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은 창작에 넘치는 계획과 뚜렷한 복안을 심증에 가득 품은 채(사실상 머릿속에선 작품이 완성한 상태로) 무덤속으로 가야만 했다. 베토벤이 런던 필하모니 소사이어티를 위해 계획한 제10 교향곡은 서주부가 Es-dur로 돼 있었고, 제 1악장은 알레그로 - 도입부 주제가 보존된 채- c-moll 이었는데, 만약에 그가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만큼만 조금 더 오래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던들 - 베토벤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 이것은 그의 필생의 거작이 될 것이어서, 이에 비하면 여태까지 완성된 다른 모든 교향곡들은 미미한 가치밖에 갖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r 를 위해 베르나르트의 대본에 의한 "십자가의 승리"라는 오라토리오를 약속했으며, 쿠프너의 대본 "사울"을 옛날양식으로 된 코러스와 더불어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었는데, 그 첫부분이 "그의 머리속에선" 사실상 완성된 상태였다. 이 외에 그는 그릴파르쳐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멜루지네"에 대해서도 자주 그릴파르쳐와 이야기하곤 했다. "당신의 오페라는 완성된 것이오."
게다가 그는 자신이 모차르트의 것보다 한층 더 좋아한 케루비니의 "레퀴엠"과 같은 양식의 최초의 "레퀴엠"도 계획하고 있었으며, 바흐의 선율에 의한 서곡도 쓸 작정이었다. 또한 그의 일생을 통한 예술상의 노고에 대한 일대의 결론이 될 것이었던 작품 "파우스트"도 그의 머릿속에선 탄생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베토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혹은 그 자신이 스스로의 과업을 완수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죽었다는 증거이다.
베토벤은 네 차례의 끔찍한 수술 뒤에 형언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 넉달 이상이나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거의 마지막 단계까지 자신이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1827년 2월27일에 시행된 네번째 수술 뒤에 사실상 베토벤이 구세주처럼 믿고 있었던 말파티 박사또한 남아있던 한가닥 희망마저 완전히 포기한 상태였지만, 환자 자신은 그걸 알지 못했다.
당시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와병중이었던 그의 옛 친구 츠메츠칼이 그에게 보내온 안부편지에 대한 그의 회답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나는 절망하지 않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활동을 완전히 중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오. 그러나 나쁜 일 속엔 항용 무언가 좋은 일도 있는 법이오. 신께서 그대도 역시 고통스런 상황에서 건져주시기를, 필경 우리는 둘 다 건강을 회복할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서로 이웃으로 상봉하게 될 거요."
그러나 이 불굴의 거인도 마침내 자신의 명이 다했다는 걸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과업을 완수하지 못한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어떤 위로의 말도 그를 힘내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따뜻한 봄철이 오면 그의 고통도 완화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그는 내말에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생애는 끝났소. 만약에 나를 낫게 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면, 그의 이름이야말로 불가사의라 불리우겠지요."라고 그의 주치의 가운데 하나인 바브루흐 박사는 기록하고 있다. 과연 베초벤은 봄이 되기 전에 죽었다.(1827년 3월26일)
그의 나이 57세-위대한 창조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무덤속에 사장(死藏)되었으니 천만번 애석한 일이다.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은 F-dur 현악사중주로 남아있지만, 그가 끝마친 최후의 작품은 B-dur현악 사중주의 마지막 악장인 Grosse Fuge를 대신한 Rondo 였다.
또한 별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소위 베토벤의 최후의 사상이란 것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C-dur 현악사중주의 단편으로서 베토벤은 이것을 출판업자이며 작곡가였던 안톤 디아벨리에게 약속했었고 또 실제로 시작하기로 했었다. 이 단편은 4분의 3박자로 된 Andante Maestoso의 a la polonaise로서 1826년 11월에 베토벤이 조카 카를과 함께 그나이젠도르프에 있는 동생 요한의 집에 묵고 있었을 때 작곡한 것이었다. F-dur 현악 사중주도 여기서 작곡했다.
그나이 젠도르프에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베토벤은 12월초에 조카와 함께 죽어가는 사람으로 빈에 돌아왔는데 그의 마지막 거소가 된 슈바르츠파니어하우스에 도착한 이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병상에서 그가 친구 베겔러에게 쓴 장문의 편지(1825년 12월28일에 받은 서신에 대한 뒤늦은 답장)를 보면 그의 정신은 더없이 의기충전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나의 좌우명은 이렇다네, nulla dies sine linea(한 줄도 안 쓰는 날은 하루도없었다.), 설사 나의 뮤즈를 잠들게 한다해도 그것은 오직 그녀가 잠이 깼을 때 더욱 활동적이 될수 있기 위함일 뿐이네. 나는 아직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고 싶다네. 그런 다음 마치 늙은 아이처럼, 친절한 사람들 사이의 어디엔가에서 속세의 삶을 마쳤으면 하네."
