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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호]
19세기 유럽에서의 불교의 의미
- 서양 사상과 불교의 만남
김정현
1. 들어가는 말: 서양은 불교를 어떻게 보았는가?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서양 지성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서양에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산업문명과 합리주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가운데 일어났으며, 그를 극복하고자 하는 19세기 정신사적 운동과 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서양에서 불교의 수용과 이해는 그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시도 한 가운데 서양의 근대불교학이 태동되고 동양 및 불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서양 지성의 폭과 깊이도 확장되고 깊어졌다는 점에서 커다란 정신사적 의미를 갖는다. 서양의 불교 연구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도 불가피한 작업일 뿐만 아니라 현대철학 및 현대문명의 향방 그리고 현대인의 정신적 삶을 성찰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이 글에서 주로 서양의 불교의 수용과정과 서양 근대철학자들에서 다루어지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19세기 유럽의 불교의 위상과 그 정신사적 의미를 다룰 것이다. 서양의 20세기 불교연구와 수용 과정을 분석하는 것은 별도의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작업이다.
서양은 불교를 어떻게 보았는가? 서양에서는 불교가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으며 영향을 미쳤는가? 불교와 서양철학은 도대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불교는 서양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서양철학은 그 만남을 통해 어떤 정신세계를 전개하고 있는가? 독일의 낭만주의는 불교와 어떤 영향관계에 있으며, 어떻게 근대 서양불교의 태동뿐만 아니라 현대의 심층심리학의 탄생에 기여하게 되었는가? 불교가 유럽에서 수용되는 과정에는 오해, 왜곡은 없었던 것일까?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현대문명과 현대인의 정신적 삶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서양에서 불교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왜 현재도 불교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증대되고 있는 것일까? 불교가 현대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우리는 서양과 불교의 만남에 대한 많은 물음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은 유럽에서 불교를 만나는 지점에서 출발하여 서양정신사와 융합하고 서양 불교학이 태동되는 과정, 불교 이해의 지평이 확장되고 깊이 있게 되는 과정 등을 추적하며, 특히 19세기 유럽의 불교가 서양정신사에서 가지는 의미를 논의할 것이다.
서양이 불교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였다.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의 투사행위로 시작된 서양에서의 불교는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라는 시대적 정신적 분위기 속에서 수용되기 시작했고, 따라서 불교의 교리 자체나 불교의 역사적 기원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신들이 바라본 불교, 즉 왜곡되거나 오해되거나 변형된 모습의 불교였다. 즉 이는 기독교 신학이나 근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해석되고 자신들의 시대적 문제의식이 반영된 서양적 불교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서양 근대문명의 한계를 인식하며 이상적 인류의 기원을 동경하는 과정에서 낭만주의자들은 인도에 관심을 갖고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 경전을 발굴하거나 번역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서양의 근대 불교학이 태동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불교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동양과 불교를 이해하는 것이 지성계에는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20세기 들어서까지 불교는 일반 대중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종교와 철학의 경계영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야스퍼스(K. Jaspers)의 말처럼 불교는 서양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잘 이해할 수 없고 거리감이 있으며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서양 사람이라는 존재의식을 버릴 때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석가가 가르친 진리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불교는 서양에서 여전히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종교로 여겨지고 있다.
