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_삶과 죽음은 모두 하느님의 선물
로마서 6:6-10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최근 10여 일 사이 저와 가까운 사람들 네 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난 10일에는 민중 신학자 이영재 목사님이, 그리고 13일에는 일생을 평화, 통일 운동에 몸을 바쳤던 조성범 동지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조성범 선생은 이영재 목사 장례식 다음 날 아침 친한 벗인 정상시 목사에게 카톡으로 이런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3가지
1.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죽음에 대해 모르는 3가지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일 아침 혼자 수리산 산행 중 심근경색, 심정지로 쓰러졌고, 등산객이 발견해 헬기로 이송 중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정상시 목사님은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 현실이 되고 너무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아득하고 현기증이 납니다. 어제 친구 이영재 목사를 송별하고 오늘 아침까지 카톡을 주고 받았는데~”라며 조 선생의 소천 소식을 전했습니다.
정상시 목사님은 김광훈 목사님께 보낸 카톡에서 “고인이 6월 13일(사망일) 아침 8시 41분에 보낸 카톡문자! 그땐 먼저 간 이영재 목사 장례 후 마음을 전한 글로 알았는데 지금 보니 소름끼치는 글! 그 문자 보낸 후 산행 나선 듯! 아~”라며 안타까움을 전하였습니다.
지난 월요일 14일에는 신성은 목사님 장인이시고 김진하 선생님 아버지이신 김경태 님께서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5일에는 한울교회 김은경 사모님께서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김은경 사모의 영결식은 박경서, 김은경과 함께 공부한 예수살기 모임에서 준비하였습니다. 정성과 사랑이 듬뿍 담긴 예배가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이날 소개된 고 김은경 사모님의 약력입니다.
“1960년 1월 19일 대구에서 아버지 김사복 목사와 어머니 신희덕 전도사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나, 1996년 박경서 목사와 결혼하여 두 아들과 함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한울교회 권사로,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 상담자로 활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로, 행복과 기쁨을 전해주는 행복 전도사로, 고민과 아픔이 있는 사람들과 특별히 이주민들의 고통을 잘 듣고 공감해 주는 상담사로 살았습니다.
2019년 1월 췌장암 진단을 받고, 흐느끼는 주위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가겠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항암과 수술이라는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이 과정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잘 듣고 배우겠다는 뜻을 세우고, 하루하루 깨어 살피며 귀 기울이고 살았습니다. ... (중략) ...
하나님이 부르신 마지막 날,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아들들이 자고 있는 줄로 착각할 정도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평화로운 얼굴로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지난주는 저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죽음과 삶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죠. 그래서 오늘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의 문제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은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고 증언합니다. 예전에 죄로 물든 육체는 죽어버려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다시는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죽음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로 부터 해방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 살 소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삶과 죽음은 단지 생명 현상일 뿐입니다. 모든 생명은 삶에서 죽음에 이르고 죽음에서 삶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죽음은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그 사실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하고 고생스럽게 살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낫다는 말인 거죠. 다분히 유교적 이해가 깔린 격언입니다. 우리 민족은 매우 종교적인 민족입니다. 우리의 전통 종교는 흔히 신교라 불리었는데 크게 본다면 무속을 포함하는 하늘 신앙입니다. 이 토대 위에 불교와 도교, 유교와 같은 고등 종교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승이나 저승에 대한 권면은 우리의 종교 사상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무교와 불교, 도교는 아주 구체적인 저승관을 형성하고 종교 의례를 통하여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교는 저승에 큰 관심이 없고 이승에 집착합니다. 유교에서는 다만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분리되어 백은 신체와 함께 분묘에 남고 혼은 사당에 모셔야 하는 것으로 믿습니다. 조상의 혼은 조상신이 되나 신체의 소멸과 병행하여 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것으로 여기죠. 하지만 조상 가운데 시조신(始祖神)이나 역사에서 공이 높은 신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아직도 유교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는 아직도 삶과 죽음을 선악의 개념으로 간주하여 삶은 좋은 것, 죽음은 나쁜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은 죽음이란 삶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합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고가의 병원비, 다이어트, 비싼 영양제와 보양식을 찾습니다. 돈이 좀 있는 자들은 남의 장기를 이식해서라도 수명을 연장하고 싶어합니다. 장기 밀매는 이런 수요에 의존하죠.
