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박태원 교수의 글 읽기에 푹 빠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애초에는 돈점쟁론에 관심을 가지고 박태원 교수의 '돈점 진리담론 - 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를 구입하여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 관점과 내용이 너무나 탁월하고 깊이가 있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박교수의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을 구입하여
한달 동안 거듭 탐독하며 지냈습니다. 놀랍고 놀라운 저서입니다.
삼십대 중반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성철스님을 친견하며 제 인생의 갈 길이 새롭게 전개된 이래로 50년 가까이 선 수행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번에 박교수의 저서를 보면서 '선(禪) 수행에 관한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는 놀라운 만남이 있었습니다.
이 감동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박교수의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란 책을 소개합니다.
저자의 책에 씌여진 <머리말>을 소개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머리말>을 그대로 보냅니다.
<책의 내용은 난해하고 서사가 복잡하고 중복되어 읽기가 쉽지 않지만, 참선 수행자라면 인내심을 갖고 독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태원 교수의 저서 '선 수행이란 무엇인가?'의 '머리'말을 지난 번에 소개했습니다.
책의 내용이 워낙 논의 내용이 방대하고 논점도 많아 독자의 읽기와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요점을 먼저 소해한 저자의 '내용 개요'를 몇 차례 나누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선 수행의 바른 길을 꼭 찾아나서기 바랍니다.
- 분당에서 혜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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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수행과 마음수행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박태원 교수
『선(禪) 수행은 변하는 파도와 접속한 채 자신도 변하면서 자유와 평안의 유희를 누리는 파도타기와도 같다.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은, ‘파도가 그쳐 잔잔한 상태’나 ‘파도에서 아예 떠난 평온’을 구하지 않는다. 생멸·변화하는 파도와 같은 세계에 몸담을 수밖에 없는 인간, 파도를 떠나면 삶도 없어지는 인간, 그런 인간이 세계 속에서 추구하고 또 누릴 수 있는 안락은, ‘파도타기의 능력’이고 ‘파도타고 노는 유희’이다. 선(禪) 수행은 이런 능력과 즐거움을 가능하게 한다. 이 책은 이런 역동적인 선관(禪觀)을 펼친다.』
- 붓다가 알려준 선(禪) 수행의 길을 걸으려면, 기법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선 수행에 관해 설한 붓다의 ‘연기적 언어(緣起的 言語)’부터 신중히 음미해야 한다. -
<머리말>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불문(佛門)을 만난 직후부터 필자가 품어 온 질문이자 지속된 탐구 과제이다. 20대 후반에 선문(禪門)을 통해 불문 안길에 들어 지금 정년퇴임 후 2년이 지났으니, 근 40여 년이 지나갔다. 이 질문을 굴린 지 40년이 넘은 셈이다. 필자에게는 가장 해묵은 보따리다.
선문(禪門)의 길에서 나름대로 쉬는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의 환희가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원 진학 후에는 불가(佛家)에 쌓인 다양·다층의 지혜들을 폭넓게 음미하면서 보따리를 채워 갔다. 원효(元曉)와 대화하면서는 ‘연기적(緣起的) 사고’의 의미가 교학 전통에서 제시된 연기(緣起) 해석학을 넘어선다는 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모든 현상은 조건들에 의해 발생한다.”라는 연기법(緣起法) 명제에서 “어떤 현상을 이해하려면 그 현상을 발생시키는데 관여하는 조건들을 파악해야 하다.”라는 의미를 읽고 나니, 모든게 새로웠다. 12연기(緣起), 공연기(空緣起), 유식연기(唯識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 등의 연기교학(緣起敎學) 어느 하나에도 갇히지 않는 상위(上位)의 보편원리가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점에 환호하였다. 연기적 사유[緣起的 思惟]의 의미를 이렇게 읽으니,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길에 놓인 모든 것이 거듭거듭 새롭게 읽혔다. 원효(元曉)와의 대화도 갈수록 새로워졌고, 남북(南北)의 모든 교학(敎學)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불교 언어를 넘어 일상과 세계의 모든 현상이 연기(緣起)라는 거울에서 새롭게 드러났다. 동∙서양 고금(古今)의 성찰들을 능동적으로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연기적 사유[緣起的 思惟]였다. 연기법(緣起法)의 의미가 이렇게 읽히자,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답해 보려 채워 가는 보따리 안도 풍요로워졌다.
붓다의 길 위헤 배열된 보배들의 가치는 연기적 성찰[緣起的 省察]로 읽어야 제대로 드러난다. ‘보배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충분히 읽어낼수록, 보배의 내용과 의미가 제대로 이해된다. 붓다의 길 위에 깔린 보배들을 다루어 온 교학들도, ‘보배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읽어내는 수준에 따라 그 타당성 수준도 결정된다. 붓다의 법설(法說)을 다룰 때 모든 교학이 연기적 성찰[緣起的 省察]을 충분히 적용한 것은 아니다. 특히 ‘마음수행으로서의 선(禪) 수행’에 관한 붓다의 법설에 대해서는, 남북 교학 모두 연기적 성찰[緣起的 省察]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타, 사선(四禪), 사념처(四念處), 육근수효(六根守護) 법설의 알아차림(正知 sampajanati) 등을 교학적으로 해석할 때, ‘발생시키는 조건들과의 관계’에서 탐구하는 경우를 목격하기 어렵다. ‘마음수행으로서의 선(禪) 수행’에 관한 언설들이 지칭하는 현상들은 그것이 조건들의 인과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를 살펴야 선(禪) 수행의 길이 보인다. 그 길의 특징, 오르는 방법, 행로, 이정표와 목적지를 전망할 수 있게 된다. 원효(元曉)나 선종(禪宗)의 마음수행 관련 언어들도 연기적 성찰[緣起的 省察]로 참구해야 그 언어들이 지시해 주는 길이 제대로 보인다.