서양에서 불교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 것일까? 프레데릭 르누아르(Frédéric Lenoir)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La Rencontre de Bouddhisme et de L'occident)』에서 서양에서의 불교 이해의 다양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서양에서의 불교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불교를 발견한 서양인이 누구냐에 따라, 그 사람의 관심사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때로는 퇴폐적인 기독교 사상으로, 절망적인 허무주의, 동양의 가톨릭, 합리주의, 무신론적 신비주의, 미신적인 종교로, 또는 하나의 철학, 비의秘意로 가득 찬 삶의 지혜, 현대적 인문주의 또는 세속적인 인생 철학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불교를 받아들였던 서양의 근대 이후의 철학자나 지성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라이프니츠,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베버 등은 불교를 직접 언급하며 다양한 해석과 인식 틀을 제공했고,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비트겐슈타인, 제임스 등 현대사상가들 역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거나 그 사유체계가 불교적 사유와 유사한 경우가 많다. 이 철학자들의 사상 속에 담긴 불교관에 대한 연구 혹은 비교철학적 논의는 동서사유의 만남을 매개하며 인류의 미래사유를 여는데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서양 근대에서 불교의 수용과정을 추적하며 그 정신사적 함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즉 이 글은 서양 근대철학자나 지성인들의 불교연구나 이해의 지평을 추적함으로써 그 정신사적 의미를 언급하고 불교가 풀어야 할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은 먼저 18세기 유럽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인도에 대한 관심으로, 그리고 점차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추적할 것이며, 그 다음으로 19세기 불교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는 다양한 논쟁적 양상과 그 정신사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20세기 서양에서의 불교 수용과 이해를 다루는 것은 그 지맥이 복잡하고 방대한 별도의 논의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에, 이 글에서는 주로 19세기 유럽지성사에 논의를 한정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를 통해 앞으로 불교가 서양에서 어떻게 활성화될 수 있을지, 그 과제는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2. 18세기 유럽의 중국 및 인도에 대한 동경
18세기에 라이프니츠, 볼프, 볼테르 등은 중국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von Leibniz)는 당시 중국에 가있던 여러 신부들이 보낸 중국보고서를 편집하여 『최신 중국소식(Novissima Sinica)』(1697)을 간행하며 그 당시 중국의 문물과 정신세계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예수회 신부들의 그룹보고서라 할 수 있는 쿠플레 신부가 편찬한 『중국의 철학자 공자, 중국의 학문(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1678)을 통해 유교경전, 즉 논어, 대학, 중용, 주역 등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교가 불교나 노장과 어떻게 다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 전례문제를 둘러싼 선교사들의 논쟁에 관심을 보이며 「중국인의 자연신학론」(1716)을 작성하며 천제天帝, 상제上帝, 귀신, 영혼, 제사, 중국 문자 등을 검토하기도 했고, 유럽이 도덕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우려하며 자연적 이성에 기초한 중국철학의 윤리적 성격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불교를 ‘붓다의 정적주의(Q!uietismus des Fo)’라는 용어로 설명하면서,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만물의 제1원리인 무로 환원된다”고 이해하였다. 이때 그의 불교 이해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붓다의 정적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슬람교의 철학으로 받아들인 아베로이즈주의자들(Averroisten)의 견해, 즉 신의 섭리를 부정하고, 인간의 영혼의 불멸과 인간의지의 선택자유를 부정한 견해보다도 더욱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불교와 에베로이즈주의, 이 양자는 유지될 수 없으며 불합리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불교를 무로 환원되는 정적주의靜寂主義로 이해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제자였던 볼프(Christian Wolff)는 독일의 할레에서 <중국인의 실천철학(De Sinarum philosophia practica)>(1721)이라는 유명한 강연을 하는데, 이로 인해 교수직까지 잃게 되었다. 그는 중국의 종교와 철학, 특히 유교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이고 인간적일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추상적이고 다른 저편세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바로 이 현실세계에 기초해 있다고 보았고, 중국인의 실천철학은 유럽인들에게는 보정적이고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볼프가 유럽정신에 대한 보완책으로서 중국철학에 대한 관심을 가진 반면, 볼테르(Voltaire)는 중국에서 나와 인도로 그 관심을 확장하였다. 볼테르는 중국과 유럽의 전례논쟁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지만, 후에는 세계문화에서 인도가 만들어 놓은 업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국에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들어간 선교사들에 의한 전례논쟁이 중국에 대한 관심을 유발했지만, 18세기 말부터는 점차 ‘인도 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785년 이후 찰스 윌킨스(Charls Wilkins)의 『바가바드기타』,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의 『마누법전』 등 산스크리트어 문헌 번역, 프리드리히/빌헬름 슐레겔 형제에 의한 산스크리트 연구 및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의 저작 『인도인의 언어와 지혜에 대하여(Über die Sprache und Weisheit der Indier)』의 출간, 헤르더, 셸링, 노발리스, 괴테, 훔볼트, 횔덜린, 괴레스(Görres) 등 당시 지성인들의 