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1-058절 |
칭기스 칸의 조상들 |
059-093절 |
칭기스 칸의 소년기 |
094-103절 |
칭기스 칸의 결혼과 메르키트족의 침입 |
104-119절 |
토그릴 완 칸, 자무카와의 연합결성과 자무카와의 분열 |
120-140절 |
몽골부의 칸위계승과 주르킨족의 붕괴 |
141-149절 |
쿠이텐 전투과 타이치구트족의 붕괴 |
150-188절 |
칭기스 칸과 완 칸의 대립 및 케레이트족의 멸망 |
189-201절 |
나이만족 정복과 자무카의 처형 |
202-223절 |
칭기스 칸의 대 칸 즉위와 95천호의 임명 및 상사 |
224-234절 |
호위군의 확대개편 |
235-246절 |
우이구르의 귀부 및 삼림부족의 정벌 |
247-264절 |
금(金), 서하(西夏), 호라즘 정벌 |
265-268절 |
서하의 멸망과 칭기스칸의 죽음 |
269-280절 |
오고타이칸의 즉위와 주변국가들의 정벌 |
281-282절 |
오고타이칸의 공적 및 <몽골비사>의 완성 |
2. 서지 사항
▪ 한문 번역본 : 『元朝秘史(원조비사)』, 원말~명초 추정
▪ 한글 완역본 : 유원수, 『몽골 비사』, 사계절, 2004
*유원수 -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인디에나 대학교 중앙유라시아 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단국대학교 몽골어과 겸임 교수로 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빙 연구원으로 있다.
몽골족에 의해 오랫동안 구전되어 오던 내용을 당시의 궁중시인이 몽골어로 구술했고 그것을 위구르 문자로 기록한 것이 '몽골의 비밀스러운 역사'라는 제목의 최초 원전이나 현재는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지금 남은 것은 원말명초에 성립한 한역본 『원조비사』(元朝秘史)이다. 원전의 한 단락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음사(音寫) |
위구르식 몽골어로 된 원전을 한어 북방 방언의 음가를 빌려 적음. |
방역(傍譯) |
음사한 문장을 형태소 수준까지 분해하여 각 단어의 뜻과 문법기능을 밝힘. |
총역(總譯) |
단락의 맨 끝에는 별도로 몽골문의 의미를 구어체 한어로 옮김. |
3. 책 내용 소개
►칭기즈 칸
1)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칭기즈 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칭기즈 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칭기즈 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칭기즈 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칭기즈 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칭기즈 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2)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1219년, 칭기즈 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과 서하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3)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칭기즈 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1220년 12월,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에서 루시군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칭기즈 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칭기즈 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칭기즈 칸은 1227년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4)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5)발슈타트 전투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6)타타르의 멍에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는 이반 뇌제 시대에 이르러서야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게 되었다.
►오고타이 칸
우구데이 칸 또는 오고타이 칸(1186년 ~ 1241년)은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이다. 몽골의 황제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아버지를 도와 부족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영토를 나누어 받아 오고타이 한국을 열었다. 1229년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어 개혁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자신의 몫으로 영지가 분배되었으나 그는 실질적으로 오고타이 한국을 통치하지는 않았다. 원나라의 황제로 묘호는 태종(太宗)이다. 칭기즈 칸의 아들 중에서 가장 지적인 사람이었다. 오고타이는 거처를 카라코룸에 정하였고, 그가 가장 신임한 인물은 야율초재로 아버지 칭기즈 칸 때부터 통치의 조력자로 함께 해왔으며, 중국식 행정 조직을 구성하여 통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정복 사업을 펴 페르시아와 남러시아를 정복하고 고려를 쳐 다루가치를 설치하는 등 영토를 넓혔다. 송나라의 사미원이 사망한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4. 독후감
1)선정 동기
나는 평소에 서양 중심적인 사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동양의 문화보다는 서양의 문화를 더 좋게 여기고, 서양 사회를 동경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안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서양 중심적인 사고는 현대의 문제만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
