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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六回 殺甯喜子鱄出奔 戮崔杼慶封獨相
제66회: 영희를 죽이니 공자 전이 달아나고 최저를 죽이고 경봉이 홀로 재상이 되다.
話說,殖綽帥選卒千人,去襲晉戍,三百人不勾一掃,遂屯兵於茅氏,遣人如衛報捷。林父聞衛兵已入東鄙,遣孫蒯同雍鉏引兵救之。探知晉戍俱已殺盡,又知殖綽是齊國有名的勇將,不敢上前拒敵,全軍而返,回復林父。林父大怒曰:「惡鬼尚能為厲!況人乎?一個殖綽不能與他對陣,倘衛兵大至,何以禦之?汝可再往,如若無功,休見我面!」孫蒯悶悶而出,與雍鉏商議,雍鉏曰:「殖綽勇敵萬夫,必難取勝,除非用誘敵之計方可。」孫蒯曰:「茅氏之西,有地名圉村,四圍樹木茂盛,中間一村人家。村中有小小土山,我使人於山下掘成陷坑,以草覆之,汝先引百人與戰,誘至村口,我屯兵於山上,極口詈罵,彼怒,必上山來擒我,中吾計矣。」
한편, 식작이 군사 천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진나라 수비군들을 습격하여, 3백 명 거의 죽이고 모씨의 땅을 점령하여, 사람을 위나라에 보내 승전소식을 전했다. 손림보가 위나라 군사가 동쪽 변방에 이미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손괴와 옹서(雍鉏)에게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게 했다. 탐지해 보니 진나라 수비병이 거의 다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 또한 식작이 제나라의 유명한 용장이라는 것을 알고, 감히 앞으로 나가 대적하지 못하고 회군하여 손림보에게 복명했다. 손림보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기를, “악귀도 무서울 것이 없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느냐? 식작 한 사람을 대적하지 못한다면 만약 위나라의 대군이 몰려오면 어떻게 막겠는가? 너는 다시 가서, 만약에 공을 세우지 못하면 나를 볼 생각을 말아라!” 했다. 손괴가 울적하게 나가서 옹서와 상의했다. 옹서가 말하기를, “식작의 용기는 만 명의 사내를 대적할 만해서 틀림없이 이기기 어렵습니다. 적을 유인하는 계책을 써야 합니다.” 하니, 손괴가 말하기를, “모씨의 땅 서쪽에 이름이 어촌(圉村)이라는 곳이 있소. 사방에 수목이 무성한 가운데에 촌락이 있고, 촌락 안에는 작은 토산이 있는데, 내가 사람을 시켜 그 토산 아래에 굴을 파서 함정을 만들어 놓고 풀로 위를 덮어놓을 것이니, 그대는 먼저 군사 백 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마을 입구로 유인해 오시오. 내가 산 위에 주둔하고 있다가 식작에게 욕을 퍼부으면, 그가 노하여 틀림없이 산 위로 나를 잡으러 와서 우리 계략에 빠질 것이오.” 했다.
雍鉏如其言,帥一百人馳往茅氏,如探敵之狀,一遇殖綽之兵,佯為畏懼,回頭便走。殖綽恃勇,欺雍鉏兵少,不傳令開營,單帶隨身軍甲數十人,乘輕車追之。雍鉏彎彎曲曲,引至圉村,卻不進村,逕打斜往樹林中去了。殖綽也疑心林中有伏,便教停車。只見土山之上,又屯著一簇步卒,約有二百人數,簇擁著一員將。那員將小小身材,金鍪繡甲,叫著殖綽的姓名,罵道:「你是齊邦退下來的歪貨!欒家用不著的棄物!今捱身在我衛國吃飯,不知羞恥,還敢出頭!豈不曉得我孫氏是八代世臣,敢來觸犯!全然不識高低,禽獸不如!」
옹서가 손괴의 말대로 백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모씨의 땅으로 가서, 적군을 정탐하러 왔다가 우연히 식작의 군사들을 만난 것처럼, 일부러 두려운 척하며 방향을 돌려 도망쳤다. 식작은 자기의 용기를 믿고 옹서의 군사가 적은 것을 얕보아, 영채를 열라고 명령하지도 않고, 단지 자기가 데리고 있던 수십 인의 군사만을 데리고 경차를 타고 옹서의 뒤를 추격했다. 옹서가 길을 꾸불꾸불 돌아 어촌에 이르러, 마을로 들어가지 않고 비탈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식작이 숲속에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수레를 멈추라고 지시하고 토산 위를 보니, 주둔한 한 무리의 보병이 약 2백 명쯤 되는데 한 장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 장수는 신체가 매우 작았고, 금 투구에 비단 전포에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장수가 식작의 이름을 부르더니 큰 소리로 욕하기를, “너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제나라에서 버림받았고, 다시 진나라 난씨들이 써먹지도 못했던 폐물이면서, 지금 위나라로 도망쳐 들어와 빌어먹는 주제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찌 고개를 들고 다니느냐? 우리 손씨들은 위나라의 8대에 걸친 충신의 집안이라는 것을 모르고, 감히 우리를 범하다니 전연 높고 낮은 형편도 모르는 짐승보다 못한 놈이로다!” 했다.
殖綽聞之大怒。衛兵中有人認得的指道:「這便是孫相國的長子,叫做孫蒯。」殖綽曰:「擒得孫蒯,便是半個孫林父了。」那土山平穩,頗不甚高。殖綽喝教「驅車!」車馳馬驟,剛剛到山坡之下,那車勢去得凶猛,踏著陷坑,馬就牽車下去,把殖綽掀下坑中。孫蒯恐他勇力難制,預備弓弩,一等陷下,攢箭射之。可憐好一員猛將,今日死於庸人之手!正是:「瓦罐不離井上破,將軍多在陣前亡。」有詩為證:「神勇將軍孰敢當?無名孫蒯已奔忙。只因一激成奇績,始信男兒當自強。」
식작이 듣더니 크게 성을 냈다. 위나라 군사 중에 알아보는 자가 있어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놈은 손상국의 큰아들인 손괴라는 자입니다.” 했다. 식작이 말하기를, “손괴를 사로잡는다면 손림보를 절반은 잡는 일이다.”했다. 그 토산은 펑퍼짐해서 그리 높지 않았다. 식작이 소리치기를, “수레를 몰아라!” 하고, 전차를 몰아서 곧바로 토산 아래에 이르렀다. 그 전차는 사나운 기세로 달려 함정에 빠져 말과 함께 밑으로 떨어져 버리니, 식작도 구덩이 속에 처박혔다. 손괴는 그의 용력을 제어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여 미리 궁노수를 대기시켜 놓았다가 함정에 떨어지자 일제히 화살을 쏘게 했다. 가련하게도 맹장 한 사람이 오늘 평범한 사람의 손에 죽었다. 이야말로, ‘질그릇 항아리는 우물가에서 깨지고 용맹한 장군은 군진 앞에서 죽는다.’라는 말과 같았다. 시가 있어 그것을 증명하기를, “귀신같이 용맹한 장군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이름 없는 손괴가 이미 도망쳤다가, 단지 한 번 격분시켜 기적을 이루어냈네. 남아란 마땅히 스스로 강해야 함을 비로소 믿게 했네.” 했다.