관심은 유럽사회에 인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헤르더(Johann Gottfried von Herder)는 인류의 자연사를 논하며, 각 민족은 그 자신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맥락에서 생각되어야지 유럽문화가 보편적 평가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보면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했고, 인도를 높이 평가하며 이를 ‘인류애의 요람’, ‘영원한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계화되고 산업화되며 삶의 통일성이나 완전성을 상실하던 시대에 낭만주의자들은 인도에서 잃어버린 인류 문명의 근원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노발리스(Novalis) 역시 동양을 “인류와 언어, 시의 진정한 조국”이라고 보는 등 그들에게 인도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대지로 보인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시도는 고전적 르네상스와 그리스·로마·지중해 중심의 편협한 인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심오하고 철학적이고 시적인 인도의 고대 세계 속에서 통합적 인본주의, 전(全)지구적 인본주의를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이 문헌학, 언어학을 연구하고 인도 경전을 번역하며 인도에 관한 저술 활동을 하는 등 이 태고의 땅을 파헤치기 시작하면서 동양은 자신들이 빚어낸 하나의 꿈이나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낭만주의에 의한 동양적 문예부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불교에 관한 연구도 진척되었으며, 다양하고 연마되지 않은 상태에서 19세기 불교의 재발견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3. 19세기 유럽의 불교이해
1) ‘무’의 논쟁
(1) 헤겔의 무의 종교
유럽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였다. ‘불교(boudhisme, Buddhismus, buddhism)’라는 용어가 유럽에서 출현하여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820년대였다. 그러나 서양의 불교문헌학이나 근대불교학이 탄생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였다. 외젠 뷔르누프의 『인도불교사 입문(Introduction à l'histoire du Buddhisme indien)』(1844)은 불교의 근원이 인도에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불교의 역사적 교리적 발전과정을 파헤친 저작으로 유럽 지성계에서는 경이로운 한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는 불교문헌학의 효시로서 무의 숭배라는 불교가 생겨나는 데도 하나의 전기轉機를 마련했다. 그는 1,000쪽이 넘는 분량의 역자 서문이 붙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1852)을 번역·출판했는데, 이러한 연구 성과들이 출판되면서 유럽인들은 불교세계의 방대함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작업은 셸링,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 빅토르 쿠쟁, 쥘 바르텔르미 생 틸레르, 텐느, 르낭에 이르기까지 당시 지성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50-60년대 출간된 단행본 저술이 50-60권 정도였고, 잡지에 실린 논고들과 학회에 발표한 보고문을 총망라한 ‘전문적인 논고’가 500-600편이나 될 정도로 19세기 중반은 불교에 대한 연구가 비교적 풍부하게 나오던 시기였다. 19세기의 가장 큰 세 철학자인 헤겔과 쇼펜하우어, 니체의 불교관은 인도를 통해 영원한 인류의 고향을 동경하는 낭만주의적 견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으며, ‘무’의 개념과 ‘허무’ 혹은 ‘무신론’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었다.
헤겔은 그로지에(Grosier)신부와 루이 모레리나 바니에(Banier)신부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견해에 영향을 받았고 낭만주의자들을 사로잡았던 ‘인도열풍’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불교에 비판적 거리를 두고 접근하였다. 그는 막 태동한 불교연구를 통해 얻어진 지식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도들의 무’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불교의 특징을 ‘무’의 개념으로 이해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이후 불교를 허무주의와 융합시키는 시도의 토대가 되었다. 그에 따르면 “동양 체계에서, 본질적으로 불교에서 무, 공은 절대적 원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 무와 공(śūnyatā)의 개념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헤겔은 이 양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고 주로 그의 논의는 ‘무’의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 『철학강요(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1830) 제87절에서 불교도가 모든 것의 원리 또는 궁극적인 목표나 목적으로 삼고 있는 무는 순수 존재와 동일한 관념이라고 보았다. 순수존재는 순수 추상인데, 이 순수존재는 절대 무규정성, 즉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즉 무와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불교에 대한 논의가 더욱 세밀하게 소개되는 저서는 『종교철학 강의 I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Religionen)』(1827)이다. 여기에서 그는 불교를 인간이 자신을 무화시켜야 하는 종교로 파악한다. 불교도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규정하는 기본 틀은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는 신념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불교는 세 가지 특징으로 규정할 수 있다. 