베토벤의 건강은 1815년 이후로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1820~21년 무렵에 처음으로 황달 증세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간 질환의 불길한 징조였다. 결국 이 증세는 나중에 간경변증으로 발전했으며, 베토벤의 지속적인 알코올 섭취량이 가중됨으로써 계속 악화되었다. 그러나 1822~23년의 기간에 베토벤은 "일찍이 생존한 예술가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보통 그는 한밤중까지 일했으며 자주 식사나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아 가정부와 친구들을 낙담시켰다. 이즈음 그의 건망증은 극에 달해서 모자를 잃어버리기 일쑤였고 험한 날씨에 맨머리로 산책을 해서 잿빛 긴 머리가 곧잘 비에 젖어있고 했다. 요컨데 모든 것이 그의 작품활동에 종속된 생활이었다. 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희열의 극치를 갈구하지 않았다. 생활의 사소한 즐거움 - 산책과 먹고 마시고, 담화와 이따금씩 피우는 담배 -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의 예술에만 몰두하게 된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1822년 2월에 베토벤 본 시절의 친한 친구 베른하르트 룸베르크가 빈에서 첼로 연주를 하였을 때도 베토벤은 모습을 나타재니 않았다. 처음엔 귓병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호소하였지만, 결국 진짜 이유는작품에 전념해야 하기 때문에 불참한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만약에 내가 자네를 찾아가지 않는다면 내가 얼마나 멀리서 살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게나. 또한 거의 쉬지 않고 내가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더욱이나 1년 내내 나는 끊임없이 앓고 있었으니이미 시작해놓은 많은 작품들을 완성하지도 못한 형편이라네."
장엄미사곡, 디아벨리 변주곡 그리고 제9번 교향곡이 모두 1822~23년 시기에 완성되었다. 1824년 이후의 베토벤의 삶은 전적으로 현악사중주 op.127, a-moll(op.132), B-dur(op.130),cis-moll(op.131) 그리고 F-dur(op.135)의 다섯 곡이 그것이다. 127번은 1824~25년에, 132번은 1825년 2월과 여름사이, 130번과 후에 대푸가로 독립해서 출판된 작품 op.133은 같은 해 7월~9월에 걸쳐, 그리고 131은 이듬해에 완성되었고, 1826년 11월에 작품 130의 새로운 피날레와 더불어 F-dur의 op.135번을 완성함으로써 사중주의 일관된 창조작업을 마무리지은 셈이었다. 물론 베토벤은 오직 사중주에만 전념한 기간에도 장래의 모든 계획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1826년 사중주의 긴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베토벤은 오페라와 오라트리오, 그리고 협주곡들과 기타작품들에 관한 새로운 착상을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1825년의 스케치북은 제10 교향곡과 바흐의 이름철자에 의한 서곡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 또한 임종의 침상에서 베토벤은 레퀴엠과 파우스트에 대해 유감스럽게 얘기했고, 피아노 방법을 집필하여는 야심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아쉬워 했다. 베토벤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계속 유기적인 발전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베토벤이 오래살면 살수록 그가 음악으로써 말해야만 했던 것은 더욱 심오한 것이 되었다. 다른 어떤 음악가보다도 베토벤은 음악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를 전적으로 표출하고자 했고 이같은 태도는 곧 그의 특성과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의 창조과정은 그대로 그의 정신의 발전과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것은 일생동안 그의 영혼 속에서 일관성있게 쌓아올린 거대한 정신의 기념탑이라 할 만한 것이다.
베토벤의 정신의 발전과정을 주로 연구한 J.W.N 설리번은 바흐와 바그너를 베토벤과 비교한 흥미있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성숙기를 거쳐 말년에 이른 작곡가에게 있어 베토벤과 같은 지속적인 발전은 매우 드문 현상으로서, 정신의 깊이와 성숙도에 있어 베토벤에 필적하는 바흐의 경우 말년에 이르러 순수한 기교의 미궁 속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또한 바그너로 말하면, 젊은 혈기가 점차 줄어들자 말년엔 피로와 헛된 동경 이외엔 아무것도 표현할 것이 없었따. 그러나 베토벤의 음악은 생애 최후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음악이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을 지닌 삶에 대한 태도의 표현이었던 때문이다." 베토벤 말년의 가장 위대한 창조로서 흔히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현악사중주곡들은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의 창조행위의 정점을 이룬다고 할수 있다.
