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값 있는 가수의 앨범이던 아니던 앨범이 발매되면 거치는 절차 중 하나는 손에 쥔 앨범이 변화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다. ‘변화’가 가수나 음악의 퀄리티를 담보하는 것은 분명 아닐텐데, 마치 청자들은 ‘변화’가 중대사처럼 느껴지고, 가수나 뮤지션의 존재를 업그레이드 하는 것처럼 단정을 지어버리니, 더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가요씬에서 음악하는 이들에게 ‘변화’라는 화두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2004년 최고의 이슈메이커로 돌아온 ‘감성코어’의 주인공 서태지에게도 변화를 운운하고, 하다못해 똑 같은 댄스음악으로 일관하는 가수들도 변화를 부르짖는 마당에 뭐 그게 중요할까 싶지만, 뮤지션이라면 -본인이 작곡,작사를 하는 싱어송라이터라고 생각한다면, 그 오묘한 인간의 마음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이라면- 변화라는 단어에 익숙해져야 되며, 추구해야 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메인스트림에 위치한 발라드/댄스 계열의 가수들의 경우, 좀처럼 변하기도 어렵고, 뮤지션으로 인정 받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또 그들에게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가 가수나 뮤지션에게 명쾌한 해답은 분명 아닐 것이다. 여기서 오늘 우리가 들여다 볼 신승훈 역시 새로 발표한 9집 앨범에서 새로움을 주기 위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정작 청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노력들을 쉽사리 감지 하기 어려운 가수임에 분명하다.
신승훈은 좋아하는 이와 싫어하는 이가 극단으로 나뉘어진다. 좋아하는 이들은 신승훈의 대중적인 발라드 장르 안에서 변하지 않고 항상 정상에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것이며, “별로~”라며 손사래를 치는 이들은 그의 음악적 정체성에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승훈은 정말 앨범마다 정체된 모습을 보인 것일까? 그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정체와 매너리즘에 빠진 이가 어떻게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으냐 말이다. 데뷔 14년의 신승훈이 발매하는 앨범마다 미디어와 수많은 팬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분명 그가 들려준 음악 안에서 결정적인 결과물을 보여줬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분명히 자신의 색깔을 알고, 대중적인 공식 안에서 안정성을 보여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신승훈은 9집 앨범을 통해서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 변화스러운 코디네이션을 주고 있다. 가야금과 스트링 세션을 사용해 퓨전 느낌을 주고 있는 ‘애심가’, 사물놀이와 플라맹고 기타연주를 접목한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애이불비 II’, 뮤지컬 배우 김선경과 함께 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모던록 스타일의 ‘네 멋대로 해라’ 등의 곡들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대중적인 공식 아래,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노래를 소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날이 오겠죠’ 나 ‘두 번 헤어지는 일’ , ‘어쩌죠’, ‘그댈 잊는다는 게’ 등의 곡에서는 신승훈의 목소리로 곡의 애절함이 전달될만한 정통 발라드를 확인할 수 있다.
신승훈의 발라드가 2004년에는 진부한 사랑 타령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대가 흘러갈수록 그의 발라드는 신선함이 떨어질 수 있고, 신세대들의 도시적인 감성과 개인적인 취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뮤지션들이 접근하는 음악적 어법과 다양한 스펙트럼을 표현해내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승훈이 우리 가요계에서 아직까지 진부한 발라드로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바로 변하지 않는 모습. 트렌드에 이끌려 우왕좌왕하기 보다는 본인의 색깔과 명확한 장르로 승부를 건다는 것. 신승훈의 이런 점들이 항상 청자들에게 “신승훈은 변했는가?”,” 왜 그대로인가?” 에 대한 의문점을 낳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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