, 오패부는 산해관에 도착했고, 12일에는 직접 독전을 하고 대규모 지원군을 집결시켜 전선에 투입했습니다. 하지만 번번히 패했고, 이번에는 해군을 이용해 해상을 돌아 봉군의 뒤를 쳐볼 계획도 세웠지만 봉군 소속 비행기의 습격을 받아 무력화되었습니다. 전선에서 이렇게 치열하게 대전이 벌어지고 있을때, 기어코 폭탄이 터져버렸습니다. 풍옥상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첫댓글 풍옥상의 성전....
오오 기대되네요.
근데 제가 애니를 좀 봐서 그런건지 몰라도 제목을 보자마자 '역습의 샤아"(건담)이 떠오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