세계사를 배우는 과정에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라는 문장을 종종 보았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이전에, 그곳에서는 수만 년이라는 시간동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고유의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라는 말은 서양 중심주의에 의한 역사 왜곡이고, 사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말이 옳은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도 사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디언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역사 왜곡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도 서양 중심적인 사고가 기반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나는 ‘그렇다면 언제부터 동양보다 서양이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일까?’, ‘동양이 세상의 중심이 있었던 적은 없었던 걸까?’하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
서양 문명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은 15세기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를 거치고, 콜럼버스에 의한 스페인․포르투갈의 신대륙으로의 진출과 17세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계몽운동 등으로 인해서 서양문명은 동양문명을 앞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이전의 시간에 동양이 서양보다 우세에 있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생각을 하던 중, 서구의 시대가 오기 전에 세계 제국을 건설해 냈었던 ‘칭기즈 칸’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에 관한 역사서를 찾아보던 중, 그 당시 몽골에서 기록되었다던 ‘몽골비사’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2) 어떻게 몽골 고원에서 살았던 몽골족이 세계 제국을 건설할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동양에서부터 서양에 이르기까지 칭기즈 칸은 어떻게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아무래도 군사력에 있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도시를 무너뜨리고 정복시키는 것은 몽골족만의 군사제도와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군사력뿐만이 아니라 칭기즈 칸의 기지 역시 몽골을 세계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몽골족은 아주 어릴 때부터 말 타는 것을 배웠고, 말을 탈 줄 아는 몽골족은 잠재적인 병사였다. 60세 이하의 몽골족 성인 남성은 모두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세계정복사의 저자이자 역사가인 주베이니는 몽골군이 “군복을 입은 농민으로서, 유사시에는 작은 사람에서 큰 사람,고위층의 사람부터 재산이 거의 없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수, 궁수, 창병이 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몽골족의 지배자들은 백성을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고도로 훈련된 기병대로 활용할 수 있었고, 이 기병대는 사실상 몽골족의 모든 성인 남성을 아우르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군 같은 기마군대는 평원 전투에서는 매우 뛰어났지만,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국의 도시를 점령하기에는 적합한 전투 수단이 아니었다. 칭기즈 칸이 전투에 임했을 때, 기마군대의 한계를 느낀 첫 전투에서는 그의 기지를 발휘하여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일화를 들자면 칭기즈 칸은 전투에서 고양이 천 마리와 제비 천 마리를 준다면 포위를 풀겠다고 제한했다. 이 동물들은 칭기즈 칸에게 주어지게 되었고, 몽골군은 동물의 꼬리에 천을 묶고 그 천에 불을 붙였다. 동물들은 몽골군에게서 풀려나자 원래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달아나게 되었고, 꼬리에 묶인 천에 붙은 불 때문에 도시는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혼란을 틈타서 몽골군이 급습을 하여 승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몽골족의 기마군대와 잠재적인 병사들 그리고 칭기즈 칸의 기지, 이 세가지가 어우러졌기 때문에 몽골이 큰 힘을 가지게 된 것 같다.
3) 특이한 점은 몽골의 장군들 중에서 전장에 버려져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른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여러 일화가 나온다. 그 중 한가지 일화를 말하자면, 타타르족이 요새화한 나라투 시투엔의 목영지를 약탈할 때, 군인들이 목영지에 버려진 한 어린 소년을 발견했다고 한다. 어린 소년을 후엘룬에게 데리고 간 칭기스 칸은 어머니에게 “선물입니다.” 하고 드렸다. 어머니가 이르기를, “훌륭한 사람의 아이였음이 틀림없다.”고 하며 자신의 다섯 아들들의 아우, 자신의 여섯 번째 아들을 삼아, 시기켄 쿠두구라고 이름지어 돌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제국의 가장 중요한 장군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이렇게 부족을 약탈한 뒤에 전장에 버려져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른 것이다.
몽골족에 의해서 자신이 살고 있던 곳이 폐허가 되고 부모와 지인들을 잃고 살아남게 되었는데, 몽골족을 배신하기보다는 몽골족의 장수가 되어서 그 군대를 이끌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신의 고향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한편으로는 칭기즈 칸이 그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아이의 입장에서는 몽골족은 자신들의 가족과 마을을 망쳐버리긴 하였지만, 반면에 전쟁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아이들에게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거두어준 은인이기도 할 것이다. 또 후엘룬이 그런 아이들을 아들로서 삼아서 기른 것 또한 그들이 몽골을 배신하지 않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래도 칭기즈 칸은 전장에 남겨진 아이들을 보살피고 자신들이 거두어내는 것까지 전쟁의 연장선으로 여긴 것 같다. 칭기즈 칸의 그러한 사고는 그가 남긴 시에서 생각해 낼 수 있었는데. 그 시는 다음 내용과 같다.