孫蒯用撓鉤搭起殖綽之屍,割了首級,殺散衛軍,回報孫林父。林父曰:「晉若責我不救戍卒,我有罪矣。不如隱其勝而以敗告。」乃使雍鉏如晉告敗。晉平公聞衛殺其戍卒,大怒,命正卿趙武,合諸大夫於澶淵,將加兵於衛。衛獻公同寧喜如晉,面訴孫林父之罪,平公執而囚之。齊大夫晏嬰,言於齊景公曰:「晉侯為孫林父而執衛侯,國之強臣,皆將得志矣。君盍如晉請之,寓萊之德,不可棄也。」景公曰:「善。」乃遣使約會鄭簡公一同至晉,為衛求解。晉平公雖感其來意,然有林父先入之言,尚未肯統口。
손괴가 갈고리로 식작의 시체를 끌어올려서 목을 베어 위나라 군사를 쫓아버리고 손림보에게 돌아가 보고했다. 손림보가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만약 나에게 그들의 수비 군사들을 구하지 않은 일을 꾸짖는다면 나에게 죄가 있다. 차라리 싸움에 이겼음을 숨기고 졌다고 고하는 편이 낫겠다.” 하고, 이에 옹서를 진나라로 보내 패배를 고하게 했다. 진평공이 위나라 군사가 진나라의 수비군을 죽였다는 말을 듣고 대로하여, 정경 조무에게 명하여, 제후들의 대부들을 전연(澶淵)에서 모아 위나라를 치려고 했다. 위헌공은 영희와 함께 진나라로 가서 손림보가 자기를 쫓아냈던 죄를 호소했으나, 진평공은 그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 제나라 대부 안영이 제경공에게 말하기를, “진평공이 손림보를 위해 위헌공을 잡아 가두었는데, 이렇게 되면 장차 나라의 힘센 신하가 모두 뜻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군께서 진나라에 청해서, 옛날 우리가 위헌공을 래성(萊城)에 머물게 한 덕을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하니, 제경공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즉시 사절을 보내 정간공(鄭簡公)과 약속하여 함께 진나라에 가서 위헌공의 석방을 청했다. 진평공은 비록 두 나라 군주들의 찾아온 뜻을 이해했으나, 손림보가 먼저 와서 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기꺼이 말을 바꾸지 않았다.
晏平仲私謂羊舌肹曰:「晉為諸侯之長,恤患補闕,扶弱抑強,乃盟主之職也。林父始逐其君,既不能討,今又為臣而執君,為君者不亦難乎?昔文公誤聽元晅之言,執衛成公歸於京師,周天子惡其不順,文公愧而釋之。夫歸於京師,而猶不可,況以諸侯囚諸侯乎?諸君子不諫,是黨臣而抑君,其名不可居也。嬰懼晉之失伯,敢為子私言之。」肹乃言於趙武,固請於平公,乃釋衛侯歸國。尚未肯釋寧喜。右宰穀勸獻公飾女樂十二人,進於晉以贖喜。晉侯悅,并釋喜。喜歸,愈有德色,每事專決,全不稟命。諸大夫議事者,竟在寧氏私第請命,獻公拱手安坐而已。
안평중(안영)이 몰래 양설힐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는 제후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제후들의 나라에 환란이 있으면 도와주고 잘못이 있으면 고쳐주어야 합니다. 또한 약한 나라는 붙들어 주어야 하며 강폭한 나라는 눌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맹주의 직분입니다. 손림보가 당초에 그의 군주를 쫓아냈을 때 진나라는 그 죄를 토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또 위나라의 신하를 위해 군주를 가두어 놓고 있어, 군주가 된 사람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옛날 진문공께서 원훤(元咺)의 말을 잘못 들어 위성공(衛成公)을 붙잡아다가 왕성으로 데려가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자께서 나라의 군주를 가두는 일은 순리가 아니라고 싫어하여 진문공은 부끄러워하며 위성공을 풀어주었습니다. 천자에게 부탁해도 오히려 불가하다고 했는데, 하물며 제후가 제후를 가두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간하지 않는 것은 신하가 무리를 지어 그 군주를 억누르는 것이니, 명분이 없는 행위입니다. 이 안영은 진나라가 백업(伯業)을 잃지 않을까 걱정되어, 감히 그대에게 몰래 말씀드립니다.” 했다. 양설힐이 곧 조무에게 말하여 진평공에게 굳이 청하자 이에 위헌공을 석방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영희는 석방하지 않았다. 우재 곡이 위헌공에게 권하여 여자 악공 12인을 단장시켜 진나라에 보내어 영희를 속죄해 달라고 했다. 진평공이 기뻐하며 영희도 석방했다. 영희가 돌아와 더욱 공을 자랑하고 나라의 모든 일을 전결하고 아무것도 위헌공에게 아뢰지 않았다. 여러 대부가 의논할 일이 있으면 결국은 영씨들의 사저에 가서 명령을 청하니 위헌공은 두 손을 맞잡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時宋左師向戌,與晉趙武相善,亦與楚令尹屈建相善。向戌聘於楚,言及昔日華元欲為晉楚合成之事。屈建曰:「此事甚善,只為諸侯各自分黨,所以和議迄於無成。若使晉楚屬國互相朝聘,歡好如同一家,干戈可永息矣。」向戌以為然。乃倡議晉楚二君,相會於宋,面定弭兵交見之約。楚自共王至今,屢為吳國侵擾,邊境不寧,故屈建欲好晉以專事於吳。而趙武亦因楚兵屢次伐鄭,指望和議一成,可享數年安息之福。兩邊皆欣然樂從,遂遣使往各屬國訂期。晉使至於衛國,寧喜不通知獻公,逕自委石惡赴會。
그때, 송나라의 상술(向戌)는 진(晉)나라의 조무와 사이가 좋았고 또한 초나라의 영윤 굴건(屈建)과도 서로 친했다. 상술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옛날 화원(華元)이 진(晉)나라와 초나라가 우호를 맺게 하려던 일을 말하니, 굴건이 말하기를, “그 일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다만 제후들이 각자 무리를 지어 편을 가르고 있으니 이것 때문에 우리가 비록 화의를 맺고 싶었어도 마침내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속국들로 하여금 상호 사신을 교환하여 다 같이 한 집안을 이룰 수 있게 권한다면 전쟁을 영원히 없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술이 그렇다고 말했다. 이에 상술이 진나라와 초나라의 군주가 송나라에서 모여서 전쟁을 멈추고 서로 만나자는 제안을 했다. 초나라는 공왕 때부터 지금까지 오나라의 빈번한 침입으로 국경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굴건은 진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은 후에 오나라의 침략에 오로지 대비하려고 했다. 진나라의 조무도 역시 초나라가 빈번히 정나라를 침입하므로 화의를 한번 맺으면 몇 년 동안 편안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나라가 모두 기쁘게 상술의 제안에 따랐다. 마침내 두 나라가 각기 속국들에 사자를 보내어 날짜를 통지했다. 진나라 사자가 위나라에 도착하여 이것을 알리니, 영희는 위헌공에게 알리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석오를 회맹에 참석하라고 했다.