첫째, 불교는 모든 차별이 멈추고, 정신의 자연적 본성의 모든 규정이나 모든 특별한 힘이 없어지는 ‘자기 안에 있음(내자존재, Insichsein)’의 고요를 절대 기반으로 갖는 것이다. 둘째, 불교는 ‘무’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때 무는 궁극적이고 최고의 원리로 파악될 수 있다. “무로부터 모든 것이 생겨나며, 무로 모든 것이 되돌아간다. 무는 일자이며, 모든 것의 시작이자 마지막이다.”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파악한 서구적 불교 이해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불교의 핵심을 서구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에게 불교에서의 무는 서양적 의미의 신과 같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은 전적으로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는 것, 무규정적인 것이다. 신에게 부가되는 것은 어떤 방식의 규정성이 아니다. 신은 무한자이다. 신은 모든 특수한 것의 부정 그 이상이다.” 셋째, 신은 무나 본질 그 자체로 파악되기도 하지만, 붓다나 달라이 라마 같은 직접적 인간으로 알려지기도 한다. 헤겔은 이러한 신적 본성의 실체적 규정은 고요하고 무규정적인 내자존재의 발육되지 못한 추상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으며, 부분적으로 경험적-역사적인 모습이자 관념이면서, 부분적으로는 상상된 우연성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헤겔의 불교에 대한 논의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열반(니르바나)이다. 그는 이를 인간이 모든 의식이나 열정의 상태에서 해방되어 무의 상태로 들어갈 때의 상태라고 보았다. “그 자신의 의미에서 인간이 이러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 즉 외형적인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방어하고, 무와 하나가 되며, 모든 의식이나 정열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불교도들이 열반(Nirwana)이라고 부르는 상태로 들어간다.” 이 열반의 상태에서 인간은 신과 하나가 되고 불멸의 존재가 되며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추상, 완전한 고독, 이러한 포기, 무로 옮겨짐으로써 인간은 신과 영원히 구별 없이 되며,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 때, 여기에서 불멸성과 영혼윤회의 관념은 붓다의 학설로 중요하게 드러난다.” 헤겔이 파악하는 열반은 모든 의식이 소멸되고 무화됨으로써 본질 혹은 무와 일체가 되는 ‘자기안에 있음’의 고요이자 성스러움의 경지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깊어지고 의미를 가짐으로써 이러한 원리와 같아져야만 한다. 즉 인간은 정념이 없는 상태로, 성향이 없는 상태로, 활동이 없는 상태로 원하는 바도 없고 행위하는 바도 없는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 인간의 성스러움이란 인간이 이러한 무화 속에서, 이러한 침묵 속에서 신, 무, 절대와 일체화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는 무와 순수 무한성의 개념을 통해 불교를 ‘본질적 존재의 종교’로 파악했으나, 이러한 그의 견해는 이후 불교를 무를 숭배하는 종교, 즉 인간도 신도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헤겔은 불교를 본질적 존재의 종교로 규정하면서도 또한 불교가 주술종교로도 전락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통찰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역사철학 강의(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에서 동양세계, 그리스세계, 로마세계, 게르만세계를 순차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인도의 장에서 불교를 언급하면서, 불교가 스스로 신, 무, 절대의 경지에 들어가는 대신에 불멸성이나 윤회에 집착하거나 불교의 사제에 매달리는 것은 우상 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스스로 붓다가 되려고 하지 않고, 붓다나 달라이 라마에 의존하려는 것은 ‘샤마니즘(das Schamanentum)’에 다름 아니며, ‘주술종교(die Religion der Zauberei)’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불교관은 스스로 내면세계의 자유를 찾지 않고 주로 기복신앙에만 매달리는 오늘날 우리의 종교적 세태에 성찰할만한 많은 것을 주고 있다.
(2) 쇼펜하우어의 불교관과 불교적 염세주의
‘무’의 개념을 통해 불교로 들어가며 열반에 대해 설명하는 헤겔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불교에서 의지의 소멸, 즉 고통으로부터 해방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로 인해 불교는 유럽에서 의지 부정의 ‘염세주의 종교’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는 고통이며 이 고통스러운 생존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은 욕망의 소멸(열반)에 있다는 불교의 세계관은 유럽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만나며 ‘불교적 염세주의’라는 용어로 확산되었다. 서양 사상이 본격적으로 동양, 특히 불교세계와 접목되기 시작한 것은 쇼펜하우어를 통해서였다. 그는 플라톤과 칸트, 우파니샤드와 불교 속에서 자신의 철학적 토대를 세웠다. 그는 불교를 자신의 철학에서 단순히 언급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체계로 받아들여 의지의 철학을 만든 것이다. 그는 헤르더의 영향을 받은 마이어(Friedrich Majer)를 통해 동양세계로 들어갔으며, 자신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가 출간되기 이전 앙케틸 뒤페롱(Anquetil Duperron)이 라틴어로 번역한 『우파니샤드』, 즉 『우프네카트(Oupnek'hat)』(1801/02)를 읽었고, 이후 슈미트(Isaak Jakob Schmidt), 하디(Spence Hardy), 쾨펜(Carl Friedrich Koeppen), 뷔르누프(E. Burnouf) 등 당시 서양의 근대불교학을 태동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지성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불교세계로 침잠해 들어간 것이다.