권능 있는 하늘이 이름 지어 주시고/어머니이신 대지에 이르게 하시어/사나이가 원수의 메르키드 사람들을/그들의 가슴도 비워놓았습니다./그들의 간장도 도려냈습니다./그들의 침소도 비워놓았습니다./그들의 친척들까지 죽였습니다./그들의 남은 자들도 거두었습니다./메르키드 사람들을 그렇게 궤멸시켰으니 물러갑시다.
시의 내용처럼 칭기즈 칸은 전장에 남겨진 사람을 거두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 것 같다. 몽골비사의 전체적인 내용에서도 그러하고, 칭기즈 칸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에서는 그를 잔혹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그에게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4) 오늘날에 이러서까지도 서양에서는 몽골, 칭기즈 칸은 파괴의 상징으로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몽골족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을 묘사되어 있다고 한다. 몽골족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파괴와 약탈처럼 부정적인 것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몽골이 서양 세계로까지 넘어가면서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생각하면 몽골족을 안 좋게만 평가할 것도 아닌 것 같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고 한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그들에 의해서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 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 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동양과 서양이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등의 과학 기술 등이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몽골 고원에서 태어난 소년이었던 칭기즈 칸은 동양에서부터 서양까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인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긴 것이다.
5) 몽골비사라는 책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두께에 억눌려서 ‘이걸 어떻게 읽지’하는 생각을 했었다. 몽골의 역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었고, 책을 펴보았을 때 이름도 너무 어려워서 인물들이 계속해서 헷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몽골비사는 딱딱한 내용의 역사서가 아니었다. 칭기스 칸의 선조는 신화적인 존재로서 푸른색 잿빛의 이리인 부르테 치노와 흰 암사슴인 고아이마랄로 거슬러 올라가서 신화적인 내용을 담은 가계를 소개하는데, 앞부분에 이러한 신화적인 내용이 나와서 마치 소설을 읽는 듯이 흥미 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이야기가 마치 전장에 나가서 뛰고 있는 장수가 서술한 듯이 전쟁의 생동감을 담아서 이야기하고 있어서 지루한 감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몽골비사는 몽골인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면서 몽골인 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설화적인 내용이 많고 그 형식도 역사서로서는 사실을 전하는 데어 부적절한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몽골의 역사를, 그 역사에 대한 몽골인들의 인식을 아는 데에는 다른 것보다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몽골비사를 읽으면서, 처음에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알고자 하였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서양 중심주의적인 사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동양이 세상의 중심이 있었던 적은 없었던 걸까?’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칭기즈 칸이라는 인물의 명성을 들어는 보았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몽골이 얼마나 번창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몽골과 칭기즈 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나의 물음에 대한 해답도 얻게 되었다.
6. 참고문헌
저자불명, 유원수 역, 『몽골 비사』, 사계절, 2004
박원길, 『몽골비사의 종합적 연구』, 민속원, 2006
데이비드 O. 모건, 권용철 역, 『몽골족의 역사』, 모노그래프, 2012
박원길, 「몽골비사에 나타난 몽골족 기원설화의 분석」, 『몽골학』, 제13호, 한국몽골학회, 2002, pp.51-90
윤은숙, 「몽.원 제국기 옷치긴가의 활동과 세력 확장」, 『역사문화연구』, 제 28호,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7, pp.101-141
조병학, 「만주와 몽골사 연구에 관한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 만주학회, 2005, pp.64-72
첫댓글 다른것보다 선정동기가 분명한 점이 인상적이네요, 또한 한글파일에 각주가 비교적 친절하게 달려있어 읽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여기서 소개가 되는군요. 개략적인 내용을 알고 읽는다면 나중에 더 도움이 될거같아요, 수고하셨습니다!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몽골의 역사에 대한 소개를 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