獻公聞之大怒,訴於公孫免餘。免餘曰:「臣請以禮責之。」免餘即往見寧喜,言:「會盟大事,豈可使君不與聞?」寧喜艴然曰:「子鮮有約言矣,吾豈猶臣也乎哉?」免餘回報獻公曰:「喜無禮甚矣!何不殺之?」獻公曰:「若非寧氏,安有今日?約言實出自寡人,不可悔也。」免餘曰:「臣受主公特達之知,無以為報,請自以家屬攻寧氏,事成則利歸於君,不成則害獨臣當之。」獻公曰:「卿斟酌而行,勿累寡人也。」免餘乃往見其宗弟公孫無地公孫臣曰:「相國之專,子所知也。主公猶執硜硜之信,隱忍不言,異日養成其勢,禍且倚於孫氏矣。奈何?」
위헌공이 듣고 대로하여 공손 면여에게 호소하니, 면여가 말하기를, “신이 예로써 그를 꾸짖겠습니다.” 했다. 면여가 즉시 영희를 찾아가 말하기를, “회맹의 큰일을 어찌하여 주군께 고하지도 않았습니까?” 하니, 영희가 발끈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자선(子鮮 ; 공자 鱄)이 나에게 약속한 것이 있는데 내가 어찌 다른 신하와 같단 말이오!” 하니, 면여가 돌아와 위헌공에게 보고하기를, “영희의 무례함이 심합니다. 어찌하여 그를 죽이지 않으십니까?” 했다. 위헌공이 말하기를, “만약에 영희가 없었으면 어찌 오늘이 있겠는가? 약속한 말은 사실 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후회할 수 없소.” 하니, 면여가 말하기를, “신은 주공의 특별한 지우를 받았으나 보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제 가속들로 영씨를 공격하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일이 성공하면 그 이익은 주군에게 돌아갈 것이나, 만일 성공하지 못하면 그 후환은 신 혼자서 감당하겠습니다.” 했다. 위헌공이 말하기를, “경은 잘 판단하여 행하되 과인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게 하시오.” 했다. 면여가 곧 사촌동생인 공손무지(公孫無地)와 공손신(公孫臣)을 찾아가 말하기를, “상국이 정사를 멋대로 하는 것은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주공께서는 약속에 발목이 잡혀 참기만 할 뿐 말도 못하니, 훗날 그 세력을 키우면 화가 옛날 손림부 집안보다 더할 것이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했다.
無地與臣同辭而對曰:「何不殺之?」免餘曰:「吾言於君,君不從也。若吾等偽為作亂,幸而成,君之福,不成,不過出奔耳。」無地曰:「吾弟兄願為先驅。」免餘請歃血為信。時周靈王二十六年。寧喜方治春宴,無地謂免餘曰:「寧氏治春宴,必不備,吾請先嘗之,子為之繼。」免餘曰:「盍卜之?」無地曰:「事在必行,何卜之有?」無地與臣悉起家眾以攻寧氏。寧氏門內,設有伏機,(伏機者,掘地為深窟,上鋪木板,別以木為機關,觸其機,則勢從下發,板啟而人陷,日間去機,夜則設之。)
공손 무지(無地)와 공손 신(臣)이 일제히 대답하기를, “어찌하여 죽이지 않습니까?” 하니, 공손 면여가 말하기를, “내가 주군에게 말했지만 주군이 따르지 않았다. 만약에 우리가 거짓으로 변란을 일으켜 다행히 성공한다면 그것은 주군의 복이며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라 밖으로 달아나면 그만이다.” 했다. 무지가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하니, 면여가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그때가 주영왕 26년(기원전 546년)이었다. 영희는 바야흐로 신년 잔치를 벌였는데, 무지가 면여에게 말하기를, “영희가 신년 잔치를 벌였으니 틀림없이 경계가 소홀할 것입니다. 제가 앞서서 쳐들어가 시험해 보겠으니 형님은 뒤따라오십시오.” 하니, 면여가 말하기를, “점을 쳐 봐야 되지 않겠는가?” 했다. 무지가 말하기를, “일이란 반드시 행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어찌 점괘에 달려 있겠습니까?” 했다. 공손 무지와 공손 신이 그의 가병(家兵)들을 모두 동원하여 영씨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영씨의 집 대문 안에는 복기(伏機)가 설치되어 있었다. (복기는 땅을 파서 깊은 굴을 만들고, 그 위를 나무판자로 덮고, 나무로 기계를 만들어 기계를 건드리면 그 형세가 밑으로 전달되어 나무판자가 열리면서 사람이 구덩이에 빠지는 것이었다. 낮에는 기계를 멈추었다가 밤에만 가동시켰다.)
是日因春宴,家屬皆於堂中觀優,無守門者,乃設機以代巡警。無地不知,誤觸其機,陷於窟中。寧氏大驚,爭出捕賊,獲無地。公孫臣揮戈來救,寧氏人眾,臣戰敗被殺。寧喜問無地曰:「子之此來,何人主使?」無地瞋目大罵曰:「汝恃功專恣,為臣不忠,吾兄弟特為社稷誅爾,事之不成,命也!豈由人主使耶?」寧喜怒,縛無地於庭柱,鞭之至死,然後斬之。右宰穀聞寧喜得賊,夜乘車來問。寧氏方啟門,免餘帥兵適至,乘之而入。先斬右宰穀於門。寧氏堂中大亂,寧喜驚忙中,遽問:「作賊者何人?」
그날은 신년 잔치가 열리는 날이라 가속들이 모두 집안에서 배우들의 놀이를 관람하느라 대문을 지키는 사람이 없고, 복기를 설치하여 경계를 대신했다. 공손무지가 그것을 모르고 기계를 건드려 구덩이 속에 빠졌다. 영씨가 크게 놀라 도적을 잡으려고 다투어 뛰어나와서 공손 무지를 잡았다. 공손 신이 과(戈)를 휘두르며 구하려 했으나 영씨의 가병이 많아 공손 신은 싸움에 져서 죽임을 당했다. 영희가 무지에게 묻기를, “네가 여기 온 것은 누가 시켰느냐?” 하니, 무지가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로 욕하기를, “네가 공을 믿고 정사를 멋대로 처리하니 신하로서 불충하여 우리 형제가 특별히 사직을 위하여 너를 죽이려고 한 것뿐이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운명이다. 어찌 다른 사람이 시켜서 했겠느냐?” 했다. 영희가 노하여 무지를 정원의 기둥에 묶어 놓고 채찍으로 때려죽이고 그런 후에 목을 베었다. 우재 곡이 영희의 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수레를 타고 위문하러 오니, 영희가 막 대문을 연 순간 면여가 군사를 거느릭고 도착하여 그 틈을 타서 영희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면여는 대문 앞에서 먼저 우재 곡을 참하니, 영씨의 집 안은 큰 혼란에 빠졌다. 영희가 경황 중에 급히 묻기를, “변란을 일킨 네놈은 누구냐?” 했다.