그에게 무는 부정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의 부정을 통해 도달될 수 있는 열반의 상태였다. 그의 견해는 무를 순수존재와 등가로 본 헤겔과도 다르며, 무를 신과 모든 초월적 존재의 부재로 본 가톨릭 이론가들과도 달랐다. 그는 의지의 본질은 갈구와 열망에 있으며, 의지의 자기실현은 고통이기에, 삶에의 의지가 부정되고 소멸됨으로써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의지라는 형이상학적 근원적 힘, 성욕, 욕망, 개체화, 무화, 고통, 해방 등을 다루는 그의 의지 형이상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층철학을 담고 있으며, 불교의 심리학적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헤겔이 무의 개념과 ‘자기안에 있음’의 고요를 열반개념에 연관시키듯 의지의 부정 상태를 열반(니르바나)에, 의지의 긍정을 윤회와 연관시켰다. “삶에 대한 의지의 긍정, 현상세계, 모든 존재의 다양성, 개체성, 이기주의, 증오, 악의는 하나의 뿌리에서 생겨난다. 다른 한편 물자체의 세계, 모든 존재의 동일성, 정의, 인간애, 삶에 대한 의지의 부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삶에 대한 맹목적인 힘이 만들어내는 세계가, 즉 충족이유율의 계기에 의해 의지의 객관화로 드러난 세계가 마야로서의 현상세계이며 세속적 체험의 세계(윤회, saɱsāra)이기에, 의지를 부정하고 초월함으로써 마야의 허상에서 벗어나 본질적 세계를 체관諦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지의 객관화로 드러난 현상세계의 허상에서 벗어남으로써, 즉 의지의 부정을 통해 본질의 세계를 통찰함으로써 세계가 실상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야콥 슈미트의 『대승불교와 반야바라밀다(Über das Mahayana und Pradschna-paramita)』에 의존해 불교에서의 궁극의 무는 “불교도들의 프라주나-파라미타(Pradschna-paramita, 반야바라밀다)로서 ‘모든 인식의 저편의 단계’이며, 주체와 객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지점이다.”고 말한다. 의지를 부정하거나 절멸하는 불교적 금욕의 실천과 체관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본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염세주의 혹은 허무주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혀졌다.
그의 무의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한 언급은 그 당시 지성 빅토르 쿠쟁의 ‘무의 숭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철학교육을 법제화시켰고 오늘날 국가교육제도의 전신인 교육제도를 창립한 빅토르 쿠쟁은 뷔르누프를 따라 불교를 브라만교의 상키야 철학에서 유래하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철학’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에게 불교는 무를 숭배하는 까닭에 종교의 본연에서 어긋나는 하나의 서글픈 철학이었으며, 존재를 경배하기 보다는 무를 숭배하고 영원을 추구하기 보다는 소멸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반종교적 성격을 지닌 부정적 종교였는데,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이와는 대척적인 것이었다. 쇼펜하우어에게 불교는 단순히 ‘무의 숭배’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인식의 저편에 있는 최고의 지혜를 여는 철학이자 삶의 의지의 부정을 통해 열반에 도달하고자 하는 허무주의 교리를 담고 있는 종교였던 것이다.
(3) 니체의 허무주의와 정신위생학으로서의 불교
쇼펜하우어 철학의 영향을 받으며 니체는 서양 근대성과 형이상학을 비판하는데, 그 논의 가운데 그의 그리스도교와 불교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있다. 인간의 자유정신이나 자기극복의 실현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추구한 그는 종교비판에 관심을 집중한다. 특히 그는 유럽의 근대문명이 진보하며 동시에 인간이 왜소해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자기구원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불교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게 신을 배제하며 허무의 한 가운데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완성을 찾아나가는 붓다의 사유는 유럽이 따라가야 할 문화적 사유모델이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칼 샤르슈미트, 칼 프리드리히 쾨펜, 오토 뵈틀링크, 바커나겔, 올덴베르크, 도이센 등을 통해 불교에 접근해 들어갔다. 특히 도이센(Paul Deussen)은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베단타 체계』(1883), 『베단타 경전들』 (1887) 등의 역저를 출판한 인도철학의 최고전문가였으며,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도이센에 의해 번역된 『브리하드아란야까 우파니샤드』를 인용하는 등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니체의 인도에 대한 관심은 우파니샤드뿐만 아니라 불교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평생 지속되었다. 이는 그의 주저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불교의 영향 아래 책 이름이 붙여진 『선악의 저편』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니체의 불교에 대한 평가는 서양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시대적 진단과 정신사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불교적 염세주의’가 퍼져나가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니체 역시 그 영향을 받아 불교를 허무주의 종교로 이해했다. 그는 불교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현실적인 삶이나 몸에 대해 적대적이며 금욕적이고 근본적으로는 허무주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가장 유명한 형식’이 ‘불교’라고 말하면서 이를 문화적 병리상태로서의 데카당스와 연관시킨다. 그는 유럽의 문화적 피로증세를 수동적 허무주의로 파악하면서 이를 현실도피 혹은 현실부정의 운동으로서 유럽적 불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불교에 대한 언급은 반드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기독교와는 달리 불교에 대해서 어느 면에서는 호의적일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래적 사유의 가능성을 불교적 사유에서 탐색하기도 한다. 그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면서” “그리스도교보다 백배나 더 실제적이고” “객관적이고 냉정한 문제제기의 유산을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는 호의를 표한다. 그에 따르면 불교는 신 개념을 폐기한 진실한 무신론을 대변하며, 도덕의 자기기만적 성격을 간파하고 선악의 저편에 서 있으며, 삶의 현상에 충실하면서도 삶의 고통을 벗어나는 정신섭생의 방법을 알려주는 실증적이면서도 진실로 객관적인 종교인 것이다. 불교가 자아(atman)나 브라만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부정하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현상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기에 능동적 허무주의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또 하나의 불교이해는 정신위생학에 관한 것이다. 그는 기독교가 원한감정에서 탄생을 했다면, 불교는 원한감정이나 복수에 대한 반대운동에서 탄생했다고 보았다. 