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인천과 서울에 있는 북한군의 규모는 어느정도였고, 지휘관은 누구며 방어전력은 어떠했을까?
조금 허탈하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이 별로 없다… 주력 부대들은 대부분
낙동강 전선에 가 있었고., 정규사단은 없었다. 대부분 급조된
부대이거나 후방치안을 담당하던 2선급 부대들어었다.
인천을 지키던 부대는 제226독립 육전부대와 제918해안포대 예하2개 포병중대 정도로 3천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는 제25여단,
제9사단 37연대, 제18사단,제31사단 등이었다. 총 병력은 대략
2만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급조된 부대중 대표적인 존재가 김포공항을 지키기 위해 인천에서 밀려난 부대와 공군 지상병력을 모아 편성한 ‘제1항공사단’ 이었다.
많아야 수백명을 지휘했을 경험밖에 없었고 모택동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에
‘올인’ 하고 있었던 김일성은 인천을 다시 찾을수 있다고 생각하고 서울 주둔 북한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리고
서울로 보낼 원군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를
떠나 기본적으로 미군을 막을수 있는 전략 자체도 없었고, 통합된 방어 사령부조차 만들지 못했다. 더구나 상대는 미군과 한국의 최고의 전부부대인 해병대였다….
9월16일 새벽
김포공항을 향하기직전의 해병 5연대 2대대 원들의 모습
6시, 북쪽을 맡은 제5해병연대는
중간 목표인 김포비행장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2대대가 선봉이었고, 1대대와 3대대가 뒤를 따랐다. 시내 소탕전투는 한국 제1해병연대가 맡았다.
인천 시내를 수색중인 국군해병대원
제1해병연대는 경인선 철도를 중심으로 북쪽은 1대대 남쪽은 3대대가 맡아 작전을 전개했다.
라이프지에 실린 경인철도를 따라 진격중인 퍼싱 전차와 미해병대
북한군의 상당수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숨어 있었지만 일부는 시민들의 신고로 체포, 일부는 저항, 도주 하다 사살되었다. 인천 시청도 3대대에게 탈환되었다.
종군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상당히 ‘거칠게’ 시믄들을 다루는 한국해병대 덕이기도 했지만,
미1해병사단이 인천시내를 누비는 동안 전투다운 전투는 거의 없었고, 인적도 끊겨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한다.
특히 불타는 담배공장은 엄청난 악취를 퍼뜨렸다.
인첸 시내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포로들은 인천에 상륙작전에 전개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 올인중인 김일성이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쉬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는 코르세어 전투기들이 오전7시,
인천 쪽으로 향햐는 T34/85 6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퍼부었는데, 그중 3대가
격파되었다. 하지만 코르세어 한대가 격추되고 조종사 윌리엄 심슨 대위가 전사하였는데, 그는 서울탈환전의 첫전사자로 기록되었다.
3대의 전차는 숨는데 성공했지만 미 해병대의 퍼싱 전차에 모두 격파 당했다.
16일밤 제5 해병연대의 스미스 대위는 부평외곽에서
북한군 트럭 한대를 노획하고 장교 1명을 포로로 잡았다. 북한군 후속부대의 선두부대라는 인민군 장교의 증언은, 놀랍게도 그시간까지 미군의 진출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북한군 제 42기계화연대 소속 T34/85 전차 6대와 250명의
병사들은 주먹밥으로 아침을 먹으며 미군에게 다가오기까지 했다. 한미 해병대는 일단 통과 시키고는 완벽하게
포위하여 전차포와 ,바추카로 맹공을 퍼부어 불과 5분만에
전차 6대를 골로 보내버렸다. 공황상태에 빠진 북한군 250명은 거의 전원 사살되었다.
당시 전투에서 파괴된 T34/85
그야말로 보전 함동 대전차전의 표본인 이 전투에서 해병대의 피해는 경상자1명이었다.
이 ‘전투’는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1129일동안 벌어진 한국전쟁 전투중 가장 완벽한 승리이기도 했다.