免餘曰:「舉國之人皆在,何問姓名乎?」喜懼而走,免餘奪劍逐之,繞堂柱三周,喜身中兩劍,死於柱下。免餘盡滅寧氏之家,還報獻公。獻公命取寧喜及右宰穀之屍,陳之於朝。公子鱄聞之,徒跣入朝,撫寧喜之屍,哭曰:「非君失信,我實欺子。子死,我何面目立衛之朝乎?」呼天長號者三,遂趨出,即以牛車載其妻小,出奔晉國。獻公使人留之,鱄不從。行及河上,獻公復使大夫齊惡馳驛追及之,齊惡致衛侯之意,必要子鱄回國。子鱄曰:「要我還衛,除是寧喜復生方可!」
면여가 말하기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너를 미워하는데 이름을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하니, 영희가 겁을 먹고 달아났다. 면여가 칼을 뺏어 들고 뒤쫓으니 영희가 대청의 기둥을 세 번 돌고 몸에 칼을 두 번 맞아 기둥 아래에서 죽었다. 면여가 영씨 집안을 남김없이 죽이고 돌아와 위헌공에게 보고했다. 위헌공은 영희와 우재 곡의 시체를 조당에 늘어놓아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했다. 공자 전(鱄)이 듣고 맨발로 조당으로 달려와서 영희의 시체를 쓰다듬으며 통곡하고 말하기를, “주군이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내가 사실 그대를 속인 것이라. 그대가 죽었으니 내가 무슨 면목으로 위나라의 조당에 서겠는가?” 하고, 하늘을 향하여 길게 세 번 외친 후에 즉시 뛰어나가 곧 소가 끄는 수레에 처자를 태우고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위헌공이 사람을 시켜 머물라고 했으나 공자 전은 듣지 않았다. 공자 전이 황하 가에 이르니, 위헌공이 다시 대부 제오(齊惡)를 시켜 역마를 타고 뒤를 쫓아가 위헌공의 뜻을 전하고 반드시 공자 전을 돌아오게 하라고 했다. 공자 전이 말하기를, “영희가 살아나기 전에는 나는 위나라에 돌아갈 수 없소!” 했다.
齊惡猶強之不已,子鱄取活雉一隻,當齊惡前拔佩刀剁落雉頭,誓曰:「鱄及妻子,今後再履衛地,食衛粟,有如此雉!」齊惡知不可強,只得自回。子鱄遂奔晉國,隱於邯鄲,與家人織屨易粟而食,終身不言一「衛」字。史臣有詩云:「他鄉不似故鄉親,織屨蕭然竟食貧,只為約言金石重,違心恐負九泉人。」齊惡回復獻公,獻公感嘆不已,乃命收殮二屍而葬之。欲立免餘為正卿,免餘曰:「臣望輕,不如太叔。」乃使太叔儀為政,自此衛國稍安。
제오가 오히려 강요하기를 마지않자 공자 전이 살아 있는 꿩 한 마리를 잡아, 제오 앞에서 허리에 찬 칼을 뽑아 꿩 모가지를 잘라 맹세하기를, “나와 처자식은 지금부터 다시는 위나라 땅을 밟지 않을 것이며 위나라의 곡식도 먹지 않겠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기면 이 꿩 같이 될 것이다!” 했다. 제오가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어쩔 수 없이 돌아갔다. 공자 전은 마침내 황하를 건너 진(晉)나라에 망명하여 한단에 숨어 살았다. 그는 가속들과 신발을 짜서 곡식과 바꾸어 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위(衛)라는 말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타국 땅이 고국보다는 못한 법인데, 신발을 삼아 곡식을 바꾸었으니 쓸쓸한 삶이었다. 단지 약속한 말은 쇠나 돌보다 더 무거우니, 죽은 사람에게 배신하는 것은 본심에 어긋나는 것이라.” 했다. 제오가 돌아와 위헌공에게 복명하니, 위헌공은 한탄해 마지않으며, 곧 명을 내려 영희와 우재 곡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위헌공이 면여를 정경으로 세우려 하니 면여가 말하기를, “신은 인망이 가벼워 태숙보다 못합니다.” 하니, 이에 위헌공이 태숙의(太叔儀)를 정경으로 삼아 정사를 맡기니, 이로부터 위나라가 점차 안정되었다.
話分兩頭。卻說,宋左師向戌,倡為弭兵之會,面議交見之事。晉正卿趙武,楚令尹屈建,俱至宋地,各國大夫陸續俱至。晉之屬國魯、衛、鄭,從晉營於左﹔楚之屬國蔡、陳、許,從楚營於右。以車為城,各據一偏。宋是地主,自不必說。議定:照朝聘常期,楚之屬朝聘於晉,晉之屬亦朝聘於楚。其貢獻禮物,各省其半,兩邊分用。其大國齊秦,算做敵體與國,不在屬國之數,各不相見。晉屬小國,如:邾、莒、媵、薛,楚屬小國,如:頓、胡、沈、麇,有力者自行朝聘,無力者從附庸一例,附於鄰近之國。遂於宋西門之外,歃血訂盟。
이야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송나라 좌사(左師) 상술(向戌)이 전쟁을 그치는 회맹을 주창하여 열국의 사자들이 만나 의견을 나누고자 하였다. 진(晉)나라 정경 조무와 초나라의 영윤 굴건이 모두 송나라 땅에 도착하고 각국의 대부들도 줄을 이어 계속 도착하였다. 진나라의 속국인 노(魯), 위(衛), 정(鄭) 세 나라는 진(晉)나라 진영의 왼쪽에 진영을 세우고, 초나라의 속국인 채(蔡), 진(陳), 허(許) 세 나라는 초나라 진영의 오른쪽에 진영을 세웠다. 전차로 성을 만들어 각기 한쪽씩을 차지했다. 송나라는 회맹이 열리는 땅의 주인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의논이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조빙 사절은 기일을 정하여 초나라 속국들은 진나라에 조공을 보내고 진나라 속국들은 초나라에 조공을 보낸다. 공물과 예물은 각각 예전의 반으로 줄이고 양쪽에 나누어 사용한다. 그 밖의 대국인 제나라와 진(秦)나라는 진(晉)나라와 초나라에 필적할 만한 나라로 간주하여 어느 한쪽에 속하지 말고 서로 만나지 않기로 한다. 진(晉)나라에 속하는 소국인 주(邾), 거(莒), 등(滕), 설(薛)나라와, 초나라에 속하는 소국인 돈(頓), 호(胡), 심(沈), 미(穈)나라 중에서 힘이 있는 나라는 스스로 조빙할 수 있으며, 힘이 없는 나라는 부용국(附庸國)의 예를 따르던가, 가까운 나라에 붙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송나라 서문 밖에서 삽혈 의식을 행하여 맹세하려고 했다.