그에게 불교는 그리스도교처럼 ‘죄와 싸움’을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통과의 싸움’을 통해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고자 했고, 이를 위해 정신섭생의 구체적인 길을 찾고자 했다. 불교는 고통과 죄를 연결시키지 않았으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초월적인 신을 설정하지 않았고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 가능성을 자기 안에서 찾는 ‘자기구원의 종교’였던 것이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원한의식으로부터의 해방에 있다고 보며,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생성 소멸하는 현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 삶의 정신적인 섭생의 길을 올바로 찾아 실천하는데 있다고 여겼다. 그는 『법구경』의 한 구절인 “적대는 적대에 의해 끝나지 않는다. 적대는 자비에 의해 끝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이를 불교의 핵심내용으로 이해했다. 우리가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긍정적 삶의 태도와 원한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정신적 섭생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니체는 불교의 위생학적 정신섭생요법이 삶의 고통과 허무를 느끼는 인간들에게 치료적 기능을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에게 심오한 생리학자인 붓다는 삶의 고통과 허무를 능동적으로 치료하는 의사였다.
니체가 높이 평가한 것은 현실에서 도피한 채 명상을 통해 세계를 관조하는 수동적인 세계관의 불교가 아니라, 삶과 현실을 긍정하며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건강하게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인 불교였다. 니체의 불교 비판은 삶과 현실의 모든 것이 덧없다 식의 허무주의에 안주하며 현실도피적인 은둔을 즐기는 수동적 불교를 향해 있다. 그는 불교에서 또 하나의 능동적 허무주의, 즉 신 없는 현실에서 일상적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선악의 저편에 서 있는 자기구원적 자유정신의 가능성을 찾은 것이다.
2) 불교와 기독교, 붓다와 예수의 비교논쟁
1840년부터 1890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사회가 점차 탈종교화되면서 불교와 기독교, 붓다와 예수를 비교하는 논의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논쟁은 심정적으로는 기독교인이면서 반反교권주의를 주장하는 참여 기독교인과 무신론자들 사이의 긴장감이 점차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서 열기를 더해 갔다. 예수가 붓다의 가르침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불교가 기독교보다 일찍 발생한 종교임을 강조하는 반교권주의자들과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초기 기독교 시대에 붓다의 설화를 새로 쓰기 위해 예수의 일생과 그의 말씀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대립이 있었고, 불교와 기독교, 붓다와 예수를 비교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붓다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와의 연관 속에서 고찰되었는데, 19세기는 예수의 생애가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과 병행하여 붓다의 전기 역시 대중 속에 자리 잡게 된 시대라 할 수 있다. 불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시도를 통해 붓다를 섬기는 종교의 발견은 세계 속에 예수를 구심점으로 하는 기독교와 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종교가 있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유럽인들은 뷔르누프의 학문적 대작이 출간된 1844년 이후 불교 세계의 방대함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불교를 통해 기독교를 다시 자리매김하면서 유럽의 정신세계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를 역사적 지평 위에서 유물론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르낭(Ernest Renan)은 불교를 “신을 배제한 가톨릭”이라고 파악했고, 붓다를 “인도의 무신론자 그리스도”라고 명명하며, 그의 가르침은 “허무주의의 복음”이며, 불교 교리는 “이제까지 존재했던 교리 중에 가장 절망스러운 무의 교리”로 이해했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논쟁은 유럽 사회 내부의 기독교 논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끄는 불씨가 되었다. 텐느(Hippolyte Taine)와 르낭은 열반이 내포하는 무의 개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만, 자비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며, 기독교와 불교의 유사점을 비교하기도 했다. 즉 기독교가 자선과 궁휼의 종교라면, 불교는 자기헌신과 자비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기독교와 불교가 분명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동정(Mitleiden)의 윤리의 기반을 이 양자에게서 건져 온다. “기독교의 가장 내면적 씨앗과 정신은 브라만교와 불교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는 이 양자의 종교가 그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 또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모든 것은 신의 명령에 대한 복종이나 불복종으로 귀결되는데 반해, 브라만교와 불교에서는 이 세계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 즉 윤회로부터 나오는 길은 고(삶의 고통), 집(고통의 원인과 발생), 멸(고통의 지양과 소멸), 도(고통을 소멸하는 방법)라는 네 가지 근본진리(사성제)가 있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하며, 이러한 깨달음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덟 가지 길(八正道)(Dhammapadam)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인식은 불교가 절대 복종과 계시를 통해 구원을 받는 기독교와는 그 방법에서 많은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유사점 혹은 차이점을 찾는 비교연구는 유럽 정신세계가 나갈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기여하였다. 19세기 후반 기독교윤리를 대체할 만한 비종교적·세속적 윤리를 모색하던 중 유럽은 신의 존재 없이 실천적 윤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불교를 통해 인식했던 것이다. 포이에르바하의 제자이자 자유사상가였던 쾨펜(Carl Friedrich Köppen)은 자신의 저서 『붓다의 종교(Die Religion des Buddha)』(1857)에서 불교는 순수 인간적 차원에서 해방을 내걸고 있으며, 각 개인의 지리적 사회적 위치와 무관하게 인간 모두의 평등성을 제창하고 있다고 보면서 윤리혁명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불교를 하나의 철학으로 보며 반종교적 부정적 종교로 보기 했지만 쿠쟁은 불교 안에서 신이 없는 실천윤리의 가능성을 보았고 철학교육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국가교육제도를 정립했던 것이다. 반교권주의 속에서 연구되고 해석되었던 불교 속에서 유럽은 신이 없는 실천윤리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다.