고통과 성취의 두 측면에서 삶의 근본특성을 자각하는 베토벤의 능력은 그의 유연성이 결핍된 본겅과 결합되어 그의 인생관을 성장시킨 필수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발전은 종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를테면 다단조 교향곡의 베토벤은 고통을 무릅쓰고 달성한 성취감 속에서 삶의 미를 발견하였는데, 여기서 운명은 도전해야 할 적이다.
반면 말기 사중주곡들의 베토벤은 최고의 성취감은 고통을 통해서 획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고통은 삶의 필요조건으로서뿐만 아니라 광명을 비춰주는 힘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달성된 화해가 순수하고 완전했다는 것이 이 음악에 의해 입증되는데, 체험의 확실성이 그의 어떤 작품에서도 이보다 더 명백히 표현된 적은 없다. 이렇게 체험의 특질 때문에 많은 평자들이 이 사중주곡들을 신비적 혹은 형이상학적이라고 묘사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용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이 음악은 진실로 베토벤이 자신의 체험의 근본 요소들을 통합한 궁극적 종합의 표현임엔 틀림없다.
베토벤은 혹종의 신비적 열반의 세계로 토피하고자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삶의 어떤 기쁨도 노고도 고통도 잊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저버리지 않았다. 그가 달성한 것은 노인의 평정 그 이상의 보다 위대하고 놀라운 무엇이다. 이 말기 현악사중주들에서 표현된 삶은 베토벤의 다른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충만함과 다양함 및 강렬함에 차 있다. 그러나 이전의 그의 음악에선 서로 상반되던 삶의 이와 같은 측면들이 이제는 단일한 줄기로 부터 조화롭게 꽃피고 있는 것이다.
삶의 체험들은 여전히 그 모든 다향성을 지닌 채 나타나지만, 더 이상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베토벤이 이 위대한 창조에 전념하고 있었을 무협 그의 귀는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1820년 이 후 빈에서 베토벤의 인기가 되살아 나자 그의 여러작품들이 리바이벌되었는데, 1822년 11월 3일, 위대한 소프라노 빌헬미네 슈뢰더를 위한 자선공연으로 베토벤의 피델리오가 케른트너토어테아터에서 리바이벌되었다.
요제프 슈타트 테아터에서 이 오페라가 성공한 데 힘입어 베토벤은 드레스 리허설을 자신이 지휘하려고 했는데, 이때의 사건을 후에 슈뢰더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리허설이 계획되었을 때, 나는 베토벤이 드레스 리허설 전에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손수 지휘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소리를 들었다.....사람을 당황케 하는 얼굴과 초자연적인 영감에 빝나는 눈을 하고, 맹렬한 몸짓으로 지휘봉을 앞뒤로 흔들면서 그는 공연하는 음악가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음부도 듣지 못했다!"....결국 일어나고야 할 일이 일어났다. 귀가 먹은 거장은 가수들과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끔찍한 혼란속에서 아무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거의 언제나 베토벤 곁에 벝어 있던 쉰들러는 혼란의 이유를 베토벤에게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를 알아차린 베토벤은 절망해서 도망치듯 극장을 떠났다. "이 때의 타격에서 그는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고 쉰들러는 쓰고 있다 (이후 그는 처음엔 스메타나 박사에게, 다음엔 신부인 페터바이스에게 귀의 치료를 받았으나 별 무효과였다.)
그러나 베토벤의 창조력은 자신이 더 이상 피아노를 연주할 수도 없고 지휘를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1822년 12월20일에 런던의 리스 앞으로 쓴 편지를 보면 이같은 사실은 한결 뚜렷해진다. "고맙게도 베토벤은 작곡할 수 있다네 - 하지만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나는 인정하네 - 하지만 그것이 그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나는 인정하네, 만약에 하느님이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만 준다면 적어도 다소 나아지기라도 한다면, 그때 나는 유럽의 모든 나라의 제안에, 아니 북아메리카의 것까지도 죄다 응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렇게 되는 경우 나는 여전히 내 삶의 성공을 만끽할 수 있을테지..."
