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신풍리 방공호에 오신 하나님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죄로, 목사, 신부였다는 죄로 사물을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이었다는 죄로, 과거에 지주였다는 죄로, 그리고 진격해 오는 유엔군을 환영하고 미국을 좋아하리라는 가상적인 죄로 우리는 죽어야 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1950년에 윤리와 도덕이 구가되고 과학과 예술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지구 위에서 가장 잔악한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야만은 야만대로 소박하고 순진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야만 그 이상인 피와 살을 짓씹는 야수로서의 공산당이 지금 인민을 위한다는 이상과 문명의 탈을 쓰고 20세기의 지구 위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정신이 또렷하여 오히려 원망스러운 마음이 치밀기까지 하였다. 시체 위에 사람을 올려 앉혀 놓고는 뒷덜미의 옷깃을 왼손으로 감싸 쥐고 오른손에 잡은 벌컨(25발 기관총)으로 후두부를 쏘아버리는 것이므로 죽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까. 고통과 신음을 내뱉을 사이도 없이 총살은 잘 집행되는 것이었다. 한줄에 묶인 우리 네 사람 중 제일 왼편 사람 김경록(40세, 전기기술자)씨의 머리가 깨어지는 모양이 엎드린 내 눈에도 똑똑히 보인다. 피가 뿜어지고 뇌수(腦髓)가 내 얼굴에도 뿌려진다. 그다음 나와 손을 한데 묶인 오명랑(61세, 의사)씨의 반백의 머리도 바로 내 코앞에서 깨지며 피를 뿜고 흰 뇌장(腦漿)을 뿌려 놓는다.
다음은 내 차례다. 이야기가 길지 시간은 2~3초 순간밖에 안 된다. 이제 ‘탕’하는 한방의 총소리와 함께 나는 영원한 길을 떠날 것이다. 생각하니 50살도 못산 나로서, 거기다 처자까지 둔 나로서는 한스러움도 컸고 슬픔도 컸다. 그러나 나는 이 죽음의 잔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와 아울러 저주받을 인간들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총살당할 차례였다. 바로 그때였다. 나의 오른쪽 1미터 앞, 이미 사살당한 시체 속에서 한 학생처럼 머리를 깎은 머리하나가 어둠 속에서 마치 문어가 머리를 드는 것 같은 모양이 보였다. 그러자 곁에 불을 들고 있던 간수가 “야, 저 대가리 쏴라.”하고 외친다.
“뭐? 어느 것?” 총 든 중위가 눈이 뒤집혀서 이미 엎어져 있는 내 목덜미를 밟으며 꿈틀거리는 시체를 향해 “탕!”하고 한 방 쏜다. 그때까지도 인민군 중위는 오른발로 내 목덜미를 밟고 있었다. 총을 쏘고 나자 몸을 돌려 나를 쏠 차례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내 오른편 사람, 나와 왼손이 묶여있는 사람을 쏘고는 내 몸 위에서 내려서는 게 아닌가. 그리고 “또 들여보내!”라고 벽력같이 호령을 내린다. 그는 이미 백여 명 이상을 사살했기 때문에 흥분도 했고 광란적 살육에 취하기도 하여 엎어져 있을뿐더러 자기 발밑에 있었던 나를 이미 죽인 줄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내 옆 사람을 쏘아죽이자 내 얼굴 위에는 그의 파열된 두 개 골의 골편(骨片)과 피와 뇌장(腦漿)이 내 얼굴을 푹 덮어 코와 입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흘러들어 온다. 기침과 재채기가 나오려는 것을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참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그냥 죽은 체하고 늘어진 채 옴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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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25전쟁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한준명 목사의 증언 기록 중 일부입니다. 1950년 10월 9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저질러진 이른바, ‘원산 신풍리 방공호 학살 사건‘의 생생한 현장 묘사입니다.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에게도 전쟁의 참상을 실감 나게 해줍니다. 사건 이틀 후 원산에 국군, 유엔군이 진주하면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시체 298구를 찾아냈고 생존자는 6명이었습니다. 당시의 발굴작업은 장편 기록영화 ‘정의의 진격’으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의 흥분과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6.25 전쟁사(戰爭史)에서 인민군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사건이었습니다.
한준명 목사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국군이 진격해 온 10월 11일 오후 4시까지 살육의 현장, 바로 그 방공호 안에서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위의 현장 기록은 한목사가 1951년 2월 21일 북한 땅을 벗어나 부산 광안리 제3 포로수용소에서 작성한 것이고 박계주편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에 <지옥의 유폐 130일>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한준명 목사는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6월 30일, 원산에서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교화소에 구금되었습니다. 김일성 정권은 이후 구금자에 대한 집단처형을 주로 방공호로 만들어진 어두운 굴속에서 집행합니다. 시체처리 문제를 고려해 저들이 답습했던 이른바 반동분자 처형방식이었습니다.
한준명 목사는 그해 12월 미군이 원산에서 철수할 때 함께 남으로 내려왔습니다. 그가 미군 수송선을 타려고 부두에 나갔을 때 먼 시골로 피난 갔던 장모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 주은선은 어머니를 데리러 황급히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돌아오기 전 수송선은 떠나려고 했습니다. 한 목사는 자식 셋을 데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아내는 수송선이 떠날 시간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 목사는 고통 속에 망설였습니다. 아내가 있는 원산에 남아야 하나? 그렇게 되면 북에 남아 자신이 사형당한 뒤 어린 자식 셋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남아봐야 사형인데 자식 셋을 데리고 남으로 떠나야 하나? 결국 한 목사는 아내가 살아남아 언젠가 만날 거란 희망을 안고 눈물을 삼키며 배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산하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던 그날, 한준명 목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오늘 이 글을 읽는 우리 가운데에도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살인마의 군홧발에 목덜미를 밟힌 채 죽음의 총구 앞에서 올리는 기도, 게다가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을 향한 용서와 구원까지 보태진 기도, 아마 하늘 아래 이보다 더 절박한 상황에서 올리는 간절한 기도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은 그날 신풍리 방공호, 흑암이 가득한 죽음의 동굴에 한줄기 생명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느덧 2023년 성탄(聖誕)과 세모(歲暮)가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돌아보면 나라 안팎의 사정,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게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이스라엘에 이어 대만과 한반도의 하늘에도 전쟁의 먹구름이 밀려옵니다. 그런데도 한국 사람들은 ‘전쟁이냐 평화냐’라는 달콤한 구호에 속아 표를 던집니다. 마치 전쟁은 먼 나라 얘기라는 듯 천하태평이고 한가롭습니다.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에게 질병이 찾아가듯 전쟁은 터질만한 곳을 어김없이 찾아갑니다. 오래 전 유럽에 지금 한국의 좌파정치세력이 선동하는 것처럼 반전주의(反戰主義)가 팽배할 때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Leon Troesky)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에 관심이 없으시다구요? 그런데 죄송하지만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세모의 성탄에 올려야 할 한국교회의 간절한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더더욱 간절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준명 목사가 남긴 그날의 간증이 우리 모두에게 기도의 간절함을 일깨워 주는 귀중한 메시지가 되어야겠습니다. 아름다운 이 강산에 두 번 다시 신풍리 방공호의 처참한 비극이 반복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 2023.12.20. 글/최익제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