3) 불교와 유럽의 자기정체성 문제
19세기 서양의 불교에서 언급되어야 할 또 하나의 주요한 사실은 19세기 불교와 아시아와 무의 숭배가 유럽의 정체성의 확인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를 무의 개념을 통해 이해하려는 헤겔적 시도나 쿠쟁의 무의 숭배론, 혹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또는 니체의 허무주의 등의 논의는 서양의 자기 정체성의 위기와 연관된 것이며, 불교가 이미 유럽에서 학문적 탐구와 지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무의 개념이나 허무주의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려는 다양한 시도는 실은 유럽 자체의 정체성의 위기와 내밀하게 연관된 것이다. 로제-폴 드르와(Roger-Pol Droit)에 따르면 19세기 유럽의 허무주의가 불교의 영향으로 대두된 것이 아니라 유럽 자신의 문제를 아시아에 돌리면서 불교는 이에 대한 촉매역할을 했다. 불교라는 전혀 새로운 지적 세계의 발견과, 유태교, 기독교 사상에 근거했던 유럽 사회의 자괴 현상에 대한 인식은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졌으며, 유럽은 스스로에 대해 그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 즉 신의 죽음, 소멸, 무의 공포 등을 모두 불교에 투사했던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불교나 붓다를 언급할 때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에게서 볼 수 있듯이 무나 열반을 언급했는데, 이는 그 논지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고 내용적 규정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재적 맥락에는 ‘허무주의’ 논의가 담겨있었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가 확산되면서 1850년대 이르면서 유럽인들에게 염세주의와 허무주의는 불교와 연관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헤겔에서 쇼펜하우어를 거쳐 니체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불교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는 허무주의의 여러 지층들에 접근하는 데 항상 준거가 되었다. 순수 존재와 무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헤겔, 삶의 의지에 대한 부정을 내세우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열반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 불교를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허무주의 종교로 보면서도 불교에는 정신섭생을 다루는 위생학적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니체에 이르기까지 무에 대한 담론은 유럽 허무주의가 이론적으로 정립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숨겨진 실험실 같은 역할을 했다. “어느 정도 당혹감을 자아내는 새로이 발견된 동양의 종교를 이해한다는 명목 하에 유럽은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두려움의 대상을 가지고 붓다의 모습을 구성하였던 바, 그것은 몰락과 심연, 공허, 사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불교는 19세기 유럽의 허무주의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투사된 불안한 자기정체성의 이론적 장치였던 것이다.
로제-폴 드르와는 19세기 유럽에서의 무의 숭배는 한 시대가 낳은 상상의 산물이자 그 시대의 주요 긴장 국면들의 반향으로 보며 다음과 같이 그 사회학적 정치적 역학을 분석한다. “1830년 영광의 3일(7월 혁명의 7월 27-29일의 사흘)에서부터 1871년 파리코뮌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무의 숭배는 노동자계급의 출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공산주의의 대두, 위험한 계급의 부각, 부르주아 계급의 ‘걷잡을 수 없는 공포’ 등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무의 숭배가 사회적 계급제도에 대한 부정, 전통 질서에 대한 항거, 평등주의의 제창, 약자들의 봉기, 굴레의 타파, 지배에 대한 거부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도 사실 당연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럽의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투사하며 진행된 불교연구는 다른 한편 서양에는 비유럽적 세계에 또 다른 고차적인 정신세계가 있다는 자각을 이끌어냈고,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연구 이외에도 막스 뮐러(Max Müller)의 비교종교학적 작업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종교에 대한 인식지평을 새롭게 열어 놓았으며, 불교가 현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 니체는 불교의 위생학적 정신섭생요법이 삶의 고통과 허무를 느끼는 인간들에게 심리철학적 치료기능을 할 수 있으며, 불교가 현실도피적 수동적 종교가 아니라 원한감정에서 해방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삶과 현실을 긍정하며 항상 깨어있는 정신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봄으로써 능동적 생활불교의 가능성을 선취하고 있다.