하지만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생각은 빨리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로마서의 증언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영원한 삶과 영원함 죽음의 경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해방된 자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가르칩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것이죠. 한 삶을 완성하고 다른 삶으로 넘어가는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설레임이 됩니다. 마치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마음처럼 말입니다.
한문으로 좀 제대로 잘 산 사람이 죽으면 임종(臨終)했다는 말을 쓰고 일반 졸부가 죽으면 사망(死亡)했다라고 합니다. 임종이란 말은 완성에 다다랐다는 말입니다. 살아 온 삶이 죽음으로 인해 완성되었다는 것이죠. 반대로 사망에란 말은 죽음으로 그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임종을 통해 가는 새로운 세상은 천국, 즉 하나님 나라이고 사망을 통해 들어가는 세상은 영벌에 처해 지는 지옥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으니 자기 인생의 반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모든 업보를 안고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죽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은 모습이 한없이 평온하고 미소를 짓고 있다면 그 사람이 살아온 생이 잘 살았다는 반증입니다. 반대로 죽은 모습이 험상 굳다던가 일그러져 있다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험하고 악했다는 표식입니다.
그러니 8절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란 바울의 고백은 하나의 삶을 완성하고 맞이할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도 죽음도 모두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잘 산 사람은 죽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죽음이라는 통로를 지나 영벌에 처해 지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걸어 온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삶을 잘 살아온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통로를 통해 더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이 기다리는 것을 감으로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앞서 깨달음을 얻고 죽음을 넘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 김은경 사모가 남긴 글 한 자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살며 깨달으며/ 김은경 권사
2019년이 다 갔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명확하게 알게 한 한 해였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로 가득한 한 해였습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 것을 경험한 한 해였습니다.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이
밥 한 끼 사주고,
반찬을 나누어주고,
안아준다는 것이
눈이 짓무르도록 운다는 것이
이리 행복한 일이구나를
알게 한 한 해였습니다.
물론 고통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금식,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수술들, 통증,
첫 번째 항암 약이 맞지 않아서 암이 커졌을 때의 실망감,
이 실망감보다 더 힘들었던 부작용들
구내염 식욕부진 설사 변비 마비 짓누르는 아픔들...
두 번째로 선택된 항암치료 약값의 부담 등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드라마틱하게 약이 잘 맞아 암이 작아져
7월 수술을 할 수 있었고,
수술 후 많이 걸어야 회복이 빠르다는 교수님들의 조언으로
아픔을 무릅쓰고 2-3시간 동안 걸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콧줄을 끼우는 것은 힘들고 거부감이 있는데,
의사의 지시대로 하라는 대로 하면 쉽게 끼워집니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은 일을 쉽게 만든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말씀도 ...
그러면 칭찬이라는 보너스도 얻을 수 있었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병원 생활에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정해주셨음을 알고 잘 따라가려 애썼던 기억~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법,
당신 앞에 순종하는 법,
나의 앞은 당신께서 결정해 주실 거라는 믿음을 가지게 하심으로
편안함을 주셨습니다.
매일 와서 따뜻한 물주머니로 갈아주던
따뜻한 남편의 손길에 사랑이 묻어 있어 좋았고,
눈 짓물러가며 매일 병문안 온 은하,
많은 사랑의 표현을 해준 가족들,
해드릴 것이 찬양밖에 없다며 기타를 들고 와서
‘내가 주안에 주가 내 안에’라는
찬양을 해주던 찬규의 친구들,
콧줄을 힘들어 하던 나에게
빼도 된다며 당장 빼 드리라고
인턴에게 한 마디 해주셨던 교수님,
처음 물을 먹기 시작했을 때
예쁜 파란색 뚜껑의 물병을 건네며
‘물만 드시잖아요’하며 내민 간호사의 예쁜 눈,
수술 부위를 아주 조심스럽게 세밀하게 치료해주셨던 간호사님
모두가 감사한 분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은 죽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이 끝은 아니죠.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다만 내가 그리스도, 진리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의 새로운 삶으로 갈라질 뿐입니다.
저는 오늘 죽음을 넘어 생명의 길로, 또 다른 삶을 시작한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분들이 걸었던 삶의 족적이 우리의 이정표가 되길 바랍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도합니다.
새 하늘 쌔 땅을 일궈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생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1.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