붓다는 자신의 언어로 지칭하는 현상들의 발생 조건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언어를 연기적(緣起的)으로 구사하는, ‘연기적(緣起的) 언어 용법’을 펼치고 있다. 지칭하는 현상의 발행 조건들을 명확히 하면서 언어를 구사하는 최초의 인물로 보인다. 현상을 관통하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을 깨달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붓다의 연기적(緣起的) 언어 용법은 그의 모든 법설을 관통하고 있다. 선(禪) 수행에 관한 가르침도 예외 없이 연기적(緣起的) 언어 용법으로 펼친다. 선(禪) 수행의 목적과 특징, 선(禪) 수행에서 발생하는 현상들, 선(禪) 수행의 방법 등을 모두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과 관련시키면서 설한다. 니까야를 통해 붓다와 대화할 때는, 무엇보다 붓다의 ‘연기적(緣起的) 언어 용법’을 음미해야 한다. 37조도품(助道品)으로 분류되는 법설을 대할 때, 그 법설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이 무엇인가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또한 니까야 편집과 전승 과정에서 혹 제자들이나 후학들의 기억이나 이해 문제로 빠져 버린 조건이 있을 가능성, 엉뚱한 조건이 추가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필자가 니까야에서 붓다의 육성을 포집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은, ‘연기적(緣起的) 언어 용법’의 정도와 수준이다.
선정(禪定) 수행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읽지 않으면, 선(禪) 수행은 흔히 신비능력이나 신비체험을 위한 기법(技法)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선정(禪定) 수행을 ‘대상에 대한 마음집중’으로 처리하는 선관(禪觀)도 그 산물이다. 선(禪) 수행이 특별한 기법으로 이해되고 설해지며 전수해 가는 현상은 선(禪) 수행의 왜곡이다. 불교 선(禪) 수행을 계승하는 현대 명상 수행도 마찬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붓다가 알려준 선(禪) 수행의 길을 걸으려면, 기법에 대한 관심은 접어두고 선(禪) 수행에 관해 설한 붓다의 ‘연기적(緣起的) 언어’부터 신중하게 음미해야 한다. ‘선(禪) 수행 관련 언어의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먼저 살펴야 한다. 그래야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는다.
니까야가 전하는 사마타∙사선(四禪)∙사념처(四念處)∙육근수호(六根守護) 법설을 ‘그 법설의 언어가 지시하는 내용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을 살피면서 음미해 보니, 교학이나 학계의 기존 관점들이 놓치거나 잘못 보았던 대목들이 보였다. 이 책에서 밝힌 선(禪) 수행에 관한 소견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방법론에 따른 것이다. ‘발생 조건들을 성찰하는 연기(緣起) 방법론’에 따라 음미하니, ‘이해수행으로서의 선(禪) 수행’과 ‘마음수행으로서의 선(禪) 수행’이 대비되었고, ‘마음수행의 길’에서는 <정념(正念) 및 육근수호 법설에서 설하는 알아차림(正知 sampajanati)➔유식무경(唯識無境)의 유식관(唯識觀)➔공관(空觀)을 품은 유식관에 의거한 원효(元曉)의 일심(一心)➔선종(禪宗)의 돈오견성(頓悟見性)>을 관통하는 연속성이 눈에 들어왔다. 붓다가 설한 ‘마음수행의 길’은 그렇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원효(元曉)와의 대화는 그 성과를 기회 있을 때마다 논문이나 저술로 글에 담아왔다. 원효전서(元曉全書)의 번역도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선문(禪門)의 길에 관한 소견은 『돈점(頓漸) 진리담론 – 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세창출판사 2016)를 비롯하여 간화선(看話禪) 관련 논문 등으로 간헐적으로나마 피력해 왔다. 그러나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글은 미루어 왔다. 보따리 속을 좀 더 알차게 채우고 난 뒤에 시도하자며 미루어 왔다. 퇴임하여 연구와 집필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해졌지만 계속 미루었다.
계기는 대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온다. 성철스님 열반 30주년 기념학술대회에서 『퇴옹은 왜 돈오점수를 비판했을까?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의 차이와 관계』라는 주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필자가 선택한 방법론에 따라 생각을 글에 담다 보니 분량이 계속 늘어났다. 할 수 없이 학술대회 발표문과 전체 글을 이원화시켜 『선(禪) 수행이란 무엇인가? - 이해수행과 마음수행』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오래 품어 온 보따리를 내려놓으니 묵은 숙제 끝냈다는 후련함이 밀려온다.
원효가 사미 시절 낭지스님에게 배우던 울산 문수암 옆 남암산 끝자락 회향재(廻向齋)에서
불기 2567년 봄에 붓을 들어 가을에 마치다.
박태원 고려대 대학원에서 불교철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 취득. 울산대 철학과에서 불교철학, 노자, 장자철학을 강의. 주요 저서로는 『원효전서 번역』 『대승기신론 사상연구』 『원효, 하나로 만나는 길을 열다』 『돈점 진리담론 –지눌과 성철을 중심으로』 『원효의 화쟁철학 – 문(門) 구분에 의한 통섭』 『원효의 통섭철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