과연 베토벤은 런던의 필하모니 소사이어티가 제안한 심포니를 작곡을 수락했고 러시아의 갈라친 공작이 의뢰한 현악사중주도 쾌히 승락했다. 갈리친 공은 한 곡당 50듀캇으로 사중주 세곡을 의뢰했는데, 마침 이때 베토벤은 지난 13년 동안 전혀 손대지 않고 있던 현악사중주를 위한 작품을 쓸 구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베토벤이 이 제의를 수락한 것은 1823년 1월25일이었는데, 첫 곡인 작품127이 완성된 것을 본것은 1825년 초였으며, 같은 해 3월에 초연되었다. 뒤이어 두 곡을 와성해서 전달했지만, 갈리친 공은 베토벤 생전엔 첫 곡의 작곡료만 지불했다.(베토벤 사후 강력한 지불요청을 받고서야 베토벤의 조카 카를에게 나머지를 지불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의뢰받은 세 곡을 완성한 후에도 계속 사중주의 형식에만 몰두해서 작품131과 135를 잇따라 작곡하게 된다.
당시 베토벤을 방문했던 인사들은 모두 그가 눈병을 비롯해서 여러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기왕성해 보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실 이 가중주들을 작곡하고 있을 당시 베토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은 어느 때보다도 나빴다. 1824년은 그의 장엄미사가 상트 페테스부르크에서 초연되고 9번 심포니가 빈에서 초연되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지만, 재정적으로는 그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카 카를에 대한 양육권을 위한 기나긴 소송에서 그는 1820년 마침내 승소판결을 받아냈지만, 조카와의 관계는 끊임없는 긴장과 불화의 연속이어서 그러지 않아도 좋지 않은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그는 조카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려는 제산에 대해서는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했었으므로 몹시 빈궁한 처지였는데다 가정 사정 역시 불안정했다. 이러한 사면초가가운데서도 그의 창작력은 정점에 달해 가장 송고한 창조를 이룩하게 되지만, 적업속도는 무척 느렸다. 이제 그가 표현해야 하는 것은 이전에 표현했던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힘들게 이루어 졌으며, 그가 접하는 의식상태는 갈수록 포착하기 힘든요인들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다 깊은 심연으로부터 우러나왔다.
이와 비례해서 창작행위도 어느 때보다 완전한 몰두와 칩거의 상태를 필요로 했다. 이제 작곡가 베토벤이 작업하고 있는 영역은 외적인 살믕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고 보호된 세계로서 일찍이 한번도 탐구된 적이 없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느몰 그의 난청과 고립은 내적 자아로의 완전한 몰입에 대한 상징이라 볼만하다. 외적인 것은 아무것도 그의 창작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으며, 기껏해야 잠시 창작을 중단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외부의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귀를 가지고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내려가 여태까지 어느 예술도 이르지 못한 인간의 영혼의 심연에서 우러나온 가장 숭고한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제9번 심포니에서 베토벤은 자신이 인류를 향해 말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남김없이 말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는 인류의 선규자로서 자신만의 고독한한 참험으로부터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기쁨과 갈망을 함께 하기위해 세계속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베토벤이 동료인간들에게 그들과 같은 한 사람으로서 말을 건 마지막 경우였다. 이후로 그는 말기 사중주곡들에서처럼 일찍이 아무도 가본적이 없는 이른바 "기이한 사념의 바다"를 홀로 항해하게 된다.
그러한 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 그의 항로는 순조롭지 못했다. 1825년초에 베토벤은 중병에 걸렸다. 1월에 그는 필하모니 소사이어티로부터 런던에 와서 그의 연속 연주회를 감독해달라는 초청을 받고 수락했지만 병 때문에 여행을 단념해야만 했다. 그는 장염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브라운호퍼 박사는 그에게 도움을 호소한 베토벤에게 술이나 커피 및 자극성 있는 음식을 절대 취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단언하지만 만약에 당신이 술을 한 방을 이라도 마신다면 몇 시간안에 당신은 쓰러져 눕게 될 것이오" 그는 또 베토벤에게 "신성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시골로 가서 "자연의 밀크" 를 마시라고 충고했다. 베토벤은 5월7일에 바덴으로 가서 - 이따금 빈을 방문하면서 - 10월15일까지 머물렀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다령으로 피를 토했으며,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혼자 힘으론 도저히 힘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의사는 죽음으로 통하는 문을 닫을지어다!"음악역시 일단 유사시엔 나를 도울 것이오"라는 말로 그는 브라운 호퍼박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맺고 있다. 당시 그는 a-moll 사중주 op.132를 작곡하고 있었다. 이즈음의 회화수첩에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복한 환자가 하나님께 하치는 감사의 노래, 새로운 힘과 다시 눈뜬 감정을 느끼면서" 이말은 약간 변경된 형태로 현재의 op.132의 molto Adagio악장에 그대로 남아있다.