楚屈建暗暗傳令,衷甲將事,意欲劫盟,襲殺趙武,伯州犁固諫乃止。趙武聞楚衷甲,以問羊舌肹,欲預備對敵之計。羊舌肹曰:「本為此盟以弭兵也。若楚用兵,彼先失信於諸侯,諸侯其誰服之!子守信而已,何患焉。」及將盟,楚屈建又欲先歃,使向戌傳言於晉。向戌造晉軍,不敢出口,其從人代述之。趙武曰:「昔我先君文公,受王命於踐土,綏服四國,長有諸夏。楚安得先於晉?」向戌還述於屈建。建曰:「若論王命,則楚亦嘗受命於惠王矣。所以交見者,謂楚晉匹敵也。晉主盟已久,此番合當讓楚。若仍先晉,便是楚弱於晉了,何云敵國?」
초나라 영윤 굴건이 몰래 명령을 내려 평복 속에 갑옷을 입은 무사로 회맹장을 겁박하여 진나라 조무를 습격한 후에 살해하려고 했으나, 백주리가 완강하게 간하여 그쳤다. 조무는 초나라가 평복 속에 갑옷 입은 무사를 준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설힐에게 물어 적의 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 양설힐이 말하기를, “본디 이 회맹은 전쟁을 그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초나라가 군사를 쓰면, 그가 먼저 제후들에게 신의를 잃으니, 제후들 중 누가 그에게 복종하겠습니까? 그대는 신의를 지키면 그만이지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했다. 이윽고 맹세를 하게 되자 초나라의 굴건은 또 먼저 삽혈을 하겠다고 상술을 시켜 진나라에 말을 전했다. 상술이 진나라 진영에 갔으나 감히 입을 열지 못하자, 그 종복이 대신 전했다. 조무가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군이신 진문공께서 천토(踐土)에서 왕명을 받고 편안히 열국들을 복종시킨 이래 중원 의 우두머리가 되었소. 초나라가 어찌 진나라 앞에 설 수가 있겠소?” 하니, 상술이 돌아가 굴건에게 전했다. 굴건이 말하기를, “만약 왕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나라도 일찍이 혜왕(惠王)으로부터 명을 받았소. 그래서 우리가 서로 만나 의논할 때 말하기를 초나라와 진나라는 필적(匹敵)한다고 했소. 진나라가 회맹을 주재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번에는 마땅히 초나라에 양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만약 그대로 진나라가 먼저 한다면 그것은 초나라가 진나라보다 약하다는 뜻이니 어찌 필적한다고 말하겠소?” 했다.
向戌復至晉營言之。趙武猶未肯從,羊舌肹謂趙武曰:「主盟以德不以勢,若其有德,歃雖後,諸侯戴之。如其無德,歃雖先,諸侯叛之。且合諸侯以弭兵為名,夫弭兵天下之利也,爭歃則必用兵,用兵則必失信,是失所以利天下之意矣。子姑讓楚。」趙武乃許楚先歃,定盟而散。時衛石惡與盟,聞寧喜被殺,不敢歸衛,遂從趙武留於晉國。自是晉楚無事。不在話下。再說,齊右相崔杼,自弒莊公,立景公,威震齊國。左相慶封性嗜酒,好田獵,常不在國中。崔杼獨秉朝政,專恣益甚,慶封心中陰懷嫉忌。
상술이 다시 진나라 진영으로 가서 굴건의 말을 전하니, 조무가 여전히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양설힐이 조무에게 말하기를, “회맹을 주재하기는 덕으로써 해야지,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덕을 있다면 삽혈을 비록 뒤에 해도 제후들이 받들 것입니다. 만약 덕이 없는데 삽혈을 비록 먼저 한다고 하면 제후들은 배반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후들을 모아서 회맹하는 것은 전쟁을 그치기 위해서요, 무릇 전쟁을 그친다는 것은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삽혈의 순서를 다투면 반드시 군사들을 쓰게 되고, 군사를 쓰면 반드시 신의를 잃게 되어 천하를 이롭게 한다는 의미를 잃게 됩니다. 원수께서 잠깐 초나라에 양보하십시오.” 하니, 조무가 이에 초나라에 먼저 삽혈하는 것을 양보했다. 삽혈과 회맹을 마친 후 제후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때 위나라 석오는 회맹에 참여했다가 영희가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히 위나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마침내 조무를 따라 진나라로 들어가 그곳에 머물렀다. 이후로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싸움이 그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편 제나라의 우상 최저는 제장공을 시해하고 제경공을 세워 위세가 제나라를 진동시켰다. 좌상 경봉은 원래 술을 좋아하고 또한 사냥을 좋아하여 항상 도성에 잘 붙어 있지 않았다. 최저가 혼자서 조정을 장악하여 멋대로 일을 처리함이 심해지니, 경봉이 마음속으로 은밀히 혐오하게 되었다.
崔杼原許棠姜立崔明為嗣,因憐長子崔成損臂,不忍出口。崔成窺其意,請讓嗣於明,願得崔邑養老。崔杼許之。東郭偃與棠無咎不肯,曰:「崔,宗邑也,必以授宗子。」崔杼謂崔成曰:「吾本欲以崔予汝,偃與無咎不聽,奈何?」崔成訴於其弟崔疆。崔疆曰:「內子之位,且讓之矣,一邑尚吝不予乎?吾父在,東郭等尚然把持﹔父死,吾弟兄求為奴僕不能矣。」崔成曰:「姑浼左相為我請之。」成疆二人求見慶封,告訴其事。慶封曰:「汝父惟偃與無咎之謀是從,我雖進言,必不聽也。異日恐為汝父之害,何不除之?」
최저는 원래 당강에게 그 소생인 최명을 적자로 삼아 뒤를 잇게 하겠다고 허락했으나, 장자인 최성이 한쪽 팔을 잃어서 불쌍하게 생각하여 차마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최성이 최저의 뜻을 짐작하고 자기가 먼저 적자를 최명에게 양보하겠다면서 최읍(崔邑)을 얻어서 노후를 보내겠다고 했다. 최저가 그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동곽언과 당무구가 즐거워하지 않고 말하기를, “최읍은 최씨의 종가 고을입니다. 반드시 적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하니, 최저가 최성에게 말하기를, “내가 원래 최읍을 너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동곽언과 당무구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겠느냐?” 했다. 최성이 그의 동생 최강에게 호소하니, 최강이 말하기를, “적자의 자리를 내주었는데, 한 읍도 아까워하며 주지 못한단 말입니까? 부친이 살아 계시는데도 동곽언 등이 이렇게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고 있는데, 만약 부친이 돌아가시면 우리 형제들은 그들에게 종이 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니, 최성이 말하기를, “잠시 이 일을 좌상에게 의뢰하여 우리를 위해 힘써 달라고 부탁해 보자.” 하고, 최성과 최강 두 사람이 경봉을 찾아가서 그 일에 대해 호소했다. 경봉이 말하기를, “그대들 부친께서 오로지 동곽언과 당무구의 말만 듣고 있으니 내가 비록 말을 한들 틀림없이 듣지 않을 것이다. 후일에 두 사람이 자네들 부친의 해가 될지 모르니, 어찌하여 그들을 없애 버리지 않는가?” 했다.