우왕좌왕하다 당한 T34/85 진격로 확보를 위해 도로옆으로 밀어낸직후 찍은 사진
이소식을 들은 맥아더와 알몬드는 잽싸게 기자들을 불러모아 부서진 전차 앞에서 얼짱각도 사진찍으며 홍보에 열중하였다.
덕분에 해병대원들이 진격속도를 늦추었다는 냉소적인 소리를 들었지 말입니다.
그사이 제5해병연대의 다른 부대들은 도중에 있는 100m 남짓 되는 고지들을 장악하면서
김포공항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50년 7월말에 찍은 김포공항 사진
17일 7시,
김포공항을 향한 공격이 전차를 앞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전차 한대는 그냥 격납고 문을 밀고 들어가 멀쩡한 야크 전투기 한대를 노획하기도했다.
급조된 북한군 제1항공사단은 나름대로 방어에 최선을 다하고 18일 새벽3시에도 야습까지 시도하는등 나름 노력을 했지만 이미… 중과부적이었다…
김포공항에서 파괴된 북한군 비랭기.. 기종이 무언지 모르겠네요...
활주로 여기저기 풀숲사이에서 저항하던 북한군들도 하나둘씩 사살되었다.
북한군 제1항공사단장은 40세의
왕연준장이었는데, 인천상륙작전-서울탈환과정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안되는 북한군 고위 지휘관이지만, 중국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바 없다.
18일 오전10시, 김포공항은 해병대의 손에 들어왔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북한군은 100명 이상의 전사자와 10명의 포로를
남기고 후퇴했다.
오후 4시부터 해병대의 코르세어 전투기들이 착륙하기 시작했고, 3개 항공대대가 일본에서 이동해와 김포에 전술항공사령부를 설치했다.
내룩
깊숙히 진격하면서 함포사격이 불가능해저 포병대와 항공대에 의존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김포공항의 가치는 매우컸다.
18일 오후 2시 40분 첫번째 C-54 수송기가 지상요원을 태우고 비행정에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오후에만 무려 36대의 수송기가 착륙 물자와 차량을 쏟아냈다.
다음날에는 주활주로도 복구되었다. 김포공항을 통해 물자를 보충받은
제5해병연대는 바로 한강 도하 준비에 착수했다.
첫댓글 정말 글 자세하게 쓰시네요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ps.이글읽고 격파된 전차는 어떤색이고 화재나 연기는 어디서나는지 색이있는 영상을 보고싶은데 없겠죠?
저 부평전투는 그나마 사진이 좀 남아 있고 불타는 사진까지도 있긴한데... 색을 구별할 칼라사진은 한장도 없더라구요..
선빵이후에 경험이없는 군대랑 쭉~ 전투를 치뤄오던 군대의 차이는 확연하네요!!!
북에 팔로군 출신들의 지휘관들이 있었긴 하지만, 실전을 치룬 병사들의 숫자는 미군과 비교 불가지요...
인천쪽에 있던 인민군은 2선급이었지만 그래도 토치카같은 곳에서 극렬하게 저항한 것들도 많았다더라.
2차대전 당시 태평양에서 미해병들이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군 섬멸을 위해 수류탄, 화염방사기를 많이 활용했지만
불도저로 그냥 밀어 생매장시키는 전술도 효과적이었지.
인천에서도 미해병대는 바로 그 전술로 항복을 거부한 인민군 약 200여명을 저렇게 생매장 시켰다더라,
이미 인천에 요새화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음 만조기간인 9월말이나 10월로 작전이 미루어졌다면, 한,미 해병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것이라고 하더군요. 갈길바쁜 미군들이 일일이 찾아 다니며 항복을 권유하기보다는 그냥 밀어버리는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을겁니다.
설마 그시대에 생존하신건...
어떻게 이런 세세한 부대, 이름들까지 다 알수가 있죠?
머릿속에 들어있나요? 마냥 신기~~
전쟁 초기에 미군 딘소장이 대전에서 행불 되잖아요.
그때 딘소장 구하러 미군 특공대 태우고 들어간 증기기관차에 기관사가 김재현 기관산데요.
미국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서 4~5년전인가 유가족들이 훈장을 받았대요.
이때 당시 대전의 상황을 중심으로 연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