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의 야단법석
정 성 천
지난겨울에는 유독 비가 많이 왔다. 그런데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고갯마루도 또다시 비로 질척거린다. 제주도에서는 고사리 장마라는 낱말이 생길 정도로 익숙한 일이겠지만 이곳 육지 농촌에서 봄비는 그래도 항상 고귀한 손님이다. 귀한 손님을 그냥 보낼 수야 있나? 우산을 챙겨 쓰고 봄비 내리는 들녘으로 산책을 나간다.
논두렁 밭두렁에는 초록빛 새 생명이 묵은 생명의 무채색 잔해를 뚫고 힘차게 돋아나 비를 맞고 있다. 꽃은 빗속에서 더욱 환하다. 꽃피움에도 순서가 있는 모양이다. 자두나무 가지 끝에 달린 작은 꽃망울은 이제 반쯤 벌어져 비에 젖고 있는데 산수유 노란 꽃술들은 만개한 채 빗줄기에 흔들리며 춤을 추고 일찍 핀 매화는 여린 꽃잎을 빗물에 하나둘 떨구기 시작한다.
어느덧 저수지 연못에 발길이 닿았다. 이곳은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자주 운동 삼아 산책 오곤 하던 자그마한 연못이다. 가득 찬 못물이 반반한 하늘을 담고 빗물을 받아내며 고요를 키우고 있었다. 못가의 수양버들, 갯버들 모두 가지 끝에 여린 새싹을 달고 하늘을 우러러 비를 맞고 있는데 괴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누군가 갯버들 한 아름을 베어 눕혀 놓았다. 아마도 얼음이 풀리자마자 들락거리던 낚시꾼들의 행위이리라. 베이지 않고 꼿꼿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갯버들 가지는 파릇파릇 새싹들만 달고 있는데 베어 눕혀 놓은 가지에는 노란 꽃들이 새싹들과 함께 피어나고 있지 않겠는가? 자세히 보니 완전히 잘라 낸 가지들은 말라 아예 새싹도 피우지 못하고 있는데 반쯤 베어 눕혔으나 한쪽 껍질만 간신히 붙어 있는 가지들은 꽃과 새싹을 함께 피워 냈다. 놀랍기 그지없다.
이 가지들도 머지않아 역시 말라 죽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을 재촉하는 봄비를 맞으며 종족 번식을 위해 힘겹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일개 하찮은 식물이지만 가슴 뭉클한 감동이 밀려온다. 생명체의 신성한 책무를 갯버들도 알고 있는 듯 불리한 조건을 무릅쓰고 정상적인 가지들 보다 더 일찍 꽃을 피운 것이다. 얼마나 힘든 노력을 쏟았을까? 그 세계는 우리의 머리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게 틀림없다.
고교 시절 동네 아저씨가 올무로 생포한 너구리 한 마리를 올가미로 목 졸라 죽이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사타구니를 흥건히 적시며 분출하던 그 하얀 액체가 정액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던 일이 생각났다.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당하는 남자 사형수들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죽기 전 자손을 만들려는 마지막 시도는 식물, 동물, 사람을 가리지 않는 원초적인 행동인 것 같다. 결코 우리의 분별로는 알 수가 없는 이런 현상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후손을 만드는 일은 생명 가진 존재라면 누구나 반드시 이행해야 만 하는 신성한 책무임에는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작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1/3이 넘고 합계출산율 또한 0.78을 기록하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을 꺼리고 설사 결혼은 하더래도 아이 가지기를 회피하는 딩크족 부부들이 늘어 가고 있다고 한다. 소득이 올라가고 먹고 생활하는 삶은 더욱 편해지고 풍요로워지고 있으나 생명의 길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느낌이다.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좀 더 편안하게 자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책임이 우리 노인들에게도 있겠지만 젊은이들이 좀 더 생명체 책무에 민감해졌으면 좋겠다. 삯 월 셋방에서 신혼을 시작하고 자식을 낳아 키운 우리의 경험을 말해주지 않더라도 저 베어 눕혀진 갯버들의 개화가 주는 의미를 마음속 깊이 되새겨 보면 어떨까?
봄비 내리는 들녘은 새 생명의 아우성으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 벌어진다. 이맘때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생명에 대한 법문이 온 들녘에 무성하다. 그렇구나! 새 생명의 활기찬 돋음이 그리고 새 생명을 잉태하려는 몸짓인 꽃피움이 진정한 부처님 법의 자리가 아닐까? 누구나 한 번쯤 봄비 내리는 들녘에 서서 저 아스라이 펼쳐지는 봄비의 야단법석에 참석하여 생명의 법문을 들어봐도 좋으련만....
첫댓글 겨울비에 이은 봄비가 무척 잦다.
올 농사도 피농할 거란 생각이 짙다.
법석은 마련됐으나 들어줄 중생은? 저 들녘의 소리없는 새싹과 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