4. 맺는 말: 심리적 영적 발견과 생활불교
19세기는 유럽의 허무주의를 준비하던 시기이자 이와 연관해 불교와 동양에 대해 관심을 확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는 유럽에서 동양의 고전과 불교경전들이 번역되고 불교의 교리나 이론들이 체계적으로 연구되던 근대불교학의 태동기이자 이를 기반으로 서양 지성인들의 사유가 아시아로 확장되고 심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계몽주의에 반기를 들며 낭만주의자들이 일으킨 동양에 대한 관심으로 불교는 유럽에 유입되었고, 이후 ‘무’나 열반, 해방, 의지, 영혼, 불멸성, 윤회에 대한 논쟁과정에서 불교는 무의 숭배의 종교 혹은 허무주의 종교로 인식되었지만, 다른 한편 이러한 실존에 연관된 다양한 주제들은 서양 지성계를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특히 19세기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불교의 심리학적 통찰을 받아들였고, 이들의 사상 속에 녹아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심층철학적 논의는 이후 서양현대지성사의 획기적 사건인 정신분석학(심층심리학)을 낳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셸링의 근원의지, 쇼펜하우어의 성애로서의 의지, 니체의 몸과 무의식, ‘그것(es)’의 개념,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리비도 개념 등 인간의 심층적 내면을 탐구하는 심층심리학의 계보 역시 불교를 서양에 유입한 낭만주의적 계보와 연관되어 있으며, 이 역시 직·간접적으로 불교사상과 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앞으로 규명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서양에서 불교는 19세기 후반에 들어 붓다의 삶과 티베트 신화에 이끌려, 즉 유물론적 과학만능주의와 교조적 종교를 뛰어넘는 ‘비교주의秘敎主義적 불교’가 주목받았고, 20세기 들어서는 서서히 대중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1960년대 들어서 불교는 기술주의, 실용주의, 상업주의 등의 경향에 반기를 들며 ‘반문화운동’ 속에서 자리 잡으면서 심리적 영적 수행과 실존적 영적 재발견을 제공했고, 1990년대에는 달라이 라마에 대한 대중적 관심, 틱낙한의 활동에 힘입어 비폭력, 관용, 책임감 등 불교적 근본 가르침이 서양에서 대중화되고, 공산주의의 몰락, 기술발전의 위협 등 불안한 사회 속에서 새로운 도덕 규범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보편적 가치를 지닌 생활철학으로 대중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의 한계,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에서 불교에 대해 관심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오늘날 서양인들이 불교에 관심 갖는 이유는 기복신앙보다는 자기 수양, 정신수양에 대한 관심에 있다. 일상의 현실에 참여하면서 불교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나 항상 깨어있고 자신의 마음을 챙기는 ‘마음챙김(mindfulness)’의 수행에, 즉 생활불교나 참여불교, 수행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증대되고 있다.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불교가 서구 유심론적 유물론의 바다 속에 휩쓸려 버릴지, 또는 21세기의 인간들에게 새로운 지혜를 제공하는 현대적 종교로 살아남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고 진단한다. 불교가 인간 개개인의 의식혁명을 통해 인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불교적 인문주의로 재생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현대의 물질주의와 타협하며 우상숭배나 주술적 비의주의에 빠져 기복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지는 불교를 인류의 귀중한 실천 자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지혜에 달려 있다. 19세기 유럽의 불교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비록 그 수용과정에서 유럽의 정신적 자기 정체성을 투사하며 오해나 왜곡, 자의적 해석이 많았다 해도 니체와 같이 불교 안에서 자유정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영혼을 관리하는 심리학적 통찰을 건져내는 이론적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심리적 영적 발견은 19세기 유럽의 지성사가 20세기로 전해 준 가장 큰 선물이며, 오늘날 생활불교 안에서 일깨워야 할 귀중한 지적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김정현/ 저서 『니체의 몸철학』 『니체, 생명과 치유의 철학』 외 다수. 역서 『니체철학강의 I』(하이데거), 『프로이트와 현대철학』(A.쉐프),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니체), 『유고(1884년 가을-1885년 가을)』(니체), 『기술시대의 의사』(야스퍼스) 등. 현재 원광대 철학과 교수.