음악은 과연 그를 도왔다. 그의 건강은 다시 회복되었고 그러자 그는 의상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알코올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사실 베토벤은 알콜 중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상당히 과음하는 편이었다. 당시 그는 많은 방문객들을 맞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베토벤이 워기황성한 상태에 있음을 발견했다. 실제로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베토벤이 이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당시 완성단계에 있었던 op.130의 B-dur현악사중주에 대한 분출하는 창조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때 베토벤은 오랫동안 소원해 있던 옛 친구 슈테판 폰 브로이닝과의 우정을 회복해서 퍽이나 유쾌한 기분이었다. 1825년 10월에 그는 그의 마지막 거소가 된 슈바이츠 파니어 하우스로 옮겼는데, 이 집은 브로이닝 가와 바로 이웃하고 있었다.
당시 12세였던 부로이닝의 아들 게르하르트는 후에 슈바르츠파니어하우스에서 란 메력적인 책을 써서 베토벤과 얽힌 추억을 생생하게 전해주게 되는데, 이 소년에겐 베토벤의 조카 카를에게 결핍된 풍부한 감수성이 있었다. 게르하르트는 베토벤의 병상에 자주 찾아가 그와 함께 지내면서 노작곡가에게 잊을 수 없는 위안이 돼주었는데, 베토벤은 "나의 요정" 혹은 "나의 바지단추"라 부르며 이 아이에게 애정을 흠뻑 쏟았다.
그러나 1825년~26년의 겨울무렵 베토벤과 조카 카를과의 알력은 피할 수 없는 클라이막스로 치달아갔다. 삼촌의 병적으로 심한 간섭과 과도한 애정에서 나혼 호된 감시를 더이상 참을 수 없게된 카를은 마침내 1826년 7월, 삼촌에게서 도망가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는데, 미수에 그친 이 자살사건은 빈 시의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 이 사건에서 받은 충격은 베토벤의 건강을 결정적으로 파손시켰다. 갑자기 그는 70세의 노인처럼 보였다고 전해진다. "나의 모든 희망은 사라졌네"라고 그는 친구인 카를 홀츠에게 쓰고 있다. "적어도 나 자신의 보다 좋은 자질을 닮은 누군가가 내 곁에 있기를 바라는 나의 모든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찍한 재난이 베토벤의 작품에는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건뒤에 베토벤이 조카와 함께 빈을 떠나(9월28일) 동생 요한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작곡한 F-dur사중주 op.135와 B-dur사중주를 위한 새로운 피날레는 더없이 밝고 쾌활한 분위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오히려 조카와의 심리적인 이별이 그로부터 무거운 짐을 벗겨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처럼 낮에는 들판을 쏘다녔고, 새벽과 저녁에는 일에 몰두해서 이 마지막 작품을 환성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이 F-dur사중주의 연주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cis-moll사중주 op.131은 1835년에 가서야 빈에서 최초로 공개연주를 가졌다. 이 최후의 사중주는 앞의 네 곡이 지닌 내용과 힘에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말년에 베토벤이 도달한 해탈의 경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느린 Des-dur악장을 포함하고 있는 이 사중주는 거의 쾌활한 악장으로 끝맺고 있는데, 이 피날레엔 "어려운 결심,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라는 불가사의한 말이 덧붙여져 있다.
무엇을 그래야만 하는가? 이 말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베토벤이 모리스 슐레신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이유도 아무런 설명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여기에 나의 친구여, 나의 최후의 사중주가 있네, 이게 마지막이 될 걸세. 정말이지 무던이도 힘들었다네. 왜냐하면 나는 마지막 악장을 거의 작곡할 수 없었기 때문이네. 하지만 자네의 편지가 그것을 내게 상기시켰기에 마침내 나는 그걸 작곡하기로 결심했다네, 그것이 바로 내가 가음과 같은 좌우명을 쓴 이유일세. - 어렵게 이룩한 결심, - 그래야만 하는가? -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
베토벤은 단순히 농담으로 이 말을 했던 것일까? 혹은 진심으로 그랬을까? 인류의 영원한 헴릿적 물음, 그래야만 하는가?(Muss es sein?)의 명제에 대해 단순히(혹은 해학적으로)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라고 대답함으로써 작곡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수난자인 이 거인은 마침내 운명과 화해하고 운명을 긍정하는 인생에 대한 자신의 궁극적 태도를 표명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