成疆曰:「某等亦有此心,但力薄,恐不能濟事。」慶封曰:「容更商之。」成疆去,慶封召盧蒲嫳述二子之言。盧蒲嫳曰:「崔氏之亂,慶氏之利也。」慶封大悟。過數日,成疆又至,復言東郭偃棠無咎之惡。慶封曰:「汝若能舉事,吾當以甲助子。」乃贈之精甲百具,兵器如數。成疆大喜,夜半率家眾披甲執兵,散伏於崔氏之近側。東郭偃棠無咎每日必朝崔氏,候其入門,甲士突起,將東郭偃棠無咎攢戟刺死。崔杼聞變大怒,急呼人使駕車,輿僕逃匿皆盡,惟圉人在廄。乃使圉人駕馬,一小豎為御,往見慶封,哭訴以家難。
최성과 최강이 말하기를, “저희들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단지 힘이 약하여 일을 이루어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니, 경봉이 말하기를, “나중에 다시 상의해 보자.” 했다. 최성과 최강이 물러가자, 경봉이 노포별을 불러 최성과 최강의 말을 서술했다. 노포별이 말하기를, “최씨의 분란은 경씨의 이익입니다.” 했다. 경봉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며칠이 지나자 최성과 최강이 다시 찾아와서 동곽언과 당무구에 대해 험담을 했다. 경봉이 말하기를, “그대들이 만약 일을 일으킨다면 내가 갑옷을 빌려주어 돕겠네.” 하고, 곧 잘 만든 갑옷 백 벌과 그 수만큼의 병장기를 주었다. 최성과 최강이 대단히 기뻐하며 밤중에 집안사람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게 해서 최저의 집 근처에 흩어져 매복시켰다. 동곽언과 당무구가 매일 아침 최저에게 문안드리는 것을 알고, 그들이 문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무사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동곽언과 당무구를 극으로 찔러 죽였다. 최저가 변이 난 것을 알고 대로하여 급히 사람을 불러 수레를 대령하도록 했다. 그러나 수레를 모는 노복들은 모두 도망쳐 숨어 버리고 오직 마부만 마구간에 남아 있었다. 곧 마부를 시켜 수레에 말을 매게 하고 어린 동자에게 말을 몰게 하여 경봉의 집으로 달려갔다. 최저가 경봉을 보더니, 울면서 집안 변란을 호소했다.
慶封佯為不知,訝曰:「崔慶雖為二氏,實一體也。孺子敢無上至此!子如欲討,吾當效力。」崔杼信以為誠,乃謝曰:「倘得除此二逆,以安崔宗,我使明也拜子為父。」慶封乃悉起家甲,召盧蒲嫳使率之,吩咐:「如此如此。﹍﹍」盧蒲嫳受命而往。崔成崔疆,見盧蒲嫳兵至,欲閉門自守。盧蒲嫳誘之曰:「吾奉左相之命而來,所以利子,非害子也。」成謂疆曰:「得非欲除孽弟明乎?」疆曰:「容有之。」乃啟門納盧蒲嫳。嫳入門,甲士俱入。成疆阻遏不住,乃問嫳曰:「左相之命何如?」嫳曰:「左相受汝父之訴,吾奉命來取汝頭耳!」
경봉이 짐짓 모르는 척 의아해하며 말하기를, “최씨와 경씨는 비록 성은 다르지만 실은 일체입니다. 어린 자식들이 감히 어른을 모르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입니까? 대감께서 만약 그들을 토벌하시겠다면 내가 마땅히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니, 최저가 그의 성의를 믿었다. 이에 감사하여 말하기를, “만약 저 두 아들놈을 없애버리고 최씨 집안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내가 최명을 시켜 좌상에게 부친의 예로 대하라고 하겠소.” 했다. 경봉이 곧 자기 집의 가병을 동원하여 노포별을 불러 인솔하게 하고, 이러저러하게 분부했다. 노포별이 명령을 받고 출발했다. 최성과 최강은 노포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고, 문을 닫고 굳게 지키려고 했다. 노포별이 그들을 꾀어 말하기를, “저는 좌상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대들을 돕기 위해서지 해치려 온 것이 아닙니다.” 했다. 최성이 최강에게 말하기를, “그렇다면 설마 서동생 최명을 없애려는 것인가?” 하니, 최강이 말하기를, “들어오게 합시다.” 했다. 이에 대문을 열고 노포별을 들어오게 하니, 갑사들도 모두 안으로 들어왔다. 최성과 최강이 저지할 수 없어서 노포별에게 묻기를, “좌상께서 뭐라고 명을 내리셨소?” 하니, 노포별이 말하기를, “좌상이 그대들 부친의 호소를 받아들여서, 내가 명을 받들어 그대들 목을 취하러 왔소.” 했다.
喝令甲士:「還不動手!」成疆未及答言,頭已落地。盧蒲嫳縱甲士抄擄其家,車馬服器,取之無遺,又毀其門戶。棠姜驚駭,自縊於房。惟崔明先在外,不及於難。盧蒲嫳懸成疆之首於車,回復崔杼。杼見二屍,且憤且悲,問嫳曰:「得無震驚內室否?」嫳曰:「夫人方高臥未起。」杼有喜色,謂慶封曰:「吾欲歸,奈小豎不善執轡,幸借一御者。」盧蒲嫳曰:「某請為相國御。」崔杼向慶封再三稱謝,登車而別。行至府第,只見重門大開,並無一人行動。比入中堂,直望內室,窗戶門闥,空空如也。棠姜懸梁,尚未解索。
노포별이 갑사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하기를, “빨리 손을 쓰지 않고 뭣 하느냐?” 했다. 최성과 최강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머리가 이미 땅에 떨어졌다. 노포별이 무사들을 풀어 최씨 집안을 노략질하여 거마, 복식, 제기 등을 남김없이 거두고, 또 대문과 문을 부수었다. 당강이 방에 있다가 놀라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오직 최명은 밖에 있어서 화를 당하지 않았다. 노포별이 최성과 최강의 머리를 수레에 매달고서 돌아와 최저에게 복명했다. 최저가 두 아들의 머리를 보더니,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서, 노포별에게 묻기를, “혹시 내실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는가?” 하니, 노포별이 말하기를, “부인은 그때 마침 잠이 깊이 들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했다. 최저가 기쁜 기색으로 경봉에게 말하기를,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저 어린 동자가 수레를 모는데 서투니 마부를 한 사람만 빌려주면 좋겠소.” 하니, 노포별이 말하기를, “제가 상국을 위해 수레를 몰겠습니다.” 했다. 최저가 경봉을 향하여 재삼 감사하고 수레에 올라 경봉과 헤어졌다. 최저가 자기의 집 앞에 도착하여 쳐다보니 대문이 크게 열려 있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중당에 들어가서 내실을 바라보니 창문은 모두 떨어져 있고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당강은 대들보에 목을 매어 아직 밧줄을 풀어놓지도 않았다.
