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65)
시월 1
세상에, 그 시월을 처형했네
그 다음 더 많은 시월들이 호명되지만
죽은 시월들은 부재라서 더 대답하네
지금 우리가 되캐서 그 이름들이 들키네
시월 2
너를 부른다
내 이름은 그 대답
그러니, 죽은 몸으로도 와서 내게 살아라
내 이름은 너의-나의-대답
- 이하석(1948- ), 사행시집 『희게 애끓는, 응시』, 서정시학,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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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에는 가창댐과 경산 코발트광산 위령탑 일대에서 열린 ‘10월문학제’를 다녀왔습니다.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에 소재한 가창댐은 1959년에 완공한 급수시설이지만,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 있었던 현장이기도 합니다. ‘10월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란 “한국전쟁 전후 정치ㆍ사회적 혼란 속에서 1946년 미군정의 식량보급정책에 반발했던 민중봉기 운동인 10월항쟁, 1950년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등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법적 절차 없이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을 이릅니다. 가창댐이 소재한 인근 골짜기에서도 위와 같이 수감되었던 자들과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자 등 다수가 끌려와 집단학살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1960년 제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신고를 받고 현장조사를 하는 등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자”(이상 가창댐 아래에 설치된 ‘위령탑’ 안내문 일부) 한 그 한 해 전에 가창댐이 완공되어서 확인할 수는 없었답니다. 추정된 학살이 사실이라면 가창댐 인근 골짜기에서 집단학살된 유해들은 전부 수몰된 셈이지요. “1950년/여름 더위의/결빙//대구 형무소에 갇힌 양심수들과 국민보도연맹원들은/구석 없는 광장에서/귀를 막지만,/죽음의/호명으로, 마구,/끄집어 올려집니다./한데 엮인 채/녹색의 차에 올라,/바리바리,/경산 코발트 폐광산에 실려 옵니다.//그들을 둘러싼/군경들은 남색의 하늘 아래/천막처럼/서 있습니다.//관리와 교화로 엮인 보도연맹원들은/포승의 상처로/파랗게/멍든 채/몇 명씩 수직 갱위에/세워집니다.//갱 구멍이 눈 흘기는/역사 같습니다./컴컴하게/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군인이/앞의 한 명을 쏘아/갱 속으로 떨어뜨리자 한데/엮인 이들/줄줄이/산 채로/따라서/떨어져 내립니다./숨 막힌 미래 속으로/셀 수 없는/몸들몸들몸들 붉게/쏟아져 내립니다.//수천 명이 쏟아져 내렸어도/한 명도 게워올려지지 않습니다./거대한 위장의 소화력으로/1950년 한여름의 더위는 캄캄하게,/결빙되고,//그리고는 그 위에 흙을 덮어버립니다.//곧장/죽음의 정보는 봉쇄되고,/폐기됩니다.”(이하석 시 「컨테이너」 부분, 『천둥의 뿌리』, 한티재, 2016) 10월항쟁 70주년에 즈음하여 시인은 위 시가 수록된 10월항쟁 시집을 출간했는데,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집단학살의 또다른 현장인 경산코발트광산 현장도 답사했습니다. 입구에는 “이곳은 1950년 7월에서 9월까지 경산, 청도, 영천, 대구 등 인근지역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 형무소 및 인근지역 형무소 수감자 등 약3,500여 명의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집단희생된 지역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국가차원의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장/경산시장’ 공동명의의 2008년 10월에 세운 안내판이 서 있으나,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해발굴작업이 지지부진한 건 발굴작업이 용이하지 않은 현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뭔가 석연찮습니다. 그게 뭘까요. 하니 시인은 우리가 시월을 호명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되캐서 그 이름들이 들키”도록 “처형”된 “더 많은 시월들”을 호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호명하는 이름들은 무고한 이름들입니다.이 호명에 더 많은 이들이 동참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들키도록요. 다 들키도록요. 다 들킨 이후까지도요. (20241009)
첫댓글 우리 지역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 시와 시인의 민감성을 묵연히 읽었습니다. 역사의 돌부리에 넘어진 생령들이시여, 한 분도 빠짐없이 왕생극락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