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8세기 "호생관 최북"이 그린 금강산 "표훈사도(表訓寺圖)". 표훈사도는 금강산의 절경으로 잘 알려진 만폭동 입구에 있는 사찰 표훈사를 그림 그림이다. 표훈사로 들어가는 이중의 홍예교와 뒤로는 아름다운 금강산이 펼쳐져 있으며 최북은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호생관(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 최북의 자는 "칠칠(七七, 北을 반으로 갈라서 부름)"인데 특히 금강산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며 표훈사도는 위치와 모양이 거의 똑같다고 한다. 그래서 건축사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중국 풍경이나 중국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북은 그림을 팔지 않고는 끼니를 이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지만 "조선 화가는 당연히 조선의 산수를 그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우리나라 풍경을 그렸다.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최북은 술을 너무 좋아하고 말과 행동이 거칠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벼슬이 높고 많은 돈을 가지고와서 그림을 부탁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려주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몇푼만 받고 그려주기도 하였다. 어느 날 금강산을 둘러보던 최북은 구룡폭포에 이르러 아름다운 절경에 감탄하며 "천하의 명사가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니 어찌 만족하지 않으랴" 외치고는 물로 뛰어들었으나 다행이 사람들이 구해주었다. 최북이 젊은날에 높으신 분 한 분이 그의 마음에 들지않아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자 그 고관이 화가 치밀어 곤장을 맞기 싫으면 그림을 그릴 것을 강요하자 "남이 나를 저버린 게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린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죽기 직전에도 열흘 동안 굶다가 그림을 팔아 겨우 돈을 마련했다고 하며 그 돈으로 술을 마시고는 만취한채로 겨울밤에 한양의 눈구덩이에서 누워자다가 49살의 나이로 결국 동사했다. 전북 무주에 2012년 최북미술관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