崔杼驚得魂不附體,欲問盧蒲嫳,已不辭而去矣。遍覓崔明不得,放聲大哭曰:「吾今為慶封所賣,吾無家矣,何以生為?」亦自縊而死。杼之得禍,不亦慘乎?髯翁有詩曰:「昔日同心起逆戎,今朝相軋便相攻。莫言崔杼家門慘,幾個奸雄得善終!」崔明半夜,潛至府第,盜崔杼與棠姜之屍,納於一柩之中,車載以出,掘開祖墓之穴,下其柩,仍加掩覆,惟圉人一同做事,此外無知者。事畢,崔明出奔魯國。慶封奏景公曰:「崔杼實弒先君,不敢不討也。」景公唯唯而已。慶封遂獨相景公。以公命召陳須無復歸齊國。須無告老,其子陳無宇代之。此周靈王二十六年事也。
최저가 놀라 혼비백산하여 노포별을 불러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두루 찾았으나 최명도 없었다. 최저가 큰소리로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오늘 경봉에게 속아 집이 없어졌구나! 어찌 세상에 살 수 있으리오!” 하고, 역시 목을 매달아 죽었다. 최저가 당한 참화는 또한 처참하지 않은가?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옛날에는 한마음으로 반역을 꾀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삐걱거려 서로 싸우는구나! 최저의 집안이 참혹하게 망했다고 말하지 말라! 간사한 영웅 중에 곱게 죽는 자가 몇이나 있는가?” 했다. 최명은 밤중에 집으로 잠입하여 최저와 당강의 시신을 거두어 관 하나에 넣어, 수레에 싣고 조상들 무덤 중 한 개를 파서 관을 묻고 흙으로 덮었다. 오직 마부 한 사람이 일을 거들었기 때문에, 이 사람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일을 마치자 최명은 노나라로 달아났다. 경봉이 제경공에게 말하기를, “최저가 사실 선군(제장공)을 시해하여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했다. 제경공은 ‘예, 예’ 할 뿐이었다. 경봉이 마침내 홀로 제경공의 재상이 되었다. 제경공의 명으로 진수무(陳須无)를 불러 귀국시켰다. 진수무가 늙었다고 관직을 사양하자, 그 아들 진무우(陳无宇)가 대신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영왕 26년(기원전 546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時吳楚屢次相攻,楚康王治舟師以伐吳,吳有備,楚師無功而還。吳王餘祭,方立二年,好勇輕生,怒楚見伐,使相國屈狐庸,誘楚之屬國舒鳩叛楚。楚令尹屈建帥師伐舒鳩,養繇基自請為先鋒。屈建曰:「將軍老矣!舒鳩蕞爾國,不憂不勝,無相煩也。」養繇基曰:「楚伐舒鳩,吳必救之。某屢拒吳兵,熟知軍情,願隨一行,雖死不恨!」屈建見他說個「死」字,心中惻然。基又曰:「某受先王知遇,嘗欲以身報國,恨無其地。今鬚髮俱改,脫一旦病死牖下,乃令尹負某矣。」屈建見其意已決,遂允其請,使大夫息桓助之。
그때 오나라와 초나라는 여러 번 서로 공격하다가 초강왕이 수군을 훈련하여 오나라를 쳤으나, 오나라도 준비를 했기 때문에, 초나라 수군은 성과 없이 돌아갔다. 오왕 여제가 왕이 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그는 용기를 좋아하고 목숨을 가벼이 여겼다. 초나라가 쳐들어온 것에 화를 내어, 여제는 상국 굴호용(屈狐庸)을 시켜 초나라의 속국 서구(舒鳩)를 회유하여 초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했다. 초나라 영윤 굴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구를 정벌하자, 양요기가 선봉을 자청했다. 굴건이 말하기를, “장군은 늙었습니다. 서구는 작은 나라여서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으니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하니, 양요기가 말하기를, “초나라가 서구를 공격하면 오나라가 반드시 구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 번 오나라 군사들을 물리쳤으니 그 군사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소. 내가 일행을 따르고 싶으니 비록 죽어도 한이 없소!” 했다. 굴건은 그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측은했다. 양요기가 또 말하기를, “나는 선왕의 지우를 입어 일찍이 몸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했으나 기회가 없는 것이 한이었소. 지금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변했고, 만일 하루아침에 창문 밑에서 병들어 죽으면, 영윤이 나의 소원을 저버리는 것이오.” 하니, 굴건은 양요기의 결심이 굳다는 것을 알고 결국 그의 청을 허락하여 대부 식환(息桓)을 시켜 그를 돕게 했다.
養繇基行至離城,吳王之弟夷昧同相國屈狐庸率兵來救。息桓欲俟大軍,養繇基曰:「吳人善水,今棄舟從陸,且射御非其長,乘其初至未定,當急擊之。」遂執弓貫矢,身先士卒,所射輒死,吳師稍卻。基追之,遇狐庸於車,罵曰:「叛國之賊!敢以面目見我耶?」欲射狐庸。狐庸引車而退,其疾如風,基駭曰:「吳人亦善御耶?恨不早射也。」說猶未畢,只見四面鐵葉車圍裹將來,把基困於垓心。乘車將士,皆江南射手,萬矢齊發,養繇基死於亂箭之下。楚共王曾言其恃藝必死,驗於此矣。息桓收拾敗軍,回報屈建。
양요기가 행군하여 이성(離城)에 도착하자 오왕의 동생 이매가 상국 굴호용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왔다. 식환은 대군이 모이기를 기다리자고 했으나 양요기가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은 수전에 강한데 지금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왔다. 또 활을 쏘고 말을 모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그들이 처음 이르러 진영을 갖추지 못한 틈을 타서 마땅히 우리가 갑자기 공격해야 한다.” 하고, 곧 활을 들고 화살을 메겨 사졸들의 앞에 서서 적군을 향해 쏘는 대로 죽였다. 오나라 군사들이 점차 물러나자 양요기가 뒤를 추격하다가 수레 위에서 굴호용을 만나자 그에게 욕하기를, “나라를 배신한 도적놈아! 감히 무슨 얼굴로 나를 볼 수 있느냐?” 하며, 양요기가 굴호용을 쏘려고 했다. 굴호용이 수레를 몰아 질풍같이 달려갔다. 양요기가 놀라며 말하기를, “오나라 군사들이 수레도 잘 모는가? 빨리 쏘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면에서 오나라의 철엽거(鐵葉車)가 달려와 그의 주위를 에워싸니, 양요기는 포위 가운데 갇혔다. 전차를 탄 장사들은 모두가 강남의 사수들로 만 개의 화살을 일제히 쏘아, 양요기는 어지러운 화살을 맞고 죽었다. 초공왕이 일찍이 ‘활솜씨를 너무 믿으면 반드시 활에 맞아 죽는다.’ 라고 말한 것이 이에 사실이 된 것이다. 식환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굴건에게 돌아와 보고했다.
建嘆曰:「養叔之死,乃自取也!」乃伏精兵於栭山,使別將子疆以私屬誘吳交鋒,纔十餘合遂走,狐庸意其有伏不追。夷昧登高望之,不見楚軍,曰:「楚已遁矣!」遂空壁逐之。至栭山之下,子疆回戰,伏兵盡起,將夷昧圍住,沖突不出。卻得狐庸兵到,殺退楚兵,救出夷昧。吳師敗歸。屈建遂滅舒鳩。明年,楚康王復欲伐吳,乞師於秦,秦景公使弟公子鍼帥兵助之。吳盛兵以守江口,楚不能入,以鄭久服事晉,遂還師侵鄭。楚大夫穿封戍,擒鄭將皇頡於陣。公子圍欲奪之,穿封戍不與。圍反訴於康王,言:「己擒皇頡,為穿封戍所奪。」
굴건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양요기의 죽음은 스스로 취한 것이다.” 하고, 곧 정예군을 이산(栭山)에 매복시키고, 별장 자강(子疆)을 시켜 휘하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 군사를 유인하게 하니, 겨우 10여 합을 싸우고 달아났다. 굴호용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추격하지 않았다. 이매가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초나라 군사가 보이지 않아서 말하기를, “초나라 군사들이 이미 물러갔다.” 하고, 곧 보루를 비우고 쫓아갔다. 이산 아래에 이르자 자강이 뒤돌아서서 반격하고 매복하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이매를 포위했다. 이매가 좌충우돌했으나 포위망을 탈출하지 못했다. 굴호용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초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이매를 구출했다. 그러나 오나라 군사는 패전하여 돌아갔다. 굴건은 마침내 서구를 멸망시켰다. 다음 해 초강왕은 다시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진(秦)나라에 원군을 청했다. 진경공(秦景公)은 그의 동생 공자 침(公子鍼)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돕게 했다. 오나라가 많은 군사로 강구(江口)를 지키자, 초나라 군사는 강이 막혀 오나라 경계에 들어갈 수 없었고, 정나라가 오랫동안 진(晉)나라를 섬겼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돌려 정나라를 침략했다. 초나라 대부 천봉수(穿封戍)가 정나라 진영에서 장수 황힐(黃頡)을 사로잡았다. 공자 위(公子圍)가 황힐을 빼앗으려 하자 천봉수가 주지 않았다. 공자 위는 도리어 초강왕에게 호소하기를, “내가 황힐을 사로잡았는데 천봉수에게 빼앗겼습니다.” 했다.
未幾,穿封戍解皇頡獻功,亦訴其事。康王不能決,使太宰伯州犁斷之。犁奏曰:「鄭囚乃大夫,非細人也,問囚自能言之。」乃立囚於庭下,伯州犁立於右,公子圍與穿封戍立於左,犁拱手向上曰:「此位是王子圍,寡君之介弟也。」復拱手向下曰:「此位為穿封戍,乃方城外之縣尹也。誰實擒汝?可實言之!」皇頡已悟犁之意,有心要奉承王子圍,偽張目視圍,對曰:「頡遇此位王子不勝,遂被獲。」穿封戍大怒,遂於架上抽戈欲殺公子圍,圍驚走,戍逐之不及。
오래지 않아 천봉수가 황힐을 끌고 와서 초강왕에게 공로를 아뢰면서 그 사정을 호소했다. 초강왕은 결정하지 못하고, 태재 백주리(伯州犁)에게 결단을 맡겼다. 백주리가 말하기를, “정나라의 포로는 대부로 평민이 아닙니다. 그에게 물어보면 능히 말할 것입니다.” 하고, 곧 황힐을 뜰 아래에 세우고 백주리는 오른쪽에 서고 공자위와 천봉수는 왼쪽에 서게 하였다. 백주리가 두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왕자 위인데 주군의 동생이다.” 하고, 다시 두 손을 들어 아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분은 천봉수인데 곧 우리의 방성(方城) 밖의 현윤이다. 누가 실제로 너를 사로잡았느냐? 사실대로 말하여라.” 했다. 황힐이 이미 백주리가 마음속으로 왕자 위를 편들어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황힐이 짐짓 눈을 크게 뜨고 공자 위를 보더니 대답하기를, “저는 이분 왕자님을 만나 이기지 못하여 포로가 되었습니다.” 했다, 천봉수가 대로하여 시렁 위에서 과를 뽑아 공자 위를 죽이려 하니, 공자 위가 놀라 달아났다. 천봉수가 쫓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伯州犁追上,勸解而還。言於康王,兩分其功,復自置酒,與圍戍二人講和。今人論狥私曲庇之事,輒云:「上下其手。」(蓋本伯州犁之事也。)後人有詩嘆云:「斬擒功績辨虛真,私用機門媚貴臣。幕府計功多類此,肯持公道是何人!」卻說,吳之鄰國名越,子爵,乃夏王禹之後裔,自無余始封,自夏歷周,凡三十餘世,至於允常。允常勤於為治,越始強盛,吳忌之。餘祭立四年,始用兵伐越,獲其宗人,刖其足,使為閽,守「餘皇」大舟。餘祭觀舟醉臥,宗人解餘祭之佩刀,刺殺餘祭。從人始覺,共殺宗人。
백주리가 뒤따라가서 두 사람을 달래어 데려왔다. 초강왕에게 말하여 그 공을 둘로 나누고 다시 술자리를 마련하여 공자 위와 천봉수에게 화해하도록 했다. 지금 사람들이 사사로운 정으로 잘못을 비호하는 일을 일러 ‘그 손을 위아래로 가리킨다.’라고 한다. (대개 본디 백주리가 한 짓에서 유래되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탄식해 이르기를, “참수나 사로잡은 공적은 진위를 가려야 하거늘, 은밀히 왕족에게 아첨하여 기미를 알려주었다. 막사 안의 논공행상이 모두가 이와 비슷했으니, 그 누가 기꺼이 공정한 도리를 지키겠는가?” 했다. 한편 오나라의 이웃인 월(越)나라는 작위는 자작이었고, 하(夏)나라 우왕(禹王)의 후예인 무여(無余)가 처음 이곳에 봉해졌다. 하(夏)나라부터 주(周)나라까지 모두 30여 대를 거쳐 지금 윤상(允常)에 이르게 되었다. 윤상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부지런하여 월나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자, 오나라가 이를 꺼렸다. 여제가 왕위에 오른 지 4년째 되는 해에 처음 군사를 동원하여 월나라를 정벌하여 종친을 잡아서 그 발꿈치를 베고 문지기로 삼아 여황(餘皇)이라는 큰 배의 문을 지키게 했다. 어느 날 여제가 배를 타고 놀다가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월나라의 종친이 여제의 칼을 뽑아서 여제를 찔러 죽였다. 여제를 호종했던 군사들이 달려들어 월나라 종친을 죽였다.
餘祭弟夷昧,以次嗣立,以國政任季札。札請戢兵安民,通好上國,夷昧從之。乃使札首聘魯國,求觀五代及列國之樂,札一一評品,輒當其情,魯人以為知音。次聘齊,與晏嬰相善。次聘鄭,與公孫僑相善。及衛,與蘧瑗相善。遂適晉,與趙武、韓起、魏舒相善。所善皆一時賢臣,札之賢亦可知矣。
여제의 아우 이매가 다음 차례로 군주의 자리를 이어받아서, 나라의 정사를 그의 동생 계찰(季札)에게 맡겼다. 계찰은 전쟁을 그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중원의 여러 나라와 통호하기를 청하니, 이매가 그 말을 따랐다. 이에 계찰이 친선사절로 먼저 노나라를 방문하여, 오대(五代)와 열국(列國)의 음악을 청해서 구경하고, 계찰이 낱낱이 품평하니 모두 그 실정에 맞아서 노나라 사람들이 음악을 안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제나라를 방문하여 안영(晏嬰)과 친하게 지냈다. 그 다음으로 정나라를 방문하여 공손 교(정자산)와 친하게 지냈다. 위(衛)나라에 이르러 거원(蘧瑗)과 친하게 지냈다. 마침내 진(晉)나라에 가서 조무(趙武), 한기(韓起), 위서(魏舒)와 친하게 되었다. 그가 친교한 모두는 그때의 현명한 신하였고, 계찰의 현명함 또한 알만하였다.
要知後事,再看下回分解。
그 다음 